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단9강(9장)하나님의 큰 긍휼을 구한 다니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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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가을 다니엘서 제 9 강
말씀/ 다니엘 9:1-27
요절/ 다니엘 9:18,19
하나님의 큰 긍휼을 구한 다니엘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큰 긍휼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온갖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서 해방 된 뒤에 어떻게 하여야 새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개혁이 없이는 바벨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았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좋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여 내면이 새로와져야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놀라운 죄사함과 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자기 갱신을 이루고자 결심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 원년에 예레미야 서를 읽고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 원년이면 정치적 전환기입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이런 혼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만 절망하거나 술을 먹고 현실을 비판하거나 반역을 모의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가 일국의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을 텐데 이런 때에 성경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때 정치적 혼란, 반역과 배반, 살상과 파괴 등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의 계시가 그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다니엘은 세상의 상황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새 왕이 들어섰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하였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까지 성경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취직시험, 자격증 시험, 수능 고사 등등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기쁨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않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시1:3). 반대로 억지로 성경을 공부하는 자들은 다 악인입니다. 그들은 겨와 같습니다.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시1:4,5).
다니엘은 앞으로 3년 후면 이스라엘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담긴 예레미야 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렘25:11b).”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이사야 40:1,2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여 그곳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70년 동안 이방 제국에서의 노예 생활은 결코 짧은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을 겪으면서 당한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길다고 생각하는데 70년은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다니엘은 조국이 비극적 상황에 처한 때에 그의 대부분의 인생을 이방 땅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해방의 예언 앞에 그의 기쁨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기쁜 나머지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해방은 우리 민족의 환희이며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해방의 소식을 듣고서 너무 기쁜 나머지 엉엉 울어 버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주민들도 해방의 기쁨과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며칠씩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다니엘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 큰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킨다고 해도 내면이 변화되지 않으면 해방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해방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데 그는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죄를 회개했습니다(4-1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인간은 악을 구체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들이 범한 죄악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범죄하였다는 것은 바른 데서 길을 잃고 헤매 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성공을 위한 투쟁은 있었지만 성숙을 위한 몸부림을 잃어버렸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성공해야 된다는 것이 주된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복을 받자 포만감에 빠지고 안일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공해야 한다는 말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위한 기도, 성숙을 위한 투쟁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행악하였습니다. 행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항하며 반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후배가 선배를 존경하지 않고 선배는 후배에게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진정한 권위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 권위를 회복할 것입니까? 어떻게 순종 훈련을 시킬 것입니까? 어떻게 야성적인 영성을 회복할 것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훈련하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심령에서 세력을 얻기 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 제자 양성에 대한 깊은 불신의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새롭게 학생 제자 양성을 할 수 있는가 회의함으로 전도를 하지만 열정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봄학기에는 전도를 좀 했지만 가을 학기 들어서 전도에 거의 시간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임 사역자인 내가 제자 양성을 하지 못하면 평신도목자님들을 어떻게 섬기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생각하니 참으로 절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목자가 없어 방황하는 캠퍼스 지성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잃어 버리고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영적 장군들인 평신도 목자님들을 배우고 또 목자님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전도하는 가운데 학생 제자 양성 역사를 새롭게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는 일용할 양식을 깊이 먹지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먹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로서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더욱 죄에 민감하게 싸우고 거룩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죄에 무딘 자이기 때문에 목자들의 영적인 문제를 예리하게 돕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학생 제자 양성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고 이 일에 더욱 충성하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니엘은 백성들이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않은 죄를 회개했습니다(13,14). 13절을 볼 때 그들에게 임한 이 모든 재앙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된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질 복과 불순종할 때 받게 될 저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무엇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무지로 인해서 징계를 받고 결국은 짐승같이 되어서 도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잠12:1절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여호와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어떤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 할 수 있고 그 정신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과 함께 자유로운 사고를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역사 창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를 깊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주의 분노가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7, 16,17). 7절을 보면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예증이 하는 바와 같다는 것입니다. 수욕이란 부끄럽고 욕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부끄러움을 입었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지켜 보셨다가 적당한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재앙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하여 듣지 않다가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치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떠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의 분노가 떠나게 해 달라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심령을 찢으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종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주십니다. 주님이시여, 황폐된 모임에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비추어 주시옵소서.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18,19). 18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그는 자신이나 백성들의 의를 바라볼 때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의나 업적이나 선행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64: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는 무게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주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주장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번 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고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산 것을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유일한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에 호소해야 합니다. 