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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3년 눅40강(23:50-24:53)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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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2회 작성일 23-06-11 14:37

본문

2023년 누가복음 제 40 강
말씀 | 누가복음 23:50-24:53
요절 | 누가복음 24:45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는 40강에 걸친 누가복음의 대장정을 이제 마치게 되었습니다. 누가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에 가져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자신들이 예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들로 변화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종과 섬김을 통해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십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누가복음에 이어 앞으로 공부하게 될 사도행전에서 하나님께 쓰임 받은 변화된 사람들의 활동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는지를 배우고 우리도 주님의 임재와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부활(1-12). 공회 의원으로서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그는 죄 없는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왕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밝히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모습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는 담대한 마음을 얻어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사형수의 시체는 방치하도록 되어있었고, 시체를 가족들이나 친구에게는 내어주는 것이 금지 되었습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아무도 아직 장사한 일이 없는 자신의 새 무덤에 장사하였습니다.

  계명을 따라 안식일에 쉬고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갔습니다. 그들은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진 것을 보고 들어갔는데 주 예수님의 시체가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이로 인하여 근심할 때에 문득 찬란한 옷을 입은 두 사람이 곁에 섰습니다.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니 두 사람이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인들은 여전히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님, 무기력하게 죽임 당하신 예수님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은 슬펐고 죽음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천사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고 알려 줍니다. 왜냐하면 그 분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계실 때에 6번이나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한다면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신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은 아래와 같은 가설들을 제시합니다.
1.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다' 예수님이 묻히신 시간은 금요일 저녁 6시쯤이었습니다. 주일 새벽까지는 약 36시간이 됩니다. 그 동안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 갔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사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우려한 일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시체를 훔쳐가서 '그가 살아났다'고 헛소문을 퍼뜨리며 교세를 확장할 것을 두려워했습니다(마27:62-66). 그래서 그들은 빌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빌라도는 경비병을 데려다가 무덤을 돌로 인봉하고 굳게 지키게 하였습니다(마27:66). 그런데 보십시오. 2절을 보면 돌이 무덤에서 굴려 옮겨지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졌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한 일일까요? 그렇게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잡히실 때 모두 도망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근처에도 오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도리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세계 최강의 로마 군병들과 싸웠을까요? 그 무거운 돌을 굴려내고 예수님의 시신을 가지고 갔겠습니까? 1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은 오히려 무덤이 비었다는 여인들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않았습니다.

2.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훔쳐갔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 시신을 훔쳐가서 얻을 이득이 하나도 없습니다. 도리어 제자들이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주장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의 시체가 오랫동안 무덤에 확실히 있어야 그 추종자들의 세력을 단단히 틀어막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갈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3. '예수님이 거의 죽음에 이르렀지만 실제는 죽지 않았다’. 무덤에 있던 36시간 동안 빠르게 회복되어 무덤을 뚫고 빠져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는 것을 위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옆구리를 창에 찔렸고 그의 죽음을 확인한 병사들이 다리를 꺾지 않았고, 시체를 내어 주었습니다.

