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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세서 2021년 신년4강(골3:18-4:18) 주께 하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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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21-01-24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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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4 강 
말씀 | 골로새서 3:18-4:18
요절 | 골로새서 3:23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번에 “김형석 교수의 백세 건강”이란 책이 나왔습니다. 그는 올해 101세인데 자신의 건강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 건강관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건강은 왜 필요할까요? 하나님께서 맡겨준 일을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제겐 건강이 1차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긴 일을 삶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살아온 것이지요. 어릴 때 자주 졸도할 정도로 허약하게 태어났지만, 지금껏 아파서 일을 못한 적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가정을 1차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먼저 주님을 잘 섬길 때 가정의 행복도 찾아오고 유지가 될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골로새교회는 빌레몬의 집에서 모였고, 지금은 빌레몬의 아들 아킵보가 에바브라 대신 주일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눔바와 그 부인의 집에서 모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가정규칙을 제시한 것은 가정교회를 전제로 한 것입니다(엡 5:22-6:9; 골 3:18-4:1). 다시 말하자면 가정규칙은 가정교회들의 생활과 윤리를 위한 지침이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한 것은 가정교회의 정당성을 더욱 확실하게 해줍니다(엡 5:22-33).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가정 교회를 섬겨야 할까요?

  첫째, 아내들에게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가정교회에서 제일 중요한 사람이 아내들이기 때문에 가장 먼저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여기서 복종은 자발적인 복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않아 그를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인류의 조상 아담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주신 저주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며, 고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는 것과 남편을 지배하려고 해도 남편이 그를 다스릴 것이라는 것입니다(창 3:16 새번역).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아내들은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함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남자를 돕는 배필이 되려면 성숙해야 합니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동등한 위치에서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돕는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질서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고전 11:3).” 에베소서 5:23에서는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남편을 가정의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입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우리도 복종을 통해서 예수님을 닮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이 좀 부족해 보이고,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잘 하지 못한다고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때로 하나하나 다 지적해줘야 되고, 챙겨줘야 합니다. 부족한 부분들이 많이 보이니 잔소리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주님은 남편 안에도 계십니다.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 안에 계신 주님께 복종하는 것이 됩니다. 남편을 존중하고, 높여주고, 그 말을 듣는 아내들의 복종을 통해서 주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남편은 존중을 받을 때 힘이 납니다. 남편이 원하는 것은 조건과 형편에 상관없이 아내가 존중해주는 것입니다.

존 비비어는 “순종”에서 자신의 가정이 어떻게 어려움 가운데 있다가 회복되었는지를 간증하고 있습니다. 그는 신약 성경은 남존여비 사상에 젖은 남자들이 쓴 책이기 때문에 부부간의 권위에 대해서는 그 말씀대로 따라서는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 때 그의 가정에 평화가 없었습니다. 부부가 늘 리더십을 가지고 다툼을 벌였습니다. 그렇게 시끄럽게 몇 년을 보낸 후 어느 날 그는 부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집의 머리로 삼으셨습니다. 당신이 따르든 말든 내가 인도할 것이요.” 이후에 존은 하나님이 주시는 안식과 평안을 누렸습니다.

그런데 존의 부인은 마음에 쉼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심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서 오래 오래 샤워와 목욕을 하곤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존을 훌륭한 지도자라고 생각한 적이 있느냐?” 그때 그녀는 “아니요. 천만에요. 저는 남편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존을 믿을 필요는 없다. 너는 나만 믿으면 된다. 너는 존이 이 집의 머리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네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 네 긴장과 불안은 스스로 가정의 머리가 되려고 해서 생기는 중압감과 짐이다. 그것이 네게는 멍에지만 남편에게는 외투다. 내려놓아라.” 그녀는 즉시 회개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분은 권력에 굶주린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샤워 실에서 곧 나와서 남편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랬을 때 평안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고 가정이 평화롭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깨닫게 된 것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남편의 선택이나 결정이 마음에 들고 납득될 때만 복종하라고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면 하나님이 친히 보호해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할 때 그녀는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해방감과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둘째, 남편들은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19절을 보십시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바울은 남편이 아내에게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과 소극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동시에 말씀하였습니다. 먼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괴롭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헬라어로는 ‘쓰라리게 만든다’, ‘비참하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새번역은 ‘모질게 대하지 마십시오’ 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아내를 괴롭게 하고 모질게 대하는 것일까요? 아내의 인격을 무시하고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일을 하느라 너무 바빠서 아내에 대해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을 때 무관심한 것입니다. 때로 감정적이 되어 육체적인 폭력 또는 언어폭력으로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남편들은 내가 어떻게 할 때 아내가 힘들어 하는가를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아내에게 힘들게 느껴진다면 그것을 즉시 중단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5은 말씀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셨습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특권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죄인들의 고통과 아픔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 섬기는 것입니다. 사랑은 약점을 이해하고 돕는 것입니다. 사랑은 헌신과 친밀함과 열정입니다. 헌신이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남편이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려면 아내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남자는 시각과 후각이 발달되어 있지만, 여성들은 청각과 촉각이 발달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은 달콤한 사랑의 말과 스킨십을 원하며 분위기를 좋아합니다. 남자는 켜짐-꺼짐 스위치가 있는 단순한 기계라면, 여자는 복잡한 조절기가 달려 있는 기계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변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남자들은 독자적인 분리를 통해 자아 정체감을 느끼지만 여자들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자아정체감을 느낍니다.