환란의 때에 먼저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하고 회개한 다음에는 자기의 의나 불의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 잘못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회개했다는 의로 구원 받고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것은 기본이고 회개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깨닫고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다니엘은 집요하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의 통곡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다니엘은 간절하고도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모세나 바울이 그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한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다니엘의 심정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켜 주시고 학생 제자 양성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니엘은 자기 불의나 자책감에 빠지지 않고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자신들을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소를 회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는데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때 자기 문제나 양들의 문제에 매여서 그 문제만 해결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심령이 막히고 실족하게 됩니다.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금방 자족해 버리거나 교만에 빠지거나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서 나의 문제 해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는 데서 자라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비전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다니엘이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와서 기도에 응답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의 이 기도를 ‘중단된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기도하는 중에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령이 이제야 도착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왔다는 것은 지칠 정도로 빨리 날아왔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저녁 제사를 드릴 때쯤이면 오후 3,4시 경입니다. 그때가 다니엘의 저녁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는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히스기야도 38세 되었을 때에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식도 낳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왕하 20: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방왔던 이사야가 성읍의 중간을 지나가기도 전에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하시고 수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며 한 이상을 깨달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날 메시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심령을 불태울 수 있는 비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70이레란 70의 7들이라는 뜻인데 7들이라는 단어가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이레는 하나의 단위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하신 어떤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허물이 마치게 됩니다. 허물이라는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라는 사상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죄를 막아버리는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또한 죄가 끝나게 됩니다. 즉 죄를 치워버리시며 죄의 종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악이 영속됩니다. 이는 무죄를 선언하신다는 것이요 죄악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화목제가 드려져서 죄가 속량되거나 죄가 용서 받고 사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죄악을 위하여 화목을 이룰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히9:26)”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사로 성취됩니다. 그 결과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에게 오는 의의 선언 혹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르게 되는’ 복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롬3:24,25). 이러한 모든 일들은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62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형벌적인 죽음, 극렬한 죽음을 죽으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 아무 것도 가지신 것이 없었고 오직 나와 여러분들과 모든 사람들의 죄악들만 가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후에 로마 군인들과 디도 베스파시안이 와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고 끝까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차 많은 사람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언약을 굳게 정하십니다. 우리는 70이레가 언제 끝에 이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가져다 주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응답으로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괴로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 역사를 볼 수있을 때 까지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응답 받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금식하며 기도를 간절히 하고자 결심을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 의가 없어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절하고도 필사적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새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익대와 이 나라와 전 세계를 위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계 만민을 구속하시기까지 그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다니엘 9:1-27
요절/ 다니엘 9:18,19
하나님의 큰 긍휼을 구한 다니엘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오늘 말씀은 다니엘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큰 긍휼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 범죄하여 온갖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는 자기 백성이 바벨론에서 해방 된 뒤에 어떻게 하여야 새로운 나라를 이룰 수 있을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개혁이 없이는 바벨론에서 해방된다는 것이 무의미함을 알았습니다. 바벨론의 포로 생활이 좋은 열매를 맺어서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죄를 철저히 깨닫고 회개하여 내면이 새로와져야했습니다. 그는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도의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놀라운 죄사함과 의의 역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자기 갱신을 이루고자 결심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 원년에 예레미야 서를 읽고 바벨론 포로 생활이 70년 만에 마치리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리오 왕 원년이면 정치적 전환기입니다. 이때는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불안합니다. 이런 혼란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다만 절망하거나 술을 먹고 현실을 비판하거나 반역을 모의 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앉아서 성경 공부를 하였습니다. 그가 일국의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을 텐데 이런 때에 성경 공부를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그때 정치적 혼란, 반역과 배반, 살상과 파괴 등의 모습은 그의 마음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점점 하나님의 계시가 그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다니엘은 세상의 상황에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새 왕이 들어섰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성경을 공부하였고 하나님의 계시가 임할 때 까지 성경을 묵상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취직시험, 자격증 시험, 수능 고사 등등 공부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니엘을 통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성경을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기쁨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마르지 않으며 그 행사가 다 형통하게 됩니다(시1:3). 반대로 억지로 성경을 공부하는 자들은 다 악인입니다. 그들은 겨와 같습니다. 그들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합니다(시1:4,5).
다니엘은 앞으로 3년 후면 이스라엘이 해방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담긴 예레미야 서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이 나라들은 칠십년 동안 바벨론 왕을 섬기리라(렘25:11b).”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는 기쁨을 이사야 40:1,2절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여 그곳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로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70년 동안 이방 제국에서의 노예 생활은 결코 짧은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36년을 겪으면서 당한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길다고 생각하는데 70년은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다니엘은 조국이 비극적 상황에 처한 때에 그의 대부분의 인생을 이방 땅에서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해방의 예언 앞에 그의 기쁨은 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해방되었을 때 그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고 기쁜 나머지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해방은 우리 민족의 환희이며 새로운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에서 해방의 소식을 듣고서 너무 기쁜 나머지 엉엉 울어 버렸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주민들도 해방의 기쁨과 환희를 이기지 못하여 며칠씩 만세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무엇을 하였습니까? 다니엘은 어디에도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족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러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와 큰 긍휼을 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킨다고 해도 내면이 변화되지 않으면 해방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그들은 해방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에 대해서 징계하시는데 그는 회개의 열매를 맺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금식하며 기도하고자 결심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무슨 기도를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죄를 회개했습니다(4-12).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인간은 악을 구체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그들이 범한 죄악이 무엇입니까? 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미 범죄하여 패역하며 행악하며 반역하여 주의 법도와 규례를 떠났사오며” 범죄하였다는 것은 바른 데서 길을 잃고 헤매 왔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대신에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에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는 풍요와 쾌락의 신이었습니다.
