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4년 골4강(3:18-4:18) 주께 하듯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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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골로새서 제 4 강
말씀 | 골로새서 3:18-4:18
요절 | 골로새서 3:23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과 직장에서도 으뜸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는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을 변화시키십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깨어진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문제아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버려지고 있습니다. 가정의 파괴는 말세의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우신 기관은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건강할 때 개인도 꿈을 성취하며 성공하고 사회와 국가가 번영합니다. 가정을 회복하는 사명과 소망이 교회에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작은 천국인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스천 윤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주님과 관련된 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라. 주님이 모든 가정의 으뜸이 되신다면 우리 사회도 변화되고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남편과 아내의 윤리. 18,19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자와 여자는 아주 다른 존재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듯이 신체 구조, 사고방식이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의 신비는 바로 다른 두 인격체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신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믿음으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진리를 깊이 이해할수록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뒤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의무이며 강제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 때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좀 부족하더라도 복종함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남편의 권위를 세웁니다. 이렇게 할 때 아내는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적인 성장과 자유와 충만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 갈비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둘은 동등이지만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남편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울 때 아내도 존재감을 느낍니다. 타락한 여자는 남편을 무시하고 휘어잡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부부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복종할 때 아내도 각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듯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두 배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아내를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지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쓰라리게 하다, 비참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원문으로는 끝이 뾰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남편은 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유익과 만족을 추구하여 아내의 마음을 송곳처럼 찔러댑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자기의 말을 빨리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 괴롭습니다. 또 아내는 남편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때 힘이 듭니다. 아내들은 짐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아내 노릇하는 분들은 자녀교육, 집안 일, 남편 내조, 때로는 직장 일까지 하면서 몸이 둘 셋이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그런데 권위적인 남편은 집안일을 잘 거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괴롭습니다. 또 동역이 안 될 때 아내들은 괴롭습니다. 동역이 되면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 괴롭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큰 소리를 칠 때 괴롭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연약함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자를 무시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상황이 반전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남편들은 나이가 들수록 집안에서 권위가 사라지고 천덕꾸러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면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고 행복할 것입니다. 남편의 권위는 큰 소리나 힘이 아니라 사랑하는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아내도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해 나갈수록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듯이 남편과 아내도 서로 사랑할수록 닮아가게 됩니다. 오래 살수록 아내의, 또는 남편의 습관은 잘 변화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내가 남편을, 내가 아내를 바꾸고자 하면 절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팔자려니 생각하고 용납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내의 그 부족함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남편의 그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은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남자들은 잔소리를 듣느니 혼자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잔소리를 자장가로 듣고 허허 웃어 넘겨야 합니다. 잔소리를 사랑의 멜로디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용납할 때 가정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적의 군대가 한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적군의 장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우리의 포로가 되어서 노예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다 풀어주겠다. 여자들은 즉시 마을을 떠나되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한 가지만을 지니고 가도록 허락하겠다.” 여자들은 각자가 저마다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하나씩 지니고 나섰습니다. 금반지를 들고 가기도 하고, 은수저를 챙겨서 나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몸집이 작으면서도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메고서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검문하던 적군이 그 여인을 세워서 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그 속에는 남자가 한 사람 들어 있었습니다. 적군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물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구야? 여인은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예, 제 남편입니다!” 적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습니다. “왜 명령을 어기는가? 보물을 가져가라고 명령했지 언제 사람을 메고 가라고 했는가?” 여인은 지혜롭게 답변했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제 남편입니다!” 적군의 장수는 여인의 지혜와 그 마음에 감동하여 남편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해주었습니다.
