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단4강(4장)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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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가을 다니엘서 제 4 강
말씀 / 다니엘 4:1-37
요절 / 다니엘 4:34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오늘은 한 사람이 회심하기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한 사람이 회심하기까지 하나님은 여러 번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서 그 뜻을 해석해주셨습니다. 그것도 안되자 칠년 동안 짐승같이 사는 훈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 권세가 영원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 변화될 때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변화되기까지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이 시간 느부갓네살 한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회심하게 되는 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은 서론으로서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을 제국의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보낸 서신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는 바벨론의 신들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크고 그는 기사를 행하기에 능하십니다. 또 그 나라는 영원하고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고 노래했습니다. 권병이란 ‘권력으로 사람을 좌우할 수 있는 신분이나 그 힘’을 말합니다. 이방 제국의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것과 같은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는 로마 시대의 핍박을 끝내고 국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서 기독교가 세계화 된 것과도 같이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느부갓네살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이방 세계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역사가 힘있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까?
첫째, 꿈을 꾸고 번민하는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4-18)
4절을 보십시오.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이 말씀을 볼 때 느부갓네살 왕이 편하고 평강할 때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편하게 되면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게으름은 죄의 온상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에게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막둥이로 태어나서 목동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부모님께 순종했습니다. 골리앗을 때려 눕힘으로서 이스라엘 여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무엇을 하든지 승리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고 왕궁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봄이 돌아오자 모든 병사들은 전쟁터로 나갔는데 그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후 간음죄를 범했고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자만심이나 안일은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악과 부패의 온상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번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벧전1:24).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지혜롭다 했으나 우준한 자가 되었습니다(롬1:22). 그가 교만하여졌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약4:6). 이스라엘의 4대 왕인 르호보암이 교만하여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열 족속을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여로보암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고, 벧엘과 단에서 예배를 드리게했습니다(왕상 12:29). 이것이 그 집이 몰락하고 이 지상에서 멸절하게 된 여러보암의 죄입니다(왕상 13:33,34). 그는 선지자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왕상 13:1-3). 열왕기서 저자는 악한 왕들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 15:34).”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합 왕은 매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공처가였습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나봇의 포도원을 부러워했고 그 밭을 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포도원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왕상 21:1-3). 그러자 아합은 침상에 드러누워버렸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줄 때 까지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왕상 21:4-6).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에게 임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했습니다. 굵은 베에 누우며, 걸음도 천천히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합 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겸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바벨론 궁을 거닐면서 교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29)” 그는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실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에디오피아로부터 인도까지 120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의 꿈은 그의 영광이 어떠했는지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의 한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높이가 심히 높았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습니다. 땅 끝에서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잎사귀는 심히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했습니다. 바벨론은 땅이 좋아서 파종한 씨의 200-300배의 수확을 했다고 합니다. 또 지금 석유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볼 때 고대에는 그곳이 얼마나 숲이 우거졌으며 비옥한 땅이었던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래는 들짐승들이 안식처로 삼았으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으며,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14-17).”
느부갓네살 왕이 자만심에 빠져 그 마음에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는 인간의 마음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변해버렸습니다(16). 하나님은 교만하여 영적인 소경이 된 그를 벌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둘째, 느부갓네살 왕의 목자 다니엘(19-27)
왕의 꿈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은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번민했습니다. 다니엘은 원수나라의 왕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연민을 느꼈습니다. 다니엘은 충심으로 말했습니다.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19).”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가 한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려 하셨습니다. 그가 받아야 할 심판은 짐승 같은 인간이 되어 7년 동안 그렇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인이었고 전쟁 포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니이다(24b).”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짐승 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전하여져서 하나님을 알도록 크신 긍휼로서 인간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7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하심으로 그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라.”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회개할 때 그의 권세와 왕권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회개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방향까지도 제시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 다니엘의 모습을보게 됩니다. 