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18 고후 8강(10:1-11:15)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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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8 강
말씀 | 고린도후서 10:1–11:15
요절 | 고린도후서 10:17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자랑과 이론을 어떻게 파하고 복음 진리를 견고하게 세웠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10:1-6).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낮추고 비굴한 태도를 취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떠나 있으면 담대하고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이중적인 성격이나 태도를 가졌거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대놓고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관용을 깊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공중 앞에서 비난할 때 함께 감정적인 싸움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훈련할 때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적할 일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불러다가 말을 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한 베트남 선수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사42:2). 조용하게 자기의 일을 하셨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세도 백성들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서 가장 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담대한 태도를 취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바람이 가능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합니다. 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는 하나님에 의한 능력, 하나님을 위한 능력,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으로 싸웠습니다. 권위와 힘으로 복종을 시키려고 하면 당장은 듣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반발심만 키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소리를 치는 것보다 조용하게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말씀으로 설득하는 것이 더 힘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은 칼로 세계를 제패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나사렛 예수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따르게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당시에는 헬라의 철학적 전통과 그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 율법주의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진화론, 사회과학이론, 실용주의, 종교혼합주의, 4차 산업 혁명과 과학기술주의 등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 복종케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사람을 알고 시대의 조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기초 위에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세상은 날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시대의 사상과 싸우려면 시대를 이해하면서 새로운 무기가 필요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질 자체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무기는 오직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과 말씀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또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말씀이 세상의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가 일하는 능력은 지혜와 지식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볼 때 처음에는 바울도 두렵고 떨었는데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8).”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하였습니다. 복음 진리와 말씀, 성령의 능력만이 각종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둘째,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7-18). 고린도 교인들은 외모만 보았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랍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뛰어난 헬라 웅변술을 사용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지독한 말더듬이였습니다. 또 호흡기가 약해서 몇마디만 해도 숨이 찼습니다. 그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약돌을 물고 발음을 연습하고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며 발성 연습을 했습니다. 유명한 수사학자의 책을 여덟 번이나 베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뛰어난 웅변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로마 청년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하도록 웅변을 하여 다 동원을 시키고 자기는 두려워 뒤로 빠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목구비도 뛰어났던 데 비해서 바울은 체구가 작고 대머리였고 오다리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도 웅변술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평범하게 들렸습니다.
또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말을 하면서 바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바울에게 주신 권세는 그들을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로부터 고린도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떠나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행하는 것이 같다고 말을 합니다. 성실하고 진실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관된 자세를 갖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이 수고한 것을 자기가 한 것인 양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합니다. 여기서 범위의 한계란 선교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대로 고린도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에게 까지 이른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자랄수록 그곳을 기초로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으로 충만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는 맛에 산다고 합니다. 자랑할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웅변 실력 자랑, 글 솜씨 자랑, 학벌 자랑, 재산 자랑, 그림 자랑, 자동차 자랑, 집 자랑, 탁구 실력, 외모 자랑, 자녀 자랑, 손주 자랑, 맛 집에 대한 정보 자랑, 옷 맵시 자랑 등등 수도 없습니다. 그런 자랑은 자기를 높이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자랑할 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또 자랑할 때 뻥, 과장이 들어갑니다. 요즈음도 ‘자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을 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라는 것이요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자랑해야 합니다. 옳다 인정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입니다. 자랑은 자기 입으로 하지 말고 남이 해야 진정한 자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니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신을 어떻게 쓰셨는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한 후에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로마서 15장 17,18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바울은 주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했고 주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의 한계 내에서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벧전 2:9). 우리에게는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인정과 칭찬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비량 선교를 자랑하는 바울(11:1-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속인 것처럼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속이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11:1을 보십시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이 인간적인 자랑을 하니 자기도 인간적인 자랑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자랑을 통해서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다. 즉 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고린도 교인들을 순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려는 중매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 관습에 의하면 신부를 결혼시켜 신랑 집에 인도할 때까지 신부 아버지는 신부의 순결성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자 아비의 마음으로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받아서 신앙이 세속화되지 않을까,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헌신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지 모른다는 근심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대적자들이 전파한 것은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는데, 대적자들은 이와는 다른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다른 영’은 사탄의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영광과 번영을 추구하는 내용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거룩한 윤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고 쉽고 편한 길을 제시했습니다. 고난의 길보다는 부담이 없이 세상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강조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사그라들고 세상 욕심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집니다.
