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서 2017년고후1강(1:1-24) 모든 위로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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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고린도후서 제 1 강
말씀 | 고린도후서 1:1-24
요절 | 고린도후서 1:3
모든 위로의 하나님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지난 주에는 포항에 5.4의 지진이 일어나고 수능 일주일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수능을 준비하던 학생들 중에는 참고서를 버렸다가 낭패를 당하거나 신체의 리듬을 수능 일에 맞추어 놓았다가 허탈해 하고, 다시 일주일을 더 보낸다는 것으로 맨붕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서울에서도 지진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가 지진에 안전한 장소가 아님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살아가면서 여러 모양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이 등장합니다. 고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사도됨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2).” 사도권 시비는 고린도후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지극히 큰 사도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바울의 사도됨을 부정하였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씀을 집필하고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공격함으로써 복음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4-6).”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행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하시며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소아시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의 2차 선교 여행 때에 일년 반 동안 머물며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와 자녀와 같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타락한 고린도 시에 교회가 세워진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바울이 떠나간 이후에 교회에는 음란과 분쟁, 우상의 음식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송사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싸움을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였고 회개에 이르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아가야는 바울이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의 한 속령입니다(롬15:25, 살전1:7). 당시 아가야 총독은 갈리오였고,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행18:12, 고후1:1).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아가야에 있는 아덴 교회나 겐그레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은 문제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이 찬송하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로우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는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자비는 연민 동정의 뜻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깊이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가운데 행하는 악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파라칼레오’는 ‘곁에서 도움을 요청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파라클레테)와 어원이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셔서 이를 견뎌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계속하여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마다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죄를 지으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과 환난, 질병과 오해와 여러 모양의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경험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고난이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속담에 과부 사정은 과부만 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롬15:12).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신다는 말이나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말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나 돌아보세요”라는 말도 상처가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찾아가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있어 주며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아무리 위로해 드릴 말을 찾아도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마음이 많이 힘들겠구나”라며 공감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위로가 필요한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양들 가운데도 고난 가운데 하루 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난을 알고 위로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말씀대로 살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넘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축복이나 물질이 넘치기를 바라는데 고난이 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빨리 지나가게 하기보다 위로를 주심으로 고난을 견디게 하십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세상 소망이 헛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이 맺히게 됩니다. 고난을 견디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 정금 같이 연단을 받게 되고 순수해집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위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과정에서, 양을 섬기면서도 고난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고난의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고난이 얼른 사라지는 것이지만 고난은 얼른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위로입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위로해준다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위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영접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환난 중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서 마음의 깊은 평강을 누립니다. 특히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히12:1-3). 우리가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작은 선물등 사랑의 표현이 위로가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위로가 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축복해 주심으로 위로를 해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지만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사랑해 주는 동역자들로 인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환난을 이겨낼 용기를 덧입게 됩니다.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를 섬기고 있는 김진경 총장은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북한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왔습니다. 쌀 천 톤을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북한 라선시를 비롯하여 209개 지역에 보육시설을 지어 33700명에게 매달 식량,분유, 의류, 약품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20년 넘게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1998년 9월 12일 북한 당국에 구속되었습니다. 이유는 그 많은 물건의 구입 자금이 어디서 왔는가, 한국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의 자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여 북한 체제 전복 음모죄로 구속했습니다. 그는 42일간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연금된 지 한 달가량 지나서 사형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통보를 받고 보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영광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깊으면 생명에 대한 경외와 함께 죽음에도 경외를 느낍니다. 그는 심문을 받던 어느 날 넉 장의 유서를 썼습니다. 하나는 학교에 보내는 편지, 두 번째는 아내에게, 세 번째는 미국 정부에 마지막으로 북한 당국에 썼습니다. 그는 미국에는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북한에 절대 보복하지 말라는 내용이었고 북한 당국에는 자신의 시신을 평양과기대에 기증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미국과 UN 총장, 독일, 스위스, 스웨덴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과기대의 가족들은 기쁨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12년 넘게 온갖 정성과 열정을 다 쏟아 저들을 도와주었는데 고작 돌아온 결과가 간첩 누명과 억류란 말인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는가.” “이제 북한 돕기는 영영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김총장은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도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김총장의 눈물 어린 호소에 모인 사람들은 목 놓아 울며 기도했습니다. 