다니엘은 영적인 실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왕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교만을 회개한 다음에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발굴된 유적들을 통해서 바벨론 문화가 다른 어떤 문화권보다 영광스러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왕궁과 왕국을 짓기 위해서 많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아와서 건축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충당했습니다. 또 병든 병아리와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은 수십만명이라도 그 수에 관계없이 다 죽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큰 죄악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우상 숭배 후에 신을 위한다는 이름 하에 음행을 행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요한 계시록에는 바벨론을 음녀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착취를 당하였습니다. 왕은 통치자로서 가난한 자들, 약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왕의 영광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이 메시지는 포악한 왕에게 아주 무례한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왕의 평안함이 장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느부갓네살 왕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이 그 어려운 간언을 어떻게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죄악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말씀을 전하는 목자를 신뢰하고 그 말을 듣습니다. 양들이 죄를 책망하는 목자의 말을 들을 때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했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요 평강을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책망 앞에서 근심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목자가 두려워서 양들의 죄를 책망하지 못하면 양이 병들게 되고 영적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자식을 때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식을 미워하는 아비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 욕을 다 당하게 됩니다. 양을 사랑하는 자는 충실하게 훈련을 시키고 징계를 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또한 왕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우리가 충만한 사랑을 덧입고 충실히 훈련하고 훈련을 받는 모임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훈련과 그 결과(28-37)
왕은 다니엘로부터 회개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을 때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왕이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궁은 공중 정원으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바벨론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9).” 느부갓네살 왕의 말에 ‘내가’, ‘나의’, ‘내’라는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자기 중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자기 중심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두 자기 큰 계명은 첫째로 우리가 온 생명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그 순서를 뒤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첫번째로 놓고는 사실상 우리 자신의 자율성을 선포하며 우리 이웃을 그 다음에 놓고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는 뒷부분 어딘가에 놓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기’라는 말의 합성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지를 보십시오. 자기 사랑, 자기 도취, 자기 주장, 자기 선전, 자기 만족, 자화 자찬, 자기연민, 잘난 체함(self-importance), 이기주의, 자기 의, 자학, 자기 비하, 자살, 자신만만, 자위, 자의식, 자조, 자충수, 자가 당착, 자격지심, 자고함, 자괴, 자기 과시, 자기 본위, 자기 중심, 자행자지, 자폐증, 자포자기, 자기고집, 자칭 등 경멸적인 단어만 해도 30개가 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바벨론 왕국은 왕의 업적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왕은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왕국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짐승 같은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단지 사악하고 잔인한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왕의 자만에 찬 말이 그 입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31). 왕은 백성들로부터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하늘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습니다. 그가 짐승 훈련을 받았을 때 손톱은 창녀처럼 길었으며 목소리는 들개와 같았습니다. 이 모습은 느부갓네살 왕의 속 사람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또 이 짐승 같은 생활은 그의 사치스러운 왕궁 생활에 반비례하여 그 만큼 더 불행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항상 무제한적인 자유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서 몰아냅니다. 타락한 인간은 성경 공부하는 것과 영적인 훈련받는 것을 가장 미워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 짐승 같은 인간들은 많은 짐승 같은 파티를 벌이며 세상 재미를 즐기려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사실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 갑니다. 우리는 한 고아원의 95% 이상의 원아들이 자기 부모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버린 것입니다. 또 한국에서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낙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현행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낙태는 기형 임신, 강간에 의한 임신, 산모의 건강이 위협 받을 경우의 임신 등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고 이러한 예외 규정일지라도 임신 28주 이상이면 낙태할 수 없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시행되고 있는 낙태는 살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말하기도 소름끼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볼 때 이런 모습들은 짐승 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후 7년이 지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짐승 같은 인간이 된 느부갓네살 왕이 그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 말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감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의 정신병은 치료되었습니다. 그의 명예와 명성이 회복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그를 영접했고 그 왕국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얻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심을 고백하였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우리는 지난 40년간 선교사 파송 1위, 제 1의 제자 양성 학생 선교 단체, 말씀이 있는 곳 등등 은근히 자랑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적 성장이 둔화되고 학생 양들을 얻는 것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성공지상 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우리의 업적에 대한 자만심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도록 역사하시고 둘로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롭게 개척 정신, 창조정신을 갖고 학생 제자 양성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과 영적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한 명에 대한 긍휼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한 사람의 회심으로 인한 변화와 성장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고 훈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일어서려면 각자의 단호한 결단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다니엘 4:1-37
요절 / 다니엘 4:34
느부갓네살 왕의 회심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자를 찬양하고 존경하였노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로 이르리로다.”
