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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부활특2강 (고전 15:35-58) 부활의 영광과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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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7회 작성일 18-04-01 13:39

본문

2018 부활절 제 2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5:35-58
요절 | 고린도전서 15:57,58

부활의 영광과 승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부활의 몸이 얼마나 찬란하고 영광스러운가를 소망하며 어려운 이 세상에서 위로 받기를 기도합니다. 어떤 사람은 부활하여 영원히 산다면 얼마나 지루할까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을 입고 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은 평화와 안식이 있고, 기쁨과 설렘이 충만하며 박진감 넘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장차 입게 될 부활의 몸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현재의 몸과는 완전히 다른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늘날 성도들 중에서도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죽으면 육체가 썩고 부패하여 흙으로 돌아가던지, 화장하여 가루로 된 뼈를 보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는가? 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사도 바울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땅에 뿌려진 씨의 비유를 들어 부활의 몸에 대해서 설명합니다. 농부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합니다. 죽음은 부활의 필수 과정이며 전제 조건입니다. 부활을 위해서는 죽음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죽음은 부활을 위한 관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수술을 받기 위해서 마취를 합니다. 잠을 자는 것과 같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깨어나 보면 수술이 끝나 있습니다. 몸은 회복되어 있고 변해있습니다. 우리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부활을 믿습니다.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은 은퇴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삶과 죽음 이후의 삶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사실 공자의 말대로 이 세상의 삶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 충실할 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삶도 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삶은 영원에 잇대어 있습니다.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이 세상의 일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선한 일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면 어떠한 몸으로 올까요? 농부가 뿌리는 것은 장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갱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제를 주십니다. 씨나 알갱이는 작고 모양도 볼품없지만 씨가 죽어 다시 땅 위로 나오는 모습은 참으로 영광스럽고 찬란합니다. 봄마다 화단에 꽃모종을 사다 심었는데 피어나는 꽃의 모양과 아름다움을 보노라면 탄성이 흘러나옵니다. 모종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으로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그 모양과 색깔, 향기를 보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생각할 것은 씨앗과 씨앗을 통해서 나타나는 형체가 전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본질은 같은데 다른 형체로 바뀐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몸은 현재 우리의 몸 즉 우리의 본질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현재의 몸에 기초해서 하나님은 그 뜻대로 형체를 주실 것입니다. 

  육체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육체라고 해서 다 같은 육체가 아닙니다. 하나는 사람의 육체요 하나는 짐승의 육체요 하나는 새의 육체요 하나는 물고기의 육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짐승과 사람을 만드실 때 둘 다 흙으로 만들었지만 짐승은 거친 흙, 사람은 고운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새는 날개가 있고 몸은 유선형으로 되어 있고 뼈 속은 비어 있어서 하늘을 가볍게 날아다닐 수 있는 구조입니다. 물고기는 부레가 있어서 뜨고 가라앉는 것을 자유롭게 하고 지느러미가 있어서 물 속을 자유자재로 다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과 짐승은 근육이 발달하여 땅 위를 달리기에 적합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나 짐승이나 새나 물고기가 자기가 처한 환경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육체를 부여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들어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활동하기에 적합하도록 우리의 육체는 변화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영역에 사는 존재들은 그 영광이 다릅니다. 40,41절을 보십시오.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해와 달과 별은 다 하늘에 있지만 그 영광이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입게 될 하늘에 속한 몸도 영광이 각기 다를 것입니다. 다니엘은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고 말씀했습니다. 별도 별 나름입니다. 그 영광이 다 다릅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광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과 하나님의 상급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주님께 충성을 하고 의롭고 선한 행실에 힘써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변화될 몸은 어떠할까요?

  42-44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우리의 육체는 노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눈도 나빠지고 머리도 빠지고 근력도 약해집니다. 피부에는 주름과 검버섯이 생기고 장기는 병들어 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게 될 때에는 20대의 몸을 유지할 것입니다. 썩지 아니할 몸이니 늘 강건하고 생명력이 넘칩니다. 열심히 일을 해도 피곤한 줄을 모릅니다. 늘 힘이 넘칩니다. 그러니 박진감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탐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죄를 짓습니다. 죄가 드러나 욕을 먹고 정죄와 심판을 받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깨끗하고 거룩하게 산다고 할지라도 죄와 허물이 있습니다. 견물생심이라고 좋은 것을 보면 갖고 싶고 먹고 싶고 누리고 싶습니다. 욕심을 제어해야 하지만 생기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가 없는 무균실에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는 세상에 살면서 우리도 모르게 오염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습들이 훤하게 들어난다면 수치를 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자기 양심에 비추어 아무도 자기 의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입게 될 몸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내면이 깨끗하고 밝고 맑고 거룩합니다. 순수합니다. 유혹을 받지 않는 몸입니다. 부활한 후에는 천사들과 같이 되어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랑이 충만하여 서로 만족하며 평화와 기쁨을 누립니다.

