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2024년 느5강(11-13장)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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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느헤미야 5강
말씀 | 느헤미야 11장-13장
요절 | 느헤미야 13:30,31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오늘 공부할 말씀은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다시 개혁을 하는 13장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섬기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일년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유대 공동체를 개혁합니다. 또 다시 개혁이 필요한 공동체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 죄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느헤미야의 열정과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찾아보고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백성들의 거주지 재배치. 느헤미야는 백성의 거주지를 재배치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 성전이 있고 성벽도 완성되었으니 축복일 것 같지만 아직 생활의 기반이 되는 중요 시설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침공을 받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약 150년 가까이 폐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막 개발된 도시와 같이 삭막하고 편의 시설이 없어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 지도자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대적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도시 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배와 행정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여기에 배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들은 애정을 가지고 이곳을 지키고 가꾸었습니다. 그들이 제비를 뽑아서 인구를 재배치했지만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이들은 부담을 갖고 억지로 예루살렘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자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10:39). 이런 분위기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제비 뽑힌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기쁨으로 영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둘째, 성벽 봉헌식. 12장은 1차 포로귀환 당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 레위인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사명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대 성전 봉사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1,2세대는 척박한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신앙을 기록함으로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끊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전과 성벽 건축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후손들이 많은 교훈을 받도록 했습니다.
27-30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성벽 봉헌은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클라이맥스 같습니다. 하나님이 성벽을 52일 만에 완성되게 하셨습니다(445년 10월 2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586년에 무너졌다가 445년에 완성했으니 14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완공이 된 것입니다. 성벽 완공 후 율법 낭독과 회개 운동, 언약을 갱신하고 거룩한 예루살렘에 백성들을 살게 한 후 비로소 성벽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성벽은 분리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율법에 기초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에 거주함으로 예루살렘 성이 제기능을 할 수 있어야 진짜 안전하고도 구별된 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벽을 재건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백성들은 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들은 두 개의 성가대를 만들어서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한 떼는 에스라, 한 떼는 느헤미야가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성벽 위를 걸어서 한 곳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 문에서 시작하여 성전 동문에서 만나도록 했습니다. 골짜기 문은 느헤미야가 성벽 공사를 시작하기 전 수행원 몇 사람과 야밤에 순찰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2:12). 행렬의 순서는 레위 찬양대-백성의 지도자-나팔을 든 제사장들-레위 찬양대 순이었습니다(31-36).
그들은 왜 갓 지은 성벽 위로 그 많은 사람들을 올라가서 걷게 했을까요?
첫째로, 성벽이 튼튼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대적들은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하였습니다(4:3). 이것이 거짓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대적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창, 칼, 활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적들이 다 물러갔기 때문에 평화로운 가운데 두 편의 무리들이 성벽 위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벽을 직접 밟아 보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몸소 확인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벽을 돌면서 그들은 지난 시간 대적들의 방해로 어려웠던 시간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심령에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성벽 봉헌식의 핵심은 기쁨, 즐거움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였을까요? 일찍이 성전 지대가 놓였을 때 젊은 세대의 기쁨과 원로 세대의 통곡이 혼재했습니다(스3:11,12). 그러나 성벽 봉헌예배를 드릴 때 오로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일말의 회한이나 슬픔이 없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의 공적 때문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도, 백성들의 수고에 기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갖은 박해와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성벽이 지어졌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무너진 성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치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2:17)”고 동기부여를 했습니다. 이제 그 수치와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언약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성벽 봉헌식을 통해서 그들의 수치가 씻기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자 그들은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있던 날, 느헤미야는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생활이 안 되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흩어지면 성전이 버려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인해서 즐거워합니다(44). 왜 즐거워할까요? 이들을 섬기고 지원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성벽이 완성되어서도 감사하지만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섬김으로써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가 교회답게 잘 돌아갈 때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와 교육과 훈련과 전도와 선교와 봉사와 구제가 잘 이루어지면 모두가 다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역량 있는 행정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집전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500여 년 전에 다윗이 기초하고(대상 22-26장) 솔로몬이 제정한 규례에 따라서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음악은 아삽이 그 일들을 주관했습니다(대상 15:19; 16:4-5, 37).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 노래하고 문 지키는 레위인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고, 레위인들은 그 중에서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습니다(민18:25-32). 그들은 첫 열매와 십일조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섬기겠다고 언약을 갱신했고 그 맹세를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성전 봉사자들을 섬기고 그들의 쓸 것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날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낭독하는데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섞여 살던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분리하였습니다.
