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10강(7:18-50) 많은 죄, 많은 사랑
페이지 정보

본문
2022년 누가복음 제 10 강
말씀 | 누가복음 7:18-50
요절 | 누가복음 7:47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세례 요한과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씻은 여인이 나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 좋은 예입니다. 세례요한은 공의를 세우는 것으로, 이 여인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회개의 물 세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헤롯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다 30대에 순교하였습니다. 지난 두 주에 세 분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두 분이 향유를 붓는 여인과 같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한 삶을 살았음을 보고 감사하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헌신도 깊어지고 기쁨과 만족도 비례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그가 맺는 열매는 결국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데서 깊어갈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심판주로 증거를 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6,17).” 또한 자신도 헤롯의 죄악을 책망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니 심판보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대하고 전했던 심판의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맞지 않자 회의가 생겼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한 구명운동을 하지 않으시는가? 왜 헤롯과 같은 악인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공평과 정의가 흐르게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회의가 들 때에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or)이십니다. 내가 가진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사명인의 삶을 살다가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믿음이 흔들리시나요? 대개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했는데 열매가 없을 때 흔들립니다.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보다 생각하며 목자의 삶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매의 많고 적음보다 신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할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부르시며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의욕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한 사탄이 우리 마음에 회의를 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회의하는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과 같이 종말론적 심판주가 아니라 고난의 종이 되어 구원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은 이것을 그가 부활하신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며, 영혼 구원 역사를 이루시며, 제자들을 세우시고 치료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그의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는 세례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아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크리스천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됩니다(사11:9).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누립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인간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주님께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원치 않으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무반응, 무감각한 세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그들은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애통함도 없이 교만하여 예수님을 판단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 즉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맺은 열매를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를 우리는 한 비참한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에 몸을 한쪽으로 기대고 발을 쭉 뻗었습니다. 이 여자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감히 앞에 서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서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그 발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한참을 울더니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한 두 방울 떨어뜨리는 것인데 통째로 부었습니다. 그리고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보통 여인들은 함부로 자기의 머리를 풀지 않습니다. 긴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긴 머리털을 수건삼아 그 발과 발가락을 하나하나 씻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발을 씻어준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지만 이 여인과 같이 사랑을 표현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그런 신랑이셨습니다. 여자의 이런 행동은 우리의 가슴을 눈물로 적시게 만듭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처음 체험할 때 엄청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그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인지 의심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이 거룩한 자라면 마땅히 여자의 행동을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아무도 이런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또한 이 여인의 마음도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이 여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오백 데나리온은 5천만 원에 해당이 되고, 오십 데나리온은 오백만 원에 해당이 됩니다. 둘 다 갚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누가 더 그를 사랑할까요? 당연히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것입니다. 빚은 우리가 지은 죄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 바리새인은 손님에게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인사치레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는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거나 종들을 시켜서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은커녕 볼에 입맞춤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면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데 올리브기름조차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청했지만 구약에 나오는 롯과 같은 자세로 냉냉하게 섬겼습니다. 반대로 여인은 아브라함과 같은 자세로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죄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여인은 공인된 죄인으로서 죄책감이 많았습니다. 이 여자는 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몸을 팔면서 살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들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 이 여인은 죄가 많지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많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정성스럽게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의 이런 행동 속에는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감사가 절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어떤 것을 드려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통째로 부어 드렸는데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죄에서의 자유함을 느꼈습니다. 누가 욕을 하건 비난을 하건, 핍박을 하건 상관이 없이 기뻤습니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여인의 행동은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의 행동입니다. 자신의 많은 죄가 용서 받았다는 감격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서 비참한 상태가 되었지만 용서받은 은혜와 감격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으셨습니다. 죄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금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은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의 눈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모든 표현들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여인의 마음을 비교 대조하는 본문을 통해서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의로운 마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회법이나 도덕법이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면 달라집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요, 미움이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을 행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내 의로는, 나의 선행으로는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의 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똑 같은 죄를 짓고도 어떤 사람은 애통하는 마음을 갖는데, 어떤 사람은 무덤덤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셔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주님의 사랑을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주위에 있는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고통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죄 사함의 은혜가 크면 그들을 크게 사랑할 것이고, 받은 은혜가 적으면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겠습니까? 아닙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는 거룩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수록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선교사님들이 주님께 받은 은혜 때문에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외국으로 나아가 언어를 익히고 자립을 하며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목자님들이 주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학생들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가운데 죄인으로서 자기를 깊이 발견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7:18-50
요절 | 누가복음 7:47
많은 죄 사함, 많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오늘 세례 요한과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고 씻은 여인이 나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마음과 성품과 뜻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한 좋은 예입니다. 세례요한은 공의를 세우는 것으로, 이 여인은 사랑으로 하나님 나라를 증거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선구자로 회개의 물 세례를 전하였습니다. 그는 헤롯이 회개하도록 촉구하다 30대에 순교하였습니다. 지난 두 주에 세 분의 장례식에 참여하였는데 두 분이 향유를 붓는 여인과 같이 주님께 온전히 헌신한 삶을 살았음을 보고 감사하였습니다. 이들이 어떻게 그런 삶을 살았을까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의 관계가 깊어갈수록 헌신도 깊어지고 기쁨과 만족도 비례합니다. 인생의 행복과 그가 맺는 열매는 결국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깊이 맺는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데서 깊어갈 수 있을까요?
