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3년 부활절 특강2(고전15:35-58)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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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활절 말씀 제 2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51,52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저는 겨울에 성미산을 산책할 때에 말라버린 나무들을 볼 때에 황량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봄이 되자 말라버린 나무들에서 개나리꽃, 매화, 홍매화, 철쭉, 목련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이 지자 파란 잎들이 나오고 어느 새 녹색 나뭇잎으로 숲이 무성해졌습니다. 자연 속에서 부활의 생명을 느끼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으로 일하십니다. 바울은 땅에 뿌리는 씨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땅에 뿌린 씨앗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이 땅 속에 파묻혀도 썩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속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의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영’은 45절에 나오는 ‘살려 주는 영’ 즉 ‘a life giving spirit’입니다. 예수님 은 ‘살려 주는 영’이기 때문에 먼저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사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매일 내 속에 있는 죽음의 요소를 몰아내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하십니다. 장차 그는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몸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어서 몸이 해체되어 흙으로 바뀌어도 그 생명은 우리의 영혼 속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씨를 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합니다(49절).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1:17-18).”
농부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가 씨앗만 보면 장차 어떤 형체를 가질지 알 수 없습니다. 남바나바 목자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다닐 때 자연책에 나온 대로 꽃의 씨를 뿌려본 경험이 있습니다. 뿌릴 때는 별 생각 없이 학교에서 시키니까 뿌렸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 씨에서 새 싹이 튼 것을 보고는 조금씩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제일 먼저 그 싹이 얼마나 자랐나를 살피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그 씨에서 아름다운 꽃이 활짝 폈을 때 우리의 어린 마음은 경이와 감탄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하고 맛있는 열매가 맺힙니다. 씨의 겉모습만으로는 장래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에는 장래 형체를 보장해주는 유전인자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새로운 형체가 생겨납니다. 사과나무를 본 사람이 없다고 칩시다. 사과 씨에서 사과나무와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사과가 열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새로운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 몸의 부활도 씨앗의 원리와 똑같이 작용합니다. 부활 때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생화학자들에 의하면 80일 주기로 우리 몸의 세포가 완전히 바뀐다고 합니다. 피는 새로운 피로 교환되고 살과 뼈도 새로운 것으로 대체됩니다. 몸은 변해도 한 인격체로서 ‘나’라는 본질적인 존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몸으로 부활해도 각 사람의 본질적인 존재와 개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부활의 형체를 주시지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형체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죽음을 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며 서로 사랑하고 선한 행실을 힘써야 합니다.
육체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명석한 머리와 긴 팔과 섬세한 손과 튼튼한 다리를 주셨습니다. 짐승에게는 잘 달릴 수 있게 네 다리를 주셨습니다. 생쥐는 얼굴의 수염을 1초에 여러 번씩 앞뒤로 휘저으며 주변을 지도화(mapping)합니다. 뱀은 열을 효과적으로 감지함으로 앞에 있는 생쥐의 몸을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느낍니다. 새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가볍게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뼈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철새들은 이주할 때를 알고 길도 압니다. 그들은 별 외에 지구의 자기장을 활용하여 난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칠 수 있게 비늘과 지느러미를 주셨습니다. 수중 포식자가 물고기 떼를 향해 돌진하면, 물고기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아무 방향으로나 도망치지 않습니다. 서로 충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공격자의 주위를 마치 물처럼 흐릅니다. 이 기적 같은 조종의 위업은 물고기 옆면에 붙어 있는 ‘측선’이라고 불리는 센서 시스템이 한 몫을 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면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압차로 몸이 터져버리거나 방사선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져 버립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동물들이 감지하는 세계,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수많은 신호와 감각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빛이 있고, 고요한 속에 소음이 있고, 텅 비어 있는 것 속에 놀랄만한 풍요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부활할 때에 우리 몸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 몸과 부활 때에 우리 몸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몸은 썩고 욕되고 약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조금씩 해체됩니다. 탄력 있던 몸매는 느슨해지고 배는 나오고 피부에는 기미와 주름이 생기고 단단했던 뼈와 근육은 약해져서 풀어지고 구부러집니다. 결국에는 늙고 쇠해서 한 줌 흙으로 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소망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설령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고 해도 잘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부끄러움과 허물뿐입니다. 두려움과 소심함 때문에 도전해보지 못한 것들도 많고, 하고 싶고 의지가 있어도 환경이 따라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에는 썩고 욕되고 약한 육의 몸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아름다운 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한 몸은 늙지 않는 몸입니다.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한 몸에서는 우리를 괴롭혔던 악습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다 합쳐 상상한다 해도 실제로 부활한 몸의 영광을 우리는 그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어렵지만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되면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몸, 부활하신 후에 보여 주신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아담이 동식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얼마나 총명하고 기억과 통찰이 뛰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뇌의 10%밖에 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 쓴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고 말씀합니다. 