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8강(6:17-49)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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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8 강
말씀 | 누가복음 6:17-49
요절 | 누가복음 6:35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평지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의 사상과 성품과 사역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평지 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핵심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감히 그렇게 살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이상적인 가르침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폼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순종함으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과 저주 선언(20-26).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고 어떤 자가 복이 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당하고 욕을 먹고 악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 우울하고 슬프고 위축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현재와 미래가 어떠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부자는 물질적인 부요함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부자는 세상 나라가 전부이고 여기가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반면 경제적인 면에서 또는 영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는 늘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영육이 통합된 존재로 봅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표현했습니다. 마태는 돈을 신뢰하였다가 돈의 한계를 알고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하여튼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배고픔은 신비입니다. 배고픔은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취약하며 의존적 존재입니다. 배고프면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기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식사의 가치가 극대화되고 식사가 하나님과 사람의 선물이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사하고 먹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 즉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영육의 굶주림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음식을 먹는 기쁨을 누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먹는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난한 중에도 평안과 행복을 누립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 때문에 굶주림과 슬픔을 겪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공급하심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배부름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네 가지 박해를 받습니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하여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을 위해서 살 때에 반대와 미움과 모욕과 버림을 당합니다. 목자 생활이 즐겁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받기도 하고,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미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세상 가치관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기뻐하고 뛰놀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내가 그런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기 때문이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 때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큽니다. 그러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씀 하신 후에 화가 있을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부요, 위로, 명성, 소유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 화를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자들이 복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아낌없이 쓰고 있는 분들은 정말로 복이 있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에게도 경고하십니다. 배부른 자는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영원한 미래에 주어질 상급은 없습니다. 부요한 자들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지금 웃고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요한 자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웃음이 애통과 울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지 않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 받을 때에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자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가난, 주림, 울음 , 박해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가난, 배고픔, 슬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가난, 주림, 울음, 박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참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둘째, 사랑과 비판에 대한 권면 (27-38). 27-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의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원수는 참으로 가까이 있습니다(12:51-53). 원수는 늘 우리의 약점을 잡고 지적하고, 판단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서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보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남에게 먼저 대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2-3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목적없는 사랑, 의도가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까요?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미움은 사랑으로만이 없앨 수 있고,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미움과 적대감을 갖고 대할까요? 죄인들 속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알지 못하는 그 사람 때문에 손해를 당하거나 해를 입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로 생각하고 공격하고 비방을 합니다. 만일 상대방이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면 미움이나 적대감을 갖지 않겠죠? 그러므로 마음에 있는 미움과 적대감을 없애는 방법은, 아무런 조건이 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고 호의를 베풀면, 굳게 닫힌 마음 문이 열립니다. 냉담하던 사람도 사랑을 받으면 반응이 조금씩 따뜻해집니다. 자연스럽게 미움과 적대감이 사라지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됩니다.
또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재판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 받는 상급이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사랑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군병들을 위해서 “그들이 자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가룟 유다를 데리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주장할 때 우리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사람들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할까요? 제자도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데 원수는커녕 형제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비판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변할까요? 잠시는 변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의 단점을 찾아서 비판을 할 것입니다.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싸움과 갈등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사람은 다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까지도 비판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악한 세상을 보고만 계시냐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합니다. 비판과 분별력은 다릅니다. 분별력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비판은 재판 석에 앉아서 판결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잘못을 찾아내어서 죄 있다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에는 사랑과 긍휼이 없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죄책감과 외식 같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대신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37b,38절을 읽겠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하라는 원어의 뜻은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하고 있으면 나만 괴롭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과 긍휼과 선대와 호의와 용서와 용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해 주면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호의를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좋아집니다. 어딜 가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우리가 베푼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복을 안겨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색하게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인색하게 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선대하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도 나를 선대하고 은혜를 베풀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헤아림을 받습니다.
39-49절은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자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은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원수는 누구입니까?
