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18 고후4강(4:7-5:10) 질그릇에 담긴 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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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고린도후서 제 4 강
말씀 | 고린도후서 4:7-5:10
요절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난을 견디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연약한 자들에게 복음 사역을 맡기십니까? 왜 사역자들에게 환난과 고난을 주사 한계를 느끼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사람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4:7-12).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요 질그릇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보배도 사람을 죽음에서 살릴 수 없고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얻게 합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쓸모 있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보배입니다. 골로새서 2: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보배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묘사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요1:4). 또한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 되시고(요4:14),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요6:35). 예수님은 소경에게 빛이 되시고(요9:5),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요11:25).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만이 충만합니다.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떼들 속에서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위대한 보배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질그릇인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보배와 같이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들고 신뢰를 얻게 역사하십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는 깨지기 쉽고, 약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그렇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약합니다. 의지도, 감정도, 지성도 약합니다. 죄의 유혹에도 약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연약함은 우리가 매일 체험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습니다. 보배는 보배합에 담아야 합니다. 아니면 강철로 만든 금고에 담아 보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심히 큰 능력은 고난 속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되신 예수님 때문에 질그릇 같은 우리가 깨지지 않고,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때마다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어려운 환경이나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그의 심히 큰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현장에서 심히 큰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증거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모든 경우에 고난을 받지만 눌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만 버림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주는 절망과 낙심을 이겨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한계에 부딪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도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은 새로운 힘을 주시고 믿음으로 일어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권세자들도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임현수 목사님은 1996년부터 북한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을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는 북한을 방문했는데 양식이 아무것도 없고 어린 아이들이 오랜 기간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지난 10년간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고 캐나다에서 북한까지 비행기로 150번을 오가며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사형 구형이었습니다. 그는 2년 6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꽁꽁 언 땅을 깨는 것과 석탄을 캐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영하 24~5도의 겨울에 양말 네 개를 신고 비닐로 덮어도 발이 너무 시렸고 엄동설한에도 하루 8시간을 꽉 채워 일을 해야 했기에 육체적인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그를 괴롭혔는데 언어폭력으로 그를 괴롭히는 북한 군인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십이지장 장애가 왔고 3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설사를 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임 목사는 “어느 날 땡볕에서 일하다 보니 너무 더워 ‘바람을 좀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한 점도 안 불었는데 기도하자마자 대형 선풍기를 튼 것처럼 바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너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찬양이 절로 나왔고 즐겁게 일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난을 제3의 성례라고 불렀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계속해서 돕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그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적극적으로 지고자 합니다. 그는 고난을 사랑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던 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일, 즉 대속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고생을 할수록 양들 가운데서는 생명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목자가 죽어야 양들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자의 희생적인 사랑을 먹고 양들은 자라납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잘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 힘있게 성장했고 순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날 때 죽음 권세가 떠나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랑, 용서, 온유, 겸손, 오래 참음, 친절, 기쁨 등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4:13-5:10). 13-18절은 부활의 소망을 믿음으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우리도 다시 살리사 모든 성도들이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죽고자 할 때 슬프거나 비장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부활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한 것처럼 바울도 자신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고린도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있습니다(15).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갈수록 늙고 눈도 침침해지고 머리도 빠지고 기억력도 흐릿해지고 여기저기 아프고 몸의 기능이 저하됩니다. 그러나 속사람 즉 ‘복음을 통해 거듭난 영혼’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서 날마다 신선하고 새롭게 솟아나는 은혜의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물이 날마다 복음의 일군에게 신선한 기쁨과 감동과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 속사람은 해가 갈수록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은 일시적이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을 때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서 자신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난은 영광을 낳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즉 몸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고 갑니다. 고난을 지고 가야 하는 목자의 삶은 영원한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장막 집은 유목민들이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했기 때문에 세우거나 철수하는 것이 쉬운 임시적으로 만든 집입니다. 견고하고 안정되게 지어진 집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 집에 비유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아니할 육체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가 낡아지면 죽고 맙니다.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슬퍼하고 절망하고 허무해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신령하고 강하고 거룩한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입니다. 