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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살전2강/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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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5,244회 작성일 03-02-03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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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2 강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2:1-3:13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2:19,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라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오늘은 사도 바울의 목자 생활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투사요, 유모요, 아비의 심정으로 양을 쳤습니다. 그의 목자 생활은 우리에게 훌륭한 모범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목자 바울을 통해서 어떻게 양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음의 투사 바울(2:1-5)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핍박을 피해서 베뢰아로 갔습니다. 그는 자기가 데살로니가에서 수고한 것이 헛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디모데에게 들은 바로는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 가운데 인내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에는 감사가 충만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에서는 바울에 대해서 비난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즉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쫓겨간 것은 그가 무슨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빌립보에서도 고난을 받고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을 만나서 귀신을 쫓아내자 주인이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관원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무리들에게 송사를 받고 옷을 찢어 벗기고 매를 맞고 깊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 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이때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다 도망한 줄 알고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즉시 간수를 말리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구원을 얻게 했습니다. 로마 상관들은 바울을 놓고자 하였지만 바울이 로마 사람인 줄 알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권하여 성에서 떠나기를 구하자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여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성을 소동케 하고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라고 핍박했습니다. 그들의 핍박이 하도 심하여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밤에 베뢰아로 보냈는데 그곳을 지나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렇게 많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의 복음을 그들에게 전했습니다. 하나님을 힘입는다는 뜻은 하나님과 연합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고 확신있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세계관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싸움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증거할 때 우상의 거짓됨이 드러나게 되고 사람들이 우상을 버리면 그 사회의 기득권층이 인적, 물질적인 손해가 따르게 됨으로 복음 증거자들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싸움 중에서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담대하게 증거했습니다.

 4절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복음을 힘있게 증거한 것은 복음 전할 부탁을 하나님께 받았기 때문입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부탁이라도 잘 들어주는데 하물며 자신의 보배피로 죄사함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주님의 부탁인데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일했습니다. 그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는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충성되이 여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들을 옳다 인정하시고 죄악된 이 시대에 복음의 증거자들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부탁하신 생명의 복음을 열심히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유모 같은 바울(6-10)

 바울은 사도로서 양들에게 대단한 권위와 위엄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의 권위는 사실 복음을 증거하고 그대로 본을 보이는 삶을 산 데서 나온 것입니다. 바울은 어린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바울은 복음의 투사인 반면에 유모와 같이 양면성을 가지고 섬세하게 양들을 섬겼습니다. 그는 원수들에 대해서는 투사와 같았지만 양들에게는 유모와 같았습니다.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길렀다는 것은 어머니의 심정으로 양들을 양육했다는 말입니다. 유모는 자기 몸을 상해가면서 아이들을 섬깁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것은 몸도 고달프고 지칩니다. 일을 해도 해도 끝이 없어 보입니다. 어머니는 이런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저절로 큰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중에 결혼해서 자녀를 낳아 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서야 철이 드는 것입니다. 목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믿음이 좋고 훌륭해서 큰 것 같지만 뒤에서 목자님들의 기도와 희생과 헌신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바울은 그들을 목숨까지 주기를 즐겨할 정도로 사랑했습니다. 이것은 현지인 양에게 미친 선교사와 같습니다. 목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면서도 아까와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양을 위해서 간이라도 빼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양들에게 목자의 사랑에 대해서 신뢰하도록 가르칠 뿐만 아니라 목자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섬겼습니다. 바울은 양들을 수단으로 삼지 않고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기 목숨까지라도 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순수한 동기로 양을 칠 때 참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열매맺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당시 바울은 천막 깁는 일을 했습니다. 헬라 세계에서 손으로 일하는 것은 노예들이 하는 일로 천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낮에는 노예와 같이 일하면서 밤에는 복음 역사를 섬겼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 중에는 청소 아르바이트, 노인들 목욕시켜 주고 밥 먹여 주는 일을 하면서 복음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장사를 하면서, 어떤 분들은 직장에서 수고 하면서 복음 역사에 헌신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헌신을 통해서 복음 역사가 힘있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천막 깁는 일을 하면서 복음역사를 섬기면 시간의 제약과 건강 때문에 어떤 일은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10절에서 바울은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이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성도들이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양들을 위해서 엄청난 자기와의 투쟁을 했고 자기 절제를 했고 자기 훈련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족한 사람들이 어떻게 양들에 대하여 옳고 흠없이 행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자기의 투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부족한 저희들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십니다. 저희가 앞으로 40일 동안 영투(영적투쟁) 오종 경기를 하는 가운데 일대일과 기도와 예배와 성경읽기와 봉사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저희들이 이런 자기투쟁을 할 때 캠퍼스에서 복음이 세력을 얻게 될 줄 믿습니다. 주님께서 저희들의 선한 믿음의 투쟁을 넘치게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특히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일대일 양을 얻어서 양육하는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양들에게 아비가 된 바울(11-3:13)