  말을 할 때도 남자는 사실중심, 결과중심, 요약해서 말을 하고, 여자들은 말을 할 때 과정중심, 확대해서 말을 합니다. 남자가 하루 1,0000개, 여자는 2,5000개 정도의 단어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남자들의 대화는 문제해결이나 설득의 수단이지만 여자들에게 있어서 대화는 개인적인 관계를 위한 다리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아내가 대화를 하자고 하면 왜 대화를 하기 원하는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남편은 무슨 문제를 해결해 줄까 생각하지만 아내는 대화를 통해 남편과의 관계가 더 깊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남성은 인정과 존경을 받기 원하지만 여성은 이해와 사랑을 받기 원합니다. 남성에게는 칭찬과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 반면, 여성은 귀중하게 여김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남편이 무언가를 할 때 박수를 쳐주고 잘 했다고 격려하면 남편은 살 맛을 느낍니다. 그러나 때마다 지적을 하고 판단을 하면 힘이 빠집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알고 확신이 들 때는 끝까지 맞서서 순종하도록 도와야 하지만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순종해야 합니다. 아내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 받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남편으로부터 무시 받는다고 생각하면 상처를 받고 좌절감에 빠지게 됩니다. 따라서 남편은 아내를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셋째, 자녀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부모를 가장 많이 의지하고,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자녀들은 커감에 따라 점점 독립적인 인격체로 존중받고 싶어합니다. 부모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합니다. 항상 부모의 말이 맞는 것은 아니란 생각이 있습니다.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 모든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어 합니다. 그렇기에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지키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모를 자녀들의 육적인 보호자로 세우셨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도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에베소서 6:2,3에서 그 이유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시고 축복해주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면 주님께서는 당신께 순종한 것으로 보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한 것 그 자체로 축복해주시는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순종하면 내 인생은 사라지고 부모님의 인생이 될 것 같은데,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최고의 약속을 주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때 하나님과 부모님의 축복을 겸하여 받고, 더욱 잘 세워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녀들이 간절히 바라는 대로, 때가 되면 독립과 자립도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의 공급 가운데 탁월하게 살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십니다. 부모에게 순종할 때 자녀들이 원하는 것들까지도 다 해주시는 주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넷째,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아비들이 자녀를 노엽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기 소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격노케 하는 것은 쓴 뿌리를 심는다는 뜻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잔소리를 하고, 감정적으로 대할 때, 권위로서 거친 말을 할 때, 또 다른 자녀와 비교할 때 격노케 됩니다. 이렇게 하면 자녀가 장성하였을 때 뿌린 것들을 되돌려 받습니다. 게다가 상처가 치유될 때까지 무기한으로 섬겨야 합니다. 부모들은 자녀를 자신의 소유로 여겼음을 회개하고, 자녀가 주님의 양이요 존중받아야 할 독립적인 인격체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녀를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자녀를 주와 같이 대하는 것입니다. 책망할 때에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알려주고 온유하게,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가정에 대해서 뿐 아니라 사회에 종사하는 종들과 상전들에게도 말씀합니다.
다섯째, 종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22-25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느니라.” 바울 당시 로마에 약 6000만명의 노예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노예 의사도 있고, 노예 가정교사도 있고, 로마의 최고 학문 기관에서 학문을 가르치는 노예 박사들도 있었습니다. 로마 사회 체계는 노예들에 의해서 유지되었습니다. 이런 노예들 위에 무식한 상전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싸움 밖에 모르고, 자랑할 것이라고는 힘밖에 없는 그런 주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주인을 섬긴다는 것으로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매일 반복되는 삶에 짜증도 났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종이 상전에게 할 수 있는 복수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대충하는 것입니다. 상전의 눈에 띄는 곳에서는 열심히 하는 척을 하고, 안 보이면 농땡이를 피우면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행동하는 종에게 “불의의 보응을 받을 줄 알라” 경고하십니다. 어떻게 종들이 상전에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23, 24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전 안에 주님이 계신다는 뜻입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일을 감당하면, 그 일은 주님을 섬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때, 주님께서는 기업의 상을 주시리라 약속하십니다. 일을 하면 할수록 하늘에 나의 상급이 계속해서 쌓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전에게도 마음을 다해 순종할 수 있습니다. 또한 상급을 바라봄으로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노예제도를 찬성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가르침은 노예제도를 뛰어넘고 있습니다. 그는 빌레몬에게 노예인 오네시모를 형제로 대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리고 상전인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인 것을 상기시켜서 종들을 공평하고 의롭게 대하도록 권면합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종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어찌하든 위에 자리를 차지하고 군림하여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으로 사는 것보다 노력해서 상전으로 올라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노예들도 기업의 상을 주님께로부터 받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로 대우받기를 거절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우리도 현재 위치에서 마음을 다하여 맡겨진 일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섯째, 상전들도 종들을 대할 때 배려해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은 종들이 하는 것이 기준에 못 미칠 수 있습니다. 더 요구하고, 빡 세게 굴리고 싶은 마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경영자 입장에서는 자본을 들여 일군 사업이기에 손해를 보면 안 되고, 본전은 뽑아야 한다는 심리가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지만 종들도 현재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상전은 단지 손해 보지 않으려 할 때, 종들은 당장 가족들을 먹일 빵조차 살 수 없는 상황일 수 있습니다. 그들을 이해하고, 배려해서 의와 공의로 베풀어야 합니다. 1b절에 보면 “너희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아라”. 하늘의 상전이신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상전들이 종들을 배려하면, 하늘의 상전도 상전들을 배려하실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 사업이 망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일터에서 의와 공의가 세워지는 것을 인하여 갑절로 축복하십니다. 모든 일들이 잘 풀리게 하실 것입니다. 하늘의 상전이 살아계심을 믿을 때, 종들을 배려하고 넉넉하게 베풀 수 있습니다.
 
