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살전4강/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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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데살로니가 전서 제 4 강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5:6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오늘 말씀은 재림의 시기와 실제 생활에서의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징조들을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I.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오리라(1-11)
4장 후반부(13-18)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미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재림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이야기했습니다. 5장에서는 재림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옵니까?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재림의 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때이지만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일어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재림은 깊은 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 세상 죄의 낙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서 혼돈과 무질서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께서 도적과 같이 재림하십니다. 집 주인이 도적을 맞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서 문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한 자매 장막에서 이사를 했는데 도적이 가스 검침원인 것처럼 하고 들어와서는 자매님들에게 이것 저것을 시키고 나서 핸드빽을 훔쳐갔습니다. 도적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 도적은 밤에 온 것이 아니라 대낮에 사람들을 속이고 왔습니다. 도둑은 대개 사람들이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 3시경에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이 갈수록 지능화되어 대낮에도 속이고 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때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행 1:7).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이나 그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마 24:36).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이와 같이 아무도 정확한 날짜와 때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을 때 도적과 같이 홀연히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홀연히 찾아오지만 예수님을 믿고 항상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빛의 아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요 9:5).”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두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흑암 가운데서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 줄 알지 못하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양보다도 더 강한 빛으로 사도 바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뒤부터 사도 바울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6,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깨어있다는 의미는 영적으로 각성을 하며 깨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잠자는 자는 감각도 없고 활동도 없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밤잠을 일분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안일과 영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라의 왕인 경애 왕은 포석정에서 술과 여자들과 큰 연회를 베풀다가 후백제 견휜의 기습에 포로가 되어 신라 1,000년의 사직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경애 왕은 나라가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대신들의 말만 믿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신하들과 함께 연락을 취하다가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수치스럽게 자결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세상 재미에 빠지고 세상 연락에 취하여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능력과 성실성만을 믿고 준비 없이 방심하다가 도적과 같이 임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연기할 수도 없고 핑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신자의 자세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항상 깨어 근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성인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를 알고 그것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 향락에 빠져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항상 잠을 자는 삶을 삽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밤의 도적과 같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큰 수치를 영원히 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께 속한 신자들은 빛의 아들과 같이 항상 주의 날을 대비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방탕한 데 쏟지 말고 항상 깨어 기도하며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가져야 합니다(8a). 8a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성도들은 사탄이 난무하는 이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절대적으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요일 1:9,10).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어떠한 유혹과 환란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더러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성도들이 이 어려운 세상에 살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소욕에 따라 살지 않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갈5:16). 로마 군인이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배를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불화살이나 창으로부터 자신의 가슴을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8b-10). 8b절을 보십시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투구는 로마 군인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투구는 성도들이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 받은 것을 말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하고 참된 소망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유혹과 환란을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세상 재미에 빠지게 되고 영적인 역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영적인 역사에 빠져서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재림 때에 누릴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누리게 될 영광과 면류관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신자들이 자든지 깨든지 자기와 함께 살도록 하심입니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건물을 세우듯이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건물은 세상의 폭풍과 비바람에 흔들리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세상의 환란과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권면하여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줄 때 악한 시대에 바로 서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II. 항상 기도하라(12-28)
사도 바울은 재림에 관한 교훈을 주신 후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다음으로 개인적인 믿음 생활에 있어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지도자나 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첫째,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했습니다(12).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교회나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에 대해서 그들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양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한 때는 권면도 하며 책망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돌보고 책임을 지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마치 자기 자식을 섬기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하는 것 같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밤낮으로 동분서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지도자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파서 양들을 먹일 영적인 양식을 준비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영적인 투쟁을 합니다. 또한 양들을 위해서 성령을 충만히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는 목자라고 부릅니다. 캠퍼스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이 있고 요회목자들이 있고 스탭 목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주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며 권하는 영적인 지도자요 하나님의 종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겠습니다.