이상에서 주님의 평지 설교는 너무나 수준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하고자 힘쓰다보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을 통해서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품성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며 사랑하기를 기도합시다. 이렇게 선한 일을 힘쓰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말씀 | 누가복음 6:17-49
요절 | 누가복음 6:35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이제 그들과 함께 평지에 서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치료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그의 사상과 성품과 사역을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 평지 설교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핵심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너무 높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되어 감히 그렇게 살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그냥 하나의 이상적인 가르침으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폼으로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원수였던 자들이었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셔서 그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며 순종함으로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복과 저주 선언(20-26).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시고 어떤 자가 복이 있는지 말씀해주셨습니다.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미움을 당하고 욕을 먹고 악하다는 평가를 받을 때 우울하고 슬프고 위축되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삶의 현재와 미래가 어떠할지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어야 복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부자는 물질적인 부요함으로 인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원이 없습니다. 부자는 세상 나라가 전부이고 여기가 행복하리라 생각합니다. 반면 경제적인 면에서 또는 영적인 의미에서 가난한 자는 늘 모든 것이 부족하기 때문에 겸손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영육이 통합된 존재로 봅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표현했습니다. 마태는 돈을 신뢰하였다가 돈의 한계를 알고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하여튼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배고픔은 신비입니다. 배고픔은 근본적으로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우리에게 있음을 알게 합니다.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취약하며 의존적 존재입니다. 배고프면 무엇을 먹든지 맛있게 기쁘게 먹을 수 있습니다. 배고픔 때문에 식사의 가치가 극대화되고 식사가 하나님과 사람의 선물이요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감사하고 먹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것 즉 생명의 신비를 체험하게 합니다. 영육의 굶주림으로 인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음식을 먹는 기쁨을 누립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함께 먹는 자리에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난한 중에도 평안과 행복을 누립니다. 어떤 사람은 가난 때문에 굶주림과 슬픔을 겪고 있지만 그것이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며 도와주십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공급하심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배부름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네 가지 박해를 받습니다. 미워하고, 멀리하고, 욕하고, 악하다 하여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사명을 위해서 살 때에 반대와 미움과 모욕과 버림을 당합니다. 목자 생활이 즐겁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해를 받기도 하고, 죄와 싸워야 하기 때문에 미움을 당하기도 합니다. 세상 가치관과 다르게 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멀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지금 기뻐하고 뛰놀라고 명령하십니다.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할 이유는 내가 그런 자격이 있다고 인정해 주기 때문이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늘에서 주어지는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살 때 고난을 받지만 하나님의 위로가 큽니다. 그러므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에 대해서 말씀 하신 후에 화가 있을 사람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부요한 자, 지금 배부른 자, 지금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는 자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부요, 위로, 명성, 소유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사람들에게 닥칠 화를 경고하며, 회개를 촉구합니다. 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삶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에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단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만 관심을 둡니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었기 때문에 이미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화를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모든 부자들이 복을 받는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은 아닙니다. 삭개오, 아리마대 요셉, 니고데모 같은 사람은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부를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에 아낌없이 쓰고 있는 분들은 정말로 복이 있습니다.
지금 배부른 자에게도 경고하십니다. 배부른 자는 부족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영원한 미래에 주어질 상급은 없습니다. 부요한 자들은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며 지금 웃고 있습니다.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요한 자들은 머지않아 자신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영원히 잃게 될 것입니다. 그때 그들의 웃음이 애통과 울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리를 칭찬하면 화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복음을 신실하게 전하지 않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복음의 내용을 변질시키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제자들은 거짓 선지자들과 같이 될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사람들의 인기와 명성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으로 살다가 가난하고 주리고 울고 박해 받을 때에 사람들과 싸우지 말고 하나님을 더욱 찾고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힘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자력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하나님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가난, 주림, 울음 , 박해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어주셔서 가난, 배고픔, 슬픔, 고난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에 가난, 주림, 울음, 박해가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상급을 바라보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참된 제자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제자들에게 하늘의 복이 있습니다.