  이상을 볼 때, 빈 무덤을 설명할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를 부정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증거는 그의 시체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2천년 동안 아무도 그의 시체를 보이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납득할 만한 다른 설명을 제시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을 확실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증거입니다. 또한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교회의 존재입니다. 석가나 공자나 모하멧은 일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3년밖에 일하신 적이 없는 예수님이 지금처럼 놀라운 교회의 확장과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그의 부활이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무덤에서 돌아가 이 모든 것을 열한 사도와 다른 모든 이에게 알렸습니다. 부활의 소식을 들은 여인들의 기쁨은 형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기쁨에 겨워 부활의 첫 증인들이 되었습니다. 문제는 사도들이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여자들의 말은 신빙성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한 충격으로 실성한 것이 아닌가 의심을 했습니다. 또 그들은 십자가에서 처절하게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여전히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무덤을 방문하여 빈 무덤을 확인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도 죽으시고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확인하러 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우리는 그의 죽음이 자신의 죄가 아니라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적인 죽음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를 믿는 사람들의 죄가 사함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몸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날마다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기쁜 복된 소식입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게 된 우리 인류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을 줍니다. 모든 사람이 죽을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소심하고 무기력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죽음이라는 견고한 진을 파괴시키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는 믿는 자들이 죄와 죽음의 종노릇하지 않도록 그 권세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부활의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고 죽음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죽음 권세로 인해서 허무한 인생을 살던 저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을 듣고 새 생명을 얻고 활력이 넘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13-35). 그날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11Km 떨어진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이 모든 된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죽은 자는 살아나지 못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눈이 가려진 것입니다. 불신에 사로잡히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분명한데 그 일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불신에 사로잡히면 부활의 소식이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겨 먹고 사는 일에 매여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불신에 빠지면 이를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넌지시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물으셨습니다.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들은 선한 목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만 생각해도 슬픔이 마음에 파도처럼 밀려왔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했습니다. 당신 간첩 아니요? “당신이 예수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고 계시는 줄도 모르면서 예수님이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알지 못한다고 비난을 합니다. 예수님은 참 유우머가 많으십니다. 그는 능청스럽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침을 튀기며 흥분해서 답을 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 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그들은 예수님이 로마의 권세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그의 죽음을 보면서 김이 샜습니다. 그들은 여자들의 말을 듣고 그가 살아나셨다는 놀라운 낌새를 느꼈지만 흘려보냈습니다. 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본 사실을 확인한 것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어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가리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 있던 두 제자는 부활에 관한 소식을 들었지만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눈 뜬 장님과 같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나 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사명을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고향에 가서 알바라도 하면서 먹고 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25-27절을 보십시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두 제자들을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이라고 꾸짖습니다. 미련함은 깊이 생각하지 않음에서 오는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구약 성경이 예언한 말씀을 깊이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예언에만 관심을 가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한 말씀에는 무관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구약 성경 말씀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셔서 깨닫게 해주시고 의심하는 그들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은 창세기 3장에 나온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고 부활하심으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아담의 자손들이 죄를 범하여 죄가 세상에 관영하자 하나님은 노아 때에 홍수로 세상을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바벨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나타나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식 하나 없는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고 그에게 복을 주어 그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창 12:1-3). 아브라함은 100세가 되어 죽은 것 같은 몸이었지만 사라의 몸에서 아들 이삭을 낳게 되었습니다. 이것도 주님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복의 근원으로서 세상 만민을 복주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살리실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4:17은 말씀합니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통해서 그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말씀을 들을 때에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었습니다(32). 성령의 감동으로 인해서 마음에 불이 붙자 슬픔으로 침울했던 마음에 커다란 감동과 위로가 임했습니다. 삶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내면이 변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 가운데 행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깨닫게 되자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 권세로 종노릇 하던 그들이 승리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부활신앙을 갖게 되자 근심과 불신과 패배와 실패의식 등 모든 어두움의 생각들이 떠나가고 믿음과 소망으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소식이 그들의 식어버린 심장을 뜨겁게 하고 강렬하게 뛰게 했습니다.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그들이 예수님을 강권하여 함께 유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집에 들어가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그들의 식사 자리는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성만찬과 같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식사 교제를 할 때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을 생각나게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성경 말씀을 듣고 마음에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식사교제를 하면서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졌습니다. 그들은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제자들과 함께 있을 필요가 없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를 격려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 1:8,9).”
 
  두 제자는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습니다. 거기서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감격과 기쁨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11Km나 되는 길을 바로 일어나 되돌아갔습니다. 복음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내가 만난 주님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나눌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36-49). 이 말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친히 그들 가운데 서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인사를 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고 놀라고 무서워하여 그 보는 것을 영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두려워하며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이 일어나느냐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물으셨습니다. 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또 그들에게 이르셨습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구약성경은 예수님의 탄생부터 생애 곧 사역과 고난 받으심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을 것과 다시 오셔서 심판하실 것 등 모든 것들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며 신약은 예언된 말씀이 성취된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매주 하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가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 증거는 내가 만난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서 세상 모든 족속에게 복을 나누어 주기를 원하십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고 만유를 회복하고자 하십니다. 이를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오순절에 강림하시고 제자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자 그들은 사도행전의 역사를 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위임명령을 주시고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서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셨습니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승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와 식사 교제를 통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늘 경험하고 마음이 뜨거워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합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이루어지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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