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18고후10강(12:11-13:13) 믿음을 확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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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10 강
말씀 | 고린도후서 12:11-13:13
요절 | 고린도후서 13:5
믿음을 확증하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오늘 말씀은 고린도후서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을 예고하면서 자신이 우려하는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남에게 콩 놔라, 팥 놔라 하면서 요구하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믿음에 있는가를 확증해야 합니다.
첫째,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12:11-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그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칭 크다(“super-apostles”)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적이고 세상적인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아니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I am nothing). 그러나 그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표가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의 표로써 모든 참음은 내적 표시이고, 표적, 기사, 능력은 외적 표시입니다. 이런 사도의 표시는 거짓 사도들이 내세우는 추천장이나 세상적인 자랑과는 다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자 하는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음에 응력이 쌓이고 감당하지 못하면 폭발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흙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깊은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힘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많은 박해를 받았고,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 무엇보다도 교인들로 인해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사람과의 갈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서 참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3의 부모들이 그러합니다. 양의 목자로서 사는 것은 더욱 참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허물을 보지만 오래 참는 것은 사랑과 성숙한 자세입니다. 모세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참다가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직분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며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내가 먼저 주님께 용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도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도의 증거입니다. 목자님들이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목자로 부르신 증거입니다.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이 음란하고 이단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십팔년을 참으면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회심하고 대학자가 되어 교회를 지키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나도 브닌나의 무시를 받았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힘들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또 아들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그녀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무엘은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무엇이든지 진득하게 참으면서 계속할 때 실력이 붙고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실력이 아니라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다보면 실력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의 표로써 둘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권능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행1:8). 바울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있어서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 못 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가 즉시 고침을 받고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에서는 점치는 귀신이 여종의 몸에서 쫓겨났습니다(행14:8-10; 16:16-18).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런 역사가 있었지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에서 한 바울의 사역을 보면, 병 고치는 이적은 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사도의 표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했습니다. 이를 위해 천막을 만들면서 자비량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아서 고린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신수비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도의 결격 사유로 지적하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공격하려면 별 것을 다 가지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마게도냐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받지 않았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신생교회였기 때문에 헌금에 부담을 주면 복음의 장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양들을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말씀을 받는 자로부터 먹을 것을 공급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로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은 권리가 있었습니다(고전9:3-10). 그러나 물질보다 사람이 중요하기에 개척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얻기 위해서 폐를 끼치지 않고자 받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에도 그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오면 숙식과 여비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구하는 것은 그들의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목적은 돈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유익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즉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바울은 재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내어줄 용의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르게 설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관심은 재물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 자체와 그들의 영적인 성숙에 있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가 물질지원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착취한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연보를 하도록 한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말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세 명의 형제들을 세워서 조심스럽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은 그들이 신자답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나 개인의 생활을 바르게 했으면 가정과 교회 내에서 형제들과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화목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복음은 세상에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이 같이 할 때 우리가 실족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시험하고 확증하라(13:1-13).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세 번째로 갈 때에 그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그가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했습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완전한 화해를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서로 싸우고 서로 시기하고 당을 짓고 분내고 혈기를 부리며, 비방하고 거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싸울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본다면 바울은 그들을 꾸짖고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원치 않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두 번째 방문 때처럼 또 다시 교인들 앞에서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을 하고 그의 인격과 가르침을 비난하는 형제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이 아직까지도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한다면 그들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기 전에 물밑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저 용서만 하고 양보하는 태도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동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에서 누룩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지키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약해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13장 3,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출신임과 신령한 환상과 기적을 자랑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고 초월적인 기적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성취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배웠습니다. 바울은 그 안에서 약하나 양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권면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의구심을 갖는 대신에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할 것을 권면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그들이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믿음은 신실한 것입니다. 변함없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공급해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합니다.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도 내가 진실로 믿음 안에 있는지, 성령께서 내 생각과 행동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한 것이요 시험에 불합격된 실격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운운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보야 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은 누구에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 낸 후에, 다른 사람의 눈에서 가시를 빼내고 믿음을 튼튼하게 세우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성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과도 문제가 생깁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원수들이 여기저기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나의 기대와 소망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욕심을 낸다고 다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채움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선을 방문했습니다. 노예선에는 평생 죄만 짓다가 잡혀온 많은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배 밑에서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왕이 방문했으니 많은 죄수들이 일생에 한번 뿐인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저마다 자기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죄가 없는 자입니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왕이 “자네는 왜 말이 없나”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 고생을 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때 왕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의인인데, 의인 속에 어떻게 너 같은 죄인이 있을 수 있느냐 너는 집으로 가라”하고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야겠습니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6-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 안에 있다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바울과 동역자들을 통해서 받은 말씀이 거짓이 아님도 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참 사도이며, 그와 동역자들은 모두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요 실패한 자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신앙을 갖도록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따라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사도적 자격을 변증해왔지만, 이것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보다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만을 바랐고 그것을 기도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그들을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그에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하였습니다(10).