둘째, 영적인 지도자를 섬겨야 합니다(13a). 13a절을 보십시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영적인 지도자인 목자들을 사랑 안에서 존경하며 사랑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목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양들을 섬깁니다. 마찬가지로 양들은 목자님들을 주님의 종으로 귀히 여기고 섬겨야 합니다. 여기에서 귀히 여기라는 말은 서로 섬기고 존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목자님이 개인적으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너희끼리 화목하라”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별로 불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성도들 간에 서로 화목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성도들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피차 화목할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목자가 주의 일에 힘쓸 수가 없습니다. 오해와 미움과 원망으로 뒤범벅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습니다. 화목 하는 비결은 겸손해야 합니다. 섬기려고 할 때 서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목하고 화평한 관계를 가질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규모 없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14a절을 보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사회나 교회의 규율을 어지럽게 하고 불복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권고하고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잘 다스리며 사랑으로 권면하고 또한 도가 지나칠 때는 이들을 징계하도록 했습니다.
또 마음이 약한 자들은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14b). 마음이 약한 자란 두려움이 많고 소심하여 낙심하기 쉬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힘이 없는 자는 연약한 자들로서 거들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박해하고 반대하고 악한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성도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복음을 반대하더라도 그들을 적대시하지 말고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끝까지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했습니다(15). 이는 세상의 불신자들이나 핍박자들에 대한 성도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롬12:19)”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 어려운 세상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항상 기뻐하라(16).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롬14:17). 우리는 우리 심령 안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험악하고 힘든 세상을 살다보면 신자들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딱딱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천사도 흠모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고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할 때 항상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할 당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중에 갇혀서 옥고를 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란과 핍박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해야겠습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17절을 보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비유로까지 말씀하셨습니다(눅 18:1).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인간은 어떤 환란과 큰 궁핍이 있을 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권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염려를 50% 정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주권자 예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고 염려 없이 온전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그 환란을 통해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하고 평안함과 기쁨이 심령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기도야말로 군대의 보병이나 기마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믿었습니다(스8:21-23).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무엇보다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이 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은 환란과 궁핍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기도로써 승리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체험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떠한 삶입니까? 커피나 각성제를 먹고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기도하는 삶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란 넓은 의미에서 주님께 마음이 향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들이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광야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은 규칙적으로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또 항상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끝난 후에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루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항상 마음이 주님께 향해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18). 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순경에 처하든지 역경에 처하든지 감사하는 삶입니다. 세상에 밤낮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기쁜 일이 있고 역경과 환란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이 안정되고 사업에도 성공하여 발전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실패와 시련의 환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쁜 일을 당했을 때나 환란을 당했을 때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 가운데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불평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시위대장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충성스러운 요셉에게 빠진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물리쳤다 하여 요셉은 억울하게 파렴치 범이요 부녀자 성폭력 범으로 투옥이 되었으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옥중에서도 죄수들의 일을 맡아 보는 총무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여서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한 공로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기근으로 주리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은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19).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절대시하여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는 성령의 불을 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광신적인 태도를 갖는 경우도 그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잘 섬겨야겠습니다. 또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예언자는 설교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나 성도들을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예언을 멸시하는 일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예언을 자기 변호의 구실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굳게 잡고 여러 가지 모양의 악은 멀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영육간에 흠 없이 보전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간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재림은 도적과 같이 예기치 못한 때 갑자기 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연락과 방탕에 빠져서 죄의 낙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근신해야겠습니다.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5:1-2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5:6
