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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서 초심을 지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장성한 삶(폴홍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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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102회 작성일 16-11-06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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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심을 지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장성한 삶 (특강)

말씀 / 고린도전서 13:1-13                                     
요절/고린도전서13:11,13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11)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13)

이 엘리야목자님의 초청으로 이곳 동교에서 다시 여러분을 뵙게 되어 감사합니다. 오늘 고린도전서 13장 말씀을 통하여 “초심을 지키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장성한 삶”이란 주제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통하여,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알게 되었는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도바울의 인생소감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과거가 어떠하였으며 자기가 경험한 사랑은 어떠한 것이었고 이 영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위대하며 우리 인생을 변화시키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시간은 덧없이 흐르고 세상은 변합니다. 변하지 않는 초심은 사랑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사랑이 변치 않고 성숙할 수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삶에 아직도 역사하는 사랑에 대한 새로운 소망과 큰 기쁨을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바울의 인생 (1-3절).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나(I)”라는 단어를 무려 아홉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는 또한 조건문인 “만일(If)”이란 단어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위대한 면을 자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안경을 쓰고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겸손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기 전 그의 인생을 논하고 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과거에 바울은 사람의 방언(여러가지 언어)과 천사의 말 (소통능력이 천사를 능가할 정도) 말을 할 수 있는 소통능력의 달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히브리어도 하고, 글로벌 인재로서 그리스어도 할 줄 알았습니다. 로마 시민으로서 로마 사람들이 말하는 법도도 익히 알았습니다. 논쟁에 지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는 그의 인생은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구리와 꽹과리는 음악(예:심포니)의 특정 부분을 강조하기 위해 쓰입니다. 그런데 그런 구리와 꽹과리를 온 종일 쳐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짜증만 나겠지요. 같은 이치로, 설득력 있는 언변이지만 사랑에 기초하지 않은 말들의 잔치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을 갈구하는 죄인의 마음은 미사여구로 움직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바울은 구약 성경말씀의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예언하는 능력(말씀에 기초한 선지자적인 통찰력)이 출중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더라도 하나님의 비밀을 분명하고 신선하게 밝혀낼 수 있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지식의 넓이와 깊이는 그 당시 최고 일류의 수준이었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그는 세계 최고 대학의 수재들 중에 수재로서 아주 열심히 공부를 했을 것입니다. 그는 문제해결 능력이 비상하여 태산과 같은 도전적인 문제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도전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적인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유대 사회의 학계와 정계에서도 조기 출세하여 대제사장을 언제든지 만나 그의 추천서를 받아 들고 사방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감옥에 집어 넣을 수 있는 실천적인 능력이 풍부하였습니다(행9:1,2). 그는 유대사회에서 인맥이 탄탄하고 높은 지위를 가지고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청년 지도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그를 향해 부러움과 경탄하는 마음으로 그를 칭찬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그는 그 모든 예언적 능력과 태산을 옮길만한 문제해결사적 재능도 결국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이나 후나 정말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일에 대한 열심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담대하게 모든 사도보다 자신이 더 많이 수고했다고 자신있게 자랑했습니다. 예를 들면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전.후서 두권의 저자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로마서, 고린도 전후서, 디모데 전후서, 빌립보서, 에베소서, 데살로니가 전후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도서 등 총 13권의 책을 썼습니다. 그는 에베소, 고린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등 무수한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온 세상이 다 그에게 나아와 주의 말씀을 듣는 것 같았습니다. (행 19:10) 그는 유대인으로서 자기 민족에 대한 사랑이 특별하였습니다. 죄악된 백성을 위해서 지옥을 불사한 모세와 같이 사도 바울 자신도 자기 동족을 위한 일이라면 지옥에서 자신의 몸이 불에 타서 한 줌의 재로 없어진다 하더라도 거리낌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자신의 민족의 문화와 유산과 역사와 무엇보다도 고난당한 자신의 민족에 대한 아픈 마음이 있었습니다(롬9:3). 그러나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에 기초하지 않았을 때 그는 무지한자요 훼방자요 난폭자가 되었습니다.(딤전 1:13). 그의 모든 열심은 결국 그의 영혼에 참 평안과 기쁨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의 인생 경험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어떤 점에서 사도바울의 인생의 한 모습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어린 아이 시절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다 하더라도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인생은 병적인 요소로 고통합니다. 현재 박 대통령에 대한 성남 민심은 두 부모님을 잃고 불운했던 한 여인의 삶을 동정하기에는, 병적인 요소로 국정이 농락당한 데에 대한 반응입니다. 한국 역사에서 존경하는 많은 사람 중  유 성룡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불안하고, 비겁하며 의심 많은 왕, 공익성보다 당파싸움에 몰두한 정치, 흩어지고 버림받은 성난 민심, 끊임없이 상전 노릇 한 명나라 장수들, 무자비한 일본침략자들 등 수많은 난관 가운데 8년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그 비결은, 이 순신장군과 더불어, 백성을 향한 변함없는 사랑, 그 초심을 지킨 것입니다. 이 두 분들은 권력욕, 물질욕 등 자기 욕심을 잘 관리했습니다. 도덕성과 함께 공익성을 한결 같이 추구한 위대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저는 바울과 같은 대 사도와 전혀 비교 할 바가 못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저도 젊어서 열심히 일했습니다. 25살에 미국에 와서 일하고 공부하고 말씀을 가르치면서 네 자녀를 키우면서 남들에 비해 두 세배의 십자가를 지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도 하고 역사도 섬기고 교수로서 전문성도 쌓아서 참으로 바쁘게 앞만 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때가 이르러 2012년 톨리도의 사역을 물려줄 때가 되었을 때에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자로서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백 가지를 잘했다고 하더라도 열 가지의 허물이 있으면 그 허물밖에 남는 것이 없는 것이 인생의 진리입니다. 왜 내가 더 겸손히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 하지 못했는가 하는 후회와 회한의 심정이 더 컸습니다. 또한 막상 톨리도 역사를 러셀 킬리, 그렉루이스, 박베드로, 부루스콰이엇카우스키, 짐 폴, 캐빈 라일리, 잔 서등 목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물려주고 나니 무거운 짐을 벗은 것 같은 가벼운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큰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예수님의 단순하고 분명하게 사랑했던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둘째, 바울은 주님의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였습니다 (4-6). 4절부터 6절을 보십시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이것은 과거 사도바울이 알지 못했던 사랑을 자신의 실제 생활에서 체험한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성격이 오래 참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온유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경쟁심이 많아서 1등을 하지 않으면 시기하는 마음으로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성을 잘 내고 사람을 무시하는 전형적인 자기중심의 사람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러 신앙선배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 주님의 사랑을 깨우쳐 준 첫 번째 사람은 아마도 스데반 집사였을 것입니다. 스데반은 성령과 은혜에 충만하여 유대 지도자들 앞에서 말씀을 전한 뒤, 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교만과 악함을 책망하였습니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행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바울은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평생 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바울은 스데반의 기도를 통해 인내와 용서하는 사랑을 보고 그의 영혼이 크게 찔림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해 준 두 번째 사람은 아나니아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이 비추신 빛으로 엎드러졌을 때, 그는 어둠 속에서 고통 가운데  신음하였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그에게 보내셨습니다. 그는 처음에 머뭇거렸지만, 하나님께 순종하여 바울을 심방하였습니다. 아나니아는 그에게 손을 얹으며 기도하였습니다. “행 9:17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이 말씀대로 아나니아는 자신들을 핍박하던 사울을 마음으로 영접하고 사랑의 손길을 내민 위대한 사랑의 실천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바울에게 전해준 세번째 사람은 바나바였습니다. “행9:26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27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바나바는 바울을 영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심지어 바나바는 그를 다소로 데리고 가 합당한 때를 기다리도록 하였습니다. 후에 바나바는 그를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오도록 도왔습니다.

