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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2018 부활특강 1(고전 15:1-34) 부활의 첫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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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6회 작성일 18-03-25 13:27

본문

2018 부활절 제  1 강
말씀 | 고린도전서 15:1-34
요절 | 고린도전서 15:20

부활의 첫 열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화단에 죽은 것 같았던 나무들에서 새싹이 나오고 있습니다. 생명의 신비를 느끼게 합니다. 한 겨울 추위 속에 죽은 것 같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이런 계절에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묵상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찬양합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강한 도전을 줍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그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셨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첫째, 예수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들(1-11).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부활을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그들의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 논란, 음란, 당파 싸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한 논쟁 등으로 고린도 교회는 시끄러웠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복음 신앙이 필요함을 알고 자신이 전한 복음을 다시 생각나게 합니다. 그들이 만일 바울이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지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신앙이 흔들리고 헛되이 믿게 되면 구원을 받지 못할 수 있습니다. 헛되이 믿는다는 것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든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부인하든지, 생각 없이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말과 지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한계와 어려움, 죽음 등의 문제에 부딪칠 때 그 믿음의 능력이 발휘됩니다.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문제에 부딪칠 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진리가 더욱 선명해집니다.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이는 복음 진리의 핵심입니다. 성경대로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사람들의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물질 문제, 인간 갈등 문제, 성격 문제, 빈부격차, 성차별, 폭력과 살인 등등 많은 문제가 있지만 성경은 근본 원인을 죄문제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서 사는 것이 죄의 뿌리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죄와 죽음으로 인해서 사람이 불행하고 비참한 것입니다.

  나와 우리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신데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오셔서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물과 피를 쏟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장사지낸 바 되셨습니다. 그는 완전히 죽으셨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그리고 삼일 만에 성경대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5-8절을 보십시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대개 어떤 일에 대한 증인은 두 명 이상이면 증거 능력이 충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오백 명이 훨씬 넘습니다. 일시에 오백여 명이 본 것은 그의 부활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게바는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실 때 계집종 앞에서 그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수제자입니다. 이렇게 두려움 많던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다가 로마에서 십자가 형을 받습니다. 그는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에 못 박힐 수 없다고 해서 거꾸로 십자가에 못 박혀 순교했습니다. 증인 중에 예수님의 친형제 야고보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가족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살았습니다. 가족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도 예수님의 부활을 목도하고 변화되어 예루살렘 총회의 회장이 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부활의 첫 증인이었던 막달라 마리아, 다른 마리아와 여인들이 빠져 있습니다. 그들까지 다 포함하여 모든 이야기를 다 기록했다면 성경의 분량이 엄청나게 두꺼워질 것입니다. 거짓을 위해서 죽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거짓된 사람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거룩한 삶을 살았습니다. 수많은 부활의 증인들이 순교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목격한 사실을 부인할 수 없어서 목숨을 바쳐서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인들 중에서 사도 바울의 변화는 부활의 증거가 확실함을 말해줍니다. 그는 본래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고 신자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을 섰던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이는데 앞장을 섰습니다. 자기 나라 유대에서 다른 나라 다메섹 까지 가서 신자들을 잡아다가 감옥에 쳐 넣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빛을 비추임 받고 쓰러졌습니다. 그 이후에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요 율법학자로서 교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배워 갈수록 겸손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은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라 칭함 받기도 감당하지 못할 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택하시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는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습니다. 그는 험한 고생을 죽도록 엄청나게 많이 했습니다. 그의 변화된 삶은 예수님의 부활 이외에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서는 율법을 파괴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을 우습게 만든다고 핍박을 받았습니다. 고린도 교회 내에는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열두 사도보다 함께 있던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그에게 들은 말씀도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학자로서 성경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사도들과 증인들을 만났고 역사적인 장소들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아라비아에서 삼년을 연구했고 고향 다소로 물러가서 10년을 머물면서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습니다. 그는 지식에 있어서 다른 사도들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11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둘째,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12-19).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영은 선하고 육은 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육체를 영혼의 무덤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죽어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하여 육체를 갖게 되는 것을 부정했습니다. 죽은 사람이 육체를 입는 것은 더 낮은 상태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됩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될 것입니다. 류 웰리스는 매 주일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주로 고백하는 것이 거짓임을 증명하고자 3년 동안 프랑스와 미국 도서관에서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첫 장을 쓰다가 무릎을 꿇고 ‘예수님은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고 벤허를 썼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세계 20억 명이나 되는 크리스천들은 거짓을 믿고 진리라고 전하는 정신없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고 증언하였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캠퍼스뿐만 아니라 해외에도 나아갔고 자신의 청춘을 드렸습니다. 짐엘리엇과 친구 네 명은 에콰도르 와다니 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갔다가 바로 순교하였습니다. 한 기자는 “도대체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삶은 헛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19세 때 일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얻기 위해 지킬 수 없는 것을 버리는 자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2년 후 다섯 명의 아내들은 자녀들을 데리고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했고 그 부족을 복음화시켰습니다. 