김진경 총장은 사랑으로써 학교에 감돌던 ‘미움’과 ‘분노’의 정서를 한순간에 걷어냈습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 평양과기대를 세우고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과 헌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를 불사조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환난을 당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너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돌에도 맞았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굶기도 했습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들을 겪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난을 받게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자기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형선고와 같은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믿고 의지하던 교만이 깨뜨려지고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절망 가운데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흔들릴 수 없는 부활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12-20절은 바울이 고린도 방문을 변경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방문을 변경함으로 그의 정직성이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직은 사도의 자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목자가 정직함과 신실함을 잃어버린다면,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왜 방문을 변경했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정직함과 신실함을 변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그들 사이를 굳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사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아끼려 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음에 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돕는 자입니다. 목자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양들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목자는 자기만족보다는 공동체의 기쁨을 위해서 사역을 합니다. 양들이 어릴 때는 주관할 필요가 있지만 성장하여 성숙하게 되면 자율성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주도적으로 양육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자립적으로 하도록 자유를 주고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양떼들을 성숙한 동역자로 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즉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2:7). 만일 직접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범죄한 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고 야단을 치고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반발심만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깨우치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는 복음 역사를 섬겨나갈 때 크고 작은 환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위로도 함께 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사역자나 성도들과 함께 하셔서 위로해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삶은 양들의 믿음을 돕고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양들을 주관하여 자기의 통제 아래 놓고자 하거나 양을 통해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는 위로도 있음을 알고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환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위로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고린도후서 1:1-24
요절 | 고린도후서 1:3
모든 위로의 하나님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지난 주에는 포항에 5.4의 지진이 일어나고 수능 일주일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수능을 준비하던 학생들 중에는 참고서를 버렸다가 낭패를 당하거나 신체의 리듬을 수능 일에 맞추어 놓았다가 허탈해 하고, 다시 일주일을 더 보낸다는 것으로 맨붕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또 서울에서도 지진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한반도가 지진에 안전한 장소가 아님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외에도 살아가면서 여러 모양의 고난을 당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위로라는 단어가 열 번이 등장합니다. 고난 중에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며 자신의 사도됨을 밝힙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2).” 사도권 시비는 고린도후서의 핵심 내용입니다. 지극히 큰 사도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고린도교회에 들어와 바울의 사도됨을 부정하였습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말씀을 집필하고 이적과 표적과 기사를 행하여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웠습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이 바울을 공격함으로써 복음의 권위를 떨어뜨리고 교회를 무너뜨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바리새인으로서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다가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묻자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행9:4-6).” 주님께서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행할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9:15,16)” 하시며 그를 이방인의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바울은 안디옥 교회에서 파송을 받아 소아시아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도 그의 2차 선교 여행 때에 일년 반 동안 머물며 개척한 교회였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는 아버지와 자녀와 같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였습니다. 타락한 고린도 시에 교회가 세워진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바울이 떠나간 이후에 교회에는 음란과 분쟁, 우상의 음식을 먹는 문제, 은사 문제, 송사 문제로 세상 법정에서 싸움을 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편지를 보내어 책망하였고 회개에 이르는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바울은 문제가 많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요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란 그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하나님께서 그 교회를 이끌어 가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아가야는 바울이 전도여행 때 방문했던 로마의 한 속령입니다(롬15:25, 살전1:7). 당시 아가야 총독은 갈리오였고, 수도는 고린도였습니다(행18:12, 고후1:1). 바울은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아가야에 있는 아덴 교회나 겐그레아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간구합니다.
바울은 문제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합니다. 3,4절을 보십시오.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바울이 찬송하는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로우시며,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그는 자비가 풍성한 분이십니다. 자비는 연민 동정의 뜻으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깊이 이해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 가운데 행하는 악을 아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그리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위로하다’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파라칼레오’는 ‘곁에서 도움을 요청하다’, ‘권면하다’, ‘격려하다’, ‘위로하다’라는 뜻입니다. 성령을 가리키는 보혜사(파라클레테)와 어원이 같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환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위로하셔서 이를 견뎌내도록 도와주십니다. 그는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 계속하여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가 환난을 당할 때마다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도우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 죄를 지으면 심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평강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때 말할 수 없는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과 환난, 질병과 오해와 여러 모양의 어려움들을 이길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위로를 받으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고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고난을 경험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의 고난이나 고통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 속담에 과부 사정은 과부만 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고난당하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습니다(롬15:12). 고난당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울어줄 때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만한 시련을 주신다는 말이나 신앙생활을 더 잘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더 크게 쓰시기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말은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나 돌아보세요”라는 말도 상처가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을 찾아가 있는 그대로 그들의 심정으로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함께 있어 주며 “힘내세요. 기도하겠습니다.” “아무리 위로해 드릴 말을 찾아도 위로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는 사람에게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보다 “마음이 많이 힘들겠구나”라며 공감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 위로가 필요한 선교사님들과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양들 가운데도 고난 가운데 하루 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고난을 알고 위로하는 삶을 살도록 주님께서 우리를 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말씀대로 살다가 많은 고난을 당하는 것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위로도 넘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축복이나 물질이 넘치기를 바라는데 고난이 넘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빨리 지나가게 하기보다 위로를 주심으로 고난을 견디게 하십니다. 이런 고난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세상 소망이 헛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게 됩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깊이 맺히게 됩니다. 고난을 견디기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게 되고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이 정금 같이 연단을 받게 되고 순수해집니다.
