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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15강(9:18-36)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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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8회 작성일 22-10-30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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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15 강                                           
말씀 | 누가복음 9:18-36
요절 | 누가복음 9:20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결산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여러 사건을 통해서 자신이 누구신가를 나타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치고, 죄를 사해 주시고, 광풍을 잠잠하게 하시는 사건을 통해서 그가 누구신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신지 충분히 보여 주신 후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질문을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통해서 제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또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한 사람들의 모임으로 교회가 세워집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오 우리는 그의 지체들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신앙고백을 함으로 구원을 받고, 이미 구원을 받은 분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제자의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신 장소는 마가복음을 참조해 볼 때 가이사랴 빌립보였습니다(막 8:27). 예수님은 중요한 시점을 앞에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를 사도로 임명하실 때 밤새워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질문을 하기 전에 먼저 기도하셨습니다. 인간의 지혜로는 예수님의 본체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실 때만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로 알 수 있습니다(엡1:17).

  예수님은 예비 질문으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더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본론으로 들어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구원과 영생에 직결된 문제입니다(요17:3). 예수님을 어떻게 아느냐에 따라서 이 땅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내세에서의 삶도 결정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20b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하나님의 그리스도’란 하나님께서 보내기로 약속하신 구원자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헬라어이고, ‘메시아’는 히브리어인데 그 뜻은 ‘기름 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은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를 택하시면 머리에 기름을 부어서 하나님이 택하여 세웠다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즉 하나님은 택하신 종들에게 하나님의 영을 부어주셔서 그 영을 통해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앙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나를 죄로 인한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나의 보호자요 인도자이시며 내가 영원토록 섬겨야 할 나의 왕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라는 뜻도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고백한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은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 왕이신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섬기며 그 분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신앙 고백한 순간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공급과 보호와 인도를 받습니다.

  로마서 10:9,10은 말씀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우리는 예배를 시작하면서 사도신경을 고백했습니다. 매주 신앙고백을 하는데 의미를 새기지 않고 형식적으로 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내용이 가장 길게 나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인격적으로 처음 영접하고 고백했을 때가 언제였습니까? 아직 그런 고백이 없는 분이 있다면 돕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때 무슨 일이 생길까요? 예수님을 영접할 때 성령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고 초자연적인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거룩한 역사가 시작이 돼요. 예를 들면 사랑에 대한 부담이 생깁니다. 옛날에는 항상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잘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이 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용서가 되기도 하고 전에 죄짓던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이 거북해 지기 시작하고  그렇죠? 그다음에 올바르게 살고 싶은 욕구 또 살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기도 하면 응답이 오기도 하고 애가 아픈데 급해서 손을 얹고 기도하면 애가 낫기도 하고, 여러 가지 거룩한 일들이 생깁니다. 옛날에는 설교만 들으면 졸음이 왔는데 이제는 귀에 들어오고, 성경이 이해가 된다든지 이런 일은 이전의 내가 아닌 좀 이상한 거룩한 요소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그렇죠?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한 분들이 용서 못할 사람을 용서하는 이유가 뭘까요? 성령이 오셔서 인간의 힘으로 안 되는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죠. 사랑만 받던 사람이 목자가 되고 섬기는 사람이 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성령을 받고 성령 하나님과 교제를 하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시고 장차 자신이 그리스도로서 받게 될 수난을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22).” 장로들, 대제사장들, 서기관들은 산헤드린 공회를 구성하는 세 그룹이었습니다. 장로들은 전통, 대제사장은 성전, 서기관들은 율법을 대표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버림을 당하고 죽임을 당한 후에 제 삼일에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가 반드시 겪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당하게 거부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대우받는 것을 무익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고난 받고 죽임 당한다고 해서 예수님의 사명이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요 승리하고 영광에 이르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일곱 마디를 하셨습니다. 어머니를 사도 요한에게 부탁하는 말도 하시고 그 중에는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런 말씀도 하시고, 목마르다 이런 말씀도 하시고 맨 마지막 말이 뭔지 아시죠? 다 이루었다! 이게 신약 중에는 헬라어로 쓰여졌는데 한 단어입니다. 테텔레스타입니다. 이게 상업 용어입니다. 돈 꿔주고 이 사람 다 갚잖아요. 그러면 마지막 빚을 다 갚아주면 딱 도장 찍어주는 게 테텔레스타예요. 갚아야 되는 거 다 갚았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면서 테텔레스타, 다 이루었다! 죄 값을 다 갚았다에요. 예수님께서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예수님은 무한하신 하나님이시고, 완전하신 인간이었기 때문에 가능했어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 죗값을 치루기 위해서 오셨고, 우리에게 천국을 선물로 주기 위해서, 우리에게 줄 천국을 마련하기 위해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의 의가 또 하나님의 사랑이 만족되었어요. 이제는 하나님께서 누구든지 구원을 선물해주시는 길이 생겨버렸어요.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구원의 선물을 받았어요. 가상입니다. 임종자리에서 천사가 천국으로 데리고 가려고 그럴 때, 어쩌면 사탄이 옆에서 아니 이 사람을 왜 천국에 데리고 갑니까? 이 사람이 이런 짓도 하고 저것도 해서 천벌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그럴 사람인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사람은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주장하겠죠. 그러면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가 그럴지 모릅니다. 맞습니다. 천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그 천벌을 대신 받았습니다. 그래서 누군가 하나님 보고, 아니 죄 진 사람을 벌한다고 그러면서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악한 사람은 벌을 안 하십니까?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맞습니다. 벌해야 합니다. 내가 다 갚았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로 받습니다.