부활한 영광스러운 몸을 아름다운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반석 데비 선교사님들이 태국의 왕족들이 입는 옷을 입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옷이 화려해서 옷 입은 분들이 평범한 분들이지만 엄청나게 예쁘고 권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옷 입은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들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입은 옷이 그 사람의 지위와 아름다운 면을 부각시키기 때문이죠. 부활한 몸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의 개성과 성품을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바로 보며 “맞아, 맞아. 이게 이 사람의 감추어진 진짜 모습이었어”라며 감탄하며 놀랄 것입니다. “야, 너 참 멋있게 변했다.” “야, 너 롱다리 됐네?” “어쩜, 얘 기미, 주근깨가 싹없어졌네!” 형제들은 모두가 왕 같은 품위와 자매들은 공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한 후 모두 만나 이러한 감격의 해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빚어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겸손과 온유의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고후4:16). 부활의 때에는 성품이 완성되어서 예수님처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한 가지 비밀을 이야기 합니다. 50-5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의 몸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4차원에 맞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썩기 때문에 이런 몸으로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려면 반드시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언제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오심을 알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부활의 새로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됩니다. 그 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함께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게 됩니다. 그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소망하면서 언제든지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눅21:34-36). 그때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때까지 사망은 인류 위에 왕 노릇해왔습니다. 바울은 사망을 향해서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은 벌이 쏘는 것과 같이 우리를 쏩니다. 벌침을 통해서 독소를 몸속에 퍼뜨리는 것처럼 사망도 죄를 공격 무기로 삼아서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죄는 율법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를 통해서 죽음의 세력이 몸 안에 들어옵니다. 죽음 권세는 허무주의, 무의미, 무정, 무자비, 두려움, 염려, 근심 등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고통스럽게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항상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립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죄를 통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는 것은 곧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죽음 권세를 박살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허무에 시달리던 우리가 이제는 도전하고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날을 생각하면서 감격에 겨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의 수고가 헛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열매가 없을 때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맡은 일에 얼마나 충성했는가로 판단하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인정해 주시며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명인의 길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장차 부활의 몸을 이루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물 한잔을 준 것도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의 일에는 확실한 결과가 있고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주님의 일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물론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만들어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열심히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51,52
홀연히 다 변화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저는 겨울에 성미산을 산책할 때에 말라버린 나무들을 볼 때에 황량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봄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봄이 되자 말라버린 나무들에서 개나리꽃, 매화, 홍매화, 철쭉, 목련 꽃이 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꽃이 지자 파란 잎들이 나오고 어느 새 녹색 나뭇잎으로 숲이 무성해졌습니다. 자연 속에서 부활의 생명을 느끼며 생명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리석은 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만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그는 지혜와 지식으로 일하십니다. 바울은 땅에 뿌리는 씨의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와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줍니다. 땅에 뿌린 씨앗은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씨앗이 땅 속에 파묻혀도 썩지 않는 것은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새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부활의 생명이 우리 몸속에 들어옵니다. 우리는 거듭나 새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8: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의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영’은 45절에 나오는 ‘살려 주는 영’ 즉 ‘a life giving spirit’입니다. 예수님 은 ‘살려 주는 영’이기 때문에 먼저는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의 영혼을 살리사 새 피조물이 되게 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역사와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매일 내 속에 있는 죽음의 요소를 몰아내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게 하십니다. 장차 그는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우리 몸속에 존재하고 있고 그 생명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죽어서 몸이 해체되어 흙으로 바뀌어도 그 생명은 우리의 영혼 속에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씨를 심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또한 육의 몸과 신령한 몸을 옷을 입는 것으로 묘사합니다(49절). 예수님은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살아 있는 자다. 나는 한 번은 죽었으나, 보아라,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있어서, 사망과 ㉨지옥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계1:17-18).”
