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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 살전1강/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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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5,308회 작성일 03-02-03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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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데살로니가전서 제 1 강                                                                       
말씀 / 데살로니가전서 1:1-10
요절 / 데살로니가전서 1:7

본이 된 데살로니가 교회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바울과 동료들은 주후 50년 초 여름에 데살로니가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그 도시에 첫 번째 교회를 세웠지만 생명의 위협을 받고는 급히 떠나야 했습니다(행17:1-10). 그 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알아보게 했을것입니다. 디모데는 기쁜 소식을 가지고 바울에게 돌아왔습니다. 데살로니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 굳게 서 있었고, 서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는 믿음에 관한 몇 가지 의문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짧은 방문 기간에 그 모든 문제들에 대해 대답해 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써서 그들의 질문에 답하고 주님께 신실한 그들의 태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 주변 지역에서 본이 될 만한 교회였습니다. 이 시간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통해서 본받을 점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먼저 은혜와 평강이 그들에게 있도록 인사를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행을 하고 가르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성도들을 위해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2).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3). 믿음, 소망,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기본적인 성품입니다. 그 열매는 역사와 수고와 인내로 나타납니다.

첫째로, 믿음의 역사.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역사는 믿음에 의해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엡 2:9). 하지만 그 믿음은 각 신자들의 삶에서 선한 역사를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선한 역사를 행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역사여야 합니다. 그 역사의 성격은 각 사람마다 다양할 것입니다. 하지만 동기와 바람은 모두 같습니다. 즉 믿음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정한 역사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행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자기가 각자 맡은 일을 하면서 즉 학생은 학교에서, 평신도 목자들은 직장에서, 사모님들을 가정에서 자기 일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이웃들과 어깨를 맞대고 일할 때 그리스도를 위해서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그들의 믿음은 현재의 직업에서 그리스도를 위한 일을 할 때 촉매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일대일로 성경을 공부하고 제자를 양성하는데 이것은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안드레의 오병이어를 드리는 믿음은 오천명을 먹이는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음의 고백은 하지만 그것이 그 나라를 확장하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한 역사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가을 학기에 학생 양들을 얻고 제자 양성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둘째로, 사랑의 수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수고는 사랑에 의해 촉진되었습니다. 사랑 때문에 신자들은 기꺼이 수고할 수 있습니다. 수고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는 코포스인데 이것은 노고나 고역을 뜻합니다. 사랑에는 희생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신자들은 기꺼이 다른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 비록 힘든 일일지라도 자신을 내어주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그러한 자발적인 수고를 할 수 있도록 격려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를 섬기는 일이 수고가 될 때 뒤로 물러서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것, 치료하는 것, 심방하는 수고 등 한 사람을 양육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사랑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제자 양성이 어려운 것은 이러한 사랑의 수고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때 엄청난 수고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감당해 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할 때 기꺼이 사랑의 수고를 하게 됩니다.

셋째로, 소망의 인내.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인내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의해 고취되었습니다. 인내란 수동적인 수용이 아닌 반대와 난관 앞에서 보이는 강인하고 꿋꿋한 태도를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로부터 심각한 반대와 박해에 직면하고서도 한결같이 신실했습니다. 이런 강인함이 어디서 나왔을까요?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을 말합니다. 그 소망은 그분이 다시 오시리라는 막연함 바람이 아니라 신자들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바라고 기대해야 할 확실한 사실입니다. 이 소망이 있었기에 그들은 믿음 때문에 핍박을 받는 중에도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언젠가는 모든 것을 바로 잡아 주실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의 삶을 주장하기를 소망하지만 어려움과 실패의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외면해버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열매가 쉽게 맺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소망으로 인내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큰 핍박은 없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 쾌락적인 것,물질적인 것들이 우리 시대를 주장하기 때문에 휩쓸리기가 쉽습니다. 이런 시대에 믿음으로 살려고 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인내해야 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역사와 수고, 인내로 나타나 그것들이 우리들의 삶을 어떻게 인도하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형제들에게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택하셨음을 안다고 확신있게 말했습니다. 택하심은 하나님의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개인이나 공동체를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그들의 공로나 구원받을 자격이 있어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결정에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시행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자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 나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과 함께 그 땅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또 그들이 말씀을 받고 그 말씀을 모든 족속에게 전하게 하시려고 그들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명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포로로 잡혀갔고 남은 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남은 자들 가운데 많은 자들조차도 결국 돌아설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특별한 수혜자들이었지만 약속된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택하시고 선택된 백성들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로 믿고 받아들이고 영접한 그리스도인들로 대체 되었습니다. 교회는 이제 믿지 않는 이스라엘을 대체하여 택함 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선택받았음을 어떻게 알았는지 5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전할 말을 하나님께서 선택하셨습니다. 이는 그분이 복음을 제시해야 큰 성과를 거두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동료들은 그 말씀을 데살로니가에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믿는 자들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떠날 때는 한 강건한 교회가 거기에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한 자들이 교만할 근거는 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는 말로 전했으며 하나님께서는 그 말을 사용하셔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그 말씀을 믿고 이해하도록 마음에 불을 지피셨습니다. 하나님은 신적인 능력으로 그들을 두룸으로써 바울의 말을 사용하셨습니다(고전2:1-5, 엡6:17,18). 바울의 말만으로는 아무도 믿도록 설득할 수 없으며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도록 마음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이 듣는 자들을 위로하고 일깨워주고 확신시키는 성령의 능력과 결합되면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말하는 것을 믿게 되고 그들의 마음과 삶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께 바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능력에는 또한 기적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성령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한 분 안에 세 인격으로 계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사람이 되셨기에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갱신과 거듭남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기 위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 이 땅을 떠나셨지만 성령을 보내셔서 자신이 사람들 가운데 영적으로 계속 임재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님은 맨 처음 오순절에 모든 신자들에게 임하셨고 이제는 모든 성도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확신이란 말씀을 전하는 자들의 깊은 확신을 말합니다. 즉 그들은 복음 진리를 확신한 것입니다. 그 확신이 얼마나 컸던지 그들은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전 세계를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날마다 그 말씀의 능력으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의 택하심에 대해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핍박 가운데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또한 그 은혜에 기초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은 그 택하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고난 가운데 불평이 아니라 감사가 나오게 합니다.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사는 것에 삶의 초점을 맞추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선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그리스도를 주로 적극 고백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요구합니다.