  에베소서 2:8,9을 보면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뭐라고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의 특징이 뭡니까? 기쁜 마음으로 주고 기쁜 마음으로 받는 거죠. 선물의 특징은 공짜죠. 공짜. 내가 일을 하고 받는 건 선물이 아니고 대가. 잘 봐달라고 갖다 준 것은 뇌물. 여기 뭐라고 그랬냐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어요.

  여러분은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여러분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게 무슨 말일 것 같아요? 사람의 어떤 인격이나  착한 마음이나 착한 행동 이게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겁니다. 이걸 또 강조하기 위해서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얘기했죠. 사도 바울이 행위라고 말할 때는 성경대로 사는 거에요. 우리가 적어도 성경대로 살아야 구원을 얻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성경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거죠. 1000개의 법 중에서 하나라도 지키지 못하면 법을 어긴 것이니까 천국에 갈 수 없죠. 그러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왜 구원이 선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되냐? 선물이 아니면 자격인데, 자격으로는 천국 갈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 구원을 선물로 주시는데, 하나님 편에서 좀 딜레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죄를 많이 지었어도 우리를 벌하거나 지옥 보내는 거 원치 않으세요.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이 뭐라고 그러시냐하면 죄 지은 사람은 반드시 벌하신다고 했어요. 하나님은 의로우시기 때문에 죄 지은 사람 반드시 벌하셔야 하거든요. 이게 하나님의 딜레마에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죄를 졌으니까 다 벌하셔야 하잖아요. 이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거예요.