둘째, 부모와 자녀의 윤리.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하는 효에 대해 십계명에는 장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과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는 것은 같은 원리입니다. 효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와 충을 같은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밖에 나가서 인간관계가 원만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도 윗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담대합니다. 기가 죽지 않습니다. 마음에 구김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기에 사랑을 할 줄을 압니다.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제 구실을 잘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에서 가르치는 효의 개념은 일방적입니다. 권위를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등하게 아버지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중성을 볼 때 자녀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집에서 하는 것과 교회에서 하는 것이 다를 때, 자녀들에게 해 주는 것과 양들에게 해 주는 것이 다를 때 분노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양의 이야기를 인내를 가지고 잘 들어주면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빠는 내게 말할 시간은 있지만 내 말을 들을 시간은 없어요”라고 한 아이가 말했는데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양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잘 챙겨주면서 자식인 자신의 생일을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목자 생활하는 부모에 대해서 자녀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녀도 집 안에 있는 양으로 다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권위로 자녀들을 복종시키면 겉으로는 순종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반발심, 반항심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윽박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대학 입학에 대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부모가 많습니다. 학업 성적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경외심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이들과 깊이 대화를 나누는 일에 힘을 쓰면 학업에 대한 집중력도 높아지고 부모에 대한 존경이 자라납니다. 자녀들의 속생각이 할아버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싸우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여기고 죄책감을 느낍니다. 교육학자 제임스 돕슨(James Dobson) 박사는 6학년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켰습니다. 글짓기의 주제는 ‘나는 원한다(I wish)’란 말로 시작하여 지금 자기가 바라는 최고의 것을 적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부모님이 싸우지 말고 잘 지냈으면.”하는 것이 제일 많았고, 위로부터 5위까지가 모두 가정의 평화와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 아이들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할 때 모든 일들이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가정의 평화는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사랑과 본을 보이는 데서 나옵니다. 자녀들을 순종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키워서 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상사와 사원의 관계. 예로부터 19세기까지만 해도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로마 사회는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많은 가정에서 노예들은 그 집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 종과 상전의 관계가 없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돈으로 사람들을 얽어매어 노예생활을 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카드 빚으로 생활하고, 빚내어 주택을 구입하고 차를 굴립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새벽에 출근하고 녹초가 되어 밤 늦게 퇴근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매일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일부러 느릿느릿 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가림만 하기 쉽습니다. 상사가 눈 앞에 있을 때는 긴장하여 열심히 일하지만 눈 앞에 없을 때는 적당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상사가 같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 하듯이 마음을 다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같은 형제라고 생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고 적당히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상사에게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사에게 일한 댓가를 받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의 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직장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직장 일도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습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습니다.
상전이라고 해서 종들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상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4:1).” 의와 공평을 베풀 때 사원들은 불만이 없습니다. 사원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자기의 힘을 다해서 일할 것입니다. 똑 같이 일을 했는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성실하게 일하기보다 잔머리를 굴리고 꼼수를 부리게 될 것입니다. 국민의 윤리의식이 높은 나라일수록 같은 노동력으로 벌어드리는 수입이 많습니다. 뇌물을 써야 일이 되는 나라는 같은 일을 하고도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수입은 적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를 때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됩니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은 외모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은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서 사람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은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즉 삶이 예배가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주께 하듯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주님을 대하듯이 공경하여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님을 섬기듯이 사랑합니다. 직장 생활도 주님께 하듯이 한다면 인정을 받고 승진을 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깨어 기도하라. 바울은 모든 관계에 대해서 말한 후에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기도 생활에 견고하라. 몰두하고 떠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기도할 뿐입니다. 하고 싶다고 느낄 때 기도합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계속하려면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부들은 새벽 시간이 어려우면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또는 밤에 일정한 시간을 내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님의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통로입니다. 사실 기도하는 일이 노동이요 힘든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이 피곤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도리어 힘을 얻고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가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항상 교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갇혀 있을 때에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데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빨리 내보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감옥에 있으면서 감사제목을 찾아서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제목을 찾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기도를 하나님께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도 주십시오, 우리의 필요만 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요청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겸손히 기도 지원을 요청합니다.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동역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보초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했고 그것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의 문을 하나님께서 여시면 감옥도 말씀 전파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5).”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기회는 지나갑니다. 그러니 잡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잘 잡아야 합니다. 또 기회를 만들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외인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시간을 쓰다보면 자기가 진정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도면밀하게 사용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일 뿐만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데 선수였습니다(10-18).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을 으뜸으로 삼고 인간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님의 으뜸 되심을 믿고 주 안에서 사랑과 순종, 공평과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신뢰하면 마음을 열고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가운데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 사회와 국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골로새서 3:18-4:18
요절 | 골로새서 3:23
주께 하듯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가정과 직장에서도 으뜸이심을 말씀합니다. 그는 개인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가정을 변화시키십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아내와 남편, 부모와 자녀, 종과 상전의 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날 깨어진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문제아로 가정과 학교와 사회에서 버려지고 있습니다. 가정의 파괴는 말세의 징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가장 먼저 세우신 기관은 가정이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건강할 때 개인도 꿈을 성취하며 성공하고 사회와 국가가 번영합니다. 가정을 회복하는 사명과 소망이 교회에 있습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작은 천국인 믿음의 가정을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크리스천 윤리는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주님과 관련된 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마음으로 주께 하듯 하라. 주님이 모든 가정의 으뜸이 되신다면 우리 사회도 변화되고 건강하게 될 수 있습니다.
