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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22년 눅11강(8:1-21)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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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2회 작성일 22-10-09 14:30

본문

2022년 누가복음 제 11 강
말씀 | 누가복음 8:1-21
요절 | 누가복음 8:15

말씀을 듣고 결실하는 자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은 열 두 사도를 세우시고 수준 높은 제자의 삶에 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제자의 삶은 주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를 맺어야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둘씩 전도여행을 보내시기 전에 마음을 준비시키고 믿음 훈련을 시킵니다. 그들이 말씀을 전할 때에 다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배척하는 사람도 있고, 믿다가 배반하는 사람도 있고, 세상을 사랑하여 흐지부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백배의 결실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열매 맺는 인생을 사는 비결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를 마치신 후 각 성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열두 제자와 여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이 여자들은 주님께 받은 바 은혜가 커서 식사를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섬겼습니다. 자매님들의 헌신으로 인해서 복음 역사는 힘있게 전진하였습니다. 사실 복음 역사에서 자매님들의 헌신이 80% 이상일 것입니다. 자매님들은 섬세하게 양육을 잘 합니다. 이들의 해산의 수고를 통해서 형제들은 사랑을 받고 힘을 얻고 격려를 받습니다.

  각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큰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그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렸고 더러는 바위 위에 떨어지매 싹이 났다가 습기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나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고 외치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너무나 평범한 말씀이라서 무리들은 “별 것 없네”, “시시하네”하고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쉽고 단순하기 때문에 보통 흘려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도록 쉽게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사실 쉽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예수님은 비유의 대가이십니다.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자연과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사용하여 머리에 쏙쏙 들어가도록, 또 오래 기억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 비유를 듣고 더 깊은 뜻을 알고자 예수님께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묻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제자들에게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질문이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질문을 하지 않으면 예수님은 입을 다물고 계셨습니다. 일방적으로 주입식으로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 마음 속에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갖도록 자극을 주시고, 스스로 생각하며 해답을 찾도록 도우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그들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진리를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고 듣고 보게 됩니다. 그러나 소원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십니다.

  비유에서 ‘씨’는 무엇입니까? 씨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씨에는 생명이 있어서 땅에 심기면 싹이 나고 줄기가 나오고 잎이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씨만 보고 있으면 이 씨가 자라서 맺힐 꽃의 아름다움과 그 향기와 열매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씨에는 유전인자가 있어서 식물의 모양과 크기와 꽃의 모양과 열매를 점차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와 같이 사람의 마음에 심기면 자라서 믿음이 생기고, 덕을 베풀고, 친절하고, 온유하고,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말씀은 한 사람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변화시킵니다.

  씨가 길가에 있다는 것은 어떤 사람을 가리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길 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길 가는 밭과 밭 사이에 나 있는 작은 길을 말합니다. 길 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딱딱하죠. 길가에 떨어진 씨앗은 흙을 뚫고 들어가지 못합니다. 씨가 굴러다니다가 사람들에게 밟히며 공중의 새들이 먹어버립니다. 마귀는 말씀을 듣고자 할 때 그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습니다.

  요한복음 8:43,44을 보면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어떻게 사람의 마음에서 말씀을 빼앗아갈까요? 마귀는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을 통해서 말씀을 빼앗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대적인 생각을 갖게 합니다. 인간 이성을 최고의 권위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합니다. 진화론에 기초한 생각이 자연과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등 대부분의 학문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마귀가 이런 생각을 심는 이유는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사람들을 바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시간을 빼앗아버립니다. 또한 스마트 폰이나 유튜브 등에 빠지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어떤 분은 드라마에 심취하자 말씀이 들어오지 않더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들을 때 집중을 해야 합니다.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감동이 오면 메모를 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길 가와 달리 바위 위에 씨가 떨어지면 싹이 곧 나오지만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버립니다. 바위 위에 부드러운 흙으로 덮여 있고 햇볕이 비취면 열기가 있기에 싹이 곧 나옵니다. 그러나 흙 밑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햇볕이 내리쬐자 점점 시들어 말라버립니다. 몇 년 전에 정원에 배롱나무를 사다 심었습니다. 정원사가 배롱나무는 뿌리를 옆으로 뻗치기 때문에 밑에 콘크리트가 있어도 상관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역시 나무가 얼마 있다가 죽었습니다. 흙 밑에 콘트리트 바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콘크리트 바닥이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버린 것입니다. 흙 밑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뿌리를 내릴 수 없습니다. 제가 정원사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했습니다. 

