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살전3강 재림 후에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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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3 강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1-1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4:17
재림 후에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은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재림 신앙을 새롭게 하고 주님 오시기 까지 거룩하고 흠이 없이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영원을 대비하면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1-12)
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가운데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핵심으로서 사랑의 수고를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수고를 하되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손과 발과 머리를 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 몸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즉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골1:10).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데 바울은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합니다. 지금 생활에 자족하게 되면 신앙이 퇴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센터에 나와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자족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정도 하니 자기 시간을 더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영적으로 안일해지고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가다가 멈추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많이 힘써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그 당시 희랍은 도덕적인 면에서 문란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음란하고 부도덕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면에서 먼저 음란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가까이 있는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나 데살로니가는 성적으로 매우 퇴폐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의 삶의 목표는 쾌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덕이 무너지고 헬라의 신전들은 이런 부패와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음란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거룩함의 적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입니다(요일3:14). 그런데 음란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인 거룩한 몸을 더럽힙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음란은 버리기 위해서는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대에는 너무 음란이 보편화되어 부부간의 도덕마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이원론적인 헬라 철학은 육체의 행위가 인간의 영혼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무절제하고 부도덕한 쾌락주의가 유행했으며 이 영향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예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이 극도의 향락주의와 부도덕과 음란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 헬라의 상태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소극적인 면에서 음란한 요소를 다 버려야겠습니다.
3a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따라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유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러므로 우리는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나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부정케 함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음란과 색욕을 좇는 것과 형제를 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정한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의 피로 자유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엡4:13).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비결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아는 일에 매일 성장해 나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을 하고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내면성을 덧입게 되어 거룩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 내면이 성령을 거스리는 죄로 가득할 때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거해야 우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시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에 임할 때 우리 자신이 성결케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 많은 세상 가운데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고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때 성령의 전인 우리 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함 속에는 공의와 함께 사랑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했습니다(9). 그들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더 많이 형제 사랑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했는데 마찬가지로 형제 사랑에 대해서도 더욱 힘쓰라고 말합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일을 하는 자에게 더 일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지금 현재로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이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사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3:16). 사람이 아무리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부족한 점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에는 배워야 할 것이 항상 더 있습니다. 우리는 더 깊게 사랑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표현해야 할 방법들이 늘 더 많이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사랑이란 끝이 없는 영원한 과정임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는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형제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소극적인 투쟁이라면 사랑은 적극적인 투쟁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형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랑은 인간적이고 정욕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랑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교회 공동체가 견고하게 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형제 사랑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당장에 예수님께서 오실 줄 알고 손을 놓고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위도식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들뜬 상태에서 시끄럽게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므로 열심히 일함으로써 장래를 대비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성도 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의 짐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구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신자들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여유가 생겨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도 돌아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은 기도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들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II. 예수님의 재림 (13-18)
데살로니가서의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사상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전하여준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18절에서 먼저 재림이 있을 때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5:1-11).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어야만 확실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은 불신자와 다름 없이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위해서 매우 슬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로 인해서 슬퍼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초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앞으로도 자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며 거짓 선지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미래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능력이 영적으로 죽은 우리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자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죽은 신자들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다시 올 것입니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육체적인 죽음이지만 신자들은 계속 죽은 상태로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 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죽는 즉시 부활하며 결국 그들의 몸도 재림 때 마찬가지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이 있던 사람들이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재림 때 일어날 사건들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강림하십니다(16a). 