첫째, 남편과 아내의 윤리. 18,19절을 보십시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남자와 여자는 아주 다른 존재입니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책이 있듯이 신체 구조, 사고방식이 아주 다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통해서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결혼의 신비는 바로 다른 두 인격체가 하나님 안에서 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과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신비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믿음으로 주 안에서 하나가 됩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 되는 진리를 깊이 이해할수록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뒤에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의무이며 강제적인 성격이 강한데 비해서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복종은 자발적인 순종입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 때문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좀 부족하더라도 복종함으로 가정의 질서를 세우고 남편의 권위를 세웁니다. 이렇게 할 때 아내는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는 영적인 성장과 자유와 충만함을 누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먼저 지으시고 그 갈비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 둘은 동등이지만 질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내를 남편을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 남편이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울 때 아내도 존재감을 느낍니다. 타락한 여자는 남편을 무시하고 휘어잡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남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여 부부싸움이 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복종할 때 아내도 각별한 사랑을 받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사랑은 아가페적인 사랑으로서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자기 몸을 희생하셨듯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두 배의 힘을 쓸 수 있습니다. 그 힘으로 아내를 섬기고 봉사하는 일을 해야지 폭력을 휘둘러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를 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괴롭게 한다는 말은 쓰라리게 하다, 비참하게 하다는 뜻입니다. 원문으로는 끝이 뾰족한 상태를 말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이 없는 남편은 늘 자기중심적이고 자기의 유익과 만족을 추구하여 아내의 마음을 송곳처럼 찔러댑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자기의 말을 빨리빨리 들어주지 않을 때 괴롭습니다. 또 아내는 남편과 오순도순 이야기하는 데서 행복을 느낍니다. 아내는 남편이 자기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때 힘이 듭니다. 아내들은 짐이 많습니다. 특히 한국에서 아내 노릇하는 분들은 자녀교육, 집안 일, 남편 내조, 때로는 직장 일까지 하면서 몸이 둘 셋이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쁩니다. 그런데 권위적인 남편은 집안일을 잘 거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괴롭습니다. 또 동역이 안 될 때 아내들은 괴롭습니다. 동역이 되면 많은 일들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니 괴롭습니다. 아내들은 남편이 큰 소리를 칠 때 괴롭습니다. 남편은 아내의 연약함을 알고 섬겨야 합니다. 우리나라는 가부장적인 사회였습니다. 여자를 무시하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은 여성의 역할이 두드러지면서 상황이 반전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권위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남편들은 나이가 들수록 집안에서 권위가 사라지고 천덕꾸러기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정말로 아내를 사랑하고 섬기면 가정에 평화가 찾아오고 행복할 것입니다. 남편의 권위는 큰 소리나 힘이 아니라 사랑하는 인격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내를 희생적으로 사랑할 때 아내도 자발적으로 남편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우리가 영적인 성숙을 해 나갈수록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듯이 남편과 아내도 서로 사랑할수록 닮아가게 됩니다. 오래 살수록 아내의, 또는 남편의 습관은 잘 변화되지 않음을 발견합니다. 내가 남편을, 내가 아내를 바꾸고자 하면 절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팔자려니 생각하고 용납하고 살아야 합니다. 아내의 그 부족함 때문에 내가 있는 것이고, 남편의 그 부족함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그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이를 알 때 우리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잔소리를 많이 하는 것은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과 같습니다. 남자들은 잔소리를 듣느니 혼자 살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어렵기 때문에 잔소리를 자장가로 듣고 허허 웃어 넘겨야 합니다. 잔소리를 사랑의 멜로디로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서로 용납할 때 가정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적의 군대가 한 마을을 포위했습니다. 적군의 장수는 마을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남자들은 모두 우리의 포로가 되어서 노예로 끌려갈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다 풀어주겠다. 여자들은 즉시 마을을 떠나되 각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 한 가지만을 지니고 가도록 허락하겠다.” 여자들은 각자가 저마다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을 하나씩 지니고 나섰습니다. 금반지를 들고 가기도 하고, 은수저를 챙겨서 나서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은 몸집이 작으면서도 엄청나게 큰 보따리를 메고서 힘겹게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검문하던 적군이 그 여인을 세워서 보따리를 풀어보았습니다. 뜻밖에도 그 속에는 남자가 한 사람 들어 있었습니다. 적군은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물었습니다. 이게 도대체 누구야? 여인은 솔직하게 답변했습니다. “예, 제 남편입니다!” 적군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습니다. “왜 명령을 어기는가? 보물을 가져가라고 명령했지 언제 사람을 메고 가라고 했는가?” 여인은 지혜롭게 답변했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보물은 제 남편입니다!” 적군의 장수는 여인의 지혜와 그 마음에 감동하여 남편을 데리고 가는 것을 허락해주었습니다.