그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축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축도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다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교제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하며, 동시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통하심이란 허물이 없는 교제와 사귐을 뜻합니다. 허물없이 서로를 감싸는 친교는 성령의 은사에 속합니다. 성도들의 친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서 성도 간에 친교가 이루어질 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 빚어집니다.
이렇게 고린도후서 말씀을 마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바울이 사도의 권위를 쓰기보다 온유와 겸손과 약한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다가가서 오해를 풀고 덕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봄 학기에 발휘하여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잘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12:11-13:13
요절 | 고린도후서 13:5
믿음을 확증하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오늘 말씀은 고린도후서의 결론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방문을 예고하면서 자신이 우려하는 일을 솔직하게 이야기 합니다. 그의 마음 속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또 어떻게 그 문제를 풀어야 하는지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아서 남에게 콩 놔라, 팥 놔라 하면서 요구하고 판단하기 쉽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정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믿음에 있는가를 확증해야 합니다.
첫째, 재물이 아니라 사람이다(12:11-2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신의 진면목을 알아주기 바랍니다. 그는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자칭 크다(“super-apostles”)고 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외적이고 세상적인 자랑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합니다. 아니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I am nothing). 그러나 그들보다 조금도 부족하지 아니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표가 무엇인가를 제시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 사도의 표로써 모든 참음은 내적 표시이고, 표적, 기사, 능력은 외적 표시입니다. 이런 사도의 표시는 거짓 사도들이 내세우는 추천장이나 세상적인 자랑과는 다릅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가장 먼저 내세우는 것은 ‘오래 참음’입니다. 내가 인정을 받고자 하는데 아무도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스트레스가 됩니다. 사람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음에 응력이 쌓이고 감당하지 못하면 폭발합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풀었을까요? 그는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흙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 깊은 자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자신을 써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했습니다. 어려움을 참고 이겨내는 힘은 성령의 은사입니다. 교회를 위해서 일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특히 바울은 많은 박해를 받았고, 생활고에 시달렸고, 그 무엇보다도 교인들로 인해서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사람에 대해서 오래 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직장에서도 사람과의 갈등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부모로서 자녀에 대해서 참아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고3의 부모들이 그러합니다. 양의 목자로서 사는 것은 더욱 참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의 허물을 보지만 오래 참는 것은 사랑과 성숙한 자세입니다. 모세는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참다가 분노를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직분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며 참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래 참는 것은 내가 먼저 주님께 용서를 받았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 나도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고난을 견디며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 사도의 증거입니다. 목자님들이 지금까지 떠나지 않고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자체가 하나님께서 목자로 부르신 증거입니다.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이 음란하고 이단에 빠지고 하나님을 떠나 있을 때에 십팔년을 참으면서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마침내 그가 회심하고 대학자가 되어 교회를 지키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한나도 브닌나의 무시를 받았지만 오래 참았습니다. 힘들 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였습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 사무엘을 낳았습니다. 또 아들 사무엘을 엘리 제사장에게 맡겼습니다. 그녀의 기도와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사무엘은 어두운 시대를 비추는 등불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역사를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두드러지는 것이 오래 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을 할 때 무엇이든지 진득하게 참으면서 계속할 때 실력이 붙고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실력이 아니라 충성이라고 했습니다. 충성하다보면 실력이 붙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의 표로써 둘째는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권능은 기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행1:8). 바울도 기적을 행하는 능력에 있어서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사도들 못 지 않았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가 된 자가 즉시 고침을 받고 일어났습니다. 빌립보에서는 점치는 귀신이 여종의 몸에서 쫓겨났습니다(행14:8-10; 16:16-18).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런 역사가 있었지만, 기록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고린도에서 한 바울의 사역을 보면, 병 고치는 이적은 별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이 변화되는 역사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결국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사도의 표시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아니했습니다. 