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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2018, 고후6강(6:11-7:16)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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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91회 작성일 18-01-28 13:18

본문

2018 고린도후서 제 6 강
말씀 | 고린도후서 6:11-7:16
요절 |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오늘 말씀은 갈등관계를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갈등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지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지혜롭게 해결해 나갈 때 그 공동체는 성숙해집니다. 반대로 갈등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갈라서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 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과 그를 따르는 자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무시를 받았습니다. 그는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 편에 보냈습니다. 그가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났을 때 고린도 교인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이 얼마나 기뻤는지를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갈등관계에 있던 양들과 관계를 회복해나갔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왜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말아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의 유익이 무엇인가? 특히 갈등관계에 있는 양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 배우고자 합니다.

  갈등관계에 있는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의 마음이 어떠하며 그들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11-13절을 보십시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형제들아” 라고 부르지 않고 “고린도인들이여!”라고 부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아직도 고린도교회 안에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과 바울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마음을 넓게 갖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향해서 마음을 넓혔습니다. 그 증거는 그의 입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입이 열립니다. 마음이 닫히면 입도 닫힙니다. 마음이 열린 사람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소통을 합니다. 바울은 아비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에 비해 고린도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사도권에 대해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지원을 하지 않고 입을 닫고 있었습니다. 그 후 바울의 말을 듣고 회개하여 돌이킨 사람도 있고, 어떤 고린도 성도들은 섭섭한 마음을 갖고, 자존심을 상해하고, 마음이 닫혀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그들에게 자신의 태도에 보답하는 양으로 마음을 넓히라고 권면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이 쉽게 파괴되고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좁은 사람은 스스로 사서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같은 문제라도 마음이 좁은 사람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지만 넓은 사람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말하고 이해합니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 앞에서 나의 마음을 살피면 회개하게 되고 성장하게 됩니다. 또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서 생각하면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고 용납하게 됩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마음을 넓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에게 아비의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않습니다(고전4:14,15).” 목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비난하고 배반하는 양들로 인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마음을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냉정하게 대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양들에 대해서 아비의 마음, 어미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성숙한 사람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좁히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도 없고, 넓히면 우주를 품어도 남는다”고 합니다.

  또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떳떳했습니다. 7:2-4을 보십시오.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불의를 행하지 않고 해롭게 한 것도 없고 속여 빼앗은 일도 없습니다. ‘불의를 행한 적’이란 누구를 억울하게 한 것을 말하고, ‘해롭게 한 적’이란 망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망하게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생명을 얻게 했습니다. ‘속여 빼앗은 적’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연보를 사취한다고 오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살든지 죽든지’ 함께 살고자 함으로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그의 애정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는 디도에게 고린도 성도들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또한 그들로 인해서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쳤습니다. 사도 바울이 넓은 마음을 품고 그들과 소통을 하려고 노력했지만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거짓 사도들과 그의 영향을 받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취했습니까?

  6:14-16a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멍에’는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나무로 만든 막대기입니다. 이스라엘은 밭에 자갈이 많아서 두 마리 소가 한 멍에를 메고 밭을 갈았습니다. 두 마리가 함께 일해야 좀 더 쉽게 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두 마리 소를 멍에에 함께 멜 때는 암소는 암소끼리, 수소는 수소끼리 묶었습니다. 암소와 수소는 물론이고, 암소와 젖소를 한 멍에에 메지 않았습니다. 순결을 소중하게 여겼기 때문이고 또한 능률도 순결에서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서로 섞어놓으면 조화가 안 되어서 능률이 떨어집니다. 소와 나귀가 멍에를 함께 메면 소나 나귀 모두에게 엄청난 고통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밭을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가 믿지 않는 자와 함께 멍에를 메면 서로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즉 사도 바울을 대적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말라고 합니다. 멍에를 함께 하다 보면 그들에게 말려들어 바울을 대적할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자는 공동체에 있지만 실제적으로 믿지 않는 자, 또는 고린도 교회에서 추방된 자일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신앙의 혼합화’ 내지는 ‘신앙의 세속화’에 대한 경고입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다 보면 신앙이 혼합화 또는 세속화 되어서 신앙이 변질됩니다. 포도주에 물을 탄 것처럼 신자의 고유한 맛을 잃어버리게 되고 신앙이 주는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도 믿고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는 혼합주의로 인해서 신앙의 생명력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불신자들과 일체의 관계를 끊고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럴려면 산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인생 목적과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중심을 지켜야 합니다.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사는 것이 때로는 힘들지만 그들에게 신뢰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때 진정한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우상숭배와 이방문화 속에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으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인 우리는 세상에서 살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배가 바다에 떠다니지만, 바다 물이 배 속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거룩한 삶을 추구하게 만듭니다. 오늘날 우상숭배, 이단적인 가르침이나 사상, 세속주의, 세상 정욕, 물질주의, 음란문화 등, ‘온갖 더러운 것’이 우리의 삶에 침투하기가 쉽지만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더러움이라 해도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거룩한 생활은 의와 불법이, 빛과 어둠이, 그리스도와 맘몬신이, 참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현세대에 참된 신자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추구해야 할 삶의 지침입니다. 현재 우리 모임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모임이 갈수록 거룩해지고 성숙해지고 있습니까? 동역자들이 더욱더 복음적인 신앙 가운데 세워지고 있습니까? 더 뜨겁게 헌신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비전을 굳게 붙잡고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면서 진정한 영향력을 끼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디도를 마게도냐에서 만나기 전 바울의 내적 외적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5절을 보면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바울은 질병과, 자지 못하고 여행하는 위험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과 대적자들이 바울을 공격하였습니다. 안으로는 고린도교회가 공중분해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분당과 파벌싸움, 바울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서 고린도 교회의 양들을 잃지 않을까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그를 위로하셨습니다. 디도가 와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보고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 성도들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를 받고 그들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바울을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들음으로 더욱 기뻐하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책망을 듣고 반발하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오히려 그를 사모하고 있고 만나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목자 바울의 책망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또한 바울과 좋은 관계를 위한 열렬한 바람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목자 바울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고, 염려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소식을 듣고 바울은 몹시 기뻤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책망을 듣고 회개하고 목자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목자에게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목자의 책망을 양들이 잘 받아 줄 때 목자는 한 없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요이 1:4은 말씀합니다. “너의 자녀들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를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사도 요한도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진리를 행하는 것을 볼 때 심히 기뻐했습니다.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의 혹독한 책망을 들은 고린도 교인들은 고통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에 후회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디도가 오지 않자 더욱 근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의 편지가 고린도 교인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세상 근심은 백해무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양들의 죄 문제를 돕고자 하면 목자는 양의 죄 문제와 씨름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목자뿐만 아니라 양에게도 힘든 문제입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해서 방치해버리면 결국 양은 실족하게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의 죄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혹독한 편지를 써서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 편지를 통해서 회개에 이르는 근심을 하게 하였습니다. 사람을 돕고자 할 때 사랑과 신뢰의 관계성을 맺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 기초 위에 책망을 해도 먹히는 것입니다. 책망도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설익은 책망은 서로의 감정만 상하게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준비해서 전할 때 성령께서 역사하여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또 가르치려고 하기보다 본을 보이는 것이 더 효과적입니다. 때로는 오래 참아야 하고 때로는 눈을 감고 넘어가야 합니다. 상대방도 자기의 잘못을 마음 깊이 깨닫고 회개할 줄 믿기 때문입니다. 교회에는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징계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의 표지는 말씀과 성례와 징계입니다.

