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세서 2021년 신년2강(2:1-23)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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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신년 제 2 강
말씀 | 골로새서 2:1-23
요절 | 골로새서 2:6,7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 교회는 거짓된 가치관들과 사상들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인간의 철학(8)과 동방의 신비주의, 천사숭배, 유대교의 전통에 대한 강조와 율법주의(11,16) 등이 교회를 위협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상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등이 있습니다. 현대판 신(神) 구글은 즉각 답을 해줍니다. 구글에 기도하면 반드시 대답이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구글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응답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신’이라고 말합니다. 또 각 교회에 문제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알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며 그 안에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그밖에 바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사랑으로 결속되어 마음에 위안을 받고,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아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애매모호하면 이단들에게 넘어가기 쉽기 때문에 확실한 이해의 풍성에 이르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식은 어떤 것을 아는 것이고, 지혜는 지식을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원에 관련된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타락했고, 어떻게 구속을 받고 회복이 되는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지식과 지혜는 근본적이고 다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교묘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큰 혼란을 준 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골로새 교회 뿐 아니라 초대 교회와 오늘날에도 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본질을 아는 어떤 신비한 영적 지식, 깊은 지식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지식은 자신들과 같은 영적인 계급의 사람들만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가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으로 족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상한 사상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들 가운데는 자신들만 아는 성경 지식, 깊은 말씀, 영적 지식이 있다며 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들을 속이는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사숭배, 율법주의, 신비주의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묘하게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헛됩니다. 공허합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서 건질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랐습니다. 초등학문은 수준이 낮고, 천박한 것입니다. 세계경영학박사들이 연구하는 것이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을 어느 위치에 놓는 것이 가장 구매력을 높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인가 등등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유전공학박사들이 개미의 뒷다리의 한 부분, 구더기, 세포 하나를 붙들고 일생을 씨름합니다. 물론 이런 과학들을 통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이나 당시 골로새에 유행했던 여러 철학이나 사상들은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모든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 그리스도는 고등학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받았습니다. 주로 받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왕으로, 주인으로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나를 죄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오 나는 그의 종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기 전에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행하고 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은 이후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의 목적과 뜻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려면 가치관의 변화, 성품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가치관이 바뀐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뿐더러 정반대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나의 마음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회개가 있기 까지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서 절망하거나 율법적인 자세로 해결하지 말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상처를 받으셨고 그가 상하심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를 주님이 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죄의 속박과 정죄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성령께서 지적하실 때마다 그 죄를 고백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요일 1: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를 닮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고 그 사랑의 관계가 자라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엠마오 상의 두 제자가 언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의 말씀도 들었지만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주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주님이 빵을 떼어 감사기도를 올리시고,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렸을 때 그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던 길에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삶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팀 체스터는 「예수님이 차려 주신 밥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전도하기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은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의 사랑을 체험할 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그를 배우고 닮아갑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던지,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만 행하지 않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던지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이 시제는 “단번에 뿌리가 박혀져 버린”입니다. 한번 뿌리를 박고 나면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내가 섬기는 주가 예수님임을 고백하고 마음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바꾸거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세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에게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서 그와 연합되어야 합니다. 나의 내면, 무의식 깊은 곳 속에서 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의 구원에 뿌리를 내리고, 그의 부르심에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고난이나 불같은 시험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돌밭은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나무의 크기는 뿌리가 내려간 만큼 크게 되어 있습니다. 깊이 뿌리 내릴 때 가뭄에도 시원한 물을 빨아들여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 세움을 받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는 건물의 비유입니다. 건물을 높이 올리고자 할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안에서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 가고 있습니다. 헛된 교훈에 현혹되지 말고 주님이 주신 복음 진리의 교훈을 믿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뿌리는 기초이고, 세움을 받는 것은 과정이고, 굳게 서는 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굳게 선 신자들은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굳게 설 때 우리는 시험과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적인 사랑과 인생 연단을 통해서 순수하게 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셋째, 그 안에서 행하려면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수동형인데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은 능동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복된 환경 속에서 감사를 잃어버렸을 때 사탄의 말을 듣고 회의하다가 넘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되었을 때 감사하기보다 욕심을 내고, 이방신을 따르다가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어리석게 되었습니다(롬 1:21).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려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감사가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힘든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딱딱해지고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면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새번역).” 감사를 적당히 하지 말고 넘치게 해야 합니다. 넘치게 한다는 뜻은 둑 위로 넘쳐흐르는 강물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왜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고후 4:15은 말씀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감사를 하게 되면 은혜가 더하여 넘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종이 주인에게 감사를 하면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면 은혜가 넘치게 되고 그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이후로 골로새 성도들을 속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신자들을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닙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성한 충만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나 있습니다. 충만은 “하나님 되심의 모든 것,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거하신다는 말씀은 물질은 악하며 따라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갖지 않으셨다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대한 논박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제는 이 충만이 영속적인 경험임을 지적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태어납니다. 그의 영적 성장은 “보태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양을 공급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목련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떨어져서 추하게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란 저런 것인가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 허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여”진 것입니다(엡 3:19).