이를 위해 천막을 만들면서 자비량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마게도냐 교회에서 선교비를 받아서 고린도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신수비를 받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도의 결격 사유로 지적하고 공격을 하였습니다. 사람을 공격하려면 별 것을 다 가지고 공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마게도냐 교회에서는 선교비를 받고 고린도 교회에서는 받지 않았을까요? 고린도 교회가 신생교회였기 때문에 헌금에 부담을 주면 복음의 장애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린 양들을 생각하고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가 말씀을 받는 자로부터 먹을 것을 공급받는 것은 정당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사도로서 바울도 고린도 교회로부터 부양을 받은 권리가 있었습니다(고전9:3-10). 그러나 물질보다 사람이 중요하기에 개척하고 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얻기 위해서 폐를 끼치지 않고자 받지 않은 것입니다.
바울은 세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에도 그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자 합니다. 당시에는 선교사들이 오면 숙식과 여비를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구하는 것은 그들의 재물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는 목적은 돈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성장과 유익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의 관계를 부모와 자식 관계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즉 어린 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어린 아이를 위하여 합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바울은 재물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내어줄 용의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르게 설 수 있다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관심은 재물이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 자체와 그들의 영적인 성숙에 있었습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교활한 자가 되어 너희를 속임수로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득을 취하더냐.” 바울의 대적자들은 그가 물질지원을 받지 않는 것처럼 하면서 착취한다고 비난을 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해서 연보를 하도록 한 것을 착취하기 위해서라고 비난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말들이 있을 것을 생각하고 세 명의 형제들을 세워서 조심스럽게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구제 사역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지금까지 자신이 자기 변명을 하는 줄로 생각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말을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이 모든 것은 너희의 덕을 세우기 위함이니라.” 바울은 그들이 신자답기를 바랬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답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믿음 위에 덕을 세워야 합니다. 나 개인의 생활을 바르게 했으면 가정과 교회 내에서 형제들과 서로 사랑하기를 힘쓰고 화목해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복음은 세상에 널리 퍼져나갈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씀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벧후 1:5-7).” 이 같이 할 때 우리가 실족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둘째, 시험하고 확증하라(13:1-13).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세 번째로 갈 때에 그가 원하는 것과 같이 보지 못하고 또 그가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이 보일까 두려워했습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완전한 화해를 이루기를 원하였습니다. 만일 바울이 원하던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여전히 서로 싸우고 서로 시기하고 당을 짓고 분내고 혈기를 부리며, 비방하고 거만하여 남을 업신여기는 모습을 보지나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부모는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싸울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보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실망스러운 모습을 본다면 바울은 그들을 꾸짖고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서로 원치 않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두 번째 방문 때처럼 또 다시 교인들 앞에서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습니다. 그의 사도적 권위에 도전을 하고 그의 인격과 가르침을 비난하는 형제들을 만나지 않을까 염려했습니다. 전에 죄를 지은 여러 사람이 아직까지도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한다면 그들을 만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지금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촉구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만나기 전에 물밑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자들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면 용서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저 용서만 하고 양보하는 태도만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전에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과 그들을 동조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교회의 이름으로 징계를 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회에서 누룩을 제거하고 거룩함을 지키고자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약해 보이지만 결코 약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고자 하는 것입니다. 13장 3,4절을 보십시오.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부활로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이 유대인 출신임과 신령한 환상과 기적을 자랑하였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은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서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강하고 초월적인 기적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는 자신의 약함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성취됨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배웠습니다. 바울은 그 안에서 약하나 양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들과 함께 살 것을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권면을 합니까?