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바울은 자신이 당한 고난과 위로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된다고 말합니다. 즉 고난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위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인생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과정에서, 양을 섬기면서도 고난은 예외 없이 찾아옵니다. 고난의 때에 가장 필요한 것은 고난이 얼른 사라지는 것이지만 고난은 얼른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이 위로입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위로해준다면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위로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영접해주시고 위로해주시고 격려해주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환난 중에 큰 위로를 받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고 기도함으로서 마음의 깊은 평강을 누립니다. 특히 우리를 위해서 고난당하신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위로를 받습니다(히12:1-3). 우리가 고난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작은 선물등 사랑의 표현이 위로가 됩니다. 고난당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주고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도 위로가 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을 축복해 주심으로 위로를 해 주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당하지만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고 사랑해 주는 동역자들로 인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이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고 환난을 이겨낼 용기를 덧입게 됩니다.
연변과기대와 평양과기대를 섬기고 있는 김진경 총장은 1987년 북한을 방문한 이후 북한 돕는 일을 본격적으로 해왔습니다. 쌀 천 톤을 북한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북한 라선시를 비롯하여 209개 지역에 보육시설을 지어 33700명에게 매달 식량,분유, 의류, 약품을 지원했습니다. 그는 20년 넘게 북한의 어린이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1998년 9월 12일 북한 당국에 구속되었습니다. 이유는 그 많은 물건의 구입 자금이 어디서 왔는가, 한국 정보부와 미국 정보부의 자금에서 비롯된 것으로 의심하여 북한 체제 전복 음모죄로 구속했습니다. 그는 42일간 억류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연금된 지 한 달가량 지나서 사형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통보를 받고 보니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위로와 영광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습니다. 그는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깊으면 생명에 대한 경외와 함께 죽음에도 경외를 느낍니다. 그는 심문을 받던 어느 날 넉 장의 유서를 썼습니다. 하나는 학교에 보내는 편지, 두 번째는 아내에게, 세 번째는 미국 정부에 마지막으로 북한 당국에 썼습니다. 그는 미국에는 그의 죽음으로 인하여 북한에 절대 보복하지 말라는 내용이었고 북한 당국에는 자신의 시신을 평양과기대에 기증해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미국과 UN 총장, 독일, 스위스, 스웨덴 정부의 노력으로 석방되었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과기대의 가족들은 기쁨과 함께 분노했습니다. “12년 넘게 온갖 정성과 열정을 다 쏟아 저들을 도와주었는데 고작 돌아온 결과가 간첩 누명과 억류란 말인가?”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세상에 이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는가.” “이제 북한 돕기는 영영 그만두어야 한다.” 하지만 김총장은 “그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한 사람도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김총장의 눈물 어린 호소에 모인 사람들은 목 놓아 울며 기도했습니다. 김진경 총장은 사랑으로써 학교에 감돌던 ‘미움’과 ‘분노’의 정서를 한순간에 걷어냈습니다. 그는 죽음을 넘어 평양과기대를 세우고 지금도 섬기고 있습니다. 그의 이런 사랑과 헌신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를 불사조와 같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어느 정도 환난을 당했습니까? 8,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바울은 아시아에서 당한 고난이 너무 힘들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히고 매도 맞고 돌에도 맞았습니다. 잠을 자지 못하고 굶기도 했습니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는 고난들을 겪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런 고난을 받게 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 매달리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자기가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이르지 않았다면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우리는 사형선고와 같은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믿고 의지하던 교만이 깨뜨려지고 진정한 겸손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큰 사망에서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절망 가운데서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이로 인해서 흔들릴 수 없는 부활 신앙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며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12-20절은 바울이 고린도 방문을 변경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방문을 변경함으로 그의 정직성이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정직은 사도의 자격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질입니다. 목자가 정직함과 신실함을 잃어버린다면, 신뢰를 회복하기까지 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왜 방문을 변경했는가를 설명하면서 자신의 정직함과 신실함을 변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고린도 성도들에게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그들 사이를 굳건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사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는 그들을 아끼려 함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그들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음에 섰기 때문입니다. 목자는 양들을 돕는 자입니다. 목자 자신의 기쁨이 아니라 양들의 기쁨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목자는 자기만족보다는 공동체의 기쁨을 위해서 사역을 합니다. 양들이 어릴 때는 주관할 필요가 있지만 성장하여 성숙하게 되면 자율성이 필요합니다. 자녀가 어릴 때는 부모가 주도적으로 양육하지만 성장하게 되면 자립적으로 하도록 자유를 주고 잔소리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양떼들을 성숙한 동역자로 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랐습니다. 즉 그들 스스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2:7). 만일 직접 가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면, 범죄한 자들을 엄중하게 책망하고 야단을 치고 훈련을 시켰을 것입니다. 이런 방법은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반발심만 일으킵니다. 그러므로 겸손하게 깨우치고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도록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서 우리에게는 복음 역사를 섬겨나갈 때 크고 작은 환난이 있지만 하나님의 위로도 함께 함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사역자나 성도들과 함께 하셔서 위로해 주시는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때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목자의 삶은 양들의 믿음을 돕고 하나님 앞에서 복된 삶, 행복한 삶을 살도록 돕는 것입니다. 양들을 주관하여 자기의 통제 아래 놓고자 하거나 양을 통해 자기 영광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자기를 섬기는 우상숭배자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환난을 주실 때는 위로도 있음을 알고 믿음을 지켜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환난은 위장된 축복이라고 했습니다. 고난 가운데 위로의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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