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2014년 골1강(1:1-29) 만물의 으뜸이신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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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골로새서 제 1 강
본문 | 골로새서 1:1-29
요절 | 골로새서 1:18
만물의 으뜸되신 그리스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들은 골로새 교회를 직접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입니다. 또한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그들이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데서 온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그들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온 천하에서도 전파되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알린 사람입니다. 그는 골로새의 토착민이며(골 4:12) 바울의 제자로서 그곳에 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라오디게아나 히에라볼리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서도 힘써 기도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는 이곳에도 복음을 전했습니다(골4:13). 그는 바울이 로마에 투옥됐을 때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골로새 지역에 퍼져 있던 이단에 대하여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골로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오네시모와 두기고가 바울의 서신을 전달했습니다(4:7-9).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시험의 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단들과 미혹하는 사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실족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별 이상한 논리들과 사상들을 접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때,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게 됩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능력으로 강해져서 기쁨으로 고난을 견디며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또 믿어야 알게 되고 자라게 됩니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제대로 알게 되면 신앙생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 하나님의 뜻은 결국 복음이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흑암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흑암은 죄와 사탄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창조주시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내가 삶의 주인인 줄 알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과 욕망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내가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겉모습은 매너가 있어 보여도 속교만이 대단했습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요 법 없이도 살 사람 같았지만 음란과 정욕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되면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악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요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을 살인하고자 하는 생각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무관심하였습니다. 흑암 속에서 우리는 처절하게 부르짖고 고통하였습니다. “제발 누가 나를 여기서 건져내주세요”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빛의 왕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죄와 사탄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철학이나 세상 지식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삶의 영역을 달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고 소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있던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빛의 왕국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신 신령한 빛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렸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았습니다. 죄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빛이 내 안에 비추이자 기쁨도 생기고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합니다. 사는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십니까? 15-17절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3,14절의 그는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15절부터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형상이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십니다(히1:2). 하나님을 아는 데 예수님 말고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것(firstborn)은 예수님이 먼저 지음 받은 피조물이란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프로토토코스는 창조 순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권위의 순서를 가리킵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시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은 시간 개념이 아닙니다. 아리우스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말해서 이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세상 모든 통치권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존재 목적이십니다(16). 또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유지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조물보다 먼저 있으셨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 역사를 이루신 창조주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왜 만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교회 이야기를 할까요? 만물이 그리스도의 창조의 열매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열매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새 사람이 되는 교회(엡2:15)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세상에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엡 3:9,10).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주인이며 자라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시란 뜻입니다. 목사가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회중이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몸이고 청기지이고 종입니다. 모든 교회의 분열은 사람이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생겼습니다. 교권 다툼이 한국 장로교를 180개로 나누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고 율법주의, 천사숭배, 영지주의, 혼합주의 등 인본적인 것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요즈음 인문학이 유행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 철학자들, 공자 맹자 논어 등 유교의 인본주의 철학, 불교 철학, 여러 가지 성공담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유행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불교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이슬람도 좋고 기독교도 좋다. 다 구원받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석가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며 속죄하였습니까? 누가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했습니까? 누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낫게 했습니까? 수많은 귀신들을 누구의 이름 권세로 쫓아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supremacy)이요, 최고봉이십니다. 그는 유일하시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 보다 더 우월한 다른 영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소유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충만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랑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겸손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능력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빛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만물의 으뜸 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으뜸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만 내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 자기희생으로 우주적인 화해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사람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하나님과 불화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사람과도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만물과도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 헌신으로 화해의 역사, 성결케 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은혜의 삶에서 떠나도록 흔드는 거센 도전과 유혹이 많습니다. 