둘째, 부모와 자녀의 윤리. 20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들이 부모님께 순종하는 효에 대해 십계명에는 장수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과 눈에 보이는 부모님을 사랑하고 효도하는 것은 같은 원리입니다. 효는 모든 인간관계의 근본입니다. 부모님께 순종하고 효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유교에서는 효와 충을 같은 원리로 보고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자식은 밖에 나가서 인간관계가 원만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와 관계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밖에 나가서도 윗사람들과 관계를 잘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 남을 사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자신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는 담대합니다. 기가 죽지 않습니다. 마음에 구김이 없습니다. 사랑을 받을 줄 알기에 사랑을 할 줄을 압니다. 가정에서 교육을 잘 받은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제 구실을 잘 할 수 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유교에서 가르치는 효의 개념은 일방적입니다. 권위를 중요시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등하게 아버지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가르칩니다. 아버지가 자녀들을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이중성을 볼 때 자녀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집에서 하는 것과 교회에서 하는 것이 다를 때, 자녀들에게 해 주는 것과 양들에게 해 주는 것이 다를 때 분노를 느낍니다. 예를 들어 양의 이야기를 인내를 가지고 잘 들어주면서 자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자녀들은 분노합니다. “아빠는 내게 말할 시간은 있지만 내 말을 들을 시간은 없어요”라고 한 아이가 말했는데 참으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양들의 생일을 기억하고 잘 챙겨주면서 자식인 자신의 생일을 무심하게 지나쳐 버리는 목자 생활하는 부모에 대해서 자녀들은 분노를 느낍니다. 그러므로 목자는 자녀도 집 안에 있는 양으로 다 같이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권위로 자녀들을 복종시키면 겉으로는 순종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반발심, 반항심이 자라게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을 윽박지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대학 입학에 대한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부모가 많습니다. 학업 성적이 중요하지만 하나님과 부모에게 순종하는 경외심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이들과 깊이 대화를 나누는 일에 힘을 쓰면 학업에 대한 집중력도 높아지고 부모에 대한 존경이 자라납니다. 자녀들의 속생각이 할아버지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님이 싸우면 자신들의 잘못으로 여기고 죄책감을 느낍니다. 교육학자 제임스 돕슨(James Dobson) 박사는 6학년 아이들에게 글짓기를 시켰습니다. 글짓기의 주제는 ‘나는 원한다(I wish)’란 말로 시작하여 지금 자기가 바라는 최고의 것을 적어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부모님이 싸우지 말고 잘 지냈으면.”하는 것이 제일 많았고, 위로부터 5위까지가 모두 가정의 평화와 사랑에 대한 희망이었다고 합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면 아이들은 안정감을 느낍니다.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할 때 모든 일들이 성취된다는 말입니다. 가정의 평화는 부모가 자녀들을 사랑하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사랑과 본을 보이는 데서 나옵니다. 자녀들을 순종의 사람으로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동시에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가정을 이루고 순종하는 자녀들을 키워서 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는 일에 힘쓰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상사와 사원의 관계. 예로부터 19세기까지만 해도 노예 제도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로마 사회는 인구의 절반이 노예였습니다. 많은 가정에서 노예들은 그 집의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육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늘날 종과 상전의 관계가 없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은 돈으로 사람들을 얽어매어 노예생활을 시키고 있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이 카드 빚으로 생활하고, 빚내어 주택을 구입하고 차를 굴립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 새벽에 출근하고 녹초가 되어 밤 늦게 퇴근합니다.