예수님은 얼마나 영광스런 모습으로 재림하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리가 한 소리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인지 동시에 일어나는지, 혹은 순서대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그분의 재림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빰빠라~ 빰빠라~ 빰빰빰 빰바라~ 예수님 재림이요!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 최대 최후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매우 극적이고 강력하게 공포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불신자들인 악인은 분과 노함으로 심판하십니다(마13:24-30). 그래서 예수님의 강림은 크리스챤들에게는 큰 기쁨과 영광이요 불신자들이나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과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에수님의 재림을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죽었던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16b). 16b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천사들의 나팔이 울려 퍼진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한 부분으로서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이후에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몸이 부활하여 새롭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호령이 나고 천사들이 말하고 나팔을 불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죽은 자들이 새로운 몸으로 무덤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사실을 몰랐으므로 형제들이 죽을 때 매우 절망하고 슬퍼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백년이나 수천년 전에 죽은 성도들이 그 몸이 흔적도 없이 썩어져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몸이 살며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한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몸에 생명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죽은 자를 다시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킬 수 없겠습니까? (고전15:35-38)
셋째, 살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 휴거를 합니다(17). 1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난 후 이 땅에 살아 남아 있는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끌려 올려질 것 입니다. 그리고 구름 속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구름에 당도하실 것이며 신자들은 위로 끌어 올려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실 때에 그를 구름 속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 땅에서 만나지 않고 구름 속에서 만나게 될까요? 아마 땅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폐허가 되어 있고 방사능과 여러 가지 해로운 것들로 오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 자체가 파괴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방 문을 잠가 놓았지만 자유롭게 들어오셨던 것처럼 몸이 변화된 성도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구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화는 천천히 일어나지만 영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휴거라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재림 때에 살아 있는 신자들과 이미 죽은 신자들 간의 재회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두 그룹은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나는 재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과 전 여호수아 선교사님과 김 엘리야 목자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모세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통역이 필요 없고 어학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 하늘 언어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서로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간증할 거리가 있으려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결단을 많이 하고 고난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고생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도 풍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수많은 은혜에 대해서 증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때는 시간이 없어집니다. 영원한 현재가 지속될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창조와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 내의 존재인 것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서 현재를 직관하고 현재에서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현재라는 시점이 대단히 애매모호하지만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을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 내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쉽게 이 세상 허무한 것들에 빠져 들고 세상 것에 애착을 갖기 쉽습니다. 또 세상 것에 정신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목표인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 때 허무한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 살 때 우리는 유혹이 많고 부질없는 삶에서 벗어나 가장 의미 있고 감격에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배우는 것도 많이 있고 또 무엇이든지 배우기가 쉬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이 다 발휘되기 때문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며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형제 사랑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4:1-18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4:17
재림 후에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기초해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은 매우 중요한 주제임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들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재림 신앙을 새롭게 하고 주님 오시기 까지 거룩하고 흠이 없이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에게 영원을 대비하면서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1-12)
1절을 보십시오.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가운데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11:6).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율법의 핵심으로서 사랑의 수고를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수고를 하되 우리의 마음뿐 아니라 손과 발과 머리를 써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산 제사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날마다 우리 몸을 당신께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 보다 순종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즉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이 그 분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입니다(골1:10).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는데 바울은 더욱 많이 힘쓰라고 말합니다. 지금 생활에 자족하게 되면 신앙이 퇴보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일주일에 세 번 정도는 센터에 나와서 주님을 섬깁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고 자족할 수 없습니다. 이제 이 정도 하니 자기 시간을 더 가져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영적으로 안일해지고 스피릿을 잃어버리고 타락하게 됩니다. 신앙 생활은 자전거 타기와 같습니다. 가다가 멈추면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욱 많이 힘써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그 당시 희랍은 도덕적인 면에서 문란했고 성적으로 타락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의 음란하고 부도덕한 생활에서 떠나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백성도 거룩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하기 위해서는 소극적인 면에서 먼저 음란을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가까이 있는 고린도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나 데살로니가는 성적으로 매우 퇴폐했습니다. 고대 헬라인들의 삶의 목표는 쾌락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덕이 무너지고 헬라의 신전들은 이런 부패와 향락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음란은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거룩함의 적입니다.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는 전입니다(요일3:14). 그런데 음란은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인 거룩한 몸을 더럽힙니다.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느니라(고전6:18).” 음란은 버리기 위해서는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라(4)”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대에는 너무 음란이 보편화되어 부부간의 도덕마저 무너지고 가정이 파괴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이원론적인 헬라 철학은 육체의 행위가 인간의 영혼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무절제하고 부도덕한 쾌락주의가 유행했으며 이 영향으로 가정이 파괴되는 예가 많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은 소돔과 고모라 성과 같이 극도의 향락주의와 부도덕과 음란 문화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 헬라의 상태보다 더 심각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지키기 위해서 소극적인 면에서 음란한 요소를 다 버려야겠습니다.