솔로몬이 아내가 있었지만 많은 이방의 여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우상들이 그 나라에 들어오고 그의 마음도 하나님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는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이방여인들을 더 사랑했을 때 솔로몬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게임을 사랑하고 영화, 음악, 만화 등 놀이문화를 사랑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변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안에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들을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할 때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교회는 계속 고난을 받습니다. 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도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21세기에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이 1세기 신자들이 받은 고난보다 더 큽니다. 더 많은 순교자들이 20,21세기에 이루졌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싫어하면 약해집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신앙은 살아 있게 됩니다. 교회는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예수님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세상의 헛된 소망을 털어버립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하고 성경 가르치며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목자로 살고자 할 때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실족하게 되지 아니할까 애타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밀의 영광이신 예수님을 알수록 하나님의 비밀이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힘써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각 사람을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비한 무엇을 체험한다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참여할 때 완전해 집니다. 바울은 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수고했습니다. 우리도 골로새서 말씀 통해 그리스도의 절대성, 으뜸 되심, 복음의 비밀과 영광 간직하고 한 사람을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돕는 복음의 일꾼 되기 기도합니다. 2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안에 으뜸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시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삶에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욕과 이기심과 굽어진 마음을 회개하고 고난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본문 | 골로새서 1:1-29
요절 | 골로새서 1:18
만물의 으뜸되신 그리스도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골로새서는 사도 바울과 형제 디모데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들은 골로새 교회를 직접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입니다. 또한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은 그들이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데서 온 것입니다. 이 복음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그들은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온 천하에서도 전파되어 자라고 있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를 개척한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그들의 사랑을 바울에게 알린 사람입니다. 그는 골로새의 토착민이며(골 4:12) 바울의 제자로서 그곳에 교회를 창설했습니다. 그는 라오디게아나 히에라볼리에 있는 신자들을 위해서도 힘써 기도하고 수고했습니다. 그는 이곳에도 복음을 전했습니다(골4:13). 그는 바울이 로마에 투옥됐을 때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는 골로새 지역에 퍼져 있던 이단에 대하여 바울에게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 골로새서를 써서 보냈습니다. 오네시모와 두기고가 바울의 서신을 전달했습니다(4:7-9).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도록 끊임없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아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시험의 때를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위에 이단들과 미혹하는 사상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혜와 지식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실족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별 이상한 논리들과 사상들을 접하고 믿음을 잃어버리는 청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채워질 때, 주님께 합당한 삶을 살게 됩니다.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게 됩니다.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습니다. 모든 능력으로 강해져서 기쁨으로 고난을 견디며 즐거움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알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또 믿어야 알게 되고 자라게 됩니다. 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탄식을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제대로 알게 되면 신앙생활의 풍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신령한 지혜와 총명, 하나님의 뜻은 결국 복음이요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 우리는 과거 흑암의 통치를 받았습니다. 흑암은 죄와 사탄의 통치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흑암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과 자신에 대해서 무지했습니다. 창조주시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내가 삶의 주인인 줄 알고 제 멋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교만하게 살았습니다. 나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이기적인 목적과 욕망을 따라서 살았습니다. 한 마디로 제 잘난 맛에 살았습니다. 내가 최고인 줄 알았습니다. 겉모습은 매너가 있어 보여도 속교만이 대단했습니다. 겉으로는 모범생이요 법 없이도 살 사람 같았지만 음란과 정욕의 종노릇을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배 아파하고 함께 즐거워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못 되면 속으로 기뻐했습니다. 그런 마음이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악한 마음을 다스릴 수 없었습니다. 나에게 불리할 것 같으면 요 핑계 저 핑계를 대고 거짓말도 밥 먹듯이 하였습니다. 때로는 미워하는 사람을 살인하고자 하는 생각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죽든지 살든지 무관심하였습니다. 흑암 속에서 우리는 처절하게 부르짖고 고통하였습니다. “제발 누가 나를 여기서 건져내주세요”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빛의 왕국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죄와 사탄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세계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철학이나 세상 지식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세계를 완전히 바꾸어 놓고 삶의 영역을 달리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할 때 죄사함을 주셨습니다. 그때 우리의 신분이 달라지고 소속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우리 속에 있던 어두움이 물러가고 빛으로 채워졌습니다. 빛의 왕국에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추어주신 신령한 빛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듣는 귀가 열렸습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아름답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스럽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았습니다. 죄인으로서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참된 삶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목적을 발견했습니다. 선한 열매를 맺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빛이 내 안에 비추이자 기쁨도 생기고 하나님의 평화가 충만합니다. 사는 맛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본래 어떤 분이십니까? 15-17절을 보십시오.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3,14절의 그는 하나님 아버지이신데 15절부터 그는 예수님이십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십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형상이십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은 자신을 보이셨습니다(요 14:9).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본체의 형상이십니다(히1:3). 예수님은 하나님의 계시의 완성이십니다(히1:2). 하나님을 아는 데 예수님 말고 더 이상의 계시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이십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예수님이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셨다는 것(firstborn)은 예수님이 먼저 지음 받은 피조물이란 뜻이 아닙니다. 