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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2018 고후9강(11:16-12:10) 약한 것을 자랑하는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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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8회 작성일 18-02-18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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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9 강
말씀 | 고린도후서 11:16-12:10
요절 | 고린도후서 12:9

약한 것을 자랑하는 바울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지금 동계 올림픽이 중반에 접어들었습니다. 금메달을 따는 선수들을 보면 동작이 부드럽게 이어집니다. 그러나 어떤 선수들은 너무 힘을 주다가 실수를 하거나 실격을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진정한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진정으로 강해지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비결이 무엇인가 배울 수 있습니다. 

  지난 주에 이어 바울이 자신의 어리석은 자랑을 늘어놓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 사도들로부터 고린도 성도들을 돌이키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기 자랑을 하는 것은 매우 쑥스러운 일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 주님께서 행할 능력을 주셨고 또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죄인의 괴수요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던 자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이렇게 깊은데 어찌 자기 자랑을 하겠습니까? 또 자랑하면 하나님께 받을 상이 없습니다. 자기 자랑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가로채는 죄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어리석은 일인 줄 알면서도 적대자들이 하는 것처럼 자기 자랑을 늘어놓고자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지혜로운 사람들인데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지혜롭다는 말은 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말입니다. 그들은 거짓 사도들이 그들을 종으로 삼거나 잡아먹거나 빼앗거나 스스로 높이거나 뺨을 칠지라도 용납하고 있습니다. 잡아먹었다는 것은 뜯어먹다, 착취하다는 뜻이고, 빼앗았다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고, 뺨을 쳤다는 것은 폭행하거나 모욕을 준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인들은 이런 것들을 용납하였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바울은 그 대적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약함을 고백합니다. 대적자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서 기적을 행한 것 같이 기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처럼 언변에 능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것들이 그토록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대적자들에 비해 자신이 못지않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첫째, 혈통적인 배경을 자랑하는 바울. 먼저 바울의 혈통적인 자랑이 무엇입니까?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히브리인’이라 함은 강을 건너온 히브리어를 쓰는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는 거룩한 문서인 성경의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인이라는 것은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성경을 원어로 볼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다 성경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고 또 풍성하게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란 뜻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할례를 받은 언약의 백성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정통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입니다.

  둘째, 자신의 수고와 고생을 자랑하는 바울.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표징으로서 무엇을 내세웁니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라는 정신없는 말을 하지만 자신은 더욱 그러하다고 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아무런 수고도 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자신이 수고하고 고생한 일들을 열거함으로서, 참된 사도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말해 줍니다. 그는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바울은 일곱 번 이상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감옥에 갇히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또한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채찍으로 39대만 때렸는데 13대씩 세 번을 때렸습니다. 이렇게 채찍에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습니다. 태장은 몽둥이로 맞는 것입니다. 바울은 루스드라에서는 돌로 맞아서 죽었다가 성 밖에 버려졌는데 깨어났습니다. 갈라디아서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옛날에 군인들이 전쟁을 하다가 몸에 칼 자국이 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고 수고한 것이 분명한 분들 앞에서 우리는 잠잠할 뿐입니다.

  또 바울은 선교 여행을 하면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배가 파선하면 죽을 수 있는 위험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안전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교 여행을 하면서 수없이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위험들을 뚫고 복음을 전하면서 불사조와 같이 살아남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능력이 그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의 도전정신, 개척 역사는 많은 위험을 동반하였습니다.

  바울은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우리는 하루만 먹지 못해도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 주리고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그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입니다. 누가 약하면 그도 약하여 하였고 누가 실족하게 되면 그도 마음에 애간장이 탔습니다. 참된 사도의 표징은 이와 같이 더 많이 수고하고 헌신하고 고생하는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성도들을 종으로 삼고자 또 양들을 누르기 위해서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랑하는 동기가 다릅니다. 바울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양들을 섬기기 위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다고 하지만 바울이 받은 고난 앞에는 명함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는다고 기가 죽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 앞에서 낙담하거나 무기력해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군사들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받지만 용감하게 믿음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양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서 마음이 눌리고 때로는 잠도 자지 못하고 전도를 하다가 거절을 당하고 모멸을 당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에 추위 속에서 전도하는 것도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거절을 당해도 포기하지 말고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전도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상에서 볼 때 바울은 자신이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 받은 것을 떳떳하게 자랑스럽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선교보고를 들을 때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십년 이십년 고생을 했는데 남긴 열매가 없어서 실패자처럼 주눅이 들어 있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저와 우리 목자님들도 열매가 없어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중심을 지키고 남아 헌신하고 있는 자체가 영적인 승리이며 자랑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믿음의 영웅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고 열매를 맺기도 하고 약속을 받기도 하고 여러 이적을 나타낸 경우도 있지만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습니다. 이를 볼 때 믿음으로 산다고 해서 다 승리하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고난도 환난도 받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형편과 처지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기뻐할 수 있고 이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고난을 통해서 열매를 맺고 영광에 이르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가 넘쳐 흘러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는 바울. 바울은 부득불 자랑하는데 강한 것이 아니라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자신이 거짓말 아니 하는 것을 아신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고관들이 그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켰으나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난 것을 자랑합니다. 당시 로마인들의 가장 영광스러운 무공인 코로나 무라리스(corona muralis)는 포위하고 있는 도시 성벽을 첫 번째로 넘어가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도망자가 되어 성벽을 ‘내려간’것을 자랑합니다. 이처럼 바울은 의도적으로 부끄럽고 수치스럽게 생각되는 것을 자랑하여 오히려 자신을 어리석게 만듭니다. 우리도 복음을 전하다가 학교사무처에도 불려가고 수위에게 쫓겨나기도 합니다. 때로는 욕을 먹습니다. 우리의 어리석고 무식한 방식으로 하는 전도의 약함 속에서 하나님은 일하시고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무익하지만 바울은 부득불 자신이 본 주의 환상과 계시를 자랑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은사를 자랑하고 신비한 체험을 자랑했는데 그런 것들이 영적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어떤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까? 그는 삼인칭을 써서 말을 합니다. 자기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는데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고 합니다. 첫째 하늘은 새가 나는 곳이요, 둘째 하늘은 별들이 있는 곳이요,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당시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주님을 직접 만났고 그의 음성을 듣고 교제했음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천국을 체험했다는 고백입니다. 아마 그의 나이 40세 정도일 때입니다. 그는 14년 동안 자신의 신비한 체험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본 영광으로 인해서 수많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현재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게 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고백을 하였습니다(롬8:18; 딤후4:8).