  4장 2절을 보십시오.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깨어 있으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대화를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가정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일을 목적으로 세워졌습니다. 우리는 구원이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 문을 열어 성경을 공부하고 싶은 소원을 주십니다. 그때 우리가 다가가서 복음을 전하고 사랑하며 섬깁니다. 하나님께서 가정교회에서 드리는 기도를 받으시고 전도와 구원 역사를 친히 이루어 가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하였습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우리가 세월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제한된 시간 내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영혼을 구원하려면 시간을 구속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야 할 사람들을 알려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그들과 만나서 항상 은혜 가운데서 말을 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소금은 기지와 재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비그리스도인과 이야기 할 때는 은혜롭게 재치 있게 말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정 교회에서 사랑과 섬김, 은혜를 풍성히 나누면 다른 사람들에게 할 말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조급하지 말고 먼저 주님의 공급을 잘 받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두기고 편에 이 편지를 보내면서 성도들에게 문안을 합니다. 두기고는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또 빌립보서와 빌레몬서를 전달한 바울의 동역자입니다. 그는 사랑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종이 된 자입니다.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냅니다. 그는 빌레몬의 종이었다가 바울을 통해 회심을 하고 다시 빌레몬에게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그들에게 문안을 합니다. 그들은 할례파이나 이들만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에바브라가 그들에게 문안합니다. 그는 골로새 교회의 개척자로서 항상 그들을 위하여 애써 기도하고 그들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였습니다.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그들에게 문안을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부터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고 합니다.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합니다. 아킵보는 메시지 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신약교회는 가정교회였습니다. 313년까지 이런 형태였습니다. 가정교회를 통해서 복음은 로마 인구의 53%를 복음화시켰고 이 힘에 의해서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였습니다. 그 이후에 바실리카에서 모임으로 사제와 평신도로 구분이 되고 평신도들이 사역을 빼앗겼습니다. 교회의 가족공동체성이 사라지고 교회권력이 세속화되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약교회의 모습과 그 정신을 회복하여, 생명을 구원하고 제자를 양성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이 함으로 아름다운 신앙생활, 더 나아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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