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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세서 2021년골3강(3:1-17)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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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2회 작성일 21-01-1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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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3 강
말씀 | 골로새서 3:1-17
요절 | 골로새서 3:16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지난 주에 16개월 된 정인이 구타 살해 사건으로 전국이 시끄러웠습니다. 양부모 모두 개신교 목사의 가정에서 자란 목회자 자녀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은 미션스쿨을 졸업했고 캠퍼스 커플이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고, 말씀도 많이 공부했을텐데… 저는 목회자로서 이들의 신앙교육이 어떠했기에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을까 깊은 회개와 반성을 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심을 받은 자들의 삶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신자로서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첫째, 위의 것을 찾으라(1-11).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고, 또한 그를 죽은 사람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여 내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에 나의 죄도 죽었고, 새 생명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대개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까? 틈만 나면 먹을 생각, 틈만 나면 누울 생각, 틈만 나면 유튜브나 드라마를 볼 생각, 틈만 나면 놀려고 하는 생각, 틈만 나면 돈이나 벌 생각, 틈만 나면 자매 생각, 틈만 나면 형제 생각, 틈만 나면 넓은 아파트에서 좋은 차를 타고 다닐 생각, 틈만 나면 출세해서 무엇인가를 보여주려는 생각 등을 합니다. 생각이 행동을 지배하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자연히 음란과 게으름과 편안한 것, 세상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자는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열망하는 것을 찾고 생각합니다. 위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이때 어떻게 하셨을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를 본받고자 힘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섬김을 받고자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이시고 영혼의 기갈 든 사람들을 생명의 말씀으로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교제하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르치셨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죄인들을 정죄하고 멀리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죄인을 분리시킴으로써 죄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고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없다고 말씀하시며 죄인들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시며 사랑으로 섬기셨습니다. 가장 시급한 섬김은 죽어가는 자를 살리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상처를 입고, 고통하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것입니다. 목자의 섬김과 사랑을 통해서 양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고 그 안에서 자라게 됩니다.

  사람들이 돈을 벌고 출세하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의 섬김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쥘수록 부리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쉽습니다. 사회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섬김을 많이 받게 됩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이 높은 지위에 올라갈수록 섬기는 삶을 살게 될 때 그 영향력은 커집니다. 자기의 특권을 내려놓고 섬길 때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자기를 낮추시고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대속제물로 드리기까지 섬기셨기에 우리가 그 사랑에 감동을 받고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크고자 하는 자는 누구든지 다른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높은 지위와 권력을 주시는 것은 목자의 마음으로 섬기라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섬기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섬김을 연습해야 합니다. 자연스럽게 될 때까지 연습해야 합니다. 섬김을 받는 것도 기쁘지만 섬기는 것은 더 깊고 성숙한 기쁨을 맛보게 합니다. 목자님들이 그런 기쁨을 알기 때문에 힘들지만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는 집안에서 섬김을 받기만 하다가 타락하기 쉬운 것을 깨닫고 설거지를 하며 섬김을 실천할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밀한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설거지를 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최근에는 막내 딸 은혜가 설거지를 하면서 ‘꼬마 주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8살된 남다애가 피곤한 엄마를 도와서 설거지를 하는 사진을 보고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아이가 장차 어찌될꼬 기대하며 축복해 주는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삶을 살 때 마음이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다른 사람의 수고에 감사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자기 고집대로 사는 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제멋대로 사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주로 믿고 영접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섬김과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점차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기 위해서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우리가 위의 것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옛 사람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합니다. 죽었기 때문에 관계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죽은 사람은 어떤 이념이나 감각이나 생각이나 기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땅의 것에 대해 이미 죽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에 대해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리고 세상은 그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갈6:14). 죽은 것을 붙들고 사는 사람은 비정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죽은 것을 찾고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취어져 있기에 우리는 위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3b).” 이는 현재적인 일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감추어진 하늘의 영적 생명입니다. “감취어졌다”는 것은 비밀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감추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기에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이 원망할 때 위를 보지 않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다가 실수를 했습니다. 반석을 한 번 쳐야 하는데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두 번 쳤습니다(민 20:11). 그가 위를 쳐다보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땅을 보고 원망하는 백성을 보고 세상을 보다가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행 7:56). 만일 스데반이 땅을 보았다면 원수들이 이를 갈고 짱돌을 들어 그를 죽이려고 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만약 분노에 차서 이를 갈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는 공포심으로 얼굴이 창백해지고 마음에 평강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보았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천사와 같이 빛나는 얼굴로 그들을 용서하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용서의 기도를 들을 때 핍박자 바울의 마음에 금이 가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절망 중에 위를 보았을 때 하늘의 수많은 별들 속에서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힘들고 어려울 때 눈을 들어 위의 것을 생각하고, 위의 것을 찾기를 기도합니다. 반드시 주님으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으라(5-15). 5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지체를 죽이라”는 원어의 표현이 먹이를 주지 마라(stop feeding)입니다. 우리 안에 선한 개와 나쁜 개가 싸우고 있습니다. 갈5:17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싸우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이 갈등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나쁜 개에게 먹이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나쁜 소욕에게 기회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성령의 소욕을 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로마서 8:13에서는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검은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고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욕체의 소욕을 죽일 수 있습니다. 17절을 보면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소원을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행할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힘입어서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육체의 소욕을 죽여야 합니다. 땅에 있는 것 중에 제일 먼저 죽일 것은 음란과 부정입니다. “음란”이란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동을 의미합니다. “부정”은 더럽고 그릇된 행위를 말합니다. 음란과 부정은 사람의 영혼을 부패시킵니다. 그리고 성도가 죽여야 할 것은 사욕과 악한 정욕입니다. “사욕”은 격렬한 충동을 가리키고, “악한 정욕”은 일반적이고 잠재적인 정욕을 가리킵니다. 음란과 부정이 행동적인 표현이라면 사욕과 악한 정욕은 마음에 일어나는 충동과 욕심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죽여야 될 것은 탐심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 탐심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죄 중에서 가장 뿌리 깊은 죄입니다. 욕심은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가져 옵니다. 탐심으로 가득 찬 사람은 결코 현재 소유한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욕심을 부립니다. 탐심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아서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러한 탐심은 그 대상을 하나님보다 위에 두기 때문에 우상숭배가 됩니다. 탐욕스러운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늘 배를 섬기는 배신자(胃信者)가 됩니다. 우리가 위의 것을 찾고 생각하기 위해서는 탐심을 제어해야 합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을 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게 됩니다(6).
