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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17강(10:1-24)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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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51회 작성일 22-11-13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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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7 강 
말씀 | 누가복음 10:1-24
요절 | 누가복음 10:2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면서 자신이 가고자 하는 지역으로 칠십 명의 제자들을 또 전도여행을 보내십니다. 우리는 여기서 죽음을 앞에 두고서도 선교 열정과 추수할 일꾼들을 간절히 찾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도해야 좋은지 예수님께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따로 칠십 인을 세우시고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8장 1절에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 두 제자가 함께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하시면서 복음전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9장 1,2절에서 열 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셨습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전도의 본을 보여 주시고 이번에는 전도 실습을 시키신 것입니다. 제가 학생들과 함께 전도를 하면서 본을 보이지 않은 죄를 깨닫습니다. 내가 전도하지 않고 전도하라고 해야 소용없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제가 전도하기를 원하는 학생들과 함께 전도하면서 전도하도록 돕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10장에서 예수님은 칠십 명을 택하여 친히 가시려는 각 동네와 각 지역으로 둘씩 앞서 보내십니다. 전도하도록 보내신 것이지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받은 사람들이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칠십 명을 택하신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70이란 숫자는 완전수로서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분명한 뜻을 가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앞둔 긴박한 상황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을 계속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을 넘어서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되는 세계 선교 비전으로 충만하셨습니다.

  두 명씩 짝을 지어 보내신 것은, 합심 동역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일꾼이라도 복음을 전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힘든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극복하기 어렵습니다. 헛생각에 빠지고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둘씩 짝을 지어서 전도를 하면 서로에게 큰 힘이 됩니다. 전도서 4장 9-12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였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동역의 역사입니다. 한 사람은 연약하지만 두 사람이 마음과 뜻을 합치면 놀라운 시너지 효과가 일어납니다. 또한 둘은 증인으로서 합당한 숫자입니다. 유대인들이 송사할 때는 한 사람의 증언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있을 때에만 받아들여졌습니다(신19:15). 복음을 전할 때 두 사람이 증인이 되도록 하여 영접하면 구원 받고, 배척하면 심판을 받는 증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 인구가 17%이니 83%가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가 선교지가 되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이방인들의 마음은 열려 있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부요해져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교회와 같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계3:17).” 주님이 사랑하는 우리가 열심을 내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전도하여 구원을 받게 하는 것을 추수하는 것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때로부터 재림하실 때까지를 세상 모든 민족을 모아서 알곡은 거두고 쭉정이는 날려버리는 추수할 시기로 보셨습니다. 누구든지 복음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천국 문이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온 세상은 희어져 추수하게 된 밭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추수에 관한 모든 권한은 추수하는 주인에게 속해 있습니다. 한 영혼이 구원 받는 일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추수하는 일꾼들을 세우셔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추수하는 일꾼들의 수고를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몸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천사들이 아니라 우리를 통해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기를 기뻐하십니다.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은 너무나 많은데 복음을 전해줄 일꾼은 너무나 적습니다. 그래서 추수하는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전도하기 전에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주님은 열두 사도에 비해서 부족한 칠십 인의 제자들이지만 추수하러 보내십니다. 농촌에서 추수할 때에는 일꾼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나 노인들까지 다 동원해서 추수해야 합니다. 일손이 그만큼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열심을 내야 하지만 한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서 멸망으로 치닫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슬퍼하십니다. 그 슬픈 마음을 안고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알 때 우리는 전도하게 됩니다. 전도는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합심해서 해야 합니다. 먼저 합심해서 기도하고 역할을 분담해서 전도해야 합니다. 즉 기도하는 사람, 복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갈 사람, 말씀을 전할 사람, 사랑하고 섬길 사람, 같이 놀아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각자가 잘 하는 것을 하고 협력할 때 효과적으로 전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보냄 받은 제자들에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말씀하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은 복음을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 편에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어떤 것이 더 자연스럽고 편한지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또 성숙한 사람들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 사람일지라도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성장합니다. 저도 예수님을 믿고 첫 사랑으로 뜨거울 때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것 같습니다. 신앙 연륜이 오래되면 만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친구들이 많은 초신자들이 훨씬 더 복음을 전하기가 좋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는 캠퍼스 안에 있는 학생들, 직장 동료들, 친구들, 이웃들, 가족, 일가친척들 등 다양합니다. 또 복음 전도는 한 번으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이 조금씩 심겨지고 때가 되면 거두는 사람이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실 때마다 복음을 믿음으로 증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자들은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평안을 빌어야 합니다.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사람들은 염려와 두려움과 갈등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들에게 갈등과 싸움과 다툼이 없기를 빌고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선물해주어야 합니다. 만일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제자들이 전한 평안이 그에게 머물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전하는 제자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제자들은 복음을 영접하는 사람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먹고 마시는 문제를 머문 사람의 집에서 책임의식을 가지고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복음 전하는 자를 영접하거든 그 앞에 차려 놓은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고 전해야 합니다.
 
  어느 동네에 들어갔는데 영접하지 아니하거든 그 거리로 나와서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너희 동네에서 우리 발에 묻은 먼지도 너희에게 떨어버리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은 소돔과 고모라보다 견디기 어려울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언제나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배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할 때 영접하면 기쁘지만 배척하면 낙담이 됩니다. 자신이 무능하거나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복음 전도자의 책임은 충실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영접하지 않는 것에 대한 책임은 듣는 사람에게 있습니다(겔3:16-21). 그러므로 복음 전도자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복음을 전해주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서 낙심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발에서 먼지를 털어버려야 합니다. 이런 행동을 통해서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게 하고 심판을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북부 지역에 있는 고라신, 벳새다, 가버나움에 화를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지역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교만해서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이 많은 권능을 행하면서 복음을 전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반응과 관계없이 예수님의 대리자로서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  복음 전도자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권세를 부여받았습니다. 복음 전도자의 말을 듣는 것은 곧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지처럼 눈치 보며 구걸하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면 안 됩니다. 당당하게 생명의 복음의 전달자요 심판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칠십 인이 기뻐하며 돌아와 예수님께 선교보고를 하였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예수님은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그들을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우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우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기록된 것”은 현재 완료형입니다.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기뻐하라” 이는 현재 명령형입니다. 항상 기뻐해야 한다는 뜻이죠. 예수님은 제자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곧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계20:12). 그러므로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권능이 주어져 있다는 것보다도 자신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더 기뻐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우리가 사역에 대한 열매로 인해서 기뻐하거나 낙심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이 구원을 받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해서 늘 기뻐하며 감사해야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뻐하셨습니다. 특히 이 복음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였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더 나아가 제자들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이는 자들까지 포함합니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조용히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23,24).” 구약 시대에 위대한 인물들 곧 선지자와 임금들이 보고자 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제자들은 보고 함께 하며 그 분의 말씀을 듣고 행하시는 이적을 체험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까지 목격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이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우리는 이미 완성된 복음을 듣고 누리며 전하고 있으니 얼마나 복된 사람들입니까?

  주님께서 부족한 우리를 이런 특권을 가진 예수님의 제자요 추수할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우리가 이를 알고 당당한 자세로 권위를 가지고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 공동체 가운데 많은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셔서 홍대와 세계 캠퍼스에서 추수하는 역사를 이루기를 기도합니다. 이번 주에 있는 홍대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에 양들을 초청해서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자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수능이 끝나는 학생들을 일대일 성경공부에 초청해서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12월 25일에 있는 성탄연합예배에 초청할 양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서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서 복음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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