패역하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고 불순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성공을 위한 투쟁은 있었지만 성숙을 위한 몸부림을 잃어버렸습니다. 경제 성장과 함께 성공해야 된다는 것이 주된 기도 제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복을 받자 포만감에 빠지고 안일해졌습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성공해야 한다는 말보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화를 위한 기도, 성숙을 위한 투쟁이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행악하였습니다. 행악하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여 반항하며 반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는 권위에 대한 도전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권위가 무너지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후배가 선배를 존경하지 않고 선배는 후배에게 신뢰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진정한 권위를 세우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영적 권위를 회복할 것입니까? 어떻게 순종 훈련을 시킬 것입니까? 어떻게 야성적인 영성을 회복할 것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과 훈련하는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각자의 심령에서 세력을 얻기 까지 공부해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 앞에 제자 양성에 대한 깊은 불신의 죄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내가 새롭게 학생 제자 양성을 할 수 있는가 회의함으로 전도를 하지만 열정과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봄학기에는 전도를 좀 했지만 가을 학기 들어서 전도에 거의 시간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임 사역자인 내가 제자 양성을 하지 못하면 평신도목자님들을 어떻게 섬기며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가 생각하니 참으로 절망이 되었습니다. 또한 목자가 없어 방황하는 캠퍼스 지성인들에 대한 목자의 심정을 잃어 버리고 자기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표현은 하나님의 양무리들을 돌보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영적 장군들인 평신도 목자님들을 배우고 또 목자님들과 함께 캠퍼스에서 전도하는 가운데 학생 제자 양성 역사를 새롭게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저는 일용할 양식을 깊이 먹지 못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먹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목자로서 말씀 앞에 철저히 회개하고 더욱 죄에 민감하게 싸우고 거룩해 지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죄에 무딘 자이기 때문에 목자들의 영적인 문제를 예리하게 돕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셔서 학생 제자 양성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시고 이 일에 더욱 충성하게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다니엘은 백성들이 죄악을 떠나고 주의 진리를 깨닫도록 하나님 여호와의 은총을 간구치 않은 죄를 회개했습니다(13,14). 13절을 볼 때 그들에게 임한 이 모든 재앙은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된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 28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주어질 복과 불순종할 때 받게 될 저주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방인의 포로가 되고 수치를 당하게 된 것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도 무엇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계속되는 무지로 인해서 징계를 받고 결국은 짐승같이 되어서 도살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잠12:1절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나니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받고 있는지 마음 속 깊이 깨달을 수 있도록 여호와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 철저한 자기 부인이 있어야 어떤 문제를 냉정하게 판단 할 수 있고 그 정신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기반과 함께 자유로운 사고를 할 때 우리는 새로운 역사 창조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자기 문제를 깊이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셋째, 주의 분노가 주의 성 예루살렘, 주의 거룩한 산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7, 16,17). 7절을 보면 수욕은 우리 얼굴로 돌아옴이 오늘날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현재의 상황이 예증이 하는 바와 같다는 것입니다. 수욕이란 부끄럽고 욕된 것입니다.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거민과 이스라엘이 가까운 데 있는 자나 먼데 있는 자가 다 주께서 쫓아 보내신 각국에서 부끄러움을 입었습니다.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재앙을 간직하여 두셨다가 우리에게 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 지켜 보셨다가 적당한 때에 자기 백성들에게 재앙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경고는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만하여 듣지 않다가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수치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떠나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주의 분노가 떠나게 해 달라고 금식하며 베옷을 입으며 재를 머리에 뒤집어 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심령을 찢으며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통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회개하는 종들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주의 얼굴 빛을 주의 황폐한 성소에 비추어 주십니다. 주님이시여, 황폐된 모임에 주님의 은혜를 다시 한번 비추어 주시옵소서.