 11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바울은 유모가 되어 양들을 섬길 뿐만 아니라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 바울은 아비의 심정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복음으로 낳고 양육했습니다. 권면은 훈계하고 교정하는 일입니다. 경계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공경심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버지는 자녀를 보호하고 훈련하고 양육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공의를 가르쳐야 합니다. 얼마 전에 동아일보에 ‘아버지는 누구인가?’라는 시가 실려 당일 조회수가 540만건 이상이 되어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시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다시 새겼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따뜻하지만 아버지의 사랑은 깊습니다. "아들, 딸이 밤늦게 돌아올 때에 어머니는 열 번 걱정하는 말을 하지만, 아버지는 열 번 현관을 쳐다본다. 아버지의 웃음은 어머니의 웃음의 2배쯤 농도가 진하다. 울음은 열배쯤 될 것이다. 어머니의 가슴은 봄과 여름을 왔다갔다 하지만, 아버지의 가슴은 가을과 겨울을 오고간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도록 하기 위해서 때로는 위로하고 때로는 책망하고 때로는 훈련하고 섬겼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군사요 복음의 일꾼이요 대장부답게 키웠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환란 가운데서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지조를 지키며 믿음의 본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까지 훈련했습니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분명한 신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일생 동안 위대한 신앙인으로 헌신합니다. 저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훈련을 잘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전요한목자님과 김이삭선교사님, 김아브라함 선교사님의 아버지와 같은 사랑과 훈련을 받으면서 대장부다운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이 시대에 캠퍼스 지성인들의 영적 아비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의 투사요 유모요 아비의 심정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섬겼다고 말하면서 이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떤 자세로 받아들였는지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들은 바울에게서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영적인 권위와 진실성과 능력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아니할지라도 역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받는 사람들이 믿음으로 받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이 참으로 그러한가 상고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일 메시지를 듣고 소감을 쓰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베뢰아 성도들보다 더 훌륭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받을 때에 믿음을 화합하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서 치유와 변화와 깨우침의 역사를 일으키고 열매를 맺게 합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은 기적입니다. 특히 성경은 다른 책과 달리 하나님의 영감과 능력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성경을 사랑하는 크리스챤’이라는 별명이 있습니다. 성경만을 읽고 크리스챤이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사에서 권서들은 성경 책을 팔고 전도도 하고 믿고자 결단한 사람들을 교회에 연결시켜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권서들이 가정 교회를 이루도록 도와 주고 사경회를 만든 사람들입니다.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권서들이 활동한 열매를 모으고 세례를 주는 일을 주로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그들도 자기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이고 사도들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유대교만을 인정하고 기독교는 그 아류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회심자가 생기고 이방인에게까지 복음을 전하자 그들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침해될 것이라 생각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가 번영할수록 자기들의 위치가 위협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훼방했습니다. 그들은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택함을 받았지만 영적 무지로 인해서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죄를 채우고 결국 하나님의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AD 70년 로마 장군 디도에 의해서 멸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은혜를 새롭게 기억하고 그 사명을 더욱 힘써 감당해야함을 깨닫게 됩니다. 지금 신의주가 개방되면서 북한 선교의 문이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준비된 선교사들을 북한에 파송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김일성 대학도 개척해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복음으로 통일하시고 제사장 나라요 거룩한 백성으로 새롭게 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앞으로 40년 동안 저희들을 통해서 233개국에 10만명의 선교사를 파송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떠난 것과 그들에게 다시 가지 못한 이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합니까? 17,18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바울이 그들을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두 번 그들에게 가고자 하였지만 사단이 막았다고 했습니다. 갑자기 병이 생겼든지, 교통 편이 끊어졌다든지, 위급한 일이 생겨서 가지 못하게 되었을 것 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가는 길을 막고 성도 사이에 오해를 불러 일으켜서 분열시키고자 합니다. 바울은 이런 오해를 막고 성도들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그들에게 사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9,20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바울은 양들을 매우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바울의 그들에 대한 자랑은 양들로 인해서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종말에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되는 승리의 면류관이요 하나님 앞에서 상급으로 여겼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보기 원했던 이유는 양들이 그의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 양들을 자랑이요 면류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열매를 맺고자 했습니다. 또 주님께 열매를 드리고자 하는 소원이 충만했습니다. 우리가 양을 치는 이유는 목자 체면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배와 같이 여기셨습니다(요17:9). 그리고 양들로 인해서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로 오직 양무리의 본이 되라(벧전5:2).”고 권면했습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는 사랑으로 맺어져 있습니다. 바울의 소망은 돈을 버는 것도 아니고 책을 써서 이름을 날리는 것도 아니고 학자가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생명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인생에서 귀한 일이 많이 있지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구원하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참다 못하여 자신과 실라만 아덴에 머물고 디모데를 데살로니가에 보내어 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자 했습니다. 즉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환난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줄을 그들도 알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이미 장차 받을 환난을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러므로 바울도 참다 못하여 그들의 믿음을 알기 위하여 디모데를 보내었습니다.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시험하여 사도 바울의 수고를 헛되게 할까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디모데가 돌아와서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하고 또 그들이 바울을 잘 생각하여 간절히 보고자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이것을 보면 바울이 양들로 인해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치 아기가 감기에 걸릴까 이것이 중이염으로 번질까 염려하는 어머니와 같은 자세로 양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세심하게 돌보고 있는 목자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매우 가난하고 궁핍하게 살았지만 양들의 믿음으로 인해서 위로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가 어느 정도 열매를 맺어 그들이 믿음에 굳게 선 것을 보니 이제 좀 살 것 같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믿음에 선 것을 보고 하나님께 어떠한 감사를 드려야 할 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해주시기를 밤낮으로 간구했습니다. 또한 주께서 그들이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그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목자 생활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목자는 영적 투사요 유모와 같은 세심함과 아비와 같은 훈련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고 양을 얻어서 이런 목자 생활을 하며 그 기쁨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양을 치면서 내가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하신 목자님의 사랑에 감사하고, 나를 목자로 불러주신 주님께 온전한 감사를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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