  다윗은 밧새바와 간통죄를 지은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비유를 듣고 결정적인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는 책망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삼하 12:1-15; 시51:2-4). 나중에는 시므이의 저주까지도 하나님의 야단으로 받아들입니다(삼하 16:7-10). 이로 인해서 회개하고 구원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반면 가인은 시기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의 책망을 듣지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창 4:5-8). 도리어 핏대를 세우며 대들었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마26:25). 그는 자기의 잘못을 자책했지만 돌이키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책망을 듣고 회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906-1907년 평양의 대부흥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 원산 지역에서 부흥의 불씨를 마련한 것은 바로 선교사 로버트 하디의 회개였습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파송 받은 남장로교 소속의 의료 선교사로서 1890년에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1901년부터 3년동안 원산과 강원도 통천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벌였으나 이렇다 할 사역의 열매가 없어 실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1903년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원산 지역의 선교사들 중심으로 기도회가 개최되었는데 그 모임의 강사로 초청을 받아 강의를 준비하던 중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한국에 파송된 서양선교사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민족적 우월감,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의 능력과 학력과 실력을 의지하는 자만감, 한국인을 미개한 민족과 무식한 백성으로 생각하는 깊은 자만감을 그대로 토로한 것이다. 말씀이 자신 안에 있는 죄악들을 드러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하디의 회개의 경험은 동료선교사들뿐 아니라 무엇보다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의 “솔직한 고백을 통해 한국인들은 죄에 대한 회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깨닫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개인의 회개 경험이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연결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되었을 때 놀라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들은 간절하게 바울을 사모하고, 바울을 변증하고, 바울을 대적한 것을 분하게 여기고, 대적하고 범죄한 자들을 징계하였습니다. 그 결과 자신들을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할 때 회개에 이르고 깨끗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깨끗한 물에서 생명이 회복되듯이 마음이 깨끗할 때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자유롭고 힘 있게 역사하십니다.

  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편지를 썼던 목적을 밝힙니다.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의로운 사람이 죄에 빠지지 않고 더욱 의롭고 성숙해 가는 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목자는 의로운 자들을 깨우쳐 죄에 빠지지 않도록 격려하고 사랑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문제가 생길 때 문제에 매몰되어 부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오늘날도 문제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훨씬 더 많은 선한 일들과 감사한 일들과 생명력이 넘치는 일들을 간과하고 힘을 빼기 쉽습니다. 우리는 선한 일들을 더욱 장려하여 악한 일들을 제압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에 대한 바울과 디도의 마음이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13-16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디도에게 고린도 교인들에 대해서 자랑을 했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인들을 직접 만나고 그들의 순종을 통해서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모든 일에 대해서 신뢰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서 기뻐하였습니다. 고난이 크면 클수록 위로의 능력이 큰 것처럼, 마음에 큰 고통이 있었던 바울은 이제야 비로소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되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갈등 관계를 풀기 위해서 마음을 넓히고 사랑으로 권면해야 합니다. 이해와 경청과 공감을 하면서 문제에 직면하도록 하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함으로 회개에 이르러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사람들로부터 죄를 지적 받을 때 세상 근심이 아니라 죄 자체를 회개하는 경건한 근심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소감을 통해서 서로 죄를 고하는 가운데 성숙한 공동체, 거룩한 공동체로 자라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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