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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3년 누가복음 제 34 강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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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60회 작성일 23-04-30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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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누가복음 제 34 강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
말씀 / 누가복음 19:28-20:18

요절 / 누가복음 19:38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오늘 말씀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예수님입니다. 본문의 말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귀를 끌고오게 하시고 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권위에 대해 무리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본문 말씀은 이 예수님의 권위(Lordship)를 조명합니다. 그의 주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살펴보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주인이 되어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왕처럼 높아지는 존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 앞에서 그의 백성인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과연 어떤 것일까요? 나는 예수님을 어떻게 영접하고 있는지 그 분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주 말씀에서 예수님은 한 귀인과 열므나의 비유를 통해 왕이 되어 돌아온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고 열심히 장사한 사람들이 어떻게 축복받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이들은 주인에게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권위를 부여받습니다. 반면에 주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은 종은 있는 것조차 빼앗깁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십니다.

 29절에서 34절까지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어린 나귀가 필요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그 나귀의 임자가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말하라 하십니다. 아무리 그래도 귀한 나귀를 말한마디에 그냥 내어 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워 보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말씀하신데로 나귀 주인에게 말했습니다. ‘주께서 쓰시겠다 하십니다.’ 이에 나귀 주인은 즉시 나귀를 내어 주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나귀를 내어줄 수 있었을 까요? 그는 아마 청지기로써의 정체성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내가 잠시 맡아두고 있을뿐이지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주께 있음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귀한 것을 기꺼이 내어준 나귀주인의 이 청지기 신앙이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줍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기인생, 자기가 주인이 되어 나에게 주어진 건강, 물질과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것에 집중합니다. 자신의 뜻을 성취하는데 삶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는 말에 ‘알빠No’ (알 바 아니다를 뜻하는 인터넷 밈이죠) 대답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권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며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자기만 알던 세리 마태도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너라" 하셨을 때에 자신의 인생을 써 주시도록 기꺼이 내어 놓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던 인생에서 복음의 사도로 그 인생이 빛을 발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내 인생의 주권자로 깊이 인정하고 주님께 드리면 주님께서도 내 인생을 확실하게 책임져 주시고 가장 합당하게 써 주시고 넘치도록 축복해 주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이 말씀을 들을 때 부담이 아니라 우리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의 음성이요, 축복의 음성인 줄을 믿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나귀 새끼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걸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그 위에 태웠습니다. 이를 본 백성들은 다 겉옷을 벗어 주님이 가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며 환영하였습니다. 스갸라 9장 9절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말씀을 성취하십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요 겸손의 왕으로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계십니다.

37-38절을 보십시오. 무리들은 먼저 주님이 능력있게 행하신 천국 사역을 찬송하였습니다(37절). 이어서 주님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오신 왕으로 높였습니다(38절). 38절을 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그들은 예수님을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 그리스도로 환영하였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지키고자, 온 유대와 로마 전역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예수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직접 만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앉은뱅이를 걷게 하시고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을 보았죠.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관에 누워 있던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리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를 통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는 것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런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라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 해방시키고 강력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실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이스라엘의 왕, 유대인의 왕이 되어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이런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는 그 이상의 왕이십니다. 지금 예수님은 온 세상의 왕으로 입성하고 계십니다.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예수님이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그를 따르는 백성들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십니다.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십니다. 평화가 하늘에 임합니다. 언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나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나타날 때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온 인류의 죄를 감당하는 일을 하실 때 선지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셨던 인류의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지, 그의 사랑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이 깊은지 드러납니다. 그의 자비로우심과 선하심, 그의 지혜와 경륜이 드러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세상왕들은 말을 타고 싸워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로마는 ‘Pax Romana’, ‘로마를 통한 평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주변국들을 무력으로 정복하고 다스렸습니다. 평화와 화평을 위해 오시는 예수님의 통치와는 정반대의 성격의 통치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과 비교해 볼 때 로마총독 빌라도의 예루살렘 입성은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명절이 되면 총독 빌라도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습니다. 명절에는 많은 사람이 모이기 때문에 소요나 반란을 예방하는 것이 그의 큰 임무였습니다. 빌라도는 거대한 전차에 타고 있었고, 그 뒤로 말을 탄 기마병들이 따랐습니다. 완전 무장한 보병들의 창검과 방패들이 햇볕에 번쩍이고 화려한 깃발들이 나부꼈습니다. 행차를 알리는 나팔소리는 천지를 진동케 하였습니다.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는 빌라도, 누가 더 왕처럼 보입니까? 또 그 행차의 성격이 어떻게 다릅니까?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이유는 메시야가 어떤 모습인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의 메시야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시킬 정치적 메시야였습니다. 멋있게 그들을 위해 싸워줄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평화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이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심으로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자신을 낮춰 종의 형제를 가지셨습니다. 죽기까지 죄인들을 섬겨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 찬송을 돌려 드립니다!