세례 요한은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예수님께 보내어 물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 대해서 심판주로 증거를 했습니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3:16,17).” 또한 자신도 헤롯의 죄악을 책망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니 심판보다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기대하고 전했던 심판의 메시아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맞지 않자 회의가 생겼습니다. 왜 예수님이 자신을 위한 구명운동을 하지 않으시는가? 왜 헤롯과 같은 악인을 그냥 보고만 계시는가? 원수를 사랑하는 것도 좋지만 공평과 정의가 흐르게 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가 회의가 들 때에 주님께 물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기묘한 상담자(wonderful counselor)이십니다. 내가 가진 의문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도하고, 성경을 보면서 질문을 하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도 세례 요한과 같이 사명인의 삶을 살다가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제 믿음이 흔들리시나요? 대개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했는데 열매가 없을 때 흔들립니다. 나는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보다 생각하며 목자의 삶을 포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울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그만두라고 할 때까지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매의 많고 적음보다 신실하게 맡은 일에 충성할 때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부르시며 인정해 주십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신앙이 흔들립니다. 내가 하는 일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을 때 의욕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기대해야 합니다. 또한 사탄이 우리 마음에 회의를 심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회의하는 요한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마침 그 때에 예수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과 같이 종말론적 심판주가 아니라 고난의 종이 되어 구원하는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일을 하고 계셨는데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은 이것을 그가 부활하신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적인 메시아 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며, 영혼 구원 역사를 이루시며, 제자들을 세우시고 치료하는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이 세상을 그의 사랑과 공의로 통치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이는 세례요한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을 것을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구원 역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무리들에게 요한에 대해서 칭찬하셨습니다. 그는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입니다. 그는 메시아의 선구자로서 주님의 길을 준비했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28).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의 신분이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높아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크리스천은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습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하시는 예수님을 통해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충만하게 됩니다(사11:9). 예수님 안에서 은혜와 진리를 풍성하게 누립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인간의 세대에 속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보다 더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율법 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주님께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셨지만 그들이 원치 않으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않는 무반응, 무감각한 세대였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자 그들은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더니, 예수님이 와서 먹고 마시자 그들은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예수님이 하지 않기 때문에 그와 제자들을 비난한 것입니다. 그들은 영혼 구원에 대한 애통함도 없이 교만하여 예수님을 판단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습니다. “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가르침, 즉 예수님과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말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맺은 열매를 보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습니다. 그 예를 우리는 한 비참한 여인의 변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과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에 몸을 한쪽으로 기대고 발을 쭉 뻗었습니다. 이 여자는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감히 앞에 서지는 못하고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섰습니다. 그리고 서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그 발을 적실 정도였습니다. 한참을 울더니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향유는 한 두 방울 떨어뜨리는 것인데 통째로 부었습니다. 그리고 긴 머리를 풀었습니다. 보통 여인들은 함부로 자기의 머리를 풀지 않습니다. 긴 머리털은 여자의 영광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자기의 긴 머리털을 수건삼아 그 발과 발가락을 하나하나 씻었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서 발을 씻어준다는 이야기는 가끔 듣지만 이 여인과 같이 사랑을 표현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이 여인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사랑해야 하는 그런 신랑이셨습니다. 여자의 이런 행동은 우리의 가슴을 눈물로 적시게 만듭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처음 체험할 때 엄청난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그것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인지 의심스러워합니다. 예수님이 거룩한 자라면 마땅히 여자의 행동을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아무도 이런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또한 이 여인의 마음도 읽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이 여인을 이해할 수 있도록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오백 데나리온은 5천만 원에 해당이 되고, 오십 데나리온은 오백만 원에 해당이 됩니다. 