네번째 사람은 사도 베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사울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 당시 사도 중의 최고 지도자로서 사울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면에서 사울에 비해 예수님을 직접 체험한 사도 중의 사도요 초대교회의 최고 수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베드로를 어떻게 대하였습니까? “갈 2:11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13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아마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다가 예루살렘에서 자기 동료들이 왔을 때 자리를 피하여서 동료들과 같이 유대말로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즐기고자 하였던 것 같습니다. 이를 본 바울은 방을 나가고자 베드로를 불러놓고 공개적으로 그가 한 행동이 위선적이며 비복음적인 것을 책망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갈라디아서에 그것을 기록하여 전 세계로 돌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사랑을 몰랐다면 일생을 두고 잊지 못할 사건이었고 평생 동안 바울을 상종 못할 인간으로 취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울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고 예수님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 15-16 절에서 베드로는 바울에 대하여 언급하였습니다. “벧후 3:15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16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베드로는 절대 바울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울을 옹호하였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 대한 칭찬도 잊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주의 종들 (스데반, 아나니아, 바나바, 베드로)의 사랑이 바울의 영적인 눈과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랑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바울 역시 각 곳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많은 복음의 친구들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 불렀습니다(딤전 1:2). ). 그 외에 그는 많은 믿음의 동역자들 특히 실라, 디도, 에바브로디도, 빌레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글로에 (고전 1:11) 등의 이름을 언급하였고 그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였습니다. 물론 바울 뿐 아니라 그들도 바울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러한 주 안에서의 사랑의 교제와 우정을 통해 바울은 그 자신의 표현대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고 부르짖던 사납고 곤고하던 사람에서 변화되어 영혼의 치유를 받고 예수님 안에서 장성한 사랑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서서히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영원히 변치않는 예수님의 사랑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UBF 공동체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사랑의 수고를 감당 한 신앙선배들이 있는 곳입니다. 저는 마음이 너그럽지 못하고 많은 면에서 모나고 자기자랑에 찌들린 보잘 것 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신앙선배들과 여러 신앙의 친구들의 사랑의 수고로 저는 어두운 내면이 나음을 얻고,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이 세상에서 참 행복한 인생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1970년 이후 전 세계의 복음역사에 동참하는 많은 훌륭한 영적 친구들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많은 사랑이 담긴 섬김과 환영을 경험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 자신의 목표만을 위해서 살다가 이제는 신앙의 선배로서 후배들의 영적성장을 위해 조용히 수고하는 삶이 보람찬 것임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성숙한 신앙세계로 들어가는 첫 걸음입니다. 

