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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2024년 느1강(1-3장)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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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4-02-25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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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느헤미야 1강
말씀 | 느헤미야 1장-3장
요절 | 느헤미야 1:5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오늘 공부할 1-3장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이 허물어지고, 성문이 불타고, 백성들은 능욕 당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1장). 그는 왕에게 구하여 예루살렘으로 돌아가(2:1-10), 예루살렘 성 건축을 결의하고(2:11-20), 유다 백성들이 합심하여 성벽을 건축합니다(3장). 우리는 느헤미야가 절망적인 상황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고 새 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 제20년 기슬르월에 수산 궁에 있었습니다. BC 445년 11월입니다. 에스라 10장과 느헤미야 1장은 13년의 간격이 있습니다. 길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지 약 162년이 지났습니다. 느헤미야는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그에게 이르렀기에 식사를 초대하여 교제하며 예루살렘 현지 상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고 전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였습니다. 느헤미야의 생생한 반응을 볼 때 이 사건은 가까운 시점에 일어난 일로 보입니다. 에스라 4장 23절과 24절에 기록된 사건으로 에스라가 2차 귀환 후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즉 458년 이후에 일어난 사건으로 추정됩니다.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아무리 슬퍼도 어떻게 ‘수일 동안’ 슬퍼할 수 있을까요? 느헤미야는 왕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권력과 명예가 있었습니다. 이런 풍요롭고 힘있는 자리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에 무관심하고 무감각하기 쉽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에서 3세로 태어났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가 사는 수산과 예루살렘은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는 한 번도 예루살렘을 방문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렇게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느헤미야는 평소에 예루살렘을 많이 생각하고 심정적으로 예루살렘과 가까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고위 관리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과 자부심이 분명하고 강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여 언약백성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페르시아의 고위 관리로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귀환한 백성들이 대적들의 방해로 인해 당하고 있는 현실을 볼 때 마음이 아팠습니다. 외국에 나가 있는 선교사님들이나 이민 간 분들이 이 나라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고, 우리보다 더 애국자인 것을 많이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느헤미야도 고위직에 있으면서 이제 자기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기여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가족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있는 백성들이 당하는 환난과 능욕을 자신이 당하는 것처럼 슬퍼하고 아파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고, 왕에게 묶여 있는 몸인 데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절망하고 슬픈 감정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하나님께 나아가 금식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권세 있는 왕과 가까웠지만 땅에서 해결책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하늘을 바라봅니다. 5절을 보십시오.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하늘의 하나님 앞에 얼굴을 향하여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해결책을 가지고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4개월 동안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친히 역사를 주관하시며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십니다. 가장 절망적일 때도 하나님을 바라보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돈을 의지합니다. 힘없는 사람을 의지하고 바라보니 때마다 실망하고 어려운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왕이 힘이 있지만 그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먼저 그에게 간절히 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구하되 어떤 자세로 구하였습니까? 그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는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하며 기도할 때에 그의 마음에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비전과 방향이 생겼습니다. 2장 12절 앞부분을 보면 “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 내 마음에 주신 것”이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방향과 지혜와 때를 따라서 일을 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왕 앞에 나서서 자신이 소원하는 바를 말하고자 합니다. 그가 섬기는 왕이 아닥사스다이고 이미 에스라의 사역을 중단시킨 일이 있음을 감안할 때(스4:21), 느헤미야가 이렇게 기도하는 건 매우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그는 이 자리를 버리고 갈 수 없고 아닥사스다가 중지시킨 성벽을 짓겠다는 것은 반역이 될 수 있지만 그는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왕에게 구하였습니다. 그는 언약의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와 믿음,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긍휼하심을 알고 믿음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감으로 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전략을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그는 왕에게 어떤 요청을 했습니까? 2장 1-3절을 보십시오.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니산월에 왕 앞에 포도주가 있기로 내가 그 포도주를 왕에게 드렸는데 이전에는 내가 왕 앞에서 수심이 없었더니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병이 없거늘 어찌하여 얼굴에 수심이 있느냐 이는 필연 네 마음에 근심이 있음이로다 하더라 그 때에 내가 크게 두려워하여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내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사오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심이 없사오리이까?” 술 관원이 왕 앞에서 근심어린 얼굴을 보이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입니다. 여기서 ‘근심’은 히브리어로 ‘라아’인데 ‘악한’, ‘나쁜’이라는 뜻입니다. 이후로 ‘선한’, ‘좋은’ 의미를 가진 ‘토브’와 대조됩니다. 그러므로 얼굴의 수심은 왕에게 악의 혹은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비쳐질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곧 왕에게 해야 할 말을 생각하면 그가 ‘크게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왕은 그에게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이는 참으로 담대한 요청이었습니다. 조상들이 묻힌 종묘사직을 당시에는 신성시하였습니다. 후손들이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곳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이라는 직접적인 지명이 아닌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라고 함으로써 조상의 무덤을 돌봐야하는 자신의 책임을 왕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는 왕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지혜롭게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는 4개월을 기도하면서 기다렸지만 행동할 때는 빨랐습니다.