넷째로, 본 받은 자들(6-10). 6,7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기쁨으로 도를 받아 사도 바울과 그 동료들, 그리고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온유와 겸손의 본을 자기에게서 배우라고 하셨습니다(마11:29). 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촉구했습니다(고전11:1,빌3:17, 빌4:9). 데살로니가의 새 신자들은 바울에게서 제자도에 관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들이 배운 것을 따라 본을 보이며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신자들이 자기 지도자들의 믿음을 본받기를 원했습니다(히13:7). 아마 그들의 지도자들은 본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통해서가 아니라 본을 보여 양들을 인도하라고 가르쳤습니다(벧전 5:3). 그런데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축복의 때나 일이 잘 풀릴 때가 아니라 많은 환란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지도자와 주를 본받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환란의 때에 그들은 주님께 신실했으며 형제들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열심히 전하는 복음의 투사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환란을 당할 때 ‘왜 하필 접니까?’ 라고 묻는 대신에 ‘왜 제가 아닙니까?’ 라고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핍박은 받는 자들은 복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마5:10-12). 성도들은 복과 함께 고난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요15:20, 행5:41, 롬8:17, 고후1:3-7, 고후 4:7-12, 엡3:13, 빌1:29, 딤후 1:12, 딤후2:10, 딤후 3:11, 딤후 4:5, 히10:32-34, 약1:2, 벧전1:6-7, 벧전2:21, 벧전4:1,13, 16, 계2:10).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을 때 한 가지 뜻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우상의 제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른 사람보다 열 배나 뛰어난 지혜와 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가 너무 뛰어나므로 다리오 왕 때에는 총리들과 방백들에게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그가 하루 세번씩 기도함으로 법을 어기고 사자 굴에서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중심을 지켰을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모든 나라에 증거하고 자신도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인도네시아에서 다리를 다쳤습니다. 그런데 그 몸으로 유럽 수양회와 CIS 수양회를 섬기셨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그 분의 상처를 보고 한 의사 목자님이 상처가 깊으니 치료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2시간씩 서서 말씀을 인도할 뿐 아니라 모든 모임에 참석하여 기도로 섬기셨습니다. 그의 깊은 상처를 본 의사 목자님은 못 박힌 예수님의 상처를 보는 것 같아 은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마더 배리 선교사님은 시카고에 돌아가서 치료를 받고 다시 인도 수양회에 참석하여 섬기고 계십니다.

 우리는 지도자를 따라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만든 본에 책임을 져야합니다. 자신의 생존에만 염두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본을 따를 것이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리라고 고백했다면 그들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고 성숙하는 것을 더 쉽게 해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를 따르려고 하는 이들이 혼란스서워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항상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완전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혹 실수했을 때 그런 실수를 어떻게 바로 잡으며 예수님을 배워 나가는지도 중요합니다. 한마디로 계속해서 예수님과 믿음의 선배들을 본받는 가운데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 집니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바울과 주를 본받는 삶을 살았을 때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부터 마게노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져 나갔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이 세상을 행해서 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어 그 소문이 퍼져 나가는 것으로 인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그들은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많은 헬라의 신들이 산다고 하는 올림푸스 산에서 80.5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많은 거짓 신들을 떠나서 산다는 것이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살면서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기꺼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예수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렸습니다.

 이를 볼 때 신앙 연륜이 짧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어떻게 좋은 믿음의 본이 되는 교회가 되었는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입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과 같은 훌륭한 영적 지도자가 있었을 때 그렇게 빨리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곳이 여러 곳이었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는 순수하게 말씀을 받고 그대로 살며 증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를 볼 때 본을 만드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본이 될 만한 목자가 있을 때 제자 양성도 잘 됩니다. 전통이 문제가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수용 능력과 함께 목자님들을 본받으려고 애쓰는 가운데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믿음의 본이 될 만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과 사명을 섬기기 위해서 좋은 보직을 마다하고 양들을 섬기시는 분, 가난하지만 캠퍼스 제자 양성을 위해서 마음과 시간을 쏟으시는 분, 몇 년씩 순례자 훈련을 감당하시는 분, 매 주일 아침 센터 청소를 하면서 주님을 섬기시는 분 등등 우리 가운데 계신 분들에게서 배우고자만 한다면 얼마든지 배우며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사도 바울이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 곁에 계셔도 배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선배나 동역자들, 또 양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사건들을 통해서 예수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런 가운데 믿음이 좋다고 소문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소문은 쉽게 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가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으로 여러 고난을 인내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과 함께 양떼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삶이 있을 때 우리 교회는 소문날 정도로 성장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본받고 있으며 또 누구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주님과 사도들의 믿음을 본받을 뿐 아니라 후배들과 주위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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