둘째, 사랑과 비판에 대한 권면 (27-38). 27-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며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우리의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원수는 참으로 가까이 있습니다(12:51-53). 원수는 늘 우리의 약점을 잡고 지적하고, 판단하고, 갈등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미워하고 저주하고 모욕하는 사람을 위해서 선대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보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남에게 먼저 대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32-3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그만큼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꾸어 주느니라.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시니라.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하나님은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배우고 익히는 것입니다. 목적없는 사랑, 의도가 없는 사랑, 순수한 사랑이 사람을 감동시킵니다. 사람들은 제자들에게서 이런 사랑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왜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까요? 복수의 악순환을 끊는 길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는데 있습니다. 미움은 사랑으로만이 없앨 수 있고, 교만은 겸손으로만이 녹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왜 미움과 적대감을 갖고 대할까요? 죄인들 속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갈등이 심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알지 못하는 그 사람 때문에 손해를 당하거나 해를 입을 것이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원수로 생각하고 공격하고 비방을 합니다. 만일 상대방이 나에게 유익하다고 생각하면 미움이나 적대감을 갖지 않겠죠? 그러므로 마음에 있는 미움과 적대감을 없애는 방법은, 아무런 조건이 없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일지라도 사랑하고 호의를 베풀면, 굳게 닫힌 마음 문이 열립니다. 냉담하던 사람도 사랑을 받으면 반응이 조금씩 따뜻해집니다. 자연스럽게 미움과 적대감이 사라지고, 선으로 악을 이기게 됩니다.
또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먼저 재판관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믿을 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가르침대로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 받는 상급이 클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가르침을 듣고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사랑을 행할 능력도 주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군병들을 위해서 “그들이 자신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저들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 가룟 유다를 데리고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주장할 때 우리를 미워하고 모욕하는 사람들까지도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비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리하면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정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할까요? 제자도의 높은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기준으로 상대방을 보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하는데 원수는커녕 형제조차도 사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에 화가 납니다. 아무리 말을 해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비판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변할까요? 잠시는 변할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나의 단점을 찾아서 비판을 할 것입니다. 서로 정죄하고 비판하면 그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싸움과 갈등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사람은 다 존중받기를 바랍니다. 인정받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까지도 비판합니다. 왜 하나님이 이런 악한 세상을 보고만 계시냐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교만하기 때문에 이렇게 비판을 합니다. 비판과 분별력은 다릅니다. 분별력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판단할 줄 아는 능력입니다. 비판은 재판 석에 앉아서 판결하는 것입니다. 정죄는 잘못을 찾아내어서 죄 있다고 판결하는 것입니다. 비판과 정죄에는 사랑과 긍휼이 없습니다. 비판과 정죄는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과 죄책감과 외식 같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대신에 어떻게 해야 할까요? 37b,38절을 읽겠습니다.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용서하라는 원어의 뜻은 놓아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미워하고 있으면 나만 괴롭습니다. 상대방은 내가 괴로워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을 살리고 변화시키는 것은 사랑과 긍휼과 선대와 호의와 용서와 용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정죄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용서해 주면 하나님은 누르고 흔들어 복을 넘치도록 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않고 용서하고 용납하며 호의를 베풀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좋아집니다. 어딜 가나 사랑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알아주시고 우리가 베푼 것 이상으로 넘치도록 복을 안겨주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인색하게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인색하게 대하십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면 하나님도 우리를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십니다. 하나님뿐만 아니라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사람들을 선대하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도 나를 선대하고 은혜를 베풀어줄 것입니다. 우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헤아림을 받습니다.
39-49절은 말씀을 듣고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기까지 자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달은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내가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원수는 누구입니까?
이상에서 주님의 평지 설교는 너무나 수준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순종하고자 힘쓰다보면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각자가 성령을 통해서 말씀 속에서 역사하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분의 품성을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섬기며 사랑하기를 기도합시다. 이렇게 선한 일을 힘쓰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자라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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