농부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가 씨앗만 보면 장차 어떤 형체를 가질지 알 수 없습니다. 남바나바 목자님은 아이들을 위해서 옥상에 텃밭을 만들고자 합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다닐 때 자연책에 나온 대로 꽃의 씨를 뿌려본 경험이 있습니다. 뿌릴 때는 별 생각 없이 학교에서 시키니까 뿌렸지만 어느 날 우연히 그 씨에서 새 싹이 튼 것을 보고는 조금씩 호기심을 가지게 되어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제일 먼저 그 싹이 얼마나 자랐나를 살피곤 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마침내 그 씨에서 아름다운 꽃이 활짝 폈을 때 우리의 어린 마음은 경이와 감탄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부활이 바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작고 보잘 것 없는 씨앗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기도 하고 맛있는 열매가 맺힙니다. 씨의 겉모습만으로는 장래 형체를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고 그 생명에는 장래 형체를 보장해주는 유전인자가 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씨앗이 땅에 떨어지면 전혀 다른 새로운 형체가 생겨납니다. 사과나무를 본 사람이 없다고 칩시다. 사과 씨에서 사과나무와 아름다운 꽃과 향기로운 사과가 열릴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하나님은 그 뜻대로 각 종자에게 새로운 형체를 주십니다. 우리 몸의 부활도 씨앗의 원리와 똑같이 작용합니다. 부활 때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과는 완전히 다를 것입니다. 생화학자들에 의하면 80일 주기로 우리 몸의 세포가 완전히 바뀐다고 합니다. 피는 새로운 피로 교환되고 살과 뼈도 새로운 것으로 대체됩니다. 몸은 변해도 한 인격체로서 ‘나’라는 본질적인 존재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몸으로 부활해도 각 사람의 본질적인 존재와 개성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부활의 형체를 주시지만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에 따라서 각 사람에게 형체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의 죽음을 심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함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며 서로 사랑하고 선한 행실을 힘써야 합니다.
육체에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하나님은 사람에게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명석한 머리와 긴 팔과 섬세한 손과 튼튼한 다리를 주셨습니다. 짐승에게는 잘 달릴 수 있게 네 다리를 주셨습니다. 생쥐는 얼굴의 수염을 1초에 여러 번씩 앞뒤로 휘저으며 주변을 지도화(mapping)합니다. 뱀은 열을 효과적으로 감지함으로 앞에 있는 생쥐의 몸을 마치 타오르는 불꽃처럼 느낍니다. 새는 날 수 있는 날개가 있고, 가볍게 하늘을 날 수 있도록 뼈는 속이 비어 있습니다. 철새들은 이주할 때를 알고 길도 압니다. 그들은 별 외에 지구의 자기장을 활용하여 난다고 합니다. 물고기는 헤엄을 잘 칠 수 있게 비늘과 지느러미를 주셨습니다. 수중 포식자가 물고기 떼를 향해 돌진하면, 물고기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입니다. 그들은 아무 방향으로나 도망치지 않습니다. 서로 충돌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공격자의 주위를 마치 물처럼 흐릅니다. 이 기적 같은 조종의 위업은 물고기 옆면에 붙어 있는 ‘측선’이라고 불리는 센서 시스템이 한 몫을 합니다. 우주선을 타고 지구 밖으로 나가면 우주복을 입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압차로 몸이 터져버리거나 방사선으로 인해서 몸이 망가져 버립니다. 우리가 아는 세계가 전부가 아닙니다. 동물들이 감지하는 세계, 우리가 몰랐던 또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수많은 신호와 감각들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우리가 어둠이라고 부르는 것 속에 빛이 있고, 고요한 속에 소음이 있고, 텅 비어 있는 것 속에 놀랄만한 풍요가 있습니다.