오직 깨어 근신할찌라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오늘 말씀은 재림의 시기와 실제 생활에서의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징조들을 볼 때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운 때에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때에 우리는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I.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오리라(1-11)
4장 후반부(13-18)에서는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이미 죽은 자들이 부활할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재림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이야기했습니다. 5장에서는 재림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어떻게 옵니까?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재림의 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다 알고 있기 때문에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때이지만 신자들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시고 알곡과 쭉정이를 가려서 심판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세상의 종말을 의미하는 동시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출발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 일어납니까? 2,3절을 보십시오.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재림은 깊은 밤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여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 팔고 이 세상 죄의 낙에 빠져 있을 때 예수님이 오십니다. 사람들이 죄악에 빠져서 혼돈과 무질서와 어두움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께서 도적과 같이 재림하십니다. 집 주인이 도적을 맞지 않으려면 항상 깨어서 문단속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번에 한 자매 장막에서 이사를 했는데 도적이 가스 검침원인 것처럼 하고 들어와서는 자매님들에게 이것 저것을 시키고 나서 핸드빽을 훔쳐갔습니다. 도적은 속이는 자입니다. 그 도적은 밤에 온 것이 아니라 대낮에 사람들을 속이고 왔습니다. 도둑은 대개 사람들이 깊이 잠들고 있는 새벽 3시경에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이 갈수록 지능화되어 대낮에도 속이고 옵니다. 한마디로 사람들이 안전하다 평안하다 할 때에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의 때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 알 바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행 1:7). 그날과 그 시는 아무도 모르고 하늘의 천사들이나 그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했습니다(마 24:36). 예수님의 재림의 때는 이와 같이 아무도 정확한 날짜와 때를 알지 못합니다. 오직 사람들이 긴장을 풀고 영적으로 잠을 자고 있을 때 도적과 같이 홀연히 찾아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홀연히 찾아오지만 예수님을 믿고 항상 깨어 있는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습니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인 성도들은 항상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그러면 빛의 아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라(요 9:5).” “너희에게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요 12:36).”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전혀 없으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의 신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어두움의 자식들이었습니다. 흑암 가운데서 죄를 지으면서도 죄를 짓는 줄 알지 못하고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써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태양보다도 더 강한 빛으로 사도 바울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뒤부터 사도 바울은 빛의 자녀요 낮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빛의 자녀로서 어떻게 재림을 준비해야 합니까?
첫째, 깨어 있어야 합니다(6,7).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깨어있다는 의미는 영적으로 각성을 하며 깨어 있는 삶을 말합니다. 잠자는 자는 감각도 없고 활동도 없습니다. 깨어 있는 삶은 밤잠을 일분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삶이 아닙니다. 영적인 안일과 영적 무관심에서 벗어나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신라의 왕인 경애 왕은 포석정에서 술과 여자들과 큰 연회를 베풀다가 후백제 견휜의 기습에 포로가 되어 신라 1,000년의 사직에 종말을 고하게 되었습니다. 경애 왕은 나라가 편안하고 안전하다는 대신들의 말만 믿고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신하들과 함께 연락을 취하다가 패배의 쓴 잔을 마시고 수치스럽게 자결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신자들의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세상 재미에 빠지고 세상 연락에 취하여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잃어버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에서 자기의 능력과 성실성만을 믿고 준비 없이 방심하다가 도적과 같이 임하는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연기할 수도 없고 핑계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신자의 자세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항상 깨어 근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위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지성인들은 홍수처럼 밀려드는 정보를 알고 그것에 대처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또한 이 세상 향락에 빠져서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술 취하고 방탕하며 영적으로 깨어 있지 못하고 항상 잠을 자는 삶을 삽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께서 밤의 도적과 같이 임하시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큰 수치를 영원히 당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빛 되신 예수님께 속한 신자들은 빛의 아들과 같이 항상 주의 날을 대비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마음을 방탕한 데 쏟지 말고 항상 깨어 기도하며 자신의 책임과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둘째,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가져야 합니다(8a). 8a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성도들은 사탄이 난무하는 이 어려운 세상을 살면서 절대적으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을 믿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음을 확신하는 믿음입니다(요일 1:9,10).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 때 우리는 어떠한 유혹과 환란에도 넘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사랑을 소유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더러운 죄를 사하여 주시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 은혜에 대해서 감사와 기쁨이 넘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성도들이 이 어려운 세상에 살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소욕에 따라 살지 않는 방패가 되는 것입니다(갈5:16). 로마 군인이 자신의 가슴을 보호하기 위해서 흉배를 입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탄의 불화살이나 창으로부터 자신의 가슴을 보호할 수가 있습니다.