이는 너무나 신비롭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찌 죄악된 인간이 감히 신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신성의 충만이신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고, 필요한 은사로 충만해집니다. 그때 주님을 위한 열정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 외에 어떤 “새로운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요 위험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믿음의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조정하고 순종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놀라운가 체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서 자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겸손이 더더욱 깊어지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깊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장차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신령하고 강하고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10b). 1:18에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나 목소리 큰 사람들이나 성도들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 깨어지고 빚어져야 합니다. 머리되신 주님께 철저히 민감하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머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고, 통제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만약에 머리가 명령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지체된 성도들이 교회에 붙어 있으되 활동을 하지 아니하고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으면 곧 말라 버리고 병들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인도하고 명령하고 지배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또 그의 종들을 통해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이것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소원을 주시는 만큼 소원하고, 주님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일을 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신 소원보다 더 큰 열심을 갖고, 주님이 주신 능력보다 더 큰 일을 하고자 할 때 탈이 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이 소원과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일을 계획하고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가르침들이 또 있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7절에서는 음식 규정과 안식일과 절기 준비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겨우 살만 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살만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과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12).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버리시고,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기들의 경건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적인 고상함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음식과 거룩한 날들을 지키면 교회에서 영적 엘리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고생하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또 18-23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천사 숭배를 주장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 천사들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 아닙니까?(히 1:14 새번역)” 23절에 보면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로운 것은, 실제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를 극복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속이는 철학과 사상은 무엇입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인간을 차갑고 잔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물질 중심, 돈을 많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세상의 경영, 마케팅 논리가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이 이 사회의 주류 사상이 되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이 정치, 경제, 문화계를 주름잡고 휘두르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주의는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불신앙과 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의 사상에 홀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져서 그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 되심을 알고 그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 순종하며 그를 일생 알아나가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과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하던 일을 계속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골로새서 2:1-23
요절 | 골로새서 2:6,7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골로새 교회는 거짓된 가치관들과 사상들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영지주의, 인간의 철학(8)과 동방의 신비주의, 천사숭배, 유대교의 전통에 대한 강조와 율법주의(11,16) 등이 교회를 위협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세상의 포로로 만들어 버리는 세속주의, 인본주의, 물질주의 등이 있습니다. 현대판 신(神) 구글은 즉각 답을 해줍니다. 구글에 기도하면 반드시 대답이 돌아옵니다. 사람들은 구글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에 응답하는 21세기의 새로운 신’이라고 말합니다. 또 각 교회에 문제도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알고 그 안에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의 충만을 누리며 그 안에서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과 그밖에 바울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애를 쓰고 있습니다. 바울이 애를 쓰고 있는 것은 그들 모두가 사랑으로 결속되어 마음에 위안을 받고,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깨달아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공동번역은 풍부하고도 완전한 이해력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예수님에 대해서 애매모호하면 이단들에게 넘어가기 쉽기 때문에 확실한 이해의 풍성에 이르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비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지식은 어떤 것을 아는 것이고, 지혜는 지식을 분별하고 적용하는 능력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구원에 관련된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어떻게 타락했고, 어떻게 구속을 받고 회복이 되는지를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지식과 지혜는 근본적이고 다함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교묘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큰 혼란을 준 사상 중의 하나가 바로 영지주의였습니다. 