  또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우리의 육체는 약합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들로 항상 북적거립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병도 달라지고 있고 또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없던 병들도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할 몸은 강합니다. 병들지 않는 몸입니다. 건강하고 회복이 빠른 몸입니다. 생명의 열매를 맺고 생명수를 마심으로 늘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신령한 몸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몸입니다. 신령한 몸은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몸일 것입니다. 그는 시공간을 초월해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고기와 떡도 드셨습니다. 살과 뼈가 있는 몸입니다. 사도 바울은 늙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고후4:16) 날로 새로워진 속사람의 모습이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납니다. 성자들의 모습을 보면 늙었을 때의 모습이 겸손하고 순진무구하고 밝고 온화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말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그러한데 부활했을 때의  속사람은 정직하고 진실하며, 은혜와 사랑이 충만합니다.

  우리가 다시 입게 될 몸은 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겉모습도 각자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는 변화산 상에서 변화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 9:3).” 씨앗과 꽃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부활한 몸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모습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입게 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형상입니다. 부활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으로서 우리가 진정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4,25).”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어떻게 다릅니까?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습니다.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은 살려 주는 영이십니다. 먼저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입니다.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습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첫 조상이 된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첫 열매’로서 죽은 자 가운데서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조상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생명의 원천이시며 이 생명이 신자들의 부활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살려주는 영’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점차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했을 때는 아름다운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덧입게 됩니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50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가 없습니다.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살려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살려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들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영생을 누리며 주님과 동행을 합니다. 하나님의 역사에 헌신을 합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죽습니다. 죽음 후에 우리의 영혼은 낙원에 들어가지만 우리의 육체는 화장을 하거나 매장을 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해서 우리 몸의 요소들은 이 땅이나 우주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무덤에서 잠자는 자들이 먼저 변화되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살아 있는 신자들은 홀연히 순식간에 변화될 것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빵빠라 빰, 빵빠라 빰, 빰빰빰 빠 ~ 예수님이 오신다는 나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 “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52,53).” 창조주 하나님은 말씀 한마디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나팔 소리가 날 때에는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 날은 환희의 날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최후 승리의 날입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오셔서 모든 악한 세력을 멸하시고 만유를 회복하실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을 것입니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21:3-5a).”

  54,55절을 보십시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는 예언이 이루어집니다. 사망이 사망을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사라집니다. 죽음은 죄의 삯이었습니다. 사망이 사라짐으로 그 권세는 다시 힘을 쓰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인해서 우리는 두려움의 종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슬픔과 눈물도 없어집니다. 허무한 것도 없어집니다. 무정한 것도 사라집니다. 무기력도 없어집니다. 우리 위에 왕 노릇했던 사망이 사라지니 은혜와 생명이 충만하게 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입니다. 사망의 독침에 쏘이게 되면 사람이 그냥 슬프고 허무하고 무기력해집니다. 무정해집니다. 그러나 이 사망이 죽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죄와 율법이 사라지니 우리에게는 자유와 생명과 의가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 모든 승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마암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실 때에 사망 권세가 힘을 잃었습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사망을 죽이실 것입니다. 지금과는 차원이 다른 생명과 은혜와 의를 우리가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최후의 영광과 승리를 바라보며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5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우리가 이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있지만 진정으로 힘써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합니다. 이 양식은 예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을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서 생명의 세계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주의 일’이라고 할 때, 눈에 보이는 열매가 있으면 헛되지 않은 것 같은데 없으면 헛된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열매가 있든 없든 주님이 나에게 하라고 주신 일을 하면 됩니다.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을 때 내가 공연히 무익하게 헛수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마음도 흔들리고 사명인의 삶을 사는 것이 흔들거립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우리가 사는 길은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신실하게 주의 일을 힘쓸 때 우리는 날마다 새로워짐을 체험하게 됩니다. 새로워진다는 말은 변화와 성장을 의미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성실하게 꾸준히 해 나갈 때 변화가 있고 성장이 있고 열매가 맺힙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너무나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해보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삶은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영원에 비하면 눈 깜짝 할 순간이라는 찰나에 불과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능력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택과 집중을 해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 해야만 하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일은 무엇입니까? 빌리 그래함 목사님은 20세기 가장 위대한 복음의 종이었습니다. 이분을 통해서 2억 명의 사람들이 복음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일대일 성경공부를 통해서 소수의 제자를 양성하였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얕게 많이 복음을 전해서는 개인과 사회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깊이가 있어야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몇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로 세우는 일에 일생을 드립니다. 그것이 작지만 사실은 큰 일입니다. 우리는 봉사의 일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고 이 일에 헌신하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가진 우리가 이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위로를 받고 이 땅에서 주의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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