신앙선배가 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발견을 하며 자아가 형성이 되도록,  자신의 인생을 책임성 있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비행기에서 안전 교육을 받을 때, 산소 마스크가 내려오면 먼저 남을 도와주려고 하기보다, 자기 마스크를 먼저 쓰고 옆에 있는 아들 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각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먼저 확립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먼저 배운 사람이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사도바울은 삼십대 초반에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10년에서 15년 정도  조용한 은둔기를 아라비아와 자기 고향 다소에서 보내고 사십대 중반에 안디옥에 와서 바나바 밑에서 성경선생의 직분을 감당한 것 같습니다. 신앙중기의 과정을 사십대 중반까지 가졌던 것 같습니다. 신앙초기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아를 확립하였던 것 같습니다. 빌립보서 3장 1-9절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발견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자랑하던 인간적인 요소들을 배설물같이 비워버리고, 죄악 된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새로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갈2:22).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의 영혼이 나음을 얻고 참 건전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셋째, 사도 바울의 그리스도 사랑의 실천 (7-13). 여기에서 바울은 예수님 사랑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인간적인 사랑은 우리 영혼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 잠시 있다 갈 존재들 입니다. 인생의 위기의 때에 우리는 홀로서서 우리의 문제와 씨름해야 되는 고독한 실존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참된 친구 그 이상의 존재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 늙으면 고독하고 외롭다는 것입니다. 최근 갑순이 갑돌이라는 드라마에서, 갑순이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사람이 명함없는 인생이 되면 패물이 되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도 갈 곳이 없어…. 아내한테 밥 한 끼 얻어먹기도  눈치가 보여. … 집에서도 완전 왕따야…”  이러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7).”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모든 것 (in all things)에서, 항상(always)” 사랑의 위대한 모습을 다 보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극심한 경쟁사회에서 과연 고린도전서 13장대로 우리가 살 수 있습니까?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기는 원하지만 너무나 진실하게 사랑의 원칙대로 살다가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고린도 전서 13장의 사랑을 젊은 시절에 모두 다 실천한다고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성장과정이 필요합니다.

“8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9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10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사랑은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결코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놀라운 영적인 은사들 (예언, 방언, 지식)과 비교합니다. 사랑은 결코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모든 은사들은 불완전하고 하나님의 선하심과 풍성하심의 일부분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랑만이 영원토록 남습니다.