무엇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바울 자신에게 지워진 직분의 짐을 말할까요? 바울이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 때문에 그렇게 많은 환난과 고난을 당한다면 직분을 벗고 싶을 수 있습니다. 또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면 삶을 벗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실의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벗고자 한다면 믿음을 버릴 수도 있고 직분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삶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 이는 죽어서 그 짐을 벗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입고자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입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고자 합니다.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짐이 무거우면 죽어서 짐을 벗고자 하는데, 바울은 오히려 더 큰 생명을 덧입어 그 짐을 가볍게 지고자 합니다. 삶의 짐이 무거울 때 짐을 벗어버리는 것도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삶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부담스러워 사람을 떠나면 짐은 가벼울 수 있지만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생명력이 더 커지고 힘이 더 커지면 짐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어깨에 힘들게 메고 가던 짐을 차에 싣고 가면 조금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짐도 버리지 않게 되고 그 짐 안에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공부하려면 짐을 많이 져야 합니다.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면 재미가 있고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게임만 하면 후에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공부를 해놓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힘드니 벗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할 힘을 덧입고자 하면 됩니다. 공부할 힘을 덧입고 공부하면 장래가 밝습니다. 어떻게 그런 힘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덧입혀 주십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삼키는 생명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 약해질수록 더 분명하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생명이 강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내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한 생명이 나타납니다. 약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면 져야 할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 없고 힘든 일이 많을수록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주님과 교제하며 그가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하루하루를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부활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몸을 주실 것을 확증하시는 보증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모으셔서 영원한 집으로 데려 가실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기초를 보이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약속들이 실제적으로 다가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고난보다 더 나은 상태를 갈망하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는 믿음으로만 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가시적으로 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1:20에서 고백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14:8)” 그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육체로 살아가며 행했던 모든 일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성경 선생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굳게 붙잡을 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심히 큰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 심히 큰 주님의 능력과 부활의 산 소망을 붙잡고 좀 더 새로워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4:7-5:10
요절 | 고린도후서 4:7
질그릇에 담긴 보배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난을 견디면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가를 알려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연약한 자들에게 복음 사역을 맡기십니까? 왜 사역자들에게 환난과 고난을 주사 한계를 느끼게 하실까요? 하나님께서 질그릇같이 깨지기 쉬운 연약한 사람을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자신의 연약함을 주장하기보다 하나님의 심히 큰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4:7-12). 바울은 보배를 질그릇에 가진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보배’는 예수 그리스도요 질그릇은 우리 신자들입니다. 세상의 어떤 보배도 사람을 죽음에서 살릴 수 없고 의롭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영생을 얻게 합니다. 쓸모없는 사람을 쓸모 있게 하고 어리석은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장 소중하고 귀한 보배입니다. 골로새서 2:3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하였습니다. 복음서에는 보배되신 예수님의 모습이 여러 모양으로 묘사되어 나옵니다. 예수님은 인생들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생명의 주가 되십니다(요1:4). 또한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영생수를 주시는 영생의 샘이 되시고(요4:14), 배고픈 자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십니다(요6:35). 예수님은 소경에게 빛이 되시고(요9:5), 사망권세에 신음하는 인생들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십니다(요11:25). 예수님에게는 어두움이 없고 운명이 없고 슬픔이 없고 죽음이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과 빛과 기쁨과 평화만이 충만합니다. 이 보배되신 예수님을 간직한 사람만이 보배와 같은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떼들 속에서 강력한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서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위대한 보배를 인식해야만 합니다. 질그릇인 우리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을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보배와 같이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예수님은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고 존귀하게 만들고 신뢰를 얻게 역사하십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는 깨지기 쉽고, 약합니다. 육체만이 아니라 마음과 정신도 그렇습니다. 고난이 닥칠 때 참아낼 수 있는 힘이 약합니다. 의지도, 감정도, 지성도 약합니다. 죄의 유혹에도 약합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의 연약함은 우리가 매일 체험하기 때문에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보배를 질그릇에 담으셨습니다. 보배는 보배합에 담아야 합니다. 아니면 강철로 만든 금고에 담아 보관해야 합니다. 그런데 보배를 질그릇에 담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심히 큰 능력은 고난 속에서 무너져 내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보배되신 예수님 때문에 질그릇 같은 우리가 깨지지 않고, 믿음을 버리지 않도록 보호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직분을 감당할 수 있도록 때마다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어려운 환경이나 자신의 연약함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의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그의 심히 큰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 현장에서 심히 큰 능력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증거합니다. 8,9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바울은 모든 경우에 고난을 받지만 눌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답답한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지만 버림을 당하지 않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고난이 주는 절망과 낙심을 이겨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고난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고 위로하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한계에 부딪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도 한계에 부딪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어려움 가운데서 하나님은 새로운 힘을 주시고 믿음으로 일어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권세자들도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있습니다.