영지주의는 골로새 교회 뿐 아니라 초대 교회와 오늘날에도 큰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참된 본질을 아는 어떤 신비한 영적 지식, 깊은 지식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 지식은 자신들과 같은 영적인 계급의 사람들만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 안에 모든 지식과 지혜가 다 들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으로 족합니다. 그러니 다른 이상한 사상에 귀 기울이지 말고 예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단들 가운데는 자신들만 아는 성경 지식, 깊은 말씀, 영적 지식이 있다며 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들을 속이는 자들이 또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사숭배, 율법주의, 신비주의 등입니다. 이런 것들은 묘하게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헛됩니다. 공허합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에게서 건질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랐습니다. 초등학문은 수준이 낮고, 천박한 것입니다. 세계경영학박사들이 연구하는 것이 백화점에 들어가서 상품을 어느 위치에 놓는 것이 가장 구매력을 높이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 것인가 등등 기본적인 것들입니다. 유전공학박사들이 개미의 뒷다리의 한 부분, 구더기, 세포 하나를 붙들고 일생을 씨름합니다. 물론 이런 과학들을 통해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이나 당시 골로새에 유행했던 여러 철학이나 사상들은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모든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 그리스도는 고등학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받았습니다. 주로 받았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왕으로, 주인으로 영접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나를 죄의 포로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시오 나는 그의 종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기 전에 내 인생의 주인은 나였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가 나를 위해서 행하고 내 마음에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행한다는 것은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로 받은 이후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내 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집니다. 그의 목적과 뜻을 따라 살고 싶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믿으면서 그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행하려면 가치관의 변화, 성품의 변화, 행동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먼저 성경공부나 설교를 통해 세상 나라의 가치관을 뛰어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합니다. 가치관이 바뀐 다음에 중요한 것은 성품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 아침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읽고 감동을 받았더라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뿐더러 정반대의 행위를 하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나의 마음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통회 자복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회개가 있기 까지 성령의 책망하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깨닫고 나서 절망하거나 율법적인 자세로 해결하지 말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상처를 받으셨고 그가 상하심으로 내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저주를 주님이 내 대신 다 받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했지만 죄의 속박과 정죄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투쟁합니다. 그는 주님께서 자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자신의 죄를 성령께서 지적하실 때마다 그 죄를 고백함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요일 1:9).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를 닮고 싶은 소원도 주시고, 능력도 주십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아니요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고 그 사랑의 관계가 자라나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엠마오 상의 두 제자가 언제 삶의 방향을 바꾸었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행하고, 그의 말씀도 들었지만 가던 길을 계속 갔습니다. 주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 자리에서 주님이 빵을 떼어 감사기도를 올리시고,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이 열렸을 때 그들은 절망에서 소망으로, 자기 살 길을 찾아 떠나던 길에서, 주님의 길을 따라 걷는 삶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팀 체스터는 「예수님이 차려 주신 밥상」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전도하기 위해서,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하면서 그 방법은 집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대화를 나누고 그의 사랑을 체험할 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시면서 우리는 그를 배우고 닮아갑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주님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집을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짓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던지, 말씀을 듣고 깨달았지만 행하지 않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던지 선택은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살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그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이 시제는 “단번에 뿌리가 박혀져 버린”입니다. 한번 뿌리를 박고 나면 이제 끝입니다. 우리는 내가 섬기는 주가 예수님임을 고백하고 마음으로 결단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바꾸거나 교환이 불가능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내리고 그 세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에게서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서 그와 연합되어야 합니다. 나의 내면, 무의식 깊은 곳 속에서 예수님께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의 구원에 뿌리를 내리고, 그의 부르심에 뿌리를 내리고, 그 말씀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고난이나 불같은 시험이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돌밭은 말씀의 뿌리가 없어서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보는 나무의 크기는 뿌리가 내려간 만큼 크게 되어 있습니다. 깊이 뿌리 내릴 때 가뭄에도 시원한 물을 빨아들여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둘째, 세움을 받고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이는 건물의 비유입니다. 건물을 높이 올리고자 할수록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 안에서 세워져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 가고 있습니다. 헛된 교훈에 현혹되지 말고 주님이 주신 복음 진리의 교훈을 믿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뿌리는 기초이고, 세움을 받는 것은 과정이고, 굳게 서는 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굳게 선 신자들은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굳게 설 때 우리는 시험과 환난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십자가의 고난과 희생적인 사랑과 인생 연단을 통해서 순수하게 되고 견고하게 됩니다.
