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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014년 골2강(2:1-23) 그 안에서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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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362회 작성일 14-01-19 1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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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골로새서 제 2 강 
말씀 | 골로새서 2:1-23
요절 | 골로새서 2:6,7
      그 안에서 행하라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만물의 으뜸이 되시는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리스도의 으뜸 되심을 훼방하는 것들을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헛된 철학들(1-10), 종교적 율법주의(11-17), 인위적인 규율들(18-23)은 그리스도의 으뜸 되심을 훼방합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우리의 행함을 결정합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몸을 악하다고 믿는다면 몸을 함부로 다루고 학대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믿으면 우리는 그에 따라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삶의 으뜸이 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바울은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얼굴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죽도록 힘을 썼습니다. 기도에 힘을 씀으로 그들을 도왔습니다. 기도는 영적인 싸움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에 모세가 기도하면 이기고 기도의 손을 내리면 밀렸습니다. 그는 싸움에서 이길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서 기도했습니다. 자기 혼자 안 되자 두 사람이 합심동역하여 모세의 양 손을 받쳐 들고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눈을 뜨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기도에 힘을 쏟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고요하고 안일합니다. 우리는 기도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그때가 바로 가장 힘써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십니다. 우리는 동역자들을 위해서, 양들을 위해서 기도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에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도록 하려 했습니다. 바울이 볼 때 골로새 성도들의 문제는 이단사상의 공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잘 모르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풍성히 이해하고 깨달을 때 그 어떤 공격도 이겨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아도 이단들의 공격을 당할 때 누구나 힘이 듭니다. 이때 목자의 위로가 필요합니다. 또 동역자들 간에 서로 사랑하기를 힘쓸 때 위로가 되고 사탄의 공격을 잘 감당하며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원수들의 공격을 받으면서 복음 진리에 대한 이해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또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실천하는 삶은 무균실이나 온실이 아니라 사탄의 치열한 공격을 받으면서, 내적인 갈등을 경험하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특히 구원에 관련된 모든 지혜와 지식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감춘 이유는 귀중하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과 머리를 써서 찾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무엇보다 합당한 자에게 주고자 감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탄에 의해서 인류 구원이 공격을 받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점차적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통해서 그가 구원자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의 종이 되어 구원 역사를 이룰 것은 창세기부터 계시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영광의 그리스도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 진리는 사람들에게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이면 끝이고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시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새롭고 산 길을 여셨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을 죽음의 세력으로 삼켰지만 죄 없는 그를 삼킬 수 없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알려주시지만 우리에게 혼란을 가져올 수 있는 지식들에 대해서는 닫아 놓으셨습니다. 과거부터 많은 사람들은 범신론에 기초한 윤회설을 신봉했습니다. 요즈음은 환생이라는 허황된 이론으로 막장 드라마를 만들어서 복잡하고 혼란하게 만듭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우리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천국으로 가고 믿지 않는 자는 지옥으로 갑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까지 그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으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옵니다(요5:29). 그들이 예수님의 재림 전에 어떤 상태로 사는 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죽었다고 살아나서 우리에게 그 삶을 알려주는 자들이 있으면 좋겠지만 하나님을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을 알려주면 사탄에 의해서 더 혼란스러운 상황들이 올 수 있기 때문에 신비에 싸이도록 하셨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유익입니다. 이 세상에서 실컷 죄를 짓고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무로 돌아간다면 얼마든지 이 세상에서 악을 행하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일이지만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부활을 이루셨습니다. 그의 부활은 우리도 부활할 것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줍니다. 그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모든 것의 끝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문으로 생각합니다. 죽음을 통해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믿음의 선진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죽음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빌 1:20-23)”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면 이 세상의 삶에 대해서 그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의 소망 가운데 서로 위로하고 이 세상에서 겪는 고난과 질병과 각종 어려움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이런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도 교묘한 말로 그들을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입니다. 당시에 그들을 속이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사람들의 영혼을 사로잡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여러 헬라 철학이 유행했습니다. 철학은 현학적이고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혹하게 합니다. 또한 철학은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철학의 뿌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인간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지혜를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래서 철학이 신앙의 이해에 도움을 줄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믿는 신앙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또 헛된 속임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천사숭배, 영지주의, 율법주의, 신비주의 등입니다. 이런 것들도 사람을 사로잡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헛됩니다. 공허합니다. 유익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랐습니다. 초등학문은 수준이 낮고, 천박한 것입니다. 당시 골로새에 유행했던 여러 철학이나 사상들은 예수님과 비교하면 한참 수준이 떨어지는 것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 모든 지식과 지혜의 원천인 그리스도는 고등학문입니다.   