  바위 위에 심겨진 씨와 같이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해버립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뿌리는 무엇일까요? 뿌리는 보이지 않지만 나무를 지탱해 주고 땅에서 물과 양분을 흡수해서 나무가 자라게 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 마음에 바위와 같은 것들이 있어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성이 자라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할 때 마음에 성령의 생수가 터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을 도울 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녀의 마음을 콱 막고 있던 바위를 깨뜨리셨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예수님을 바로 알고 메시아로 고백하며 기쁨이 충만해졌습니다. 그때 동네에 들어가 나의 모든 것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고 전도했습니다. 바위가 제거되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믿음의 뿌리가 자라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린 아이에게는 우유요 성숙한 사람들에게는 고기와 같이 영양분을 공급하고 힘을 주고 믿음이 자라게 하고 그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에 있는 ‘바위’는 무엇일까요? 사마리아 여인처럼 해결되지 않은 죄문제 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과 유대인 전통이 바위처럼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도 율법과 유대 전통이라는 틀에 갇혀서 생각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이 충돌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말씀을 들었지만 세상적인 메시아 관이 견고하게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복음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다는 말씀을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심지어 부활 이후에도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실 때가 이때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그 마음의 바위들이 깨어져버렸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힘을 얻어 땅 끝까지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 때에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제자들은 순교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가요? 사람은 자라온 환경의 영향을 받아 가치관, 세계관을 형성합니다. 일반적으로 구복신앙을 가지고 마음의 평안과 건강 유지, 성공하고 출세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유교적인 교육을 받아온 사람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불교 색채가 강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면, 운명적이고 체념적인 신앙생활을 합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눅6:38). 우리는 내 안에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옛 사람의 가치관, 세계관, 인식의 틀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늘 배우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세계관, 가치관, 인생관, 역사관, 인간관 등이 새롭게 형성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해서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뀝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하고자 할 때에 시련이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으면 시련의 풍파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시련은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연단입니다. 시련은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시련은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고 기도함으로 주님과 더 깊이 교제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뿌려진 씨가 더러는 가시떨기 속에 떨어지매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았습니다. 사실상 씨가 좋은 땅에 떨어졌지만 그 땅에는 가시떨기가 함께 자랐습니다. 가시떨기는 생명력이 강하여 황무지에서도 잘 자랍니다. 가시떨기는 주위에 물과 영양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 빨아들입니다. 가시떨기 밭에는 가시넝쿨도 있어서 나무를 빙빙 감아서 태양을 향해 올라갑니다. 그러면 가시덩쿨로 인해서 잎이 자라지 못하고 말라 죽게 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만 이생의 염려가 우리의 기운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합니다. 염려는 끊임없이 생깁니다. 사람에게는 동물과 달리 상상력이라는 특별한 힘이 있어서 미래를 생각하면서 염려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염려의 95%는 쓸데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염려하는 대신에 염려하는 날을 정하여 그 시간에만 열심히 염려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해야 하는 5% 염려 중에서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과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힘껏 하고,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은 열심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염려할 것을 찾는 대신에 하루 다섯 가지 감사제목을 찾아서 써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염려가 물러가고 희망이 생깁니다. 95% 염려할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하여 성공하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족하는 법을 배워야 하고 근검절약을 해야 합니다. 재물에 대한 소망 대신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재물은 있다가도 독수리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향락은 절제훈련을 함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또한 경건한 즐거움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즐거움, 찬송하는 즐거움, 선행을 하는 즐거움, 동역자들끼리 교제하는 즐거움, 운동의 즐거움 등등 세상의 향락이 아니라도 건전한 즐거움들이 많이 있습니다.

  뿌려진 씨가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서 백 배의 결실을 하였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햇볕과 수분과 영양분을 충분히 흡수해서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결국 백배의 결실을 합니다. 평균 수확량은 10배 정도인데 백배의 결실은 씨앗이 맺을 수 있는 최대치입니다. 엄청난 수확을 하는 농부는 얼마나 기쁠까요? 15절을 보십시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꽃은 열흘 정도 있다가 지고 나서 열매를 맺기까지 몇 달 동안 비를 맞고 태양을 맞고 비바람을 거치면서 열매가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서 순종할 때 말씀이 자라납니다. 지속적인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가치관이 바뀌고 선한 일에 힘을 쓰게 됩니다. 선한 일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일용할 양식을 먹고 주일 메시지를 듣고 그 말씀을 되새기면서 깨닫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깨달은 말씀을 어찌하든지 순종하면서 더 깊은 진리의 세계를 맛보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보고 체험합니다. 그 말씀이 점차 자신의 마음과 행동과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신실하게 살다보면 때론 박해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을 때에도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면서 인내합니다.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둡니다.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입니다. 즉 어두움을 밝히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를 드러내고자 전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빛을 감추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추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진리의 등불을 숨기지 말고 밝혀서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야 합니다. 진리를 숨기는 것은 어리석고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믿는 자들은 복음의 유익을 자신만 누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주어야 합니다.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17). 숨은 것이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야 합니다.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길 것입니다. 이 말씀은 씨의 비유에 대한 결론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삼가라’는 ‘관찰하라’, ‘식별하라’, ‘감지하라’는 뜻입니다. 내가 어떤 자세로 말씀을 듣고 있는지 관찰해보라는 것이지요. 말씀을 듣는 마음 상태가 길 가와 같지 않은지, 돌밭과 같지 않은지, 가시떨기와 같지 않은지 살펴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듣는 마음 자세가 잘못되었다면 바꾸어서 좋은 마음 밭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밝히 깨닫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밝아지게 되고 믿음이 깊은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말씀을 듣는 자세가 잘못되었으면 아무리 많은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믿음이 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갖고 있는 것까지 빼앗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가르치실 때에 그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어떤 이가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을 보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하셨습니까?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예수님의 가족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들을 가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있지만 예수님이 가장 원하시는 것은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말씀을 많이 들으면 행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때로 저도 말씀을 가르치는 것으로 일을 다 했다는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족으로서 그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열매 맺는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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