7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는 그 가운데 행하였으나” 과거에 그리스도를 믿기 이전에 우리의 옛 생활은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탐욕과 탐심 가운데 행하는 삶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을 부끄러워하고 버려야 합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부끄러운 거짓말은 입술로 범하는 죄입니다. 말이 마음에서 나오고 그 말을 듣고 우리의 뇌가 명령을 내린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동을 제어하기 전에 말을 제어해야 합니다. 행동이 변화되기 전에 지식과 말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말은 그 사람의 인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아름다운 말, 은혜로운 말, 경어를 쓰게 되면 자연스럽게 행동을 조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옛 사람과 그 행위는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가 변화된 삶을 살려면 먼저 가치관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치관이 하나님 나라의 지식으로 새롭게 되어야 합니다. 이 지식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실제로 능력을 발휘하는 생생하고 살아있는 지식입니다(요일2:3). 하나님은 새 생명을 얻은 우리의 지각을 여셔서 살아있고 신령한 지식을 알게 하십니다.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 이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입니다(엡 4:24). 우리가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변화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말씀을 들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설교가 귀에 들어옵니다. 이전에는 성경책이 수면제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이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11).

  우리가 옛 사람과 그 행위는 벗어 버리고 입어야 할 새 사람의 옷은 어떠합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거룩한 자들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제 성도는 긍휼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자비”란 친절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서로 용납하고, 또 피차 용서해야 합니다(13).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했습니다(14). 새 생명이 내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에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등이 옷을 입은 것과 같이 삶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이 사랑은 희생적인 사랑이요, 변함이 없는 사랑이요, 끝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수고할 때 힘들지만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사랑의 수고는 의복을 띠로 묵어 단정하게 하듯이 신자들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띠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는 죄로 인해 깨어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회복하십니다.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질 때 평강이 찾아옵니다. 이 평강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잔잔하게 흐르는 강과 같이 평강이 우리 속에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평강은 참된 사죄와 구원,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었음을 확신하는 깊은 안도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게 될 때 이런 평강을 누리게 됩니다. 코로나 판데믹으로 인해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있습니다. 앞날을 생각해볼 때 염려가 됩니다. 이런 가운데 어떻게 주님의 평강으로 다스리게 할 수 있을까요? 빌립보 4:6,7은 말씀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있는 모습 그대로 주님께 나아가 나의 염려를 아뢰십시오. 믿음이 안 생기면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힘들면 힘들다고 주님 앞에 고백하며 그 품 안에서 쉼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옛 사람의 옷을 벗고 새 사람의 옷을 입어 점차로 주님을 닮아갑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여 감사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우리는 일대일과 그룹으로 성경을 공부하고, 일용할 양식도 먹고, 소감도 쓰고 나눕니다. 성경을 암송하고 필사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UBF 세계 대표이신 윤모세 목자님은 지난 약 8개월 동안 약 3천 구절을 다시 한 번 암송하였다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마음에 말씀이 풍성히 거하게 되자 거의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떠오르고, 말씀에 기초하여 사고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도전과 시련 가운데서도 그의 마음에 하늘의 기쁨이 넘쳤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곧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인격체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충만히 거할 때 성령이 충만하게 됩니다(엡 5:18-20). 새 생명을 얻은 신자들이 변화된 삶을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합니다. 지식욕을 채우려는 욕심이나 의무감으로 말씀을 공부하거나, 앵무새 같이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 소화를 시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죄의 소욕이 물러나고 거룩한 소원이 생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풍성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혜의 보고입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인생 문제 앞에서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주는 지혜로 인생 문제가 해결될 때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게 됩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풍성히 거하게 하려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과 교제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자라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깨달을 때 그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는 소원이 생깁니다. 더 나아가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그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가 행하시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에서 깊어지고, 그를 인격적으로 알아가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주님과 깊이 연합하게 되고 그를 닮아가게 됩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서 나의 인생 길을 인도하십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 매일 5시 30분쯤에 일어나서 일용할 양식을 먹고 성경을 세장 이상씩 읽었습니다. 영어 성경을 일독 하고 이제 새 번역 성경으로 읽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로 인해 매일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하루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제게는 가장 즐거운 시간입니다. 어려운 가운데서 동역자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흙수저로 태어나서 고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고생이 없이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원 삼아 믿음으로 못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하게 하여 그와 교제하고 예수님을 조금이라도 더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으로 우리 안에 풍성하게 하사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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