임현수 목사님은 1996년부터 북한에서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어린이들을 비롯한 북한 주민들을 위해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습니다. 그는 북한을 방문했는데 양식이 아무것도 없고 어린 아이들이 오랜 기간 밥을 먹지 못해 굶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지난 10년간 고아원과 양로원을 설립하고 캐나다에서 북한까지 비행기로 150번을 오가며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사형 구형이었습니다. 그는 2년 6개월 동안 억류되어 있으면서 꽁꽁 언 땅을 깨는 것과 석탄을 캐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는 영하 24~5도의 겨울에 양말 네 개를 신고 비닐로 덮어도 발이 너무 시렸고 엄동설한에도 하루 8시간을 꽉 채워 일을 해야 했기에 육체적인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정신적인 고통도 그를 괴롭혔는데 언어폭력으로 그를 괴롭히는 북한 군인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아 십이지장 장애가 왔고 3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설사를 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총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임 목사는 “어느 날 땡볕에서 일하다 보니 너무 더워 ‘바람을 좀 보내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산으로 둘러싸여 바람이 한 점도 안 불었는데 기도하자마자 대형 선풍기를 튼 것처럼 바람이 몰려들었습니다. 너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서 찬양이 절로 나왔고 즐겁게 일했다”고 합니다. 그는 고난을 제3의 성례라고 불렀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깊이 만났습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계속해서 돕기를 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고 그의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적극적으로 지고자 합니다. 그는 고난을 사랑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났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던 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믿음으로 연합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직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는 일, 즉 대속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죽을 고생을 할수록 양들 가운데서는 생명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12).” 목자가 죽어야 양들이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목자의 희생적인 사랑을 먹고 양들은 자라납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을 잘라 먹고 사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 힘있게 성장했고 순수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나타날 때 죽음 권세가 떠나갑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생겨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랑, 용서, 온유, 겸손, 오래 참음, 친절, 기쁨 등으로 나타납니다.
둘째,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합니다(4:13-5:10). 13-18절은 부활의 소망을 믿음으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내용입니다. 13,14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예수님을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는 우리도 다시 살리사 모든 성도들이 그 앞에 서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과 함께 고난을 받고 죽고자 할 때 슬프거나 비장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는 자는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다는 부활의 승리를 확신했습니다. 그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더 좋은 상황이 전개된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고난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당한 것처럼 바울도 자신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고린도 성도들을 영적으로 성장하게 하고 있습니다(15).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육체는 시간이 갈수록 늙고 눈도 침침해지고 머리도 빠지고 기억력도 흐릿해지고 여기저기 아프고 몸의 기능이 저하됩니다. 그러나 속사람 즉 ‘복음을 통해 거듭난 영혼’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어서 날마다 신선하고 새롭게 솟아나는 은혜의 샘물이 있습니다. 그 샘물이 날마다 복음의 일군에게 신선한 기쁨과 감동과 행복을 줍니다.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 속사람은 해가 갈수록 성장하고 성숙해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고난은 일시적이요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이 있을 때 현실에 얽매이지 않고 이 땅에서 자신 있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고난은 영광을 낳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 즉 몸의 구속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고 갑니다. 고난을 지고 가야 하는 목자의 삶은 영원한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압니다. 장막 집은 유목민들이 이동을 자유롭게 해야 했기 때문에 세우거나 철수하는 것이 쉬운 임시적으로 만든 집입니다. 견고하고 안정되게 지어진 집과 대조를 이룹니다. 바울은 인간의 육체를 장막 집에 비유하였습니다.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은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이 세상에서 무너지지 아니할 육체는 없습니다. 모든 육체가 낡아지면 죽고 맙니다. 장막집이 무너질 때 사람들은 슬퍼하고 절망하고 허무해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썩지 않고 쇠하지 않고 신령하고 강하고 거룩한 몸을 덧입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입니다.