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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16강(9:37-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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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87회 작성일 22-11-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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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6 강                                               
말씀 | 누가복음 9:37-62
요절 | 누가복음 9:62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받으시고 제자의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그리고 계속해서 제자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내면성과 자세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마음과 제자들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 결심을 하고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고난 없는 영광만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어떤 마음과 자세로 자신을 따라야 하는지 가르쳐주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내면성과 자세를 새롭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자 큰 무리가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 앞에 나아와 소리를 질렀습니다.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귀신이 그를 잡아 갑자기 부르짖게 하고 경련을 일으켜 거품을 흘리게 하며 몹시 상하게 하고야 겨우 떠나 가나이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주기를 구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못하더이다.” 외아들이 이렇게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아이가 땅바닥에 쓰러져 게거품을 흘리며 손발을 흔들면서 경련을 일으킬 때 마음이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7장 15절에서는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25절에서는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이라고 말씀합니다. 귀신의 역사로 인해서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는 아들은 소통이 완전히 단절된 상태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답답함을 불에도 들어가고 물 속에도 들어감으로 표현했는지 모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니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이 외아들은 용하다는 의사를 찾아다니며 치료를 받았지만 상태는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소문을 듣고 나아왔는데 예수님은 안 계시고 아홉 제자들만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세 제자들에 대한 경쟁심도 있고 전도여행 때에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도 받았고, 경험도 있었습니다(9:1,6). 많은 귀신을 쫓아내었던 제자들이 어찌하여 귀신들린 아이 한 명을 고치지 못했을까요? 마태복음 17장 19-20절에서는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 9장 28-29절에서는 기도 부족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믿음과 기도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은 고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성령이 우리 마음에 임하십니다. 권세를 부여 받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사용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성령의 능력은 거룩한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거룩한 삶에서 믿음이 확실하게 되고 말씀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분명한 것은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번잡해서 기도가 잘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속이 시끄러웠기 때문에 기도를 해도 기도가 제대로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용을 썼지만 이 외아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고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볼 때 마음이 답답하였습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에게 참으리요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시고 3년 동안 소망을 두고 키우셨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서 믿음을 심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의 비밀을 소유한 복음의 일꾼들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믿음이 없고 패역한 그 시대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올라가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떠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제자들이 능력 있는 하나님의 종들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 승천하시고 나서 성령이 오시면 제자들이 권능을 받고 자신이 한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현재 제자들의 모습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이 없고 패역한 모습을 책망하고 아이를 데려오라고 명하셨습니다. 그가 올 때에 귀신이 아이를 거꾸러뜨리고 심한 경련을 일으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을 꾸짖으시고 아이를 낫게 하셨습니다. 아이를 그 아버지에게 도로 주시니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위엄에 놀랐습니다. 그들이 다 그 행하시는 모든 일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높아지고 그에 대한 기대가 증가할 때에 이상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을 너희 귀에 담아 두라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리라.”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들의 인기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에 온 마음이 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함으로 인류 구속 역사를 이룰 것을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 알지 못했습니다. 또 그들은 이 말씀을 묻기도 두려워하였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세상의 영광을 얻고자 할 때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디서 오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할 때 고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행할 때 능력이 나오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고난을 받고자 결심하실 때에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예수님께서 그 권능으로 로마의 군인들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에 누가 총리를 하고 누가 경제부총리를 하고 누가 행정장관이 될 것인가 서열을 정하고자 하였습니다. 국가를 경영하고 회사나 공동체를 경영하려면 이런 조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처음 누구를 만날 때 유교의 장유유서에 따라서 나이를 묻고 학번을 묻고 누가 형님인지 누가 동생인지 서열을 정해야 처신을 하는데 편안함을 느낍니다. 또 직장도 연공서열을 따라서 임금을 정하는 것이 오래된 관습입니다. 오늘날에는 이런 것보다 능력에 따라서 임금을 협상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기준으로 제자들이 공동체를 경영하기를 원하셨을까요?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 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어린 아이는 당시에는 사람 숫자에도 치지 않을 만큼 중요하지 않은 존재였습니다. 어린 아이는 연약하기 때문에 늘 섬김이 필요하고 도와야 합니다. 잔손이 많이 갑니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무엇을 가르쳐 주면 잘 받아들입니다. 제자들은 이제까지 어린 아이들이 모이면 시끄럽다며 쫓아버렸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유익한지 아닌지에 따라서 사람들을 영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모임에 필요한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도움과 섬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영접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c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c 그, '형제들')(새번역 마 25:34-37, 40).” 세상 나라에서는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자가 큰 자이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작은 자들을 품고 섬기는 자들이 큰 자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높으신 분이시지만 연약한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고 가난한 삶을 사시며 낮은 자리에서 섬기셨습니다. 