바울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나타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들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말과 지식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은 모세와 같이 어눌했습니다. 반면에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경 저자가 된 이유는 그의 지식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이 사도로서 정체성이 약하거나 자격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를 잘못된 사도라고 대적자들은 몰아부쳤습니다. 당시 복음 사역자는 교회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무료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천막을 만들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렸습니다(행 18:3, 11, 고전 9:14-15, 18, 고후 12:13). 즉 신수비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기 위한 목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평신도 선교사님들이 자립을 위해서 일을 하고 또 시간을 쪼개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성을 하고 메시지를 준비하여 섬깁니다. 이 일에 따르는 고난을 현지인들이 알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바울은 평신도 선교 운동의 모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부족한 것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개척 역사를 섬길 때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개척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할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비량 선교사로서의 길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거짓 사도들, 속이는 일꾼들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될 것입니다. 가짜는 결국 드러나고 진실은 영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적자들 역시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 기준은 ‘그 행위대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온유와 겸손과 희생적인 삶을 배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외모를 자랑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의 율법과 헬라 철학에도 능통한 자였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인 중의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적인 것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면서 교회를 개척한 것을 자랑합니다. 자비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어린 고린도 교회를 섬긴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자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이름을 내는 것으로 자랑하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의를 행하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으로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10:1–11:15
요절 | 고린도후서 10:17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거짓 사도들의 자랑과 이론을 어떻게 파하고 복음 진리를 견고하게 세웠는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어리석게 여기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섬겨야 하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첫째,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10:1-6).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함께 있을 때는 자신을 낮추고 비굴한 태도를 취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또 떠나 있으면 담대하고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자신이 이중적인 성격이나 태도를 가졌거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대놓고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얼핏 그렇게 보이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와 관용을 깊이 배웠기 때문입니다. 누가 나를 공중 앞에서 비난할 때 함께 감정적인 싸움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어리석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을 훈련할 때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지적할 일이 있으면 개인적으로 불러다가 말을 했기 때문에 자존심이 강한 베트남 선수들이 그를 신뢰하고 따랐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셨습니다. 그는 자기가 하는 일을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사42:2). 조용하게 자기의 일을 하셨지만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모세도 백성들의 불평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서 가장 승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담대한 태도를 취하지 않게 해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들이 자신의 권위를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바람이 가능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는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을 따라 싸우지 아니합니다. 그의 무기는 무엇입니까? 4절을 보십시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그는 하나님에 의한 능력, 하나님을 위한 능력,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으로 싸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으로 싸웠습니다. 권위와 힘으로 복종을 시키려고 하면 당장은 듣는 것 같지만 속에서는 반발심만 키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큰소리를 치는 것보다 조용하게 온유와 겸손과 사랑의 태도를 가지고 말씀으로 설득하는 것이 더 힘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은 칼로 세계를 제패하려다가 실패했지만 나사렛 예수는 온유함으로 세상을 따르게 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 능력은 모든 이론을 무너뜨립니다.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합니다. 당시에는 헬라의 철학적 전통과 그 사상으로 무장된 사람들, 거짓 사도들의 가르침, 율법주의의 가르침이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였습니다. 