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7강(6:1-18)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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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7 강
말씀 | 누가복음 6:1-16
요절 | 누가복음 6:13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새 이스라엘의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세우심으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꿈을 이루십니다. 즉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신 것과 열두 사도 양성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제자 양성을 배워서 이 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잘 전달해 주어야하겠습니다.
첫째,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1-5).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청년인 제자들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쫄깃쫄깃한 생밀을 먹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큰 소리로 책망하는 바람에 제자들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체할 것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율법규정을 들이대며 협박하였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열정에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을 규정해놓았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밀 껍질을 제거하기 위해 밀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면 그것은 체질로 간주한다. 만일 밀 이삭을 비비면 그것은 타작으로 간주된다. 만일 그 주위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면 그것은 과일 선별 작업과 동일시된다. 만일 그 이삭을 짓이기면 그것은 맷돌질이다. 만일 그것을 손으로 흩뿌리면 그것은 키질이다.” 그들의 규정에 따르면 제자들이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도리깨로 두드리고 키질을 해서 음식을 장만한 것입니다(출34:21). 안식일 규정을 네 가지나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는 행동과 가르침이 몹시 못마땅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3장 25절에는 이와 같은 행위가 허락되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따서 먹고, 포도원에 가서 손으로 포도를 따 먹어도 되지만 낫을 대서는 안 됩니다. 즉 탐욕이 아니라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 따먹는 것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에 대한 구약성경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뜻은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 다섯 덩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통 떡은 없고 수중에 거룩한 떡 밖에 없어서 그것을 주었습니다.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날은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새로 만든 빵을 올려놓고 올려져있던 빵은 물려냈습니다. 다윗은 그 진설병을 받아서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레24:5-9).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히멜렉이나 다윗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이 며칠을 굶어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왕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진설병을 먹었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봉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다윗 및 다윗과 함께 한 일행처럼” 제자들도 성전보다 크신 예수님과 함께 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한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르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을 제정한 분이시오 또 안식일에 경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이 무슨 날인지 정의하실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날을 주관하십니다. 히브리서 3:18에 보면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이스라엘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남아 있던 그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논쟁은 죄사함의 권세에서 안식일 문제로 확대가 됩니다. 즉 안식일 문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 다음에 등장합니다. 죄사함과 안식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참된 안식은 죄사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진정한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롭게 된 사람은 이웃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왕노릇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웃과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비대면 예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절대적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던 주일 성수 개념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분명하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폄하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안식일 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안식일에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이 주일입니다. 초기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성전과 회당과 가정에서 기독교인이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AD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출교를 당하고 나서 한 주의 첫날인 주일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6일 동안 하던 일을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안식일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 때에 거기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석공이었는데 일을 하다가 오른손을 다쳐서 말라버렸고, 일을 할 수 없어서 빌어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서 그는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의식 때문에 늘 오른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다녔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한 손 마른 문제로 인해 당해야 했던 아픔과 고통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 안에 있었지만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회당에 나아와 어떤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해석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의료 행위라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나 아이를 낳거나 할례를 베풀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예외가 되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치료한다면 안식일 법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로의 유전에 매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육체의 손은 멀쩡했지만 마음의 손이 말라비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른손 마른 사람의 인생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인생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이 사람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본래 주신 사랑이나 동정심은 다 말라버려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애통하며 회개해야 했지만 내면이 말라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져서 한 손 마른 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아셨기에 다른 날 이 사람을 고치던지, 아니면 갈등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고,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용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는 어린 아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바리새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시인하거나 고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고치고자 열심이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죽일 태세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순종할 때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의 손이 치료가 되었고 그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고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의 노기는 살인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마12:14).