오늘은 한 사람이 회심하기까지 일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한 사람이 회심하기까지 하나님은 여러 번 꿈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선지자 다니엘을 통해서 그 뜻을 해석해주셨습니다. 그것도 안되자 칠년 동안 짐승같이 사는 훈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세상 나라를 다스리시며 그 권세가 영원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 한 사람이 변화될 때 이방인들 가운데 하나님을 알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큰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한 사람이 변화되기까지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이 시간 느부갓네살 한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회심하게 되는 지 살펴 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은 서론으로서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을 제국의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보낸 서신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천하에 거하는 백성들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에게 조서하노라 원하노니 너희에게 많은 평강이 있을지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이적과 기사를 내가 알게 하기를 즐겨하노라 크도다 그 이적이여, 능하도다 그 기사여,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르리로다.” 그는 바벨론의 신들보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간증하는 것이 즐거웠습니다. 하나님의 이적은 크고 그는 기사를 행하기에 능하십니다. 또 그 나라는 영원하고 그 권병은 대대에 이른다고 노래했습니다. 권병이란 ‘권력으로 사람을 좌우할 수 있는 신분이나 그 힘’을 말합니다. 이방 제국의 왕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이는 콘스탄틴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공포한 것과 같은 역사입니다. 이를 통해서 기독교는 로마 시대의 핍박을 끝내고 국교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의 회심을 통해서 기독교가 세계화 된 것과도 같이 변화될 것 같지 않은 느부갓네살 한 사람의 변화를 통해서 이방 세계에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역사가 힘있게 일어났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이런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까?
첫째, 꿈을 꾸고 번민하는 교만한 느부갓네살 왕(4-18)
4절을 보십시오. “나 느부갓네살이 내 집에 편히 있으며 내 궁에서 평강할 때에” 이 말씀을 볼 때 느부갓네살 왕이 편하고 평강할 때에 꿈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경고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이 편하게 되면 죄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게으름은 죄의 온상입니다. 우리는 다윗 왕에게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막둥이로 태어나서 목동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부모님께 순종했습니다. 골리앗을 때려 눕힘으로서 이스라엘 여인들 사이에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사랑했을 때 무엇을 하든지 승리를 얻었으며, 마침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여 이스라엘 왕이 되게 하셨고 왕궁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만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봄이 돌아오자 모든 병사들은 전쟁터로 나갔는데 그는 저녁때가 되어서야 침상에서 일어났습니다. 그 후 간음죄를 범했고 살인죄를 지었습니다. 자만심이나 안일은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모든 악과 부패의 온상입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을 번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우주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는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벧전1:24). 그가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을 때 스스로 지혜롭다 했으나 우준한 자가 되었습니다(롬1:22). 그가 교만하여졌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그를 축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겸손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약4:6). 이스라엘의 4대 왕인 르호보암이 교만하여졌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열 족속을 찢어서 여로보암에게 주셨습니다. 여로보암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라 아주 정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벧엘과 단에 두고 북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게 하고, 벧엘과 단에서 예배를 드리게했습니다(왕상 12:29). 이것이 그 집이 몰락하고 이 지상에서 멸절하게 된 여러보암의 죄입니다(왕상 13:33,34). 그는 선지자로부터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길을 바꾸지 않았습니다(왕상 13:1-3). 열왕기서 저자는 악한 왕들의 생애를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습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왕상 15:34).”
그러나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합 왕은 매우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또 공처가였습니다. 그는 왕이면서도 나봇의 포도원을 부러워했고 그 밭을 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나봇은 포도원을 팔기를 거절했습니다(왕상 21:1-3). 그러자 아합은 침상에 드러누워버렸습니다. 그의 아내 이세벨이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줄 때 까지 울면서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왕상 21:4-6). 그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러나 재앙이 그에게 임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했습니다. 굵은 베에 누우며, 걸음도 천천히 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합 왕은 인류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겸비하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꾸고 공포에 떨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바벨론 궁을 거닐면서 교만한 말을 하였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29)” 그는 자기 영광을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실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에디오피아로부터 인도까지 120도를 정복하고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나라를 넘치게 축복하셨습니다. 그의 꿈은 그의 영광이 어떠했는지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땅의 한 중앙에 한 나무가 서 있었습니다. 그 높이가 심히 높았습니다. 그 나무가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그 높이는 하늘에 닿았습니다. 땅 끝에서도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 잎사귀는 심히 아름답고 그 열매는 많아서 만민의 식물이 될 만했습니다. 바벨론은 땅이 좋아서 파종한 씨의 200-300배의 수확을 했다고 합니다. 또 지금 석유 매장량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것을 볼 때 고대에는 그곳이 얼마나 숲이 우거졌으며 비옥한 땅이었던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래는 들짐승들이 안식처로 삼았으며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었으며, 무릇 혈기 있는 자가 거기서 식물을 얻었습니다. 꿈 속에서 그는 한 순찰자, 한 거룩한 자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 나무를 베고 그 가지를 찍고 그 잎사귀를 떨고 그 열매를 헤치고 짐승들로 그 아래서 떠나게 하고 새들을 그 가지에서 쫓아내라 그러나 그 뿌리의 그루터기를 땅에 남겨 두고 철과 놋줄로 동이고 그것으로 들청초 가운데 있게 하라 그것이 하늘 이슬에 젖고 땅의 풀 가운데서 짐승으로 더불어 그 분량을 같이 하리라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인생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나리라 이는 순찰자들의 명령대로요 거룩한 자들의 말대로니 곧 인생으로 지극히 높으신 자가 인간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며 또 지극히 천한 자로 그 위에 세우시는 줄을 알게 하려 함이니라(14-17).”