셋째,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8b-10). 8b절을 보십시오.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투구는 로마 군인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쓰는 것입니다. 여기서 투구는 성도들이 죄와 형벌로부터 구원 받은 것을 말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사를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말합니다. 성도들은 구원의 은혜를 누리면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영원하고 참된 소망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유혹과 환란을 감당해 나갈 수 있습니다. 신자들도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다 보면 세상 재미에 빠지게 되고 영적인 역사를 열심히 하다 보면 영적인 역사에 빠져서 우리가 참으로 바라보아야 할 재림 때에 누릴 영광과 소망을 바라보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성도들의 진정한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누리게 될 영광과 면류관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굳게 붙잡고 세상 유혹을 물리치며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은 신자들이 자든지 깨든지 자기와 함께 살도록 하심입니다(10).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신자들은 어떤 생활을 해야 합니까? 1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덕을 세운다는 의미는 건물을 세우듯이 상대방을 세워주는 것을 말합니다. 건물은 세상의 폭풍과 비바람에 흔들리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은 세상의 환란과 유혹에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서로 권면하여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줄 때 악한 시대에 바로 서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II. 항상 기도하라(12-28)
사도 바울은 재림에 관한 교훈을 주신 후에 실제적으로 필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교회 공동체 생활에 대해서 교훈을 주고 다음으로 개인적인 믿음 생활에 있어서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공동체 생활에 있어서 지도자나 목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첫째, 영적인 지도자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했습니다(12).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교회나 어떤 공동체의 지도자에 대해서 그들의 영적인 권위를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맡고 있는 양떼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또한 필요한 때는 권면도 하며 책망도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다스리고 돌보고 책임을 지는 것 같이 어려운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러므로 신자들은 그들이 얼마나 수고를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마치 자기 자식을 섬기기 위해 온갖 수고를 하는 것 같이 양떼들을 돌보기 위해서 밤낮으로 동분서주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지도자들은 말씀을 연구하고 파서 양들을 먹일 영적인 양식을 준비합니다. 영적인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서 많은 영적인 투쟁을 합니다. 또한 양들을 위해서 성령을 충만히 주시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런 분들을 우리는 목자라고 부릅니다. 캠퍼스 양들을 돌보는 목자들이 있고 요회목자들이 있고 스탭 목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분들이 주안에서 우리를 다스리며 권하는 영적인 지도자요 하나님의 종으로 그 권위를 인정하고 순종해야겠습니다.
둘째, 영적인 지도자를 섬겨야 합니다(13a). 13a절을 보십시오.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영적인 지도자인 목자들을 사랑 안에서 존경하며 사랑으로 섬기라고 했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목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목자들은 예수님의 종으로서 양들을 섬깁니다. 마찬가지로 양들은 목자님들을 주님의 종으로 귀히 여기고 섬겨야 합니다. 여기에서 귀히 여기라는 말은 서로 섬기고 존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목자님이 개인적으로 흠이 있다 하더라도 사랑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성도들 간에는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13b절을 보십시오. “너희끼리 화목하라”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는 다른 교회와 비교할 때 별로 불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성도들 간에 서로 화목하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화목하라는 말씀은 명령형입니다. 성도들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피차 화목할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성도들 간에 분쟁이 있는 곳에서는 목자가 주의 일에 힘쓸 수가 없습니다. 오해와 미움과 원망으로 뒤범벅이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행할 수가 없습니다. 화목 하는 비결은 겸손해야 합니다. 섬기려고 할 때 서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화목하고 화평한 관계를 가질 때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규모 없는 자에 대해서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14a절을 보십시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여기서 규모 없는 자란 사회나 교회의 규율을 어지럽게 하고 불복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런 자들에 대해서 권고하고 경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자들을 잘 다스리며 사랑으로 권면하고 또한 도가 지나칠 때는 이들을 징계하도록 했습니다.