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입니다. 무엇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바울 자신에게 지워진 직분의 짐을 말할까요? 바울이 자기에게 맡겨진 직분 때문에 그렇게 많은 환난과 고난을 당한다면 직분을 벗고 싶을 수 있습니다. 또 땅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힘들면 삶을 벗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현실의 삶의 짐이 너무 무거워서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벗고자 한다면 믿음을 버릴 수도 있고 직분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삶의 짐이 너무 무겁다고 생각하는 이는 죽어서 그 짐을 벗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벗고자 함이 아니라 입고자 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입고자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입고자 합니다.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짐이 무거우면 죽어서 짐을 벗고자 하는데, 바울은 오히려 더 큰 생명을 덧입어 그 짐을 가볍게 지고자 합니다. 삶의 짐이 무거울 때 짐을 벗어버리는 것도 사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그러면 삶을 놓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부담스러워 사람을 떠나면 짐은 가벼울 수 있지만 사람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보다 생명력이 더 커지고 힘이 더 커지면 짐이 더 이상 짐이 되지 않습니다. 어깨에 힘들게 메고 가던 짐을 차에 싣고 가면 조금도 힘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짐도 버리지 않게 되고 그 짐 안에 있는 것들을 누릴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것은 쉽지만은 않습니다. 공부하려면 짐을 많이 져야 합니다. 공부 안 하고 게임만 하면 재미가 있고 부담감이 없습니다. 그러나 게임만 하면 후에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공부를 해놓으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공부가 힘드니 벗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할 힘을 덧입고자 하면 됩니다. 공부할 힘을 덧입고 공부하면 장래가 밝습니다. 어떻게 그런 힘을 덧입을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덧입혀 주십니다. 그 생명은 죽음을 삼키는 생명입니다. 곧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사람의 생명이 약해질수록 더 분명하게, 강하게 나타납니다. 사람의 생명이 강하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 내가 약할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한 생명이 나타납니다. 약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나면 져야 할 짐을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간이 없고 힘든 일이 많을수록 새벽을 깨워 기도하고 일용할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주님과 교제하며 그가 주시는 은혜와 능력을 덧입고 하루하루를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은 부활의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몸을 주실 것을 확증하시는 보증이십니다. 물론 우리가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압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예수님이 계신 곳은 따로 떨어져 있습니다. 언젠가는 예수님이 자기를 믿는 모든 성도들을 모으셔서 영원한 집으로 데려 가실 날이 올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합니다. 바울은 신자들이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생활 방식을 따라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인생의 기초를 보이는 것에 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없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이런 약속들이 실제적으로 다가올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재의 고난보다 더 나은 상태를 갈망하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 때에는 믿음으로만 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에 가시적으로 주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9,10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바울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보다 어떻게 하면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빌립보서 1:20에서 고백하기를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롬14:8)” 그는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했습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육체로 살아가며 행했던 모든 일을 근거로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는 그 사람이 그 몸으로 행한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어찌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인생을 살고자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지만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로서, 성경 선생으로서 부르심을 입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굳게 붙잡을 때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낙심하기 쉬운 때에 심히 큰 능력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죄를 이기는 능력, 장애물을 뚫고 나가는 능력은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모두 심히 큰 주님의 능력과 부활의 산 소망을 붙잡고 좀 더 새로워지고 성장하고 열매를 풍성히 맺는 새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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