  그 때에 왕후도 왕 곁에 앉아 있었습니다. 왕이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묻고 왕이 그를 보내기를 좋게 여겼습니다. 사실 지금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말을 잘 못했다가는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을 잃을 수 있고,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큰 두려움 가운데 담대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그는 기한을 정하고 또 강 서쪽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려 비자를 주시고,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자신이 들어갈 집 즉 총독 관저를 위하여 들보로 쓸 재목을 주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성을 건축하게 해달라는 요청은 다시 짓게 해달라는 말입니다. 왕이 중지명령을 내려서 대적들이 무너뜨린 성을 다시 짓게 해달라는 말은 왕의 조치에 불만을 품고 왕이 내린 조서에 반기를 들겠다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시므로 왕이 허락하고 군대 장관과 마병을 보내어 그와 함께 가게 허락하였습니다. 왕의 술 관원은 왕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고위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자리를 버리고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고 환난과 능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가겠다는 것일까요? 느헤미야가 어떻게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과 능욕을 받는다는 소식이 그의 삶에 큰 전환점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모세와 같이 자기 백성들이 당하는 고난에 기꺼이 동참하고자 결단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을 새로운 사명지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그처럼 높은 자리에 이르게 하신 것도 바로 이 때를 위해서라고 생각했습니다(에4:14). 이런 분명하고도 강력한 부르심이 있었기에, 예루살렘에서 성벽을 쌓고 영적인 개혁을 하면서 부딪치는 반대와 공격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공격은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로부터 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하게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12년간의 휴가를 내어서 예루살렘 성벽 재건과 공동체 회복을 위해서 일을 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페르시아 왕의 손이 꽉 잡고 있는 제국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선한 손이 일하고 계심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이방 왕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왕에게 좋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좋게 보이는 게 중요합니다. 왕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느헤미야가 왕에게 요청한 걸 보면 분명하고 구체적이고 확신이 느껴집니다. 그가 지난 네 달 동안 기도하면서 새로운 사명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이를 감당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이 언제인지 찾고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느꼈을 때 왕에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담대하게 구했습니다. 왜 그에게 네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긴 시간 동안 같은 기도 제목을 놓고 기도하다보면 자신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게 되고, 지혜를 구하게 되고, 일을 시작하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지속적인 기도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준비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란 단순히 우리 희망 사항을 알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교제하면서 그의 인도하심과 지도를 받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덧입는 시간입니다.

  3장에서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머무른 지 사흘 만에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그 마음에 주신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아니하고 밤에 일어나 예루살렘 성을 살펴보았습니다. 상황 파악을 한 것입니다. 그가 들었던 것보다 더 심각하였습니다. 후에 그들에게 “우리가 당한 곤경은 너희도 보고 있는 바라 예루살렘이 황폐하고 성문이 불탔으니 자, 예루살렘 성을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말자”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마음에 불을 붙였습니다. 세계 만민이 말씀을 배우러 와야 할 예루살렘 성이 불에 타버린 것은 수치입니다. 거룩한 백성, 보배와 같은 제사장 나라로서 말씀을 비추어야 할 이 나라가 황무한 현실은 수치였습니다. 센터에서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사람들로 북적거려야 하는데 주중에 텅 빈 모습을 보는 것은 수치스럽습니다. 목자로서 양들을 섬기는 것은 영광인데 그렇지 못한 자신을 볼 때 수치스럽습니다. 우리도 양들이 들며 날며 생명의 꼴을 얻는 공동체를 건축하여 다시 수치를 당하지 맙시다! 느헤미야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한 손이 그를 도우신 일과 왕이 그에게 이른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일어나 건축하자 하고 모두 힘을 내어 이 선한 일을 하려고 일어섰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을 업신여기고 비웃었습니다. “너희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 너희가 왕을 배반하고자 하느냐?” 대적들의 반응은 사실상 페르시아 왕에 대한 반역입니다. 왕이 좋게 여기고 허락한 일을 매우 악하게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선하게 보시는 일을 하려고 하는 데 대적들은 악하게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인간적이고 정치적인 욕심을 가진 사람에게는 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적하고 방해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관점에 서느냐 아니면 자기나 세상의 관점에 서느냐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우리는 종인 것,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우리는 그의 지시를 따르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 주의해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초청에 응할 때 하나님과 동역을 하며 공동체를 세울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유다에 들어가기 위해 강 서쪽 총독들에게는 조서를 보여주었지만, 산발랏이나 도비야나 게셈은 아직 조서의 내용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에 예루살렘 성읍 건축을 반역이라고 왕에게 고발하였을 때 아닥사스다 왕이 건축을 중단시킨 사실을 떠올려서 유다 사람들에게 트라우마를 심고 시도조차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느헤미야는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를 형통하게 하시리니 그의 종들인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에게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기억되는 바도 없다”고 대응하였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형통하게 하신다는 강한 믿음으로 대적들의 반대를 물리쳤습니다. 또한 성벽 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스룹바벨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어떤 외부 협력자도 거부하였던 것처럼(스4:3), 느헤미야도 성벽 재건을 하면서 원수들의 개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성벽 공사는 주님의 백성인 이스라엘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벽 재건에 참여하는 것은 희생이 아니라 특권입니다.