세상에서 멸시 받던 세리와 창기와 각종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가장 높은 분이시지만 병들고, 버림받은 자들을 소중한 자들로 여기시고 보듬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한 사람을 천하보다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위클리프 성경번역선교회’는 5,000명의 사역자들이 600개 이상의 언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선교회의 대표인 타운센드는 어느 날 한 부부의 초청을 받아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 이후에는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부부가 참석하기로 한 성경공부 모임에 늦게 되었습니다. 식탁을 정리할 시간도 없이 급히 가야 했습니다. 그러자 타운센드가 “제가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할 테니 빨리 가서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십시오.”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말에 부부는 깜짝 놀라서 “아닙니다. 우리가 식탁을 정리한 후에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타운센드는 부부에게 성경공부에 참석하도록 재촉한 후에 홀로 남아서 식탁을 정리하고 설거지를 했습니다. 훗날 부부는 타운센드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유능하고 훌륭하다는 인상을 풍기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우리 집에서 설거지를 하는 그를 뒤로 하고 성경공부 모임으로 달려가면서 나는, 내가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 즉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보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작은 일, 작은 섬김을 소중히 여깁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건 인정해 주지 않건 맡은 바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홉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지 못해서 창피를 당했는데 이 사람이 귀신을 쫓아냈다는 것은 자신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귀신을 내어 쫓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요한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 것을 보고 기뻐해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자기가 속한 모임에 있지 않고, 자기들을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금지시켰습니다. 자기가 속한 모임만 인정하고 다른 모임은 배척한 것입니다. 그는 매우 편협하고 독선적이었습니다. 자기 모임이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다른 모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다른 교회나 단체나 교단끼리 연합할 수가 없습니다. 또 배울 수 없습니다. 그로 인한 경쟁과 쓸데없이 힘을 낭비하거나 중복해서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자들을 앞서 보내시매 그들이 가서 예수님을 위하여 준비하려고 사마리아인의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기 때문에 그들이 받아들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는 적대적이었습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에는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건너서 돌아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에 대한 편견이 없었기 때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런 마음을 사마리아인들이 알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들은 자신들을 영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분노를 하늘에서 불을 내려 꼬실라버리고자 마음을 먹고 주님께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함께 다른 마을로 가셨습니다. 제자가 좁은 내면으로는 세상 사람들을 품고 섬길 수 없습니다. 속 좁은 마음은 분열과 다툼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다양한 종류의 사람을 품고 섬겨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넓은 마음으로 나를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오래 참아야 합니다.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품고 섬겨서 어찌하든지 살리는데 제자 생활의 목적을 두어야 합니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여짜왔습니다. “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이 말은 어떤 희생과 고난도 감수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실제적으로 겪어야 할 고난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의 삶을 이상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을 보고 신령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존경하고 추종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예수님처럼 능력 있고 존경 받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많은 분들이 목자 생활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이 길을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고백하곤 합니다. 이제까지 목자로 살아온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 목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굴이나 집이나 머리 둘 곳은 보금자리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정된 집이 없으셨습니다. 삶이 불안정하고 가난했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따르려면 안정된 삶을 포기하고 가난한 삶을 각오해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라도 감수하고자 결단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따르면서 겪게 되는 많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후회하고 손해의식에 시달리게 됩니다.

  목자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명의 양을 제자로까지 세우는 데는 많은 인내와 눈물의 기도와 수고가 따릅니다. 목자는 양들로 인해서 애간장이 녹습니다. 이런 애씀과 희생이 있기 때문에 목자의 삶이 아름답습니다. 결혼생활과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수고와 희생과 섬김과 예기치 못한 어려움을 반드시 겪게 됩니다. 이를 알고 감당하고자 결심할 때 힘든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가 이번에는 한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인생에 찾아온 놀라운 기회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부모의 장례를 치루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자식의 책무를 무시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보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이 더욱 중요하고 시급하다는 뜻입니다. 부친을 장사지내는 일, 공부하는 일, 직장을 구하고 일하는 일, 자식을 키우는 일 등 모든 일들을 하면서 우리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초점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61,62절을 보십시오.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이 사람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소원을 가졌지만 먼저 가족들을 작별하게 해 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면 인간적인 정과 욕심을 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고자 결단했다면 이 세상과 가족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합니다. 사무엘상 6장에는 수레에 여호와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 길로 나아가는 암소들이 나옵니다. 그 암소들에게는 새끼들이 있었습니다. 새끼들이 “음매”하면서 어미를 불렀고 그들의 젖은 퉁퉁불어 아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뒤를 돌아보거나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벧세메스로 갔습니다. 사명을 완수한 후에는 그 소는 번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은 우리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 일을 위해서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 길로 올라가는 암소들과 같이 한 눈 팔지 않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가는 길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장래가 걱정이 된다고 해도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됐다고 하실 때까지 주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제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자세를 바르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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