22,23절을 보십시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종들은 매일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일부러 느릿느릿 할 수 있습니다. 또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눈가림만 하기 쉽습니다. 상사가 눈 앞에 있을 때는 긴장하여 열심히 일하지만 눈 앞에 없을 때는 적당히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신자들은 상사가 같이 있든지 없든지 하나님 앞에서 일을 해야 합니다. 주님께 하듯이 마음을 다하여 일을 해야 합니다. 특히 같은 형제라고 생각하여 교만한 마음을 품고 적당히 일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상사에게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23절을 보면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사에게 일한 댓가를 받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업의 상을 주십니다. 우리는 주 그리스도를 섬깁니다. 직장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직분입니다. 그러므로 직장 일도 주님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습니다. 주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심이 없습니다.
상전이라고 해서 종들에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위에 하나님이 상전으로 계시기 때문입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4:1).” 의와 공평을 베풀 때 사원들은 불만이 없습니다. 사원들이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해야 자기의 힘을 다해서 일할 것입니다. 똑 같이 일을 했는데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성실하게 일하기보다 잔머리를 굴리고 꼼수를 부리게 될 것입니다. 국민의 윤리의식이 높은 나라일수록 같은 노동력으로 벌어드리는 수입이 많습니다. 뇌물을 써야 일이 되는 나라는 같은 일을 하고도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수입은 적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정의와 공평이 강물처럼 흐를 때 모두가 잘 사는 나라가 됩니다.
크리스천의 윤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듯 하는 것은 외모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잘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하는 것은 건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기 유익을 따라서 사람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은 예배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는 것은 우리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입니다. 즉 삶이 예배가 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 복종하고 남편이 아내에게 주께 하듯 희생적인 사랑을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을 주님을 대하듯이 공경하여 순종하고 부모는 자녀를 주님을 섬기듯이 사랑합니다. 직장 생활도 주님께 하듯이 한다면 인정을 받고 승진을 하고 좋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입니다.
넷째, 감사함으로 깨어 기도하라. 바울은 모든 관계에 대해서 말한 후에 “기도를 계속하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기도 생활에 견고하라. 몰두하고 떠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기도할 뿐입니다. 하고 싶다고 느낄 때 기도합니다. 위기가 닥쳤을 때 기도합니다. 그러나 기도를 계속하려면 일정한 장소와 시간을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주부들은 새벽 시간이 어려우면 아이들을 보내고 나서 또는 밤에 일정한 시간을 내어 기도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벽 일찍 일어나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에 헌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님의 일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우리가 만나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통로입니다. 사실 기도하는 일이 노동이요 힘든 일입니다. 기도하는 일이 피곤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도리어 힘을 얻고 쉼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를 계속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기도가 호흡처럼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항상 교제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갇혀 있을 때에 찬송하고 감사하며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데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는 감옥에서 빨리 내보내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감옥에 있으면서 감사제목을 찾아서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환난 가운데서도 감사제목을 찾아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기도를 하나님께 이것을 주십시오, 저것도 주십시오, 우리의 필요만 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감사함으로 아뢰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기도를 요청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 일 때문에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은 겸손히 기도 지원을 요청합니다. 사역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동역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보초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써서 복음을 전했고 그것이 성경이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전도의 문을 하나님께서 여시면 감옥도 말씀 전파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5).” 세월을 아끼라는 말은 기회를 잡으라는 뜻입니다. 기회는 지나갑니다. 그러니 잡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할 기회를 잘 잡아야 합니다. 또 기회를 만들어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외인들에게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과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시간을 쓰다보면 자기가 진정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기회를 놓치지 말고 주도면밀하게 사용하여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바울은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자일 뿐만 아니라 친구를 사귀는데 선수였습니다(10-18).
결론적으로 우리는 주님을 으뜸으로 삼고 인간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주님의 으뜸 되심을 믿고 주 안에서 사랑과 순종, 공평과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신뢰하면 마음을 열고 깊은 사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 안에서 인간관계를 맺어 가는 가운데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이 사회와 국가에도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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