39절을 보면 무리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는 광경을 지켜보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찬송하는 일을 금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만일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십니다(40절). 그동안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기 꺼려했던 예수님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증거하십니다. 일찍이 선자자들은 메시야가 강림하면 온 우주 만물이 찬송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하박국 2장 11절에서는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했습니다.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사실은 너무나 중요하고 귀해서 사람들이 침묵하면 오히려 돌들이 소리를 지르며 환영할 것이란 의미입니다.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성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얼굴에 수심이 짙어지시더니 급기야 어떻게 하십니까? 성을 보시며 우십니다. 그냥 눈물을 흘리는 정도가 아니라 비통한 통곡을 하셨습니다. 왜 이렇게 우실까요? 42-44절까지 읽겠습니다. 시작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예루살렘’의 뜻이 무엇입니까? ‘평화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평화의 성아! 네가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그런데 지금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의 눈에 숨겨져 있도다” 하십니다. 그들은 진정한 평화가 뭔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서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자기 백성에게 왔지만 예루살렘은 영접하지 않습니다. 배척하고 오히려 로마의 권위를 의탁하여 죽입니다. 그 결국이 무엇입니까? A.D.70년에 그들이 의탁했던 로마에 의해 백십만명이 살육을 당하며 예루살렘 성이 초토화됩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사람들이 쟁기질을 하여 농사를 지을 정도로 예루살렘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기록합니다. 이 참화 이후 유대인들은 2천년동안 나라 없이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습니다. 평화의 도시가 심판의 도시가 됩니다. 예루살렘의 미래를 보시고 우시는 예수님은 참으로 긍휼이 많으신 심판의 주십니다.

45, 4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시며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성전에 기도 소리가 가득해야 하는데 장사하는 소리로 가득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여 지도자들의 잇속을 챙기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뜰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예배드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장사치들로 인해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월절 기간에 모이는 순례객이 300만 명 이상 되었고, 도살된 짐승이 260,000 마리였다고 합니다. 많은 순례객들을 상대하는 비즈니스는 엄청난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장사하고 환전하는 자들에게 면허를 주는 것은 공회에 큰 돈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면허세, 권리금, 부당 이익들은 결국 다 가난한 순례객들의 주머니를 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는 유대 교권주의자들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죄를 몰아내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깨끗케 하시고 말씀으로 채우셨습니다. 내 마음의 성전 또한 죄에 대한 회개로 깨끗이 해야함과 동시에 말씀의 채움이 있어야 함을 배웁니다.

20장을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성전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 그들은 로마정부로부터 권위를 인정받아 유대인에 대한 모든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디 갈릴리 촌 사람이 와서 자기들이 합법적으로 장사하도록 허락한 사람들을 쫓아내고 장사를 방해하니 예수를 매우 못마땅 해 했습니다. 그래서 가까이 가서 따지듯이 묻습니다.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위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이 말은 ‘우리는 로마로부터 합법적으로 권위를 위임받아 성전을 관리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우리의 허락도 없이 이렇게 맘대로 하냐’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대답 대신 역으로 질문하십니다. 3.4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이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요약하면 세례요한의 권위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과 같이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인 하나님께로부터 권위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역으로 많은 사람이 회개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런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권위도 인정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세례 요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면 백성들의 반대에 부딪칩니다. 백성들 대부분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어디로부터인지 알지 못한다고 회피합니다.

