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고후5강(5:11-6:10) 화목하게 하는 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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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5 강
말씀 | 고린도후서 5:11-6:10
요절 | 고린도후서 5:18
화목하게 하는 직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할 때 사람과 불화하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불화를 조성하는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할 때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를 새롭게 받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화목하게 하는 직분(5:11-21).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도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받으면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있고, 전전 대통령까지 검찰에 불려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투명한 삶, 정직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진정으로 자랑할 기회를 주기를 원할 정도로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비량하며 때로는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힘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포기하거나 상황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끝까지 감당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랑입니다. 전무후무한 사랑입니다. 자신을 오래 참으시며 감당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고 더욱 힘있고 뜨겁게 돌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왜 이런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까? 15절을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타락한 인간들의 특징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인생 목적이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에 있습니다. 그럴 때 시간과 돈을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씁니다. 가까이 있는 가족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강권될 때 가능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인생에 참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후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서 무시를 받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요, 마리아의 아들로서 천대를 받았습니다. 가장 극심한 것은 로마의 사형수로써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면 무시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존귀한 자이지만 죄인들을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같이 되었고 죽으셨지만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의 괴수로 알고 그를 따르던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인간 조건을 따라서 평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모로 자랑하며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인간적인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자기중심적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도 상호간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고귀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보아야 할까요?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귀합니다.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놀라운 창조의 역사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된 신자들을 볼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십니다(습3:17). 그의 존재 자체가 이런 기쁨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던 데서 나와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하며 살게 됩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정훈 울산대 교수는 어려서부터 반야심경해설서를 볼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군대도 불교군종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극렬하게 기독교를 배격하고 미워했습니다. 공립학교의 종교활동 금지법,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간판 철거 등을 외치며 극렬한 안티 크리스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듣던 중,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씀을 듣고, “쇼하네, 너나 잘 하세요” 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혀가 굳어지면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고,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십자가만 봐도 눈물을 흘리는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 때 그 마음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지금은 울산대 교수로 있으면서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변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우리의 죄값으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늘 불안하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심판의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과 원수 관계가 되면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합니까? 북한과 미국이 원수 관계입니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서 핵을 쏘겠다고 위협하고 미국은 힘이 최강이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힘들어 합니다. 하와이에서 북한이 쏜 미사일이 날라온다는 오보에도 불구하고 대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고 하는 일마다 저주가 뒤따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셨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두려움의 종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삼아서 희생하심으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면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사람과도 화목하게 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직분도 받았습니다. 이 직분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언약의 직분이 바로 화해의 직분입니다. 세상은 불화가 심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자, 제일 먼저 부부끼리도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면, 사람과도 불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화목하려면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화목의 직분을 맡은 자가 필요합니다. 가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둘째,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며 고난을 받았습니다(6:1-10).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 성육신 하시고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통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곧 낮아짐, 섬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할 때만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공짜로, 선물로 받았지만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공기나 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씀으로써 공기는 마음껏 들이마시기가 힘들게 되었고, 물은 마시기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값없이 주신 은혜라 하여 감사치 않고 이를 남용하게 되면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파멸시키는 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 합니까? 3-10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받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은 일반적인 시련이고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은 외부에서 육체적으로 가해지는 고난입니다. 수고와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하는 고난도 받았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는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의 무기로 좌우에 가지고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의의 무기를 가지고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겉모습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징벌을 받은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가 실제적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자 힘썼습니다(빌3: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직분을 감당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난과 궁핍함도 있고 죄와 불의와 맞서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겨야 합니다. 고난과 자기 부인을 배우지 않으면 기형적인 신앙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고난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5:11-6:10
요절 | 고린도후서 5:18
화목하게 하는 직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오늘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대속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에 대해서 나와 있습니다. 인간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 불화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불화할 때 사람과 불화하게 됩니다. 어디에서든 불화를 조성하는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화목할 때 피스 메이커(Peace maker)가 되어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어 주는 복된 사람이 됩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하는 은혜를 새롭게 받고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화목하게 하는 직분(5:11-21). 바울은 앞에서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는다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두렵고 떨림으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다시 너희에게 자천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을 것을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도 모든 것이 다 드러나는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으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 전직 대통령이 재판을 받으면서 모든 것이 드러나고 있고, 전전 대통령까지 검찰에 불려갈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할 때 우리는 투명한 삶, 정직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외모를 자랑하는 자들에게 자신에 대해서 진정으로 자랑할 기회를 주기를 원할 정도로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이를 위해 자비량하며 때로는 고난을 받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걸림이 되지 않도록 힘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13,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되어 살았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완전히 사로잡혔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죄인을 위해서 대신 죽으신 사랑입니다.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을 내어 주신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포기하거나 상황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끝까지 감당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수 없었던 사랑입니다. 전무후무한 사랑입니다. 자신을 오래 참으시며 감당해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갈수록 그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당해야 하는 고난을 피하지 아니하고 더욱 힘있고 뜨겁게 돌파해 나갔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왜 이런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까? 15절을 보면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사람이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오직 자신을 위해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해서 살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사탄의 말을 듣고 타락한 인간들의 특징은 자기를 위해 산다는 것입니다. 인생 목적이 자기 영광과 자기 만족에 있습니다. 그럴 때 시간과 돈을 이기적으로 자기만을 위해서 씁니다. 가까이 있는 가족조차도 사랑하지 못하고 무관심으로 섬기지 못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배려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에 강권될 때 가능합니다. 자기를 위해 살 때 행복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살며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섬기는 인생에 참 행복과 기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달은 후 바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예수님은 나사렛 사람으로서 무시를 받았습니다. 목수의 아들이요, 마리아의 아들로서 천대를 받았습니다. 가장 극심한 것은 로마의 사형수로써 십자가 처형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면 무시를 할 수 있지만 그 내용을 보면 존경하고 사랑하고 감탄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존귀한 자이지만 죄인들을 위해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어 이 땅에 성육신하셨습니다. 그는 죄인들과 같이 되었고 죽으셨지만 죄가 하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고 따르게 됩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단의 괴수로 알고 그를 따르던 성도들을 무자비하게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성경을 깊이 공부하면서 그가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인간 조건을 따라서 평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는 외모로 자랑하며 자기를 비난하는 사람들과도 인간적인 싸움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가치관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외모로 보고 자기중심적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도 상호간에 예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피 흘려 사신 고귀한 존재로 보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보아야 할까요? 17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옛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빚어서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음으로 사람이 되었습니다.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고귀합니다. 죄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사람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은 놀라운 창조의 역사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된 신자들을 볼 때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잠잠히 사랑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십니다(습3:17). 그의 존재 자체가 이런 기쁨이 됩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은 어두움 속에서 죄를 지으며 살던 데서 나와 빛 가운데서 의를 행하며 살게 됩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던 사람이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사는 것입니다.