셋째, 그 안에서 행하려면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수동형인데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은 능동형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이라는 복된 환경 속에서 감사를 잃어버렸을 때 사탄의 말을 듣고 회의하다가 넘어졌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모든 것이 넉넉하게 되었을 때 감사하기보다 욕심을 내고, 이방신을 따르다가 멸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어리석게 되었습니다(롬 1:21). 이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행하려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감사가 충만해야 합니다. 물론 힘든 가운데 있으면 마음이 딱딱해지고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면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새번역).” 감사를 적당히 하지 말고 넘치게 해야 합니다. 넘치게 한다는 뜻은 둑 위로 넘쳐흐르는 강물의 모습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왜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고후 4:15은 말씀합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감사를 하게 되면 은혜가 더하여 넘치게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종이 주인에게 감사를 하면 은혜를 더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감사하면 은혜가 넘치게 되고 그 말씀을 행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이후로 골로새 성도들을 속이는 세상의 가치관에 대해서 주의를 주고 이를 바로 잡고자 합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신자들을 사로잡을까 주의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닙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신성한 충만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나타나 있습니다. 충만은 “하나님 되심의 모든 것,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의 모든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 거하신다는 말씀은 물질은 악하며 따라서 예수께서는 인간의 몸을 갖지 않으셨다는 영지주의의 가르침에 대한 논박입니다. 뿐만 아니라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시제는 이 충만이 영속적인 경험임을 지적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날 때,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태어납니다. 그의 영적 성장은 “보태짐”을 통해서가 아니라 “영양을 공급받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저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했습니다. 대학 1학년 때 목련꽃이 화려하게 피었다가 떨어져서 추하게 뒹구는 모습을 보면서 인생이란 저런 것인가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참 허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생명의 충만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덧입을 때, 그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충만하여”진 것입니다(엡 3:19).
이는 너무나 신비롭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찌 죄악된 인간이 감히 신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신성의 충만이신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의 보호와 인도하심과 공급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능력으로 충만해지고, 지혜로 충만해지고, 필요한 은사로 충만해집니다. 그때 주님을 위한 열정이 생깁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체험 외에 어떤 “새로운 체험”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르침은 잘못된 것이요 위험한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할 때 믿음의 갈등이 있습니다. 갈등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나의 뜻으로 조정하고 순종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그 말씀에 순종할 때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그의 예비하심이 얼마나 놀라운가 체험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서 자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고, 겸손이 더더욱 깊어지고,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도 깊어집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다가 죽으면 장차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신령하고 강하고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10b). 1:18에서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목사나 목소리 큰 사람들이나 성도들이 교회의 머리 노릇을 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갈등이 생기고 문제가 생기고 분열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 깨어지고 빚어져야 합니다. 머리되신 주님께 철저히 민감하게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머리는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고, 통제하고 조절하는 역할을 합니다.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만약에 머리가 명령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사람은 몸이 정상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지체된 성도들이 교회에 붙어 있으되 활동을 하지 아니하고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으면 곧 말라 버리고 병들게 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인도하고 명령하고 지배하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하시는 것을 보고 따라야 합니다. 주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또 그의 종들을 통해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 안에 소원을 주시고 이것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소원을 주시는 만큼 소원하고, 주님이 능력을 주시는 대로 일을 하면 됩니다. 주님이 주신 소원보다 더 큰 열심을 갖고, 주님이 주신 능력보다 더 큰 일을 하고자 할 때 탈이 나게 됩니다. 반대로 주님이 소원과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큰 일을 계획하고 감당해 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하심에 민감하게 순종해야 합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를 위협했던 가르침들이 또 있었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17절에서는 음식 규정과 안식일과 절기 준비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 할례는 육체의 할례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는 겨우 살만 베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장사되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는 것입니다. 살만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을 완전히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 것입니다. 골로새 성도들은 과거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습니다(12).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불리한 조문들이 들어 있는 빚문서를 지워버리시고,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셔서, 우리 가운데서 제거해버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통치자들과 권력자들의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개선 행진에 포로로 내세우셔서, 뭇 사람의 구경거리로 삼으셨습니다. 그들은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기들의 경건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종교적인 고상함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음식과 거룩한 날들을 지키면 교회에서 영적 엘리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고생하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또 18-23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천사 숭배를 주장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 천사들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들은 모두 구원의 상속자가 될 사람들을 섬기도록 보내심을 받은 영들이 아닙니까?(히 1:14 새번역)” 23절에 보면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로운 것은, 실제로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를 극복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를 속이는 철학과 사상은 무엇입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인간을 차갑고 잔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물질 중심, 돈을 많이 주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세상의 경영, 마케팅 논리가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이 이 사회의 주류 사상이 되었습니다. 인본주의 사상이 정치, 경제, 문화계를 주름잡고 휘두르고 있습니다. 세속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주의는 창조주와 구속주에 대한 불신앙과 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의 사상에 홀리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져서 그의 다스림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 되심을 알고 그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고 세움을 입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 순종하며 그를 일생 알아나가고 닮아갈 수 있습니다. 환난과 유혹이 많은 이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하던 일을 계속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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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골로새서-2mv2.hwp (25.0K)
0회 다운로드 | DATE : 2021-01-10 14:2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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