넷째, 그는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시도록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18,19). 18절을 보십시오. “나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며 눈을 떠서 우리의 황폐된 상황과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성을 보옵소서 우리가 주의 앞에 간구하옵는 것은 우리의 의를 의지하여 하는 것이 아니요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함이오니” 그는 자신이나 백성들의 의를 바라볼 때 소망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의나 업적이나 선행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사64: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는 무게가 나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오직 주의 큰 긍휼을 의지하여 주 앞에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기 의를 주장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두번 씩 금식하며 십일조를 꼬박 꼬박 내고 죄를 짓지 않고 거룩하게 산 것을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세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유일한 소망의 원천이 되시는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에 호소해야 합니다. 환란의 때에 먼저 회개의 투쟁을 해야 하고 회개한 다음에는 자기의 의나 불의를 내세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 잘못이냐를 따지기 시작하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또 우리가 회개했다는 의로 구원 받고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는 것은 기본이고 회개하는 것도 사실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우리는 불쌍히 여기심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깨닫고 이렇게 증거합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다.
다니엘은 집요하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탄원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의 통곡 소리를 듣는 듯합니다. 다니엘은 간절하고도 필사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모세나 바울이 그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고 기도한 것과 같았습니다. 우리가 다 함께 다니엘의 심정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합시다.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들으시고 행하소서 지체치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우리의 영성을 회복시켜 주시고 학생 제자 양성을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다니엘은 자기 불의나 자책감에 빠지지 않고 회개기도를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의지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대한 큰 믿음을 가지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를 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자신들을 죄를 용서해 주시고 성소를 회복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다니엘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명성이 땅에 떨어진 것이 가슴 아팠습니다. 그는 죄를 회개하는데 머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을 때 자기 문제나 양들의 문제에 매여서 그 문제만 해결되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심령이 막히고 실족하게 됩니다. 반대로 문제가 해결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금방 자족해 버리거나 교만에 빠지거나 자기 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다니엘을 통해서 나의 문제 해결보다 하나님 아버지를 더 사랑하는 데서 자라나야 하겠습니다. 지금은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달라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비전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에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해 주셨습니까? 다니엘이 자신의 죄와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간구할 때에 천사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와서 기도에 응답해 주었습니다. 다니엘의 이 기도를 ‘중단된 기도’라고 부르는 것은 기도하는 중에 기도가 응답되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면 다니엘이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하나님의 명령이 내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전령이 이제야 도착하였습니다.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왔다는 것은 지칠 정도로 빨리 날아왔다는 뜻입니다. 다니엘이 저녁 제사를 드릴 때쯤이면 오후 3,4시 경입니다. 그때가 다니엘의 저녁 기도 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통곡하는 기도에 속히 응답해 주십니다. 히스기야도 38세 되었을 때에 불치의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자식도 낳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통곡하며 기도하였습니다(왕하 20:2).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심방왔던 이사야가 성읍의 중간을 지나가기도 전에 기도에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병을 낫게하시고 수명을 15년 더 연장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의 통곡하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시며 한 이상을 깨달아 알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나타날 메시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정한 소망을 주십니다. 우리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 심령을 불태울 수 있는 비전을 주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 부음을 받으리라.” 70이레란 70의 7들이라는 뜻인데 7들이라는 단어가 독특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70이레는 하나의 단위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속적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정하신 어떤 기간을 말합니다. 그 기간 내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먼저 허물이 마치게 됩니다. 허물이라는 단어는 배교와 반역이라는 사상과 결합되어 있습니다. 죄를 막아버리는 사역은 오직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말미암아 허물을 덮으셨습니다. 또한 죄가 끝나게 됩니다. 즉 죄를 치워버리시며 죄의 종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악이 영속됩니다. 이는 무죄를 선언하신다는 것이요 죄악을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화목제가 드려져서 죄가 속량되거나 죄가 용서 받고 사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죄악을 위하여 화목을 이룰 것입니다. 이러한 화목제는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신 (히9:26)”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희생 제사로 성취됩니다. 그 결과 영원한 의가 드러나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에게 오는 의의 선언 혹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우리가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바르게 되는’ 복된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롬3:24,25). 이러한 모든 일들은 메시야가 기름부음을 받으심으로 이루어집니다.
62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형벌적인 죽음, 극렬한 죽음을 죽으실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으실 때 아무 것도 가지신 것이 없었고 오직 나와 여러분들과 모든 사람들의 죄악들만 가지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난 후에 로마 군인들과 디도 베스파시안이 와서 예루살렘과 그 성전을 파괴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끝까지 전쟁이 있을 것이고 끝까지 황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장차 많은 사람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언약을 굳게 정하십니다. 우리는 70이레가 언제 끝에 이를는지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을 가져다 주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요 왕이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다니엘은 기도의 응답으로 메시야를 통해서 이루어질 놀라운 구속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 괴로운 세상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배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미래 역사를 볼 수있을 때 까지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응답 받는 기도를 하려면 먼저 금식하며 기도를 간절히 하고자 결심을 해야 합니다.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 의가 없어져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분명한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절하고도 필사적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내면이 새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홍익대와 이 나라와 전 세계를 위한 왕 같은 제사장으로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세계 만민을 구속하시기까지 그 역사에 귀히 쓰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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