둘 다 갚을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둘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누가 더 그를 사랑할까요? 당연히 많이 탕감을 받은 사람이 더 사랑할 것입니다. 빚은 우리가 지은 죄를 비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 바리새인은 손님에게 해야 하는 기본적인 인사치레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에서는 손님이 오면 발 씻을 물을 가져다주거나 종들을 시켜서 발을 씻겨주었습니다. 그런데 시몬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발은커녕 볼에 입맞춤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이 오면 머리에 향유를 한 방울씩 떨어뜨리는데 올리브기름조차도 붓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식사자리에 초청했지만 구약에 나오는 롯과 같은 자세로 냉냉하게 섬겼습니다. 반대로 여인은 아브라함과 같은 자세로 예수님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죄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고 죄 사함을 받은 일이 많은 자는 많이 사랑한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여인은 공인된 죄인으로서 죄책감이 많았습니다. 이 여자는 살기 힘든 현실 속에서 몸을 팔면서 살다가 어느 날 예수님을 만나 말씀을 들었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5:31,32).” 이 여인은 죄가 많지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면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보고 믿게 되었습니다. 여인은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정죄하지 않고 용서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격해서 많은 눈물을 쏟았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긴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에 떨어진 눈물을 정성스럽게 닦고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의 이런 행동 속에는 주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감사가 절절이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어떤 것을 드려도 아깝지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가장 귀한 향유 옥합을 통째로 부어 드렸는데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죄에서의 자유함을 느꼈습니다. 누가 욕을 하건 비난을 하건, 핍박을 하건 상관이 없이 기뻤습니다. 예수님께 값비싼 향유를 쏟아 부은 여인의 행동은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자의 행동입니다. 자신의 많은 죄가 용서 받았다는 감격과 확신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여인은 많은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서 비참한 상태가 되었지만 용서받은 은혜와 감격을 이렇게 극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에게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말씀하시며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고 부연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함께 앉아 있는 사람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십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다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죄사함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흘리는 바 언약의 피를 십자가에서 쏟으셨습니다. 죄는 운명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지금 사함을 받고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주님은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의 눈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모든 표현들은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과 여인의 마음을 비교 대조하는 본문을 통해서 나는 어디에 속해 있는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주님과 더 깊은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 생각해봅시다.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의로운 마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회법이나 도덕법이나 양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자신을 보면 달라집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탐욕이 우상숭배요, 미움이 살인이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는 간음을 행한 것이라고 하나님은 판단하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설 때 자신의 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보면 나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성령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내 힘으로는, 내 의로는, 나의 선행으로는 죄를 속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그의 피로 말미암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습니다. 똑 같은 죄를 짓고도 어떤 사람은 애통하는 마음을 갖는데, 어떤 사람은 무덤덤하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를 주셔서 죄를 깨닫고 회개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는 분주하게 많은 일을 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주님의 사랑을 알고자 힘써야 합니다.
여러분은 최근에 예수님으로부터 어떤 은혜를 받았습니까?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 주위에 있는 헐벗은 자, 병든 자, 갇힌 자, 고통하는 자들의 모습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받은 죄 사함의 은혜가 크면 그들을 크게 사랑할 것이고, 받은 은혜가 적으면 적게 사랑할 것입니다. 죄 사함을 받은 것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많은 죄를 사함받기 위해서 죄를 지어야겠습니까? 아닙니다. 빛 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할수록 우리는 거룩해지고 죄에 대한 감각은 예민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그의 거룩하심을 닮아갈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수록 이웃을 더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선교사님들이 주님께 받은 은혜 때문에 한국에서의 안정된 삶을 버리고 외국으로 나아가 언어를 익히고 자립을 하며 양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목자님들이 주님께 받은 사랑 때문에 헌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무익한 종이라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고백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주님을 섬깁니다. 학생들은 말씀을 공부하고 소감을 써서 나누는 가운데 죄인으로서 자기를 깊이 발견하고 죄사함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충만한 은혜를 부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