느부갓네살 왕이 자만심에 빠져 그 마음에 하나님을 버렸을 때 그는 인간의 마음을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 속에 있는 사람의 마음이 짐승의 마음으로 변해버렸습니다(16). 하나님은 교만하여 영적인 소경이 된 그를 벌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 역사의 절대 주권자이심을 알게 하셨습니다.
둘째, 느부갓네살 왕의 목자 다니엘(19-27)
왕의 꿈 이야기를 들은 다니엘은 얼마 동안 놀라 벙벙하며 번민했습니다. 다니엘은 원수나라의 왕이 심판을 받는 것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연민을 느꼈습니다. 다니엘은 충심으로 말했습니다. “내 주여 그 꿈은 왕을 미워하는 자에게 응하기를 원하며 그 해석은 왕의 대적에게 응하기를 원하나이다(19).” “왕이여, 이 나무는 곧 왕이시라. 이는 왕이 자라서 견고하여지고 창대하사 하늘에 닿으시며 권세는 땅 끝까지 미치심이니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가 한 제국의 황제가 될 것을 확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려 하셨습니다. 그가 받아야 할 심판은 짐승 같은 인간이 되어 7년 동안 그렇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이방인이었고 전쟁 포로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에게 분명히 말했습니다. “왕이여, 지극히 높으신 자의 명정하신 것이 내 주 왕에게 미칠 것이니이다(24b).”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왕이 사람에게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거하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여기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 살면 짐승 같은 인간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온전하여져서 하나님을 알도록 크신 긍휼로서 인간을 도우신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느부갓네살 왕을 7년 동안 철저하게 훈련하심으로 그를 도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십니다. 26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이 그 나무 뿌리의 그루터기를 남겨 두라 하였은즉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줄을 왕이 깨달은 후에야 왕의 나라가 견고하리라.” 하나님은 느부갓네살이 회개할 때 그의 권세와 왕권을 회복시켜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회개하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방향까지도 제시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목자 다니엘의 모습을보게 됩니다. 다니엘은 영적인 실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왕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교만을 회개한 다음에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발굴된 유적들을 통해서 바벨론 문화가 다른 어떤 문화권보다 영광스러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느부갓네살은 그의 왕궁과 왕국을 짓기 위해서 많은 악한 일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들을 침략했습니다. 그들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그는 헤아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로로 사로잡아와서 건축 역사에 필요한 노동력으로 충당했습니다. 또 병든 병아리와 같이 쓸모없는 사람들은 수십만명이라도 그 수에 관계없이 다 죽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큰 죄악입니다. 당시 바벨론은 우상 숭배 후에 신을 위한다는 이름 하에 음행을 행하였습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요한 계시록에는 바벨론을 음녀 바벨론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이 힘있는 자들에게 착취를 당하였습니다. 왕은 통치자로서 가난한 자들, 약자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는 것은 왕의 영광이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라고 합니다. 다니엘은 왕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도록 회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의 사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 이 메시지는 포악한 왕에게 아주 무례한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죄인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 돌아올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왕의 평안함이 장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목숨을 걸고 느부갓네살 왕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니엘이 그 어려운 간언을 어떻게 하는지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양들의 죄악을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죄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말씀을 전하는 목자를 신뢰하고 그 말을 듣습니다. 양들이 죄를 책망하는 목자의 말을 들을 때 근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7:10)”고 했습니다. 말씀 앞에 자기 영혼의 비참한 상태를 발견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것이요 평강을 맛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책망 앞에서 근심하는 사람은 생명을 얻게 됩니다. 목자가 두려워서 양들의 죄를 책망하지 못하면 양이 병들게 되고 영적 성장은 멈추게 됩니다. 자식을 때리지 못하는 사람은 자식을 미워하는 아비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그 욕을 다 당하게 됩니다. 양을 사랑하는 자는 충실하게 훈련을 시키고 징계를 합니다. 다니엘은 왕에게 충성스러운 신하였습니다. 또한 왕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목자였습니다. 우리가 충만한 사랑을 덧입고 충실히 훈련하고 훈련을 받는 모임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하나님의 훈련과 그 결과(28-37)