셋째, 또 개혁. 느헤미야가 총독 일을 마치고 일년 후에 돌아와 보니 성전이 개판이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아가 연락이 있었습니다. 도비야는 집요하게 성벽공사를 방해했던 사람이고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전부터 유다의 귀족들과 결혼으로 맺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시대에 사역했던 대제사장입니다(12:12). 대제사장은 온 성전을 대표하는 자로 성전 창고의 사용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비야에게 성전 방을 내주었습니다(5). 이방인에게 성전 방을 제공한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에게 방을 내 준 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 10절을 보면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십일조와 헌물에 의지해 사는 데, 그것이 끊기니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사람들이 성전에 머무를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성전은 버려지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썰렁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화가 나서 도비야의 가구들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방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물건들과 제사 기물들을 다시 그 방에 들여 넣도록 했습니다.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성전을 버린 민장들의 행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레위인들을 불러다가 다시 제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였습니다. 그 동안에는 들이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갖다 준다 한들 남용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도 비어 있고 신뢰할만한 지도자가 다시 온 것을 보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곳간에 들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충직하다고 인정받는 셀레먀, 사독, 브다야, 삭굴을 분배 책임자로 세우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장사꾼들을 통제하였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간 사이에 백성들이 계명을 어기고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 21:14). 제사장들이 통혼하는 것은 거룩한 제사장직을 더럽게 하는 일입니다. 제사장 직무의 시작은 성결로부터입니다. 성결 없이는 제사장의 직무도 없습니다. 제사장 직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종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손자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영적인 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4).”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22).”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개입하시고 일해 달라는 간구합니다. 자신이 한 일들을 도말하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고 백성들의 삶을 개혁했고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아 개혁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약을 갱신하면서 지키겠다고 한 결혼, 안식일, 십일조 약속이 다 무너진 것을 보았을 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개선되지 않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확인하고 깊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개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또 무너질텐데”라고 회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린 언약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1:5).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복해서 언약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옛 삶으로 회귀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끝까지 그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옛 삶으로 돌아가 버린 백성들을 붙잡고 또다시 개혁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진정한 개혁가였습니다.
영적인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죄를 책망하며 싸우는 것도 어려운데, 전체 공동체의 문제와 싸우려니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까요? 느헤미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였지만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잘 돌아가고 거룩하도록, 하나님 종들의 직무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유지시켜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참된 개혁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힘은 거룩함,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준을 세우고 절대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우리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고자 할 때,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모든 짐이 풀리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말씀 | 느헤미야 11장-13장
요절 | 느헤미야 13:30,31
나의 하나님, 나를 기억하소서
“내가 이와 같이 그들에게 이방 사람을 떠나게 하여 그들을 깨끗하게 하고 또 제사장과 레위 사람의 반을 세워 각각 자기의 일을 맡게 하고 또 정한 기한에 나무와 처음 익은 것을 드리게 하였사오니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
오늘 공부할 말씀은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을 마치고 끝나야 할 것 같은데 다시 개혁을 하는 13장이 나옵니다. 느헤미야는 12년 동안 유대 총독으로 섬기고 페르시아로 돌아갔습니다. 일년 뒤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유대 공동체를 개혁합니다. 또 다시 개혁이 필요한 공동체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연약함, 죄성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동시에 느헤미야의 열정과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무엇인가 찾아보고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백성들의 거주지 재배치. 느헤미야는 백성의 거주지를 재배치하였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루살렘에 거주하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서 거주하게 하고 그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주하게 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백성들이 복을 빌었습니다. 이스라엘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솔로몬의 신하들의 자손은 유다 여러 성읍에서 각각 자기 성읍 자기 기업에 거주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것이 성전이 있고 성벽도 완성되었으니 축복일 것 같지만 아직 생활의 기반이 되는 중요 시설이 없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침공을 받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까지 약 150년 가까이 폐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막 개발된 도시와 같이 삭막하고 편의 시설이 없어 불편했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 지도자들을 배치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여전히 대적들의 공격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도시 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또한 예루살렘은 예배와 행정의 중심지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을 여기에 배치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도시이기 때문에 그들은 애정을 가지고 이곳을 지키고 가꾸었습니다. 그들이 제비를 뽑아서 인구를 재배치했지만 2절에 보면 ‘예루살렘에 거주하기를 자원하는 모든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즉 이들은 부담을 갖고 억지로 예루살렘에 거주한 것이 아니라 자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회개하고 언약을 갱신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느 때보다 좋았습니다. 그들은 성전을 버려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10:39). 이런 분위기를 생각할 때, 예루살렘에 거주하도록 제비 뽑힌 것을 부담스러워하기보다는 기쁨으로 영접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둘째, 성벽 봉헌식. 12장은 1차 포로귀환 당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와 함께 돌아온 제사장, 레위인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새로운 사명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성전 봉사자들입니다. 이들은 이 세대 성전 봉사자들에게 귀감이 되었습니다. 1,2세대는 척박한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들의 이름과 신앙을 기록함으로 후손들이 두고두고 기억하도록 했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끊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성전과 성벽 건축을 위해 헌신한 분들의 이름을 기록함으로 후손들이 많은 교훈을 받도록 했습니다.