이러한 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큰 경고가 됩니다. 종교지도들은 세례 요한이 하늘로부터 온 자임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물질과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이 사실을 고의적으로 거부합니다. 그들은 신앙 양심보다 돈과 그들의 기득권을 더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9-18절에서 불의한 농부 비유를 통해 종교지도자들의 문제를 지적하십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소작농에게 세를 놓았습니다. 땅의 돌을 제거하고, 망대를 세웠습니다. 울타리를 치고, 포도즙 틀을 만들고,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내주며 일하게 했습니다. 농부들은 주인이 여행을 떠나 있는 동안 일하여 포도 열매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때 주인이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포도 소출의 얼마였습니다. 이는 주인과 농부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한 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농부들은 주인에게 감사하며 소출 얼마를 내고 사랑의 관계성을 지속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어떻게 합니까? 전혀 상상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주인 보낸 종에게 소출 얼마를 주지 않고 거저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때리기까지 합니다. 주인을 무시했고, 관계성을 깨버렸습니다. 이때 주인이 어떻게 하죠? 농부들은 관계성을 깼지만 주인은 관계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씁니다. 종들을 계속 보냅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두번째 종도 멍이 들도록 때려 빈손으로 돌려보냈습니다(11). 주인은 다시 세 번째로 종을 보냈습니다(12a). 농부들은 그 종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들겨 패서 길거리에 내다버렸습니다(12b). “어찌할까?” 주인은 마지막으로 비장의 카드를 뺐습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는 것이었습니다(13b). ‘혹 그는 존대하리라’ 아들은 공경할 줄 알았습니다. 아들을 존대하기만 하면 그 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모두 없던 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비로운 주인입니까? 그러나 농부들의 반응은 기대와 달랐습니다. 그들은 주인 아들이 온 것을 보고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다가 살인계획을 짰습니다.  “이 자는 상속자이니 그를 죽이고 우리가 재산을 다 차지하자.”(14). 그리하여 그들은 주인의 아들을 죽여 울타리 밖으로 내던졌습니다(25a).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난 거죠. 아들을 죽인 그들의 본질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주인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농부들은 포도원 주인이 아니라 세로 든 청지기에 불과했습니다. 마땅히 주인을 공경하고 열매가 맺히면 소출을 바쳐야 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타국에 가 있는 동안 여러해 포도원을 열심히 가꾸다보니 포도원이 자신들의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급기야 자신들이 주인행세를 했습니다. 둘째는, 욕심입니다. 욕심에 눈이 뒤집혀 자기가 세로든 소작농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수고한 것은 자신들이고 주인은 일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인자한 주인을 힘이 없는 사람으로 보고 유산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셋째는 감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아무 소유도 없는 그들은 주인의 은혜로 포도원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를 감사하게 생각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어버리고 감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욕심을 부추깁니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 마음을 파고 들어옵니다. 본문의 농부들은 욕심으로 인해 영적인 눈이 감기고 본분을 망각했습니다. 주인의 아들을 죽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진멸을 당했습니다. 오늘날 욕심으로 망가져 버린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욕심을 이기는 길이 무엇일까요?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재능을 주셨습니다.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직장 생활하는 축복을 주셨고, 물질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숨쉬고 걸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감사합니까?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나를 부르시고 영적인 포도원을 주시고 참된 수확을 얻는 일꾼의 삶을 살게 하신 것은 크신 은혜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욕심을 물리치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크신 은혜를 늘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예수님은 ‘주가 쓰시겠다’하시며 자기의 권위를 주장하십니다.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말씀으로 가르치십니다. 소출의 얼마를 바치라 하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의 경배와 찬양을 받으실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죄값을 치르시고 우리를 하늘로 이끄시는 구세주가 되십니다. 이 예수님을 왕이요 구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의 은혜를 충만히 누리는 축복된 삶 살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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