헬라어 프로토토코스는 창조 순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권위의 순서를 가리킵니다. 즉 모든 피조물은 그리스도의 권세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시간도 창조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하나님에게서 나오셨다는 것은 시간 개념이 아닙니다. 아리우스는 시간 개념을 가지고 말해서 이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넘어서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만물의 창조자로서 세상 모든 통치권의 근원이시며, 만물의 존재 목적이십니다(16). 또 만물보다 먼저 계셔서 만물을 붙들고 계십니다. 히브리서 1장 3절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자연 세계와 영적 세계의 질서와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인하여 유지되고 있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피조물보다 먼저 있으셨고 하나님과 함께 창조 역사를 이루신 창조주이십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십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왜 만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교회 이야기를 할까요? 만물이 그리스도의 창조의 열매라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열매입니다. 이방인과 유대인이 한 새 사람이 되는 교회(엡2:15)는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을 세상에 드러내는 새로운 공동체입니다(엡 3:9,10).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는 말씀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다스리고 인도하는 주인이며 자라게 하는 생명의 원천이시란 뜻입니다. 목사가 교회의 머리가 아닙니다. 회중이 교회의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십니다. 우리는 그의 몸이고 청기지이고 종입니다. 모든 교회의 분열은 사람이 주인이 되려고 할 때 생겼습니다. 교권 다툼이 한국 장로교를 180개로 나누었습니다. 골로새 교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지 않고 율법주의, 천사숭배, 영지주의, 혼합주의 등 인본적인 것들이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 되십니다. 요즈음 인문학이 유행입니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헤겔 등 철학자들, 공자 맹자 논어 등 유교의 인본주의 철학, 불교 철학, 여러 가지 성공담을 다루는 이야기들이 유행입니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 불교도 좋고 천주교도 좋고 이슬람도 좋고 기독교도 좋다. 다 구원받자고 하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라고 주장하는 기독교를 독선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나 공자나 석가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는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셨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서 피를 흘리며 속죄하였습니까? 누가 죽음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했습니까? 누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이 낫게 했습니까? 수많은 귀신들을 누구의 이름 권세로 쫓아냈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supremacy)이요, 최고봉이십니다. 그는 유일하시고 절대적인 분이십니다. 예수님 보다 더 우월한 다른 영적인 존재가 없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성의 일부를 가지고 계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소유하신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충만이신 예수님! 예수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사랑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 생명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은혜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겸손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능력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지식과 지혜가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빛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 안에는 평화가 가득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야합니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면 만물의 으뜸 되신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으뜸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권위만 내 세웠습니까? 아닙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예수님은 십자가의 피, 자기희생으로 우주적인 화해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인간의 죄로 사람뿐 아니라 세상 만물이 하나님과 불화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으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고, 사람과도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만물과도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화해의 목적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 없는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복음은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님이 자기 생명을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희생, 헌신으로 화해의 역사, 성결케 된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우리가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항상 은혜의 삶에서 떠나도록 흔드는 거센 도전과 유혹이 많습니다. 솔로몬이 아내가 있었지만 많은 이방의 여인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우상들이 그 나라에 들어오고 그의 마음도 하나님에게서 떠나갔습니다. 그는 사랑한 죄밖에 없다고 핑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이방여인들을 더 사랑했을 때 솔로몬은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모든 복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랑하고 싶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합니다. 게임을 사랑하고 영화, 음악, 만화 등 놀이문화를 사랑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주변적인 것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해야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힘써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 안에 참된 만족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 것들을 사랑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할 때 바울은 어떠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채운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당하는 고난을 말합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감당해야 하는 고난입니다. 교회는 계속 고난을 받습니다. 교회가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도 함께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21세기에 신자들이 당하는 고난이 1세기 신자들이 받은 고난보다 더 큽니다. 더 많은 순교자들이 20,21세기에 이루졌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싫어하면 약해집니다. 고난의 의미를 알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당할 때 신앙은 살아 있게 됩니다. 교회는 고난을 먹고 자랍니다. 예수님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고난이 있습니다. 이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는 거룩해집니다. 겸손해집니다. 세상의 헛된 소망을 털어버립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하고 성경 가르치며 말씀에 순종할 때 나타나는 고난을 어떻게 여기고 있습니까?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는 영광입니다. 우리가 목자로 살고자 할 때 날마다 속에 눌리는 일이 있습니다. 양들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실족하게 되지 아니할까 애타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밀의 영광이신 예수님을 알수록 하나님의 비밀이 더 풍성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을 힘써 전파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각 사람을 완전한 사람으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신비한 무엇을 체험한다고 완전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으로 완전해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님, 그리고 그의 십자가를 체험하고 참여할 때 완전해 집니다. 바울은 이 확신이 있기 때문에 힘을 다하여 수고했습니다. 우리도 골로새서 말씀 통해 그리스도의 절대성, 으뜸 되심, 복음의 비밀과 영광 간직하고 한 사람을 완전함에 이르기까지 돕는 복음의 일꾼 되기 기도합니다. 29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내 안에 으뜸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만물의 으뜸이시오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그 안에 거하십니다. 우리의 구원과 삶에는 예수님 한 분만으로 충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십자가만을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욕과 이기심과 굽어진 마음을 회개하고 고난을 받으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만물의 으뜸이신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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