“11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랑의 성장과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어렸을 때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소년시절 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2002년 1월, 고 이사무엘 박사님께서 소천하시기 며칠 전이었습니다.  1월에 그 분을 찾아뵙고 새해 인사를 드리는 것이 저의 습관이었습니다. 그 때 목자님은 매우 아프셨습니다. 심각한 건강 상태 때문에 아무도 만날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와 저는 그레이스 사모님께 그냥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목자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셔서 그분의 서재에서 몇 시간 대화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목자님께서는 숨쉬는 것도 힘들어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러나, 몇 시간 동안이나 제 두 딸과 두 아들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톨리도 역사와 저의 직장 일에 대해서 대화를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3장 11절을 읽으시고는, “이제 나도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하여 예수님의 사랑에서 더 자라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제가 목자님과 가졌던 마지막 만남이었고, 며칠 후 목자님은 집안에 화재가 나서 소천하셨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목자님께서는 장성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한 사람의 양을 귀하게 여기시고 복음의 동역자들을 위해 자신을 드렸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이 예수님 안에서 장성한 사람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은 행복한 신앙의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면서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로마서 1:14).”“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고린도전서 15:8,9).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디모데전서 1:15).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에베소서 3:8).  사도 바울이 장성함에 따라 그의 내면은 예수님과 다른 사람들이 점점 커지고 자기 자신은 철저히 비우는 겸손한 종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인생의 말년을 보냈는지를 관찰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인생의 3기는 에베소에서 고별인사를 한 이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사실상 은퇴한 것이었습니다. 다시는 개교회 개척역사를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방인으로 부터 헌금을 가지고 왔을 때, 그 때의 리더십은 초창기 순교자적 복음적인 사도들이 아니었고, 그 주위환경과 타협하여 어떻게든 살아남고자하는 현상유지형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유대인의 관례대로 성전에서 제사를 드려서, 자신들에게 부담이 없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행 21:17-25). 그래서 그들은 바울에게 성전에 가서 유대인의 성결예식에 참여하도록 강권했습니다. 바울은 그 부탁을 받아들이고 결례의식을 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온 몇몇 유대인들이 그를 성전에서 보았을 때, 그들은 사람들을 선동해서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위험한 상황에서 바울은 자신을 구출해 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생 소감을 발표하며 예수님의 은혜를 증거했습니다. 그가 이방인을 위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해 말하자 모든 유대인들이 화가 나서 그를 죽이려 들었습니다 (행 21:3~22:21). 그는 죄수가 되어 감옥에 갇혔고, 2년 동안이나 유대에 있는 감옥에서 다른 감옥으로 전전하게 되었습니다 (행 24:27). 이 기간 동안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간절히 기도했던 것처럼 (행 12:5) 바울의 안전을 위해 기도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버려져 바울은 감옥에서 2년 홀로 있었습니다. 버림받은 몸이 되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써서 가이사에게 재판을 받는 조건으로 로마에 왔으나, 그는 고독했습니다. 의사 누가 외에는 아무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습니다 (딤후 4:16). 그러나 이때 사도 바울은 더 깊은 영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빌레몬, 디모데전후서등 주옥같은 편지들을 책으로 썼습니다. 바울은 그의 노년시절 인생의 밑바닥이서,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을 실천하신 예수님을 묵상하였고 예수님의 사랑과 인격을 사모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깊이 경험했습니다. 그 후로 그의 내면이 달라졌습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졌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하여 무엇을 하는가 혹은 무엇을 하지 않는가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세계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환영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셋방에서 오는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하나님 나라를 담대히 전하였습니다(Acts 28:18-20).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자신의 동역자들과 성도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감사와 기쁨과 평화가 그의 삶의 특징이 되었습니다. 그는 디모데, 디도, 빌레몬, 빌립보, 그리고 에베소 교회를 위하여 긴 편지를 썼습니다. 그의 내면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그리스도의 사랑은 그의 영혼에 감사와 기쁨과 평화를 넘치게 했습니다. 모든 면에서 자족하는 참 행복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 그가 순교하기 얼마 전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자신의 인생의 마지막을 기쁨과 평안으로 맞을 수 있는 하늘나라의 소망과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실천했습니다. 

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 뿐만 아니라 인생의 이면에 감추어진 모든 복잡한 것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입니다. 또는 이 세상 삶의 모든 사건이나 기억을 모두 잊어버리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롭고 영원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13”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하루는 성 프랜시스가 화단을 가꾸며 잡초를 뽑고 있었습니다. 한 방문객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내일 종말이 온다면 당신을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잡초를 뽑고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면, 이 세상의 마지막 날은 평범한 어느 하루와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대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자신이 많은 것을 배웠지만 어떻게 늙는가 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늙는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잊혀지나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또 세상에 귀중하던 것들을 하나씩 잃으나, 천국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무엇보다도 섭섭한 마음들을 극복하고 외로움을 감당하며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세상에 오는 사람을 하나하나 사랑하는 위대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고 성장하며 성숙한 인생을 산다는 것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마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도 시므온과 안나와 같이 믿음의 등불을 지키는 훌륭한 목자님들이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하며, 영적으로 깨어있습니다. 은퇴 후도 빛이 나지 않는 일이라도, 노동을 하며, 수입에 맞게 검소하며 분수에 맞게 삽니다. 도움이 필요 한 작은 자들을 돕습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은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망으로 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최고인 이유는 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늙고 병들게 됩니다. 사랑하는 친구들도 하나씩 둘씩 떠나가고,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말도 할 수도 없고 움직일 수도 없는 때가 반드시 오게 됩니다. 그때에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뒤로 두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마음에 "만세반석"이란 찬송가를 부르고 예수님의 사랑을 의지하며 하늘 문이 열리는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살아 생전 숨 쉬고 죽어 세상 떠나서
  거룩하신 주 앞에 끝날 심판 당할 때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 갑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님 안에서 행복한 소년시절, 청년시절, 장년시절 그리고 노년시절을 보내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16년 11월 6일 (동교)  홍 바울 (미국 톨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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