3a절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을 때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따라 인간을 거룩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도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유지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서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1:18-19). 그러므로 우리는 망령된 행실에서 벗어나 성도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하심이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우리를 부정케 함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정은 음란과 색욕을 좇는 것과 형제를 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부정한 죄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죄를 짓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죄 문제를 해결하고 예수님의 피로 자유함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된다는 의미는 단순히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서 적극적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엡4:13).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비결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아는 일에 매일 성장해 나갈 때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노력을 하고 또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의 내면성을 덧입게 되어 거룩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몸을 성령의 전으로 쓰시기 위함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우리 내면이 성령을 거스리는 죄로 가득할 때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거해야 우리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치시고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몸에 임할 때 우리 자신이 성결케 되고 거룩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죄 많은 세상 가운데서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말씀을 통해서 회개하고 우리의 내면을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야겠습니다. 그때 성령의 전인 우리 몸이 성령으로 충만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
거룩함 속에는 공의와 함께 사랑의 개념이 들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사랑했습니다(9). 그들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에게 더 많이 형제 사랑을 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했는데 마찬가지로 형제 사랑에 대해서도 더욱 힘쓰라고 말합니다.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일을 하는 자에게 더 일하도록 하는 법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지금 현재로 만족하지 말고 더 많이 하도록 권면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서로 사랑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 비하면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사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셨습니다(요3:16). 사람이 아무리 사랑을 많이 하더라도 부족한 점이 있는 법입니다. 사랑에는 배워야 할 것이 항상 더 있습니다. 우리는 더 깊게 사랑해야 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표현해야 할 방법들이 늘 더 많이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사랑이란 끝이 없는 영원한 과정임을 깨닫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는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이기심입니다.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만을 생각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형제를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이 소극적인 투쟁이라면 사랑은 적극적인 투쟁입니다. 9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형제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야 합니다. 자연적인 사랑은 인간적이고 정욕적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사랑해야 합니다. 회개하고 기도를 많이 하고 거룩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추구하는 것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면 교회 공동체가 견고하게 성장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형제 사랑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은 당장에 예수님께서 오실 줄 알고 손을 놓고 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위도식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들뜬 상태에서 시끄럽게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곧 다시 오실 것이므로 열심히 일함으로써 장래를 대비하는 삶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데살로니가 성도 중에서 몇몇 사람들은 남이 도와주지 않으면 안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성도들의 짐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구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그들에게 자기 일을 하고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권면했습니다. 신자들은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여유가 생겨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도 돌아볼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노동은 기도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오더라도 오늘 사과 나무 한 그루를 심겠다고 말한 스피노자의 말처럼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들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바른 자세입니다.
II. 예수님의 재림 (13-18)
데살로니가서의 주제는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 사상입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전하여준 예수님의 재림과 종말에 대해 여러 가지 오해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18절에서 먼저 재림이 있을 때 죽은 자들의 부활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의 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5:1-11).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 당시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살아 있어야만 확실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은 불신자와 다름 없이 예수님의 재림에 참여할 수 없는 것으로 오해하여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을 위해서 매우 슬퍼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은 성도들로 인해서 슬퍼하고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민에 대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기초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예수님의 부활은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의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신 대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앞으로도 자신이 약속한 모든 것을 지킬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통치자이시며 거짓 선지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부활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미래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능력이 영적으로 죽은 우리도 다시 살리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다가 자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죽은 신자들은 이미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있는데 예수님과 함께 다시 올 것입니다. 죽음으로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것은 잠시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은 영원히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여전히 육체적인 죽음이지만 신자들은 계속 죽은 상태로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자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부활 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죽는 즉시 부활하며 결국 그들의 몸도 재림 때 마찬가지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하는 것도 순서가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살아 남이 있던 사람들이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재림 때 일어날 사건들은 무엇입니까?