또 마음이 약한 자들은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14b). 마음이 약한 자란 두려움이 많고 소심하여 낙심하기 쉬운 사람들을 말합니다. 힘이 없는 자는 연약한 자들로서 거들어 주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특히 자신을 박해하고 반대하고 악한 사람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성도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복음을 반대하더라도 그들을 적대시하지 말고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끝까지 오래 참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또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고 했습니다(15). 이는 세상의 불신자들이나 핍박자들에 대한 성도의 태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너희가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악을 선으로 이기라(롬12:19)”고 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어 어려운 세상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항상 기뻐하라(16).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고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사 우리를 영원한 죽음과 심판에서 구원하신 그 사랑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기뻐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기쁨이라고 했습니다(롬14:17). 우리는 우리 심령 안에서 나오는 기쁨이 있어야겠습니다. 이 험악하고 힘든 세상을 살다보면 신자들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딱딱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우리를 천사도 흠모할 하나님의 종으로 쓰시고 주님 안에 거하게 하신 은혜를 기억할 때 항상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4절에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할 당시 바울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중에 갇혀서 옥고를 당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환란과 핍박을 받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험한 세상에서 주님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해야겠습니다.
둘째, 쉬지 말고 기도하라(17). 17절을 보십시오. “쉬지 말고 기도하라.”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 것을 비유로까지 말씀하셨습니다(눅 18:1).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어떤 환란 가운데서도 항상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은 빌립보서에서 말씀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 인간은 어떤 환란과 큰 궁핍이 있을 때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에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주권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염려를 50% 정도 하면서 기도를 하게 되지만 기도를 열심히 하다 보면 주권자 예수님의 사랑과 신실하심을 믿고 염려 없이 온전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다 보면 그 환란을 통해서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오히려 감사하고 평안함과 기쁨이 심령에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 있어서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로써 하나님을 만나 대화할 수 있습니다. 에스라는 기도야말로 군대의 보병이나 기마병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믿었습니다(스8:21-23). 예수님은 그의 생애 가운데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때 무엇보다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이 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누구보다 더 많은 환란과 궁핍과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수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옥에 갇히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하고 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기도로써 승리하고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것을 체험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어떠한 삶입니까? 커피나 각성제를 먹고 잠도 자지 않고 하루 24시간 동안 계속 기도하는 삶입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기도란 넓은 의미에서 주님께 마음이 향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좁은 의미에서 기도는 우리들이 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새벽 미명에 일어나서 광야에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은 규칙적으로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또 항상 무슨 일을 하기 전에 기도하고 끝난 후에 기도하는 삶입니다. 그리고 하루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항상 마음이 주님께 향해 있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셋째, 범사에 감사하는 삶입니다(18). 18절을 보십시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범사에 감사하는 삶은 순경에 처하든지 역경에 처하든지 감사하는 삶입니다. 세상에 밤낮이 있듯이 우리 인생에도 기쁜 일이 있고 역경과 환란이 있습니다. 우리 생활이 안정되고 사업에도 성공하여 발전할 때도 있지만 갑자기 실패와 시련의 환란을 겪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쁜 일을 당했을 때나 환란을 당했을 때나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란 가운데서도 감사해야 합니다.
구약에서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애굽에 종으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불평하지 않고 충성스럽게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때 그는 시위대장의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충성스러운 요셉에게 빠진 보디발 여사의 유혹을 물리쳤다 하여 요셉은 억울하게 파렴치 범이요 부녀자 성폭력 범으로 투옥이 되었으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자기가 맡은 일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옥중에서도 죄수들의 일을 맡아 보는 총무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여서 애굽 왕의 꿈을 해석한 공로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어 기근으로 주리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세상을 구원하는 역사에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교회 공동체에서 성도들은 성령을 소멸치 말아야 합니다(19). 성령의 역사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말라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판단을 절대시하여 성령의 역사를 무시하는 태도는 성령의 불을 끌 수 있습니다. 반대로 지나치게 광신적인 태도를 갖는 경우도 그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를 잘 섬겨야겠습니다. 또한 예언을 멸시치 말라고 했습니다. 신약 시대에 있어서 예언자는 설교를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교회나 성도들을 다스리는 일을 합니다. 예언을 멸시하는 일은 예언을 남용하거나 예언을 자기 변호의 구실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을 굳게 잡고 여러 가지 모양의 악은 멀리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영육간에 흠 없이 보전되고 성결한 삶을 살도록 간구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의 재림은 도적과 같이 예기치 못한 때 갑자기 임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연락과 방탕에 빠져서 죄의 낙을 즐기고 있을 때 갑자기 주님이 재림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서 근신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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