27-30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벽을 봉헌하게 되니 각처에서 레위 사람들을 찾아 예루살렘으로 데려다가 감사하며 노래하며 제금을 치며 비파와 수금을 타며 즐거이 봉헌식을 행하려 하매 이에 노래하는 자들이 예루살렘 사방 들과 느도바 사람의 마을에서 모여들고 또 벧길갈과 게바와 아스마웻 들에서 모여들었으니 이 노래하는 자들은 자기들을 위하여 예루살렘 사방에 마을들을 이루었음이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하게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벽을 정결하게 하니라.” 성벽 봉헌은 에스라, 느헤미야서의 클라이맥스 같습니다. 하나님이 성벽을 52일 만에 완성되게 하셨습니다(445년 10월 2일).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이 586년에 무너졌다가 445년에 완성했으니 140년 동안 폐허로 방치되다가 완공이 된 것입니다. 성벽 완공 후 율법 낭독과 회개 운동, 언약을 갱신하고 거룩한 예루살렘에 백성들을 살게 한 후 비로소 성벽 봉헌식을 하였습니다. 성벽은 분리와 보호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으로만 되지 않습니다. 율법에 기초하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온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에 거주함으로 예루살렘 성이 제기능을 할 수 있어야 진짜 안전하고도 구별된 성이 될 수 있습니다. 성벽을 재건함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백성들은 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마음에 새기기 위해서 신앙고백을 하고 찬양을 합니다.
그들은 두 개의 성가대를 만들어서 감사의 찬양을 합니다. 한 떼는 에스라, 한 떼는 느헤미야가 인도하여 각각 다른 방향으로 성벽 위를 걸어서 한 곳에서 만나게 했습니다. 그들은 골짜기 문에서 시작하여 성전 동문에서 만나도록 했습니다. 골짜기 문은 느헤미야가 성벽 공사를 시작하기 전 수행원 몇 사람과 야밤에 순찰을 했던 곳이기도 합니다(2:12). 행렬의 순서는 레위 찬양대-백성의 지도자-나팔을 든 제사장들-레위 찬양대 순이었습니다(31-36).
그들은 왜 갓 지은 성벽 위로 그 많은 사람들을 올라가서 걷게 했을까요?
첫째로, 성벽이 튼튼하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대적들은 “여우 한 마리가 올라가도 무너지리라”고 조롱하였습니다(4:3). 이것이 거짓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이 도와주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성벽 재건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대적들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보기를 원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창, 칼, 활을 들고 있지 않습니다. 적들이 다 물러갔기 때문에 평화로운 가운데 두 편의 무리들이 성벽 위에서 행진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성벽을 직접 밟아 보면서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몸소 확인하고 감사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성벽을 돌면서 그들은 지난 시간 대적들의 방해로 어려웠던 시간들이 영화처럼 머릿속을 지나쳤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심령에 새기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온전히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
43절을 보십시오. “이 날에 무리가 큰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성벽 봉헌식의 핵심은 기쁨, 즐거움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였을까요? 일찍이 성전 지대가 놓였을 때 젊은 세대의 기쁨과 원로 세대의 통곡이 혼재했습니다(스3:11,12). 그러나 성벽 봉헌예배를 드릴 때 오로지 기쁨이 충만하였습니다! 이제 일말의 회한이나 슬픔이 없습니다! 이 기쁨은 인간의 공적 때문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지도력도, 백성들의 수고에 기인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 갖은 박해와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도움으로 성벽이 지어졌으니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무너진 성벽은 하나님의 백성의 수치를 상징했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2:17)”고 동기부여를 했습니다. 이제 그 수치와 부끄러움이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지난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며, 언약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회복되었습니다. 성벽 봉헌식을 통해서 그들의 수치가 씻기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자 그들은 감격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성전 봉헌식이 있던 날, 느헤미야는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습니다. 성전 봉사자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을 하게 했습니다.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생활이 안 되면 흩어져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 흩어지면 성전이 버려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로 인해서 즐거워합니다(44). 왜 즐거워할까요? 이들을 섬기고 지원하는 일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종들을 섬기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성벽이 완성되어서도 감사하지만 성전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도록 섬김으로써 기쁨을 누린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가 교회답게 잘 돌아갈 때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예배와 교육과 훈련과 전도와 선교와 봉사와 구제가 잘 이루어지면 모두가 다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역량 있는 행정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배를 집전하고 있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로 하여금 500여 년 전에 다윗이 기초하고(대상 22-26장) 솔로몬이 제정한 규례에 따라서 집행하도록 했습니다. 음악은 아삽이 그 일들을 주관했습니다(대상 15:19; 16:4-5, 37). 스룹바벨 때와 느헤미야 때 노래하고 문 지키는 레위인들에게 날마다 쓸 몫을 주고, 레위인들은 그 중에서 성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습니다(민18:25-32). 그들은 첫 열매와 십일조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섬기겠다고 언약을 갱신했고 그 맹세를 실천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성전 봉사자들을 섬기고 그들의 쓸 것을 주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 날 모세가 기록한 율법을 낭독하는데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양식과 물로 이스라엘 자손을 영접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저주하게 하였음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섞여 살던 암몬과 모압 사람들을 이스라엘 가운데서 모두 분리하였습니다.