첫째로, 예수님께서 강림하십니다(16a). 예수님은 얼마나 영광스런 모습으로 재림하십니까? 16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 하시리니” 그는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할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소리가 한 소리를 다양하게 표현한 것인지 동시에 일어나는지, 혹은 순서대로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리들은 그분의 재림을 알려 주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빰빠라~ 빰빠라~ 빰빰빰 빰바라~ 예수님 재림이요! 예수님의 재림은 인류 최대 최후의 사건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매우 극적이고 강력하게 공포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재림하셔서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십니다. 의인은 영생으로 불신자들인 악인은 분과 노함으로 심판하십니다(마13:24-30). 그래서 예수님의 강림은 크리스챤들에게는 큰 기쁨과 영광이요 불신자들이나 악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과 멸망을 가져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겸손한 자세로 믿음을 굳게 지키며 에수님의 재림을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겠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고 죽었던 자들이 먼저 일어납니다(16b). 16b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께서 오실 때에 천사들의 나팔이 울려 퍼진 다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부활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림의 한 부분으로서 그들을 데리고 오실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이후에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 그들의 몸이 부활하여 새롭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후에 고린도 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고전15:51-52).” 호령이 나고 천사들이 말하고 나팔을 불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고 죽은 자들이 새로운 몸으로 무덤에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사실을 몰랐으므로 형제들이 죽을 때 매우 절망하고 슬퍼했습니다. 이로 인해 그들의 믿음이 약해졌습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백년이나 수천년 전에 죽은 성도들이 그 몸이 흔적도 없이 썩어져 버렸는데 어떻게 다시 몸이 살며 예수님의 재림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한마디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시고 우리 몸에 생명을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죽은 자를 다시 영광스럽고 신령한 몸으로 부활시킬 수 없겠습니까? (고전15:35-38)
셋째, 살아 있는 성도들이 공중 휴거를 합니다(17). 17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일어난 후 이 땅에 살아 남아 있는 신자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끌려 올려질 것 입니다. 그리고 구름 속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구름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리스도는 구름에 당도하실 것이며 신자들은 위로 끌어 올려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강림하실 때에 그를 구름 속에서 만나게 될 것입니다. 왜 땅에서 만나지 않고 구름 속에서 만나게 될까요? 아마 땅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폐허가 되어 있고 방사능과 여러 가지 해로운 것들로 오염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 자체가 파괴되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방 문을 잠가 놓았지만 자유롭게 들어오셨던 것처럼 몸이 변화된 성도들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구름 속에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성화는 천천히 일어나지만 영화는 순식간에 이루어집니다. 휴거라는 초자연적인 사건은 재림 때에 살아 있는 신자들과 이미 죽은 신자들 간의 재회를 가능하게 할 것입니다. 두 그룹은 모두 그리스도의 오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신나는 재회는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다가 돌아가신 부모님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 사무엘 선교사님과 전 여호수아 선교사님과 김 엘리야 목자님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다윗과 모세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통역이 필요 없고 어학을 배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 하늘 언어를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어린 양의 은혜를 찬양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서로 간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간증할 거리가 있으려면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결단을 많이 하고 고난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고생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승리의 소식, 기쁨의 소식도 풍성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수많은 은혜에 대해서 증거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아니 그때는 시간이 없어집니다. 영원한 현재가 지속될 것입니다. 사실 시간이란 창조와 함께 시작된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 내의 존재인 것입니다.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에서 현재를 직관하고 현재에서 미래를 기대하게 됩니다. 현재라는 시점이 대단히 애매모호하지만 현재를 기점으로 해서 시간을 파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라는 시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간 내에 존재하는 인간으로서 쉽게 이 세상 허무한 것들에 빠져 들고 세상 것에 애착을 갖기 쉽습니다. 또 세상 것에 정신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허무한 것들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인간은 영원한 목표인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살 때 허무한 세상에서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거룩한 나그네로 살 때 우리는 유혹이 많고 부질없는 삶에서 벗어나 가장 의미 있고 감격에 찬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배우는 것도 많이 있고 또 무엇이든지 배우기가 쉬울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능력이 다 발휘되기 때문에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며 왕 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을 생각하면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솟아오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형제 사랑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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