“죽은 사람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을 것으로 심는데,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심는데, 영광스러운 것으로 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심는데, 강한 것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으로 심는데, 신령한 몸으로 살아납니다. 자연적인 몸이 있으면,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42-44).”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습니다. 부활할 때에 우리 몸이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현재 우리 몸과 부활 때에 우리 몸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차이가 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는 몸은 썩고 욕되고 약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서 조금씩 해체됩니다. 탄력 있던 몸매는 느슨해지고 배는 나오고 피부에는 기미와 주름이 생기고 단단했던 뼈와 근육은 약해져서 풀어지고 구부러집니다. 결국에는 늙고 쇠해서 한 줌 흙으로 사라집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인생을 소망하지만,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설령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다고 해도 잘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온 인생의 발자취를 돌아보면 부끄러움과 허물뿐입니다. 두려움과 소심함 때문에 도전해보지 못한 것들도 많고, 하고 싶고 의지가 있어도 환경이 따라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할 때에는 썩고 욕되고 약한 육의 몸을 벗어버리게 됩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 때에는 아름다운 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몸을 입게 됩니다. 부활한 몸은 늙지 않는 몸입니다.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부활한 몸에서는 우리를 괴롭혔던 악습도 사라질 것입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다 합쳐 상상한다 해도 실제로 부활한 몸의 영광을 우리는 그릴 수 없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는 것이 어렵지만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사시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되면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보여주신 몸, 부활하신 후에 보여 주신 몸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아담이 동식물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얼마나 총명하고 기억과 통찰이 뛰어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뇌의 10%밖에 쓰지 못하고 있는데 다 쓴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빌 3:21)”고 말씀합니다. 부활한 영광스러운 몸을 아름다운 옷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반석 데비 선교사님들이 태국의 왕족들이 입는 옷을 입은 사진을 보았습니다. 금과 보석으로 만든 옷이 화려해서 옷 입은 분들이 평범한 분들이지만 엄청나게 예쁘고 권위가 있어 보였습니다. 옷 입은 사람이 왕 같은 제사장들임을 알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입은 옷이 그 사람의 지위와 아름다운 면을 부각시키기 때문이죠. 부활한 몸이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부활의 몸은 우리의 개성과 성품을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바로 보며 “맞아, 맞아. 이게 이 사람의 감추어진 진짜 모습이었어”라며 감탄하며 놀랄 것입니다. “야, 너 참 멋있게 변했다.” “야, 너 롱다리 됐네?” “어쩜, 얘 기미, 주근깨가 싹없어졌네!” 형제들은 모두가 왕 같은 품위와 자매들은 공주 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부활한 후 모두 만나 이러한 감격의 해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 사람 아담은 흙으로 빚어서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 생령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십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 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받은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부활의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사랑이 넘치고 겸손과 온유의 사람들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고후4:16). 부활의 때에는 성품이 완성되어서 예수님처럼 완전히 하늘에 속한 사람의 형상을 입게 됩니다.
바울은 이제 한 가지 비밀을 이야기 합니다. 50-5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혈과 육을 지닌 인간의 몸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현재 우리의 몸은 이 세상에서 4차원에 맞게 살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썩기 때문에 이런 몸으로는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서 살려면 반드시 썩지 않는 몸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언제 이런 변화가 일어납니까? 예수님이 오심을 알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입니다. 나팔소리가 나면 죽었던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나서 부활의 새로운 몸으로 홀연히 변화됩니다. 그 때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도 함께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썩을 몸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몸을 입게 됩니다. 그 날은 믿는 자들에게는 승리의 날이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최후의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날을 소망하면서 언제든지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눅21:34-36). 그때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때까지 사망은 인류 위에 왕 노릇해왔습니다. 바울은 사망을 향해서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사망은 벌이 쏘는 것과 같이 우리를 쏩니다. 벌침을 통해서 독소를 몸속에 퍼뜨리는 것처럼 사망도 죄를 공격 무기로 삼아서 인간을 공격해 왔습니다. 죄는 율법의 힘을 등에 업고 우리를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그 죄를 통해서 죽음의 세력이 몸 안에 들어옵니다. 죽음 권세는 허무주의, 무의미, 무정, 무자비, 두려움, 염려, 근심 등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고통스럽게 합니다. 율법으로 인해 항상 죄의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립니다. 이와 같이 죽음은 죄를 통해서 자기 세력을 확장해 왔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이기는 것은 곧 죄를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죽음 권세를 박살내셨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 권세에서 자유롭게 해주셨습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고 슬퍼하며 허무에 시달리던 우리가 이제는 도전하고 개척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날을 생각하면서 감격에 겨워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복음 역사를 섬기면서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나의 수고가 헛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열매가 없을 때 흔들립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맡은 일에 얼마나 충성했는가로 판단하십니다. 작은 일에 충성할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인정해 주시며 상급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고,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어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명인의 길을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장차 부활의 몸을 이루는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쓰는 삶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이름으로 물 한잔을 준 것도 갚아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주의 일에는 확실한 결과가 있고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적인 이유에서라도 주님의 일을 위하여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물론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만들어서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원하시고,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열심히 해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장차 이루어질 부활의 영광을 소망하면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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