  하나님의 딜레마와 예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예화를 하나 들겠습니다. 어떤 조그마한 마을에 임금님이 계셨는데 임금님이 아주 의로우셨대요. 국민들을 다스리는데 돈이 있든지 빽이 있든지 상관없이 법대로, 상 줄 사람은 상주고, 벌 줄 사람은 벌주고 이랬대요. 국민들이 의로우신 임금님 하고 존경했답니다. 임금님이 의로우실 뿐만 아니라 사랑이 많으셔서 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효성이 지극했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어떤 법이 있는데. 이것을 어기면 기둥에다 이렇게 묶어놓고서 등어리를 채찍으로 40대를 친다는 법이 있었대요. 채찍은 보통 채찍이 아니라 가죽에다가 뾰족뾰족한 납덩어리 같은 걸 달아서 등을 치면 쫙 감기면서 잡아당기면 살이 쫙 찢어지는 이런 몸서리치는 채찍이었대요. 아무도 이 법을 어기기를 원치 않는 거에요. 그런데 어느 날 소문이 도는데 임금의 어머니가 이 법을 어겼다는 소문이 돌고 국민들 틈에 소문이 쫙 퍼지면서 국민들의 의견은 반으로 갈립니다. 국민들의 반은 우리 임금님은 의로운 분이시니까 가족이라 할지라도 죄를 졌으면 법대로 처벌을 할 거다. 국민들의 반은 우리 임금님은 사랑이 많으신 분인데 장정도 맞고 견디지 못하는 채찍을 어머니가 맞도록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다. 재판을 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이제 어머니는 법정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임금님은 용상에 앉아 있었어요. 형리가 죄를 낭독하는데 누가 들어도 그 어머니가 죄를 범하기는 했어요. 판결을 어떻게 내립니까? 임금이 금방 판결 못 내리십니다. 시간이 좀 지난 다음에 임금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어요. 저 여인이 죄를 범했다. 형틀에다 여인을 묶어라. 그러자 와 만세 소리가 났어요. 우리 임금님 의로우시다. 또 다른 국민들의 반응. 임금님 너무 무정하시다. 어머니가 그런 매를 맞도록 하다니. 형리가 어머니를 형틀에 묶고 그 무시무시한 채찍을 가지고 치려고 그러는데 임금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뚜벅뚜벅 내려와서 어머니 앞에 와서 왕관을 벗고 용포를 벗고 웃도리를 하나하나 벗어서 맨살이 드러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임금이 어머니를 등 뒤에서 감싸안았어요.  그리고 채찍을 든 형리를 쳐다보면서 자 이제 죄인을 쳐라. 그다음부터 채찍이 떨어지면서 살이 찢어지고 피가 흐르는데 죄를 지은 어머님의 살이 찢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 없으신 임금님의 살이 찢어지고 죄 지은 어머니의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죄 없는 임금님의 피가 흘러내렸어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바로 그거예요. 세상 사람들 행동으로, 생각으로,  말로, 너무나도 해서는 안 될 것을 하고, 해야 할 것은 못 합니다. 내가 받아야 할 천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천벌을 대신 받으신 거에요.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가 받아야 할 천벌을 대신 받으신 것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구약에 벌써 예언이 돼 있어요. 예수님이 오시기 7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을 했습니다. 이사야는 예수님 오시기 700여 년 전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이사야 53:6에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갈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가 받을 천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 어머니를 감싸 안고서 등에 채찍을 맞으신 임금님처럼, 우리가 받을 천벌을 대신 받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을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예수님은 지금 누군가의 마음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 시간 다 눈을 감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기를 원하는 분은 손을 들어 주세요. 예, 내려 주세요. 예수님을 영접하는 기도는 이렇게 합니다. 저를 따라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님, 구원을 선물로 주시어 감사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할 바를 하지 못하면서 살았던 죄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 죄를 위해 돌아가신 것을 믿습니다. 내가 받을 천벌을 대신 받으신 것을 믿습니다. 예수님, 내 마음을 엽니다. 내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내 죄를 용서해 주시고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저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주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으로 인도해주십시오.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다윗과 같은 왕국을 세울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상 왕들처럼 힘과 권력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이사야 53:4-6절에 예언된 대로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삼일 후에 다시 살아나셔서 죄와 죽음 문제를 해결한 하늘의 왕으로서 다스리십니다. 이처럼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영광에 이르는 것이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23절을 보십시오.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제자의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욕망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자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늘 자기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가 왕인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 중심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자리 잡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자기중심성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충돌을 합니다. 갈등을 겪습니다. 이때 자기중심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힘쓰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특징을 사랑으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삶은 순종과 섬김입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직장에서는 상관에게 순종하고, 국가 권력에 순종하는 가운데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순한 사람만이 아니라 거칠고 순종하기 힘든 동료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순종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잡을수록 나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나를 섬기는 사람들이 많아지니 나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자원이 많아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는 다른 사람들을 성공시켜주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예수님의 성품을 배워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때 생명을 얻습니다. 자유를 얻습니다. 세상에서는 맛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보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를 잃든지 빼앗기든지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와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세상에 계실 때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하늘에서 가지셨던 영광스러운 형체로 변화되셨습니다. 그분의 내부에서부터 영광의 광채가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고 얼굴 모습도 변화되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였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고,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별세에 대해서 이야기 했는데 별세는 ‘엑소더스’로서 길을 떠남이란 뜻인데 예수님의 죽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엑소더스로서 출애굽 역사를 연상시킵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생활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 장자 재앙에서 구원받고 이집트에서 나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서 인류의 죄와 죽음 문제가 해결되어서 믿음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됩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왔습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고난없이 영광을 누리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 말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나님께서 직접 세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권면하셨습니다. 즉 고난과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영접하고, 그 분의 제자로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님만 보였습니다.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였습니다. 변화된 예수님의 모습과 하늘의 음성은 제자들의 마음에 영원히 잊지 못할 강한 인상과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후에 베드로후서 1장 17,18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이 때의 일을 언급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하나님은 이런 경험을 통해서 제자들이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말씀과 성령을 통해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이십니까? 예수님은 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은 우리의 입술로만 되어서는 안 되고 우리의 머리와 가슴과 손과 발을 통해서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그 안에 거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가 그를 예배하며 따르되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제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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