왕은 다니엘로부터 회개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그는 잠시 근신하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근본적으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회개하지 않을 때 더욱 교만해졌습니다. 열 두 달이 지난 후에 왕이 바벨론 궁 지붕에서 거닐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궁은 공중 정원으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바벨론 시가지를 내려다 보면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39).” 느부갓네살 왕의 말에 ‘내가’, ‘나의’, ‘내’라는 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는 그의 자기 중심성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자기 중심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두 자기 큰 계명은 첫째로 우리가 온 생명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죄는 그 순서를 뒤바꾸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을 첫번째로 놓고는 사실상 우리 자신의 자율성을 선포하며 우리 이웃을 그 다음에 놓고 하나님은 눈에 띄지 않는 뒷부분 어딘가에 놓아 두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기’라는 말의 합성어가 얼마나 풍부하고 다양한지를 보십시오. 자기 사랑, 자기 도취, 자기 주장, 자기 선전, 자기 만족, 자화 자찬, 자기연민, 잘난 체함(self-importance), 이기주의, 자기 의, 자학, 자기 비하, 자살, 자신만만, 자위, 자의식, 자조, 자충수, 자가 당착, 자격지심, 자고함, 자괴, 자기 과시, 자기 본위, 자기 중심, 자행자지, 자폐증, 자포자기, 자기고집, 자칭 등 경멸적인 단어만 해도 30개가 넘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바벨론 왕국은 왕의 업적이 아니었으며 백성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였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왕은 자만에 빠졌습니다. 그는 영광스러운 왕국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짐승 같은 인간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는 단지 사악하고 잔인한 짐승에 불과했습니다. 왕의 자만에 찬 말이 그 입에 있을 때 하늘에서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31). 왕은 백성들로부터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뜯어 먹었습니다. 그의 몸은 하늘 이슬에 젖고, 그의 머리털은 독수리 털과 같았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았습니다. 그가 짐승 훈련을 받았을 때 손톱은 창녀처럼 길었으며 목소리는 들개와 같았습니다. 이 모습은 느부갓네살 왕의 속 사람의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또 이 짐승 같은 생활은 그의 사치스러운 왕궁 생활에 반비례하여 그 만큼 더 불행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은 항상 무제한적인 자유를 갈망하며 하나님을 그들의 삶에서 몰아냅니다. 타락한 인간은 성경 공부하는 것과 영적인 훈련받는 것을 가장 미워합니다.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습니다. 이 짐승 같은 인간들은 많은 짐승 같은 파티를 벌이며 세상 재미를 즐기려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사실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 갑니다. 우리는 한 고아원의 95% 이상의 원아들이 자기 부모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들었습니다.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버린 것입니다. 또 한국에서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낙태가 시행되고 있습니다. 현행 모자보건법에 따르면 낙태는 기형 임신, 강간에 의한 임신, 산모의 건강이 위협 받을 경우의 임신 등으로 엄격히 제한돼 있고 이러한 예외 규정일지라도 임신 28주 이상이면 낙태할 수 없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에 시행되고 있는 낙태는 살인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끔찍한 일들은 말하기도 소름끼칩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볼 때 이런 모습들은 짐승 같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 후 7년이 지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짐승 같은 인간이 된 느부갓네살 왕이 그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이 말은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며 하나님을 바라보았다는 뜻입니다. 그가 하늘을 우러러 보았을 때 총명이 돌아왔습니다. 이에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존경하였습니다.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사에게든지 땅의 거민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누가 감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 할 자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깊이 깨달은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회개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의 정신병은 치료되었습니다. 그의 명예와 명성이 회복되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의 모사들과 관원들이 그를 영접했고 그 왕국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는 영생을얻게 되었으며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벨론 제국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능히 낮추심을 고백하였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우리는 지난 40년간 선교사 파송 1위, 제 1의 제자 양성 학생 선교 단체, 말씀이 있는 곳 등등 은근히 자랑할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영적 성장이 둔화되고 학생 양들을 얻는 것도 어렵게 느껴집니다. 우리는 성공지상 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우리의 업적에 대한 자만심에 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을 회개하도록 역사하시고 둘로 나누셨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 하나님과 역사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새롭게 개척 정신, 창조정신을 갖고 학생 제자 양성에 힘을 써야 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회심과 영적 성장을 위해서 말씀을 가르치고 힘써 사랑해야 합니다. 한 명에 대한 긍휼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한번 한 사람의 회심으로 인한 변화와 성장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전하고 훈련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새롭게 일어서려면 각자의 단호한 결단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믿음으로 나아가 우리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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