셋째, 또 개혁. 느헤미야가 총독 일을 마치고 일년 후에 돌아와 보니 성전이 개판이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대제사장 엘리아십과 도비아가 연락이 있었습니다. 도비야는 집요하게 성벽공사를 방해했던 사람이고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했습니다. 그는 전부터 유다의 귀족들과 결혼으로 맺은 친밀한 관계였습니다. 엘리아십은 느헤미야 시대에 사역했던 대제사장입니다(12:12). 대제사장은 온 성전을 대표하는 자로 성전 창고의 사용처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도비야에게 성전 방을 내주었습니다(5). 이방인에게 성전 방을 제공한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영원히 하나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암몬 사람에게 방을 내 준 것은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또 10절을 보면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라고 기록했습니다. 레위인들은 성전에서 나오는 십일조와 헌물에 의지해 사는 데, 그것이 끊기니 제 역할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직접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봉사해야 할 사람들이 성전에 머무를 수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느헤미야가 없는 사이에 성전은 버려지고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썰렁했습니다.
느헤미야는 화가 나서 도비야의 가구들을 모두 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 방을 정결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물건들과 제사 기물들을 다시 그 방에 들여 넣도록 했습니다. 성전이 원래의 기능을 회복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는 성전을 버린 민장들의 행실을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레위인들을 불러다가 다시 제자리에 세웠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다시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였습니다. 그 동안에는 들이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십일조와 헌물을 갖다 준다 한들 남용될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방도 비어 있고 신뢰할만한 지도자가 다시 온 것을 보고 백성들이 십일조를 곳간에 들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충직하다고 인정받는 셀레먀, 사독, 브다야, 삭굴을 분배 책임자로 세우고 제사장들과 레위인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백성들이 안식일을 잘 지키도록 장사꾼들을 통제하였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페르시아에 간 사이에 백성들이 계명을 어기고 아스돗, 암몬, 모압 여인과 결혼해서 살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 21:14). 제사장들이 통혼하는 것은 거룩한 제사장직을 더럽게 하는 일입니다. 제사장 직무의 시작은 성결로부터입니다. 성결 없이는 제사장의 직무도 없습니다. 제사장 직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성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 종들도 거룩해야 합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의 손자를 심판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영적인 개혁을 단행할 때마다 하나님에게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내 하나님이여 이 일로 말미암아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내가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14).” “내 하나님이여 나를 위하여 이 일도 기억하시옵고 주의 크신 은혜대로 나를 아끼시옵소서(22).”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31).”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하나님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개입하시고 일해 달라는 간구합니다. 자신이 한 일들을 도말하지 말고 기억해 달라고 합니다. 수많은 반대에도 52일 만에 성벽을 완성했고 백성들의 삶을 개혁했고 감격적인 성벽 봉헌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지 않아 개혁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언약을 갱신하면서 지키겠다고 한 결혼, 안식일, 십일조 약속이 다 무너진 것을 보았을 때 느헤미야의 마음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개선되지 않는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확인하고 깊이 절망할 수 있습니다. “개혁을 해봤자 무슨 소용인가 또 무너질텐데”라고 회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점으로 돌아와버린 사람들에게서 눈을 돌려 기억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람들이 잊어버린 언약을 하나님은 기억하십니다. 느헤미야는 처음부터 언약을 기억하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예루살렘에 왔습니다(1:5). 백성들이 광야에서 반복해서 언약을 잊어버리고 끊임없이 옛 삶으로 회귀하려고 할 때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끝까지 그들을 도우시고 인도하셨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하나님을 기억했습니다. 이 하나님을 의지해서 옛 삶으로 돌아가 버린 백성들을 붙잡고 또다시 개혁을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진정한 개혁가였습니다.
영적인 개혁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죄를 책망하며 싸우는 것도 어려운데, 전체 공동체의 문제와 싸우려니 얼마나 힘들고 두려웠을까요? 느헤미야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였지만 개혁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잘 돌아가고 거룩하도록, 하나님 종들의 직무가 지속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유지시켜 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이 아무 소용없습니다. 참된 개혁은 주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힘은 거룩함, 순수함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기준을 세우고 절대성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우리를 돌아보고 회개하고 말씀대로 살며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살고자 할 때, 우리를 진정으로 변화시키시고 성숙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 모든 짐이 풀리고 문제가 해결이 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하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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