오늘날은 진화론, 사회과학이론, 실용주의, 종교혼합주의, 4차 산업 혁명과 과학기술주의 등이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이들을 어떻게 그리스도께 복종케 할 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사람을 알고 시대의 조류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런 기초 위에 말씀의 능력을 믿고, 그 능력으로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 4:12).” 이 세상은 날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세상에서 시대의 사상과 싸우려면 시대를 이해하면서 새로운 무기가 필요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본질 자체는 변할 수 없습니다. 인간 존재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죄인을 변화시키는 무기는 오직 복음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복음과 말씀으로 도전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또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고, 그 말씀이 세상의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는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 우리가 일하는 능력은 지혜와 지식의 영이신 성령의 역사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볼 때 처음에는 바울도 두렵고 떨었는데 십자가의 복음과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해서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8).”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6:17)”고 하였습니다. 복음 진리와 말씀, 성령의 능력만이 각종 세력들을 굴복시키고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둘째, 주 안에서 자랑하는 바울(7-18). 고린도 교인들은 외모만 보았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당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루살렘의 랍비들로부터 추천서를 받았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 교수 밑에서 공부하여 박사 학위를 받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뛰어난 헬라 웅변술을 사용하여 설교를 하였습니다. 데모스테네스는 본래 지독한 말더듬이였습니다. 또 호흡기가 약해서 몇마디만 해도 숨이 찼습니다. 그는 이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조약돌을 물고 발음을 연습하고 가파른 언덕을 뛰어오르며 발성 연습을 했습니다. 유명한 수사학자의 책을 여덟 번이나 베껴 썼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뛰어난 웅변가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는 로마 청년들로 하여금 전쟁에 참여하도록 웅변을 하여 다 동원을 시키고 자기는 두려워 뒤로 빠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이목구비도 뛰어났던 데 비해서 바울은 체구가 작고 대머리였고 오다리였습니다. 그의 목소리도 웅변술을 하는 사람들에 비하면 평범하게 들렸습니다.
또 바울의 대적자들은 자신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고 말을 하면서 바울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야말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입니다. 바울의 대적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바울에게 주신 권세는 그들을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로부터 고린도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의 믿음을 바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 대하여 우리는 떠나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행하는 것이 같다고 말을 합니다. 성실하고 진실된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일관된 자세를 갖는 것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증거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습니다. 대적자들은 바울이 수고한 것을 자기가 한 것인 양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합니다. 여기서 범위의 한계란 선교의 영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나누어 주신 대로 고린도에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그들에게 까지 이른 것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믿음이 자랄수록 그곳을 기초로 더 넓은 지역으로 나아가 복음을 전하기를 원했습니다. 바울의 마음에는 자신이 아니라 주님으로 충만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는 맛에 산다고 합니다. 자랑할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웅변 실력 자랑, 글 솜씨 자랑, 학벌 자랑, 재산 자랑, 그림 자랑, 자동차 자랑, 집 자랑, 탁구 실력, 외모 자랑, 자녀 자랑, 손주 자랑, 맛 집에 대한 정보 자랑, 옷 맵시 자랑 등등 수도 없습니다. 그런 자랑은 자기를 높이고 인정을 받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또 자랑할 때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또 자랑할 때 뻥, 과장이 들어갑니다. 요즈음도 ‘자뻑’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을 하라고 합니다.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이 하신 일을 자랑하라는 것이요 주님이 베푸신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행하신 일들을 알고 자랑해야 합니다. 옳다 인정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입니다. 자랑은 자기 입으로 하지 말고 남이 해야 진정한 자랑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9:23,24).”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 안에서 사랑과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로 말미암았으니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부족한 자신을 어떻게 쓰셨는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성공적인 선교 사역을 감당한 후에 언제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로마서 15장 17,18절에서도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이처럼 바울은 주 안에서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자랑했고 주님께서 정해 주신 분량의 한계 내에서 자랑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어두운 가운데서 불러내서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주님을 자랑해야 합니다(벧전 2:9). 우리에게는 사람의 칭찬이 아니라 주님의 칭찬이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로부터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는 인정과 칭찬을 듣기를 기도합니다.