  오늘날 부활이 없더라도 현실에 충실하게 살아가면 된다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현실에 충실하게 살더라도 죽음에 직면하게 되면 절망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현실에 충실하고자 애를 쓰는 가운데 여행을 하고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놀고 싶은 것을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삶이 멋있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허무합니다. 쾌락을 추구하고 세속적인 삶을 사는 마음의 동기는 허무함을 잊고자 하는 것입니다. 잠시는 잊혀질 수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쾌락이 끝나고 나면 더 큰 허전함이 몰려옵니다.

  오늘날은 몸을 중시하는 사회입니다. 이를 위해서 화장품을 사용하고 자신을 아름답고 젊게 보이고자 애를 씁니다. 그러나 내면에 허무한 생각으로 가득하면 그것이 얼굴에 나타나게 됩니다. 생기가 없습니다. 어둡습니다. 우리는 장례식에서 부활신앙이 있는가 없는가를 가장 극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몸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소망을 갖습니다. 몸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도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요 현재의 교회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세계는 멸망이 아니라 구속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복음을 통해서 새로운 삶을 창조하고 계십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은 우리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지속하고 사명에 충성하게 합니다.

  셋째, 만유의 회복(20-28).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이 잠자는 자들에게 어떤 희망을 줍니까?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죽음을 잠으로 보고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잠을 자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첫 열매는 다음 열매를 보장합니다.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같이 죽은 자의 부활도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될 것입니다.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그 후에는 마지막입니다.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모든 악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입니다. 사망은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원수입니다. 사망은 항상 최후의 승리자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도 늘 죽음을 두려워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고 개척하고 역사를 창조하는 인생을 살지 못하고 찌그러진 삶을 살아갑니다. 조금만 몸이 이상해도 암에 걸려서 죽는 것이 아닌가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항상 두렵게 했던 죽음을 그리스도께서 멸하실 것입니다. 마침내 사망조차도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제외한 만물의 최고 통치권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성부는 성자를 보내셨고 성자는 그 사명을 완수하신 후에 구속된 인류를 하나님께로 다시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마지막 날에는 만유의 질서가 회복되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28절을 보십시오.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는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만유의 회복을 말합니다. 부활은 우주적인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그 이후 만유의 회복은 구원의 완성입니다.

  넷째,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29-34). 당시에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았겠습니까?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바울과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는데 따르는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때마다 위험을 무릅쓸 뿐만 아니라 날마다 죽노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습니다. 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고 전하는 것은 당시 황제 숭배를 하는 사회에서 국가에 반하는 선동분자로 몰렸습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율법을 파괴하는 자요 이방인과 교제하는 자로 비난하여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에베소에서는 아데미 우상을 섬기는 자들이 소요를 일으켜 바울을 찢을 것처럼 달려들었습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아 죽을 뻔 하였습니다. 이런 반대와 핍박 속에서도 그는 불사조와 같이 살아남아 복음을 전했습니다. 날마다 죽는다는 그의 고백은 날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는 삶을 살았다는 고백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는 죽는 자 같았으나 살았습니다. 약한 자 같으나 강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그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그저 먹고 마시는 삶의 방식을 택했을 것입니다. 쾌락주의의 뿌리는 죽음으로 인한 절망입니다. 이를 잠시 잊어버리고자 하는 몸부림에 불과합니다. 죄의식과 죽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잊고자 쾌락으로 도피하고 타협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33,34절을 보십시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악한 동무들은 죄를 즐기자고 유혹합니다. 죄 짓는 것이 재미있다고 속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기꾼들은 거짓말을 참말처럼 합니다. 자신들의 죄악된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게 말하는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죄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되었으면 하나님 앞에서 깨어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돈과 이성 문제에서 깨끗해야 합니다. 유혹은 언제나 다가옵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적당히 하면서 마음의 안식만 누리면 되지 않는가 속삭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잔재미를 부인하면서까지 사명을 감당할 필요가 있는가 회의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까지 하는 것은 부활의 소망 때문입니다(딤후 4:3-8). 부활신앙을 가진 자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합니다(고전10:31).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라고 말하는 자들은 “죽음은 멀리 있으니,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 노나니” 노래를 부르면서 마시고 부으라고 말합니다. 현재의 삶을 마음껏 즐기는 것에 가치를 둡니다. 게임, 댄스, 맛 집, 자동차, 여행 등.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먹고 마시는 것 외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부활신앙이 없으면 이 세상 풍습을 따라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쾌락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선을 행해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헌신하고 복음 전파를 위해 때마다 위험을 무릅씁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은 질병의 위험, 강도의 위험, 궁핍 등 각종 위험 가운데서도 복음 전파를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세상의 명예와 부와 쾌락을 배설물로 여기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희생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부활에 대한 소망이 분명하기 때문에 이런 삶을 기쁨으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부활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선한 행실에 힘을 씁니다. 사람을 얻고 치료하고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제자를 키웁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의를 행합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하여 때로는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으로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주님의 칭찬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을 믿을 때 진정으로 풍성한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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