  그러나 바울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자기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런 체험은 대적들의 자랑과는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을 위한 자랑거리로 삼지 않고 오직 대적자들의 비난에 맞서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에게는 자랑하거나 권장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자랑은 어리석은 일이며, 모든 영광은 오로지 하나님 한 분에게만 돌려져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자랑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그가 참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 그를 보는 바와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둡니다. 사람은 자기 자랑을 할 때 뻥튀기를 좋아합니다. 또한 이런 신비한 체험을 자랑하게 되면 복음 진리를 흐릴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그 독특한 체험으로 인해 자신이 보통 사람들과 같은 성정을 지닌 연약한 인간 이상의 존재로 평가하게 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을 보십시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서 육체의 가시는 안질이나 간질 또는 몸의 질병이었습니다. ‘가시’는 원어로 ‘스콜롭스’로서 끝이 뾰족한 나무 꼬챙이, 말뚝, 가시라는 뜻입니다. 이는 그가 지속적으로 육체적인 고통을 당했음을 말해줍니다. 그는 이 가시는 사탄의 사자라고 말했습니다. 사탄이 보낸 대리인, 사탄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가 안수해서 많은 사람들의 병을 낫게 했는데 자신의 병을 고치지 못하고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사탄이 조롱을 했을 것입니다. “너 자신이나 잘 고쳐라. 너나 잘해라.” 그가 당하는 육체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게 하고 영적인 회의를 불러올 정도였습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습니다. 고질적인 육체의 질병이나 연약함, 자녀의 문제, 우울증이나 정신적인 질병 등으로 인해서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께 충성하고 있는데 왜 내게 이런 아픔들이 있는가 회의가 생깁니다. 기도를 해도 잘 낫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반복해서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육체의 가시를 주셨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나님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하려고 이렇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약해질 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자기가 강한 사람은 하나님보다 자기의 능력을 의지해서 일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약할 때 더욱 깨어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요한 웨슬레의 아내는 악처였습니다. 그가 전도를 하고 집에 들어오면 후라이팬으로 머리를 내리치기도 했습니다. 그는 늦게 결혼을 했는데 이 자매는 하녀였고 시기심이 많은 여자였다고 합니다. 하여튼 골치 아픈 아내로 인해 그는 집에 들어가서 쉬는 것보다는 밖에 나가 전도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기도에 힘쓰게 되었습니다. 그는 위대한 감리교의 창시자요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도 유명한 악처였습니다. 그의 아내로 인해서 소크라테스는 인생을 깊이 성찰하게 되었고 ‘너 자신을 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나서 고난에 대한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는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자신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였습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궁핍을 기뻐하는 정도에 까지 이른 바울에 대해서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에 궁핍하게 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를 무시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돈이 좀 있는 가정이나 없는 가정이나,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었고 이를 기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이 돈은 적어졌는데도 가족 관계가 더 좋아지고 여유도 많아진다면 만족할 수 있습니다. 돈이 적으니 겸손하게 되고 서로 불쌍히 여기게 되고 돈 때문에 싸울 일도 없습니다. 때마다 하나님께 필요를 구하며 기도에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기보다 내가 처한 상황에서 스스로 기획하고 노력해서 좀 더 나아지는 삶을 산다면 만족을 느끼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가난해도 형편에 맞게 생활하면서 자족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강함과 지혜를 자랑하고 부와 성공을 자랑합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약점과 실패와 가난은 부끄러워하고 감추고자 합니다. 어찌하든지 약함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그 약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과 사역 속에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타나도록 우리도 약함을 자랑하며 겸손하게 주님을 의지하며 충만한 은혜 가운데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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