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사도성에 의구심을 갖는 대신에 자신들의 믿음을 시험해보고 확증할 것을 권면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그들이 믿음 안에 있는가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믿음은 신실한 것입니다. 변함없이 신뢰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이심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믿는 사람들 안에 거하십니다. 그를 믿는 자들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공급해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을 마음의 왕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성령이 충만합니다. 그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살고 성령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도 내가 진실로 믿음 안에 있는지, 성령께서 내 생각과 행동과 삶을 지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은 말씀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버림 받은 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한 것이요 시험에 불합격된 실격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서 운운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믿음을 확인해보야 합니다. 우리도 말씀을 대할 때 이 말씀은 누구에게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보다 먼저 자신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내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 낸 후에, 다른 사람의 눈에서 가시를 빼내고 믿음을 튼튼하게 세우는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고린도 교인들의 문제는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이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성에 문제가 있으면 사람들과도 문제가 생깁니다. 다툼이 일어납니다. 원수들이 여기저기 생깁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면서 그 말씀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말씀은 거울과 같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잘못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나의 기대와 소망이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하다면 회개하고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욕심을 낸다고 다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마음을 비우는 것이 채움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한 번은 알렉산더 대왕이 노예선을 방문했습니다. 노예선에는 평생 죄만 짓다가 잡혀온 많은 죄수들이 쇠사슬에 묶여 배 밑에서 노를 젓고 있었습니다. 왕이 방문했으니 많은 죄수들이 일생에 한번 뿐인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저마다 자기의 결백을 주장했습니다. “나는 억울합니다. 나는 죄가 없는 자입니다”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왕이 “자네는 왜 말이 없나”하고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참으로 죄인입니다. 여기서 이 고생을 해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때 왕은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의인인데, 의인 속에 어떻게 너 같은 죄인이 있을 수 있느냐 너는 집으로 가라”하고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내가 옳다고 주장하고 남 탓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믿음을 시험하고 확증해야겠습니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6-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버림 받은 자 되지 아니한 것을 너희가 알기를 내가 바라고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림 받은 자 같을지라도 너희는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만일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 안에 있다면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이 분명합니다. 또한 바울과 동역자들을 통해서 받은 말씀이 거짓이 아님도 증명이 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참 사도이며, 그와 동역자들은 모두 버림을 받은 자가 아니요 실패한 자들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악을 행하지 않도록, 그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시도록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여기서 ‘악을 행하지 않는 것’은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서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한 신앙을 갖도록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진리를 따라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의 사도적 자격을 변증해왔지만, 이것은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자신보다 고린도 교인들이 온전하게 되는 것만을 바랐고 그것을 기도의 우선순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그들을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그에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하였습니다(10).
그는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이 말씀은 오늘날 교회에서 축도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축도에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다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원의 은혜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하는 인간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구원의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성령의 교통하심’은 성령께서 일으키시는 교제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도 간에 서로 교제하며, 동시에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교통하심이란 허물이 없는 교제와 사귐을 뜻합니다. 허물없이 서로를 감싸는 친교는 성령의 은사에 속합니다. 성도들의 친교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성령을 따라서 성도 간에 친교가 이루어질 때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로 빚어집니다.
이렇게 고린도후서 말씀을 마치게 되어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셔서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바울이 사도의 권위를 쓰기보다 온유와 겸손과 약한 모습으로 성도들에게 다가가서 오해를 풀고 덕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봄 학기에 발휘하여 서로 사랑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을 잘 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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