셋째, 자비량 선교를 자랑하는 바울(11:1-15).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염려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뱀이 에덴동산에서 여자를 속인 것처럼 거짓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들을 속이고 그들의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었습니다. 11:1을 보십시오. “원하건대 너희는 나의 좀 어리석은 것을 용납하라 청하건대 나를 용납하라.” 바울은 자기를 비난하는 자들이 인간적인 자랑을 하니 자기도 인간적인 자랑을 할 수 있도록 그의 어리석음을 용납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바울은 대적자들에 비해서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자신의 자랑을 통해서 적대자들의 정체를 밝힙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으로 그들을 위하여 열심을 냅니다. 즉 그들을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고린도 교인들을 순결한 처녀로서 그리스도와 결혼시키려는 중매인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 관습에 의하면 신부를 결혼시켜 신랑 집에 인도할 때까지 신부 아버지는 신부의 순결성에 대한 책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고자 아비의 마음으로 의무를 다하고자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유혹을 받아서 신앙이 세속화되지 않을까, 그리스도께 대한 순수한 헌신을 잃어버리지 않을까,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질지 모른다는 근심과 불안이 있었습니다. 대적자들이 전파한 것은 바울이 전한 것과는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했는데, 대적자들은 이와는 다른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다른 영’은 사탄의 영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영광과 번영을 추구하는 내용을 전하였습니다. 그들은 죄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않고 거룩한 윤리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부인, 자기 십자가를 요구하지 않고 쉽고 편한 길을 제시했습니다. 고난의 길보다는 부담이 없이 세상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하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강조하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은 사그라들고 세상 욕심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집니다.
바울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가 비록 말에는 부족하나 지식에는 그렇지 아니합니다. 그는 이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나타내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사도들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말과 지식을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말은 모세와 같이 어눌했습니다. 반면에 지식은 뛰어났습니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인격적으로 아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경 저자가 된 이유는 그의 지식에 대한 확신과 하나님의 계시로 인한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이상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전한 것이 사도로서 정체성이 약하거나 자격이 없어서 그런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를 잘못된 사도라고 대적자들은 몰아부쳤습니다. 당시 복음 사역자는 교회로부터 재정적 후원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무료로 가르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 천막을 만들면서 스스로 생계를 꾸렸습니다(행 18:3, 11, 고전 9:14-15, 18, 고후 12:13). 즉 신수비를 받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양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을 높이고 자신을 낮추기 위한 목자의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평신도 선교사님들이 자립을 위해서 일을 하고 또 시간을 쪼개서 복음을 전하고 제자 양성을 하고 메시지를 준비하여 섬깁니다. 이 일에 따르는 고난을 현지인들이 알기 때문에 선교사님들을 존경하고 따릅니다. 바울은 평신도 선교 운동의 모델이었습니다.
바울은 자비량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마게도냐 교회로부터 부족한 것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는 고린도 개척 역사를 섬길 때 빌립보 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는 개척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할 것입니다. 그는 이제까지 해 온 그대로 앞으로도 그렇게 하고자 합니다. 그는 자비량 선교사로서의 길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거짓 사도들, 속이는 일꾼들도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합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될 것입니다. 가짜는 결국 드러나고 진실은 영원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행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대적자들 역시 그 책임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마지막 때의 심판 기준은 ‘그 행위대로’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사도 바울의 온유와 겸손과 희생적인 삶을 배웠습니다. 그는 자기의 외모를 자랑하지 아니했습니다. 바울은 사실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의 율법과 헬라 철학에도 능통한 자였습니다.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자유롭게 구사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인 중의 이스라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외적인 것을 자랑하지 아니합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으면서 교회를 개척한 것을 자랑합니다. 자비량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어린 고린도 교회를 섬긴 것을 자랑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고자 애를 썼습니다. 우리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성공하고 출세하고 이름을 내는 것으로 자랑하기보다 주님을 사랑하고 의를 행하며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는 것으로 자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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