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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살후2강/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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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202회 작성일 03-02-03 15:14

본문

2002년 데살로니가 후서 제 2 강                                           
말씀/데살로니가후서 3:1-18
요절/데살로니가후서 3:1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치면서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마지막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부탁하였고(1-5) 둘째, 규모 있게 행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6-18). 우리가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을 때 세상의 유혹을 이기고 주와 복음을 위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핍박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재림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부왕부왕거리지 말고 규모 있게 자기 맡은 바 일에 충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저희에게 말세를 사는 자세에 대해 말씀하여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1-5)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연하고 습관적으로 부탁하지 않고 매우 구체적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바울은 매우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성도들을 귀한 동역자로 여기고 함께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말씀 역사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더욱 겸손하게 기도 요청을 했습니다. 그가 부탁한 기도 제목이 무엇입니까?

첫째, 주의 말씀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 주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르게 되었을 때 그들을 변화시키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서 마게도냐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이는 말씀의 권세가 나타나 죄인들을 변화시켜 거룩한 새 사람이 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임하게 되자 우상을 섬기고 죄악 가운데 살던 그들은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 돌아와 사랑의 수고와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소망 가운데 핍박을 받으면서 인내했습니다. 주의 말씀은 복음을 가리킵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너희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주의 말씀이 너희 가운데서와 같이 달음질하여 영광스럽게 되고” 우리는 여기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능력이 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복음 증거는 사람을 통하여 이루어 집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종들을 통해서 말씀이 힘있게 전파되도록 기도할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공동체를 건설해 나가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개인 개인이 말씀 공부를 통해서 자아관, 가치관, 세계관과 우주관이 뚜렷한 사람들로 자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 생활을 통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삶 속에서 존경과 사랑을 받을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정직하다, 깨끗하다, 그 사람들 참으로 존경스럽다는 말을 들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과 복음 사역을 통해서 주위의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기도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통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하고 영광스럽게 됩니다. 

둘째, 우리를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달라고 기도 부탁을 했습니다(2). 무리하고 악하다는 것은 불합리하고 부도덕하고 무법한 악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음을 증거할 때 믿는 사람들도 있지만 거부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 소리, 예수님    소리, 찬송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미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증거할 때 훼방하는 사람들이 있고 악한 영의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미운 감정에 사로잡힙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으면 속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쫓아다니면서 훼방을 합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유대인들에게서 가는 곳마다 핍박을 받았고 시장의 깡패들에게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무리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주시기를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것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자신들을 위해서 기도를 부탁할 뿐만 아니라 현재 그곳에서 환란과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주는 미쁘사 너희를 굳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키시리라.” 사도 바울은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오뚜기 같이 일어나서 복음을 증거해 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와 보호하심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고통 받고 있는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확신 있게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자신들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대로 행하고 행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바울은 양들을 대하기를 주님을 섬기듯이 했습니다. 바울은 양들을 믿었습니다. 목자와 양이 깊은 사랑과 신뢰로 맺어져 있을 때 무한히 성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 들어가도록 주께서 인도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5). 이것은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그리스도의 재림을 대망하는 인내를 견지하도록 비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 자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가 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을 다해서 사랑하는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적으로 누리며 사는 사람은 부족함을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사랑하시되 변함없이 신실하게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그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성공적으로 잘 될 때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어떠한 역경과 환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을 때 환란 가운데서 인내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히 12:2,3). 성도의 성숙한 정도는 인내로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얼마나 죄인들을 참으셨습니까? 또한 십자가를 참으셨습니까? 우리가 당하는 환란은 장차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II. 규모 있게 행하라 (6-18)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나서 한가지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은 하지 아니하고 이곳 저곳을 두루 다니면서 남의 일에 간섭하여 일을 만들었습니다. 일하지 않으면서 분주한 몸이었습니다. 자신의 일에 규모 있게 종사하지 않는 자일수록 남의 일이나 간섭하고, 하는 일없이 분주히 다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셨는데 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하면서 직장도 사표 내고, 공부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크리스챤은 하나님이 다 해주신다는 이상한 믿음을 가지고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일에 대해서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렇게 본을 보이며 살았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 것을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규모 없이 행하지 아니하며 누구에게서든지 양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사도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는 낮에는 주로 천막을 만들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자비량 선교사로 일했습니다. 그가 하루 종일 천막 만드는 일을 하고 와서 밤에 복음 역사를 섬기려니 얼마나 힘이 들었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으로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평신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을 하면서 캠퍼스 제자 양성 역사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최고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고 선교지에 나아가 접시 닦기와 신문팔이를 하여 물질 자립을 시작했고, 어떤 선교사님은 재외 공관에 대사로 발령을 받기 직전에 사표를 내고 선교지에서 청소로 자립을 시작했습니다. 어떤 선교사들은 닭의 목을 따는 도계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생각할 때 너무나 안쓰러워 도계공이라 부르지 않고 “도계사”로 불러야만 했습니다. 낮에는 이렇게 일을 하고 밤에는 캠퍼스에 올라가 피싱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불법 침입자라는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고난과 역경의 독수리 훈련을 통하여 선교사님들이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믿음, 예수님 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믿음, 하나님을 믿고 태산을 옮기는 믿음을 선물로 주십니다. 