  3장 1-2절을 보면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제일 먼저 북쪽 문을 건축합니다. 왜 북쪽 인가요? 이 지역은 놀랍게도 사마리아 지역과 인접해 있습니다. 항상 이 북쪽은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늘 초긴장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를 누가 담당 합니까? 제사장들이 담당을 합니다. 이스라엘이 허물어진 국가지만 제사장들이 이스라엘에서 어떤 위치에 존재합니까? 최고의 리더들입니다. 가장 힘들고 가장 어려운 성벽을 제사장들이 앞장서서 담당을 합니다. 그러자 그 여파가 전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셨습니다. 우리가 리더들입니다. 리더들이 앞장서서 희생할 때 모두가 즐겁게 일할 수 있습니다.

  3-5절을 보면 어문 건축역사와 성벽 재건역사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5절에 보면 드고아의 귀족들은 그 역사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이 많았지만 마음이 동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어떤 사정이 있었는지,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희생하고 헌신해야할 때에 발을 뺐습니다. 이들은 역사에 참여하지 않고 방관자들이 되었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영광스러운 명단에 이름을 남길 수 있었는데, 도리어 부끄러운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6-12절을 보면 옛 문과 성벽 재건역사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13-14절은 골짜기 문과 분문의 중수 역사를 기술하고 있고 15-27절에서는 샘문과 성벽의 중수를 기술하였습니다. 28-32절을 보면 미문에서 양문까지의 중수를 기술하고 있습니다. 성문과 성벽 재건역사에 참여한 핵심 인물이 40명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직업별로는 금장색, 장인들(8), 그리고 심지어 여성들까지 언급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살룸과 그 딸들”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백성들이 참여 하였으며 서로 협력하여 그 역사를 섬겼습니다. 드고아의 귀족들은 참여하지 않았지만 모든 백성들이 참여하여 크고 작은 일을 담당하였습니다. 23절과 28절과 30절에 보면 예루살렘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집 건너편 성벽을 건축했다고 했습니다. 즉 성벽 건축은 자기 집을 보호하는 공사입니다. 예루살렘에 살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재건역사에 함께 하였습니다. 7절에 보면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과 미스바 사람들도 참여 하였습니다. 이들 모두는 다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그 역사를 섬겼습니다. 그로인해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이 이방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52일 만에 재건되었습니다. 그로인해 그들의 수치가 회복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여 서로 협력하고 그 역사를 섬기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고 은혜롭습니다.

  우리 말로 ‘그 다음은’이라는 표현이 31회 반복되고 있습니다. 성벽 공사는 자신이 중수한 부분을 연결하는 작업입니다. 건축물을 잇는 것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잇는 것입니다. 성벽 건축을 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성전 건축은 마음이 하나 되는 게 중요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문과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장차 나타날 참된 성전의 그림자입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곧 참된 성전을 세워가는 데에도 그 원리가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롬12:4,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우리는 전도와 제자양성과 선교를 통해서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내가 섬기고 있는 요회를 중건하여 건실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신입생 입학식 하는 날에 전도하였습니다. 앞으로 동아리 박람회가 있습니다. 이때 학생들을 성경공부에 초청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또 주중에 학생들을 식사에 초대하여 함께 교제하며 사랑하고 복음을 전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공부하는 가운데 제자로 양육하고자 합니다. 이 일은 혼자서 할 수 없습니다. 모두가 함께 작은 일들을 맡아서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열매를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요회가 튼튼하게 세워져야 새 양들을 담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충실한 말씀공부와 사랑의 교제와 섬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요회와 각 부가 협력함으로 공동체를 견실하게 세우는 일에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느헤미야와 같이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님께 간절히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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