  또 11-17절에는 믿는 것도 좋은데 믿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육신에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크리스천이 된 사람들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키는 생활이 습관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것을 버리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자신들은 힘들게 율법을 지키면서 때마다 금식도 하고, 음식도 가려서 먹는데 이방의 크리스천들은 너무 쉽게 믿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 등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기들의 경건성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종교적인 고상함을 주장하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고 음식과 거룩한 날들을 지키면 교회에서 영적 엘리트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너희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고생하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또 18-23절에서 어떤 사람들은 천사 숭배를 주장했습니다. 우리 죄인들이 어떻게 감히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가? 천사들을 통해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23절에 보면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라고 말합니다.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로운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죄를 극복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속이는 철학과 사상은 무엇입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 신자들을 속이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은 인간을 차갑고 잔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순수하고 꿈으로 가득해야 할 학생들도 10억 원만 준다면 감옥에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치관이 물질 중심으로 변화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로 세상의 마케팅 논리가 들어와서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 상원 채플린이었던 리챠드 핼버슨은 기독교에 대해서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종교역사가들은 기독교가 중동에서 시작되었고, 나중에 그리스로 전파되어서는 하나의 철학이 되었고, 로마로 전파되어서는 법체계가 되었고, 유럽으로 가서는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미국으로 와서는 무엇이 되었을까? 기독교는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었다.” 정곡을 찌르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규모가 작더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며 일대일로 인격적으로 섬기고자 합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증거들을 다 쓰려면 이 세상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가장 특징적인 일곱 가지 표적을 요한복음에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우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습니다. 즉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충만한 신성을 덧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너무나 신비롭고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어찌 죄악된 인간이 감히 신성에 참여할 수 있을까요? 신성의 충만이신 예수님께서 인성을 입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과 같은 신령하고 강하고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우리는 예수님을 주로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오,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이십니다. 모든 권세가 예수님으로부터 나옵니다. 예수님이 모든 권세를 다 쥐고 계십니다. 사람들이 머리가 되고자 하지만 실상은 예수님이 머리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살아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영들의 지배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상담사요 경영자요 심리학자요 철학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변호사요 의사요 중재자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를 화목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의사도 되십니다. 또 예수님은 왕 중의 왕이시오 주의 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요즈음 학생들은 스마트 폰 안에서 행합니다. 일어나서 자기까지 스마트 폰을 붙잡고 그것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 속에서 정보를 찾고 음악을 듣고 스마트 폰을 통해서 친구들과 교제를 나눕니다. 공부도 스마트 폰을 가지고 합니다. 심지어 스마트 폰은 젊은이들에게는 신체의 일부분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행하면 나의 사고나 행동의 범위가 좁아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언가 제약을 받을 것 같습니다. 술도 못 마시고 담배도 못 피우고 연애도 마음대로 못하고 주일에는 예배에 참여해야 하고 일대일 공부도 해야 하고 팀 모임도 해야 하고 얽매이는 것 같습니다. 한 분이 은퇴를 하고 등산을 다녔습니다. 그런데 6개월을 하고 나니 더 이상 갈 산이 없더랍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마음대로 산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자유를 얻을 것 같지만 사실은 죄의 종이 되기 쉽습니다. 