 국내에서도 평신도 목자님들의 수고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7,80년대는 다른 나라의 기술을 가져다가 써먹으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나라가 선진국 대열에 들다 보니 다른 나라에서 기술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스스로 신 지식과 기술을 개발하고 발명하고 발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연구에 투자해야 하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이제는 책에 나오지 않는 지식들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하지 않는 일 그렇지만 꼭 필요한 일들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이 세계에서 살아남지 못합니다. 이것은 기업뿐만 아니라 스포츠, 예술, 학문 등 모든 분야에도 통용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라가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이란에게 축구를 진 것은 히딩크식 기술이 이미 다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감독이 새로운 작전과 기술을 개발해서 시합에 임해야 하는데 히딩크에게 배운 것을 그대로 써 먹으니 하나도 통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미 이란에서 한국의 기술과 작전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려면 전보다 더 기초가 튼튼하면서도 창조적인 교육을 해야 하고 더 전문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 가운데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하니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보다 더 애쓰고 힘써서 일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10). 우리는 일을 하면서 존재 의미를 느끼고 기쁨을 누립니다. 사람이 일을 하지 않으면 쉽게 늙어 버립니다. 또 일할 때 스피릿이 생깁니다. 일할 때 영적 성장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가 맡은 바 일에 충성을 다하는 가운데 복음 역사를 섬겨야 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바울은 규모없이 일만 만드는 자들에게서 떠나라고 합니다. 그들을 떠남으로써 탈선자들에게 반성과 회개의 기회를 주려는 것입니다. 그들을 권면하고 책망하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해야지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책망은 그 자체 보다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일만 만드는 자들을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규모 없이 행하는 자들은 충성스럽고 헌신하는 사람들을 낙심하게 만듭니다. 그들은 게으르고 불순종하면서 자신들의 믿음은 고차원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규모 없는 자들의 미혹 가운데 빠지지 않고 열심히 규모 있게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시대에 계속 믿음의 투쟁을 하며 양들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열심히 규모 있는 생활을 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투쟁하다가도 그냥 이 시대의 대세를 따라서 살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하다가 일하지 않는 누룩이 공동체에 퍼지게 되면 그 모임이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지니 때가 이르면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갈 6:9). 또한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십니다(롬 2:6,7).

 14,15절을 보십시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 복음 신앙을 깨뜨리는 사람에 대해서 징계하는 목적은 그를 파멸시키려고 함이 아니라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져서 다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징계하되 원수와 같이 여기지는 말아야 합니다. 역사상 사상의 대립은 무서운 적개심을 일으켜서 살상에 이르게 까지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인륜을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탈선자를 징계하는 경우에도 원수와 같이 그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는 형제와 같이 친밀하게 대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으로 평강의 주께서 친히 때마다 일마다 그들에게 평강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광신자들이 있어서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고 어지러운데 평강의 주께서 때마다 일마다 불안을 해소해주시고 평강을 주시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평강을 원하지만 평강한 마음을 갖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우리는 바람직한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강의 근원은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에게는 평강이 없습니다. 바울은 그 편지의 권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친필로 사인을 하고 편지를 마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의 말씀이 달음박질 하여 영광스럽게 되도록 기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진리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규모 있게 행함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주님께서 저희 공동체를 통해서 주님의 영광이 캠퍼스와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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