이정훈 울산대 교수는 어려서부터 반야심경해설서를 볼 정도로 불교에 심취했고, 동국대 불교학과를 나와, 군대도 불교군종병으로 갔습니다. 그는 극렬하게 기독교를 배격하고 미워했습니다. 공립학교의 종교활동 금지법, 고려은단의 Jesus loves you, 간판 철거 등을 외치며 극렬한 안티 크리스찬으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기독교를 공격하기 위해 어떤 목사님 설교를 듣던 중,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 라는 말씀을 듣고, “쇼하네, 너나 잘 하세요” 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혀가 굳어지면서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강력한 전류가 흘렀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꼬꾸라졌고, 자신이 얼마나 악한 죄인인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십자가만 봐도 눈물을 흘리는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복음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되었을 때 그 마음에 천국이 임했습니다. 지금은 울산대 교수로 있으면서 순교정신으로 복음을 변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행하고자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18,19절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가 되어서 우리의 죄값으로 심판을 받아 영원한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이 늘 불안하고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고, 심판의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는 것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불화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과 원수 관계가 되면 얼마나 불안하고 답답합니까? 북한과 미국이 원수 관계입니다. 북한은 미국을 향해서 핵을 쏘겠다고 위협하고 미국은 힘이 최강이지만 그래도 불안해서 힘들어 합니다. 하와이에서 북한이 쏜 미사일이 날라온다는 오보에도 불구하고 대혼란을 일으켰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고 하는 일마다 저주가 뒤따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으셨다면, 우리 스스로는 하나님과 화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두려움의 종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사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미셨습니다. 아무 죄 없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삼아서 희생하심으로 화목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권면합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이 사람과도 화목하게 됩니다. 잠언 16:7을 보면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의 원수라도 그와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만 받은 것이 아니라 동시에 직분도 받았습니다. 이 직분은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것입니다. 새언약의 직분이 바로 화해의 직분입니다. 세상은 불화가 심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자, 제일 먼저 부부끼리도 화목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지면, 사람과도 불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화목하려면 하나님과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화목의 직분을 맡은 자가 필요합니다. 가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둘째, 화목의 직분을 감당하며 고난을 받았습니다(6:1-10). 바울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화목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려면 그리스도의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 성육신 하시고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기시고 마침내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온통 희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정신은 곧 낮아짐, 섬김, 희생적인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의 정신을 소유할 때만이 화목케 하는 직분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은혜는 그리스도의 피로 이루어지고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받은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공짜로, 선물로 받았지만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 공기나 물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를 가볍게 여기고 함부로 씀으로써 공기는 마음껏 들이마시기가 힘들게 되었고, 물은 마시기 힘들 정도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죄사함의 은혜가 값없이 주신 은혜라 하여 감사치 않고 이를 남용하게 되면 은혜를 헛되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하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를 파멸시키는 독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어떻게 합니까? 3-10절을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무도 우리가 섬기는 이 일에 흠을 잡지 못하게 하려고,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아무에게도 거리낌거리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 또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손과 왼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기 위해서 받은 고난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환난과 궁핍과 고난은 일반적인 시련이고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은 외부에서 육체적으로 가해지는 고난입니다. 수고와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하는 고난도 받았습니다. 이런 고난 가운데서도 그는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을 의의 무기로 좌우에 가지고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바울이 이런 의의 무기를 가지고 복음역사를 감당할 때, 사람들의 눈에 비추어진 겉모습과 하나님 앞에서의 실제 모습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과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과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있습니다. 징벌을 받은 사람과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가 이렇게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가 실제적인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자 애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의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권능을 체험하고자 힘썼습니다(빌3:10,11).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주시고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며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이 직분을 감당할 때 고난이 있습니다. 때로는 가난과 궁핍함도 있고 죄와 불의와 맞서야 합니다.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죄를 이겨야 합니다. 고난과 자기 부인을 배우지 않으면 기형적인 신앙인을 낳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과 고난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자라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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