방종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는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십니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행할 때 자유와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안에서 행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무슨 생각을 해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기 전에 ‘예수님은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실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요, 무슨 결정을 하더라도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향을 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삶을 사는 건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말씀과 기도로 시작하고 매주 소감을 통하여 말씀 안에 거하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특히 고난의 때에 흔들리지 않고 믿음으로 더욱 그러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이 별로 화끈한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고 깨고 하다보면 나무가 자라는 것처럼 우리도 자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고자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고 투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첫째, 예수님 안에 뿌리를 박게 됩니다. 중심을 잡았는데 어정쩡하게 있으면 안 됩니다. 아예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결혼은 한 배우자에게 뿌리를 박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섬기는 주가 예수님임을 고백하고 마음으로 결단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이제 주인을 다른 것으로 바꾸거나 옮기면 안 됩니다. 그 안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무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이리 저리 옮겨다는 것 봤습니까? 사람이 파서 옮기지 않는 한 심겨진 나무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갑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의 세계 속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여러 가지 유혹과 이단세력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주로 받았는데도 흔들리고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뿌리는 땅 속에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의 내면, 무의식 깊은 곳 속에서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서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나무의 크기는 별 것이 아닙니다. 결국은 뿌리가 내려간 만큼 그 나무는 크게 되어 있습니다. 뿌리는 내리지 않고 가지와 잎사귀만 무성하면 강풍이 한번 불면 그대로 쓰러져 버립니다. 깊이 뿌리 내릴 때 가뭄에도 시원한 물을 빨아들여 푸르른 나무를 유지합니다. 공중의 지친 새들이 모여 들어 그늘 밑에서 쉼을 얻습니다. 강풍이 불어도 뽑혀나가지 않고 든든히 서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 비밀을 알고 순탄할 때나 어려울 때나 인내심을 갖고 예수님 안에서 행하여 꾸준히 믿음의 뿌리를 내리길 기도합니다. 뿌리 내리는 데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시간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말씀 공부하고 묵상하는 삶을 통해서 주님이 주시는 생명력을 충분히 덧입어야 합니다. 그때 힘을 얻고 죄악을 이기고 새로워질 수 있습니다. 

  둘째, 세움을 받게 됩니다. 이는 건물의 비유입니다. 건물을 높이 올리고자 할수록 땅 속으로 깊이 기초를 박아야 합니다. 건물이든지 나무든지 아래로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위로는 반드시 서야 합니다. 이는 신자들의 성장과 성숙을 뜻합니다. 즉 건강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헛된 교훈에 현혹되지 말고 주님이 주신 복음 진리의 교훈을 믿고 그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뿌리는 기초이고, 세움을 받는 것은 과정이고, 굳게 서는 것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세움을 잘 입지 못하면 넘어집니다. 세상 죄는 강한 파도와 같이 우리를 덮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예수님께 뿌리를 내리고 세움을 입고 성장해야 합니다.
 
  셋째, 감사함을 넘치게 해야 합니다. 다른 것은 다 수동형인데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은 능동형입니다. 우리가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감사가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힘든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이 딱딱해지고 불평을 많이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산다면 어떤 경우에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감사가 중심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적당히 감사하지 말고 감사가 넘치게 해야 합니다. 넘치는 감사로 말미암아 사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이 충만해지면 감사도 충만해지고 넘치게 됩니다. 성령의 생수가 넘칠 때 우리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는 선하고 은혜롭고 지혜로운 말을 하게 됩니다. 감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제사입니다.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은 관계를 부드럽게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지 더 잘 해주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들은 주위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줍니다. 기쁘게 해 줍니다. 감사는 인간관계를 치료하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가 넘치는 사람은 신앙이 진보하고 있는 표시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맺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힘찬 강물과 같이 흐르면서 때를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경계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만물의 으뜸이 되심을 알고 그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뿌리를 박게 되고 세움을 입게 됩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가 더욱 성숙해지고 우리의 삶이 풍성해집니다. 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서 행하는 한 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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