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마음을 찢는 회개의 투쟁을 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셋째,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12-16).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깊이 병들고 메마른 악한 내면을 보고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볼 때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함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하여 새 이스라엘로 열두 명의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또한 열둘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양육하고 훈련하기에 적절한 인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보다 소수의 사람들을 택하여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갈 지도자 그룹입니다. 제자 양성 방법은 마가복음 3장 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그의 인격과 사역을 배웁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본 받아 전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제자는 권능을 덧입어서 악한 영을 내쫓고 성령의 권능으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사도’라는 단어는 한 번 사용되었는데(마10:2; 막6:30), 누가복음에서는 9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6:13; 9:10,12; 11:49; 17:5; 22:14; 24:9,10,11).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들은 사도의 권위를 지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도들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제자는 부름 받은 자요, 사도는 보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 받아서 일을 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구속 역사를 계승할 자들이요, 신약 교회의 열두 기둥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자 분명한 방향을 잡으셨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열 두 사도는 누구입니까?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이들은 청년들이요, 당시 어부나 세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눅5:10)과 우레의 아들(막3:17)이라고 불리는데 이들도 갈릴리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이며,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마리아와 자매관계였습니다(요19:25; 막27:56; 막15:40).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행12:1,2),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요13:23; 19:26; 20:2; 21:7,20). ‘빌립’은 벳새다 출신이며,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요한복음 1장 45절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집니다. ‘마태’는 세리 레위의 다른 이름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리 직업을 버렸고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공동체에 속한 것 자체가 예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도마’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나중에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모든 명단에서 똑같이 아홉 번째에 소개되는데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셀롯이라는 시몬’은 ‘가나나인 시몬’이라고도 소개됩니다. ‘셀롯’이나 ‘가나나인’은 모두 열정적인 사람, 열심당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정치적인 열정을 품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시몬은 이스라엘 독립을 품고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아들이나 예수님의 동생이 아닙니다.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불리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자입니다. 가룟은 유대에 있는 어떤 지역인데 가룟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사도로 세우신 것은, 첫째로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다양성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만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셋째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축성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에 얽매여서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명의 사도들은 그 마음이 새 부대처럼 신축성이 있어서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복음을 스펀지와 같이 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제련되지 않은 광석과 같아서 잘 양육하고 훈련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현재는 부족하지만 장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소망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계승하여 그 시대 영혼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이 죽고 난 후에는 그들을 대신할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그 시대 영혼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홍익대학생들과 목자님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분들이 캠퍼스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또한 저희 각자가 평생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구원과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6:1-16
요절 | 누가복음 6:13
열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예수님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대신할 새 이스라엘의 열두 사도를 세우셨습니다. 열 두 사도를 세우심으로 거룩한 백성, 제사장 나라의 꿈을 이루십니다. 즉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원대한 구속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세우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을 통해 구속 역사를 이루신 것과 열두 사도 양성은 예수님 사역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신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제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제자 양성을 배워서 이 복음을 다음 세대에게 잘 전달해 주어야하겠습니다.
첫째, 안식일의 주인 되신 예수님(1-5).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청년인 제자들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그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쫄깃쫄깃한 생밀을 먹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리새인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큰 소리로 책망하는 바람에 제자들은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고 체할 것 같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배고픈 제자들의 마음을 헤아리기는커녕 율법규정을 들이대며 협박하였습니다. 랍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지키고자 하는 열정에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을 규정해놓았습니다. 탈무드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한 여자가 밀 껍질을 제거하기 위해 밀을 이리저리 뒤척거리면 그것은 체질로 간주한다. 만일 밀 이삭을 비비면 그것은 타작으로 간주된다. 만일 그 주위에 붙은 것들을 떼어내면 그것은 과일 선별 작업과 동일시된다. 만일 그 이삭을 짓이기면 그것은 맷돌질이다. 만일 그것을 손으로 흩뿌리면 그것은 키질이다.” 그들의 규정에 따르면 제자들이 곡식을 거두어들이고 도리깨로 두드리고 키질을 해서 음식을 장만한 것입니다(출34:21). 안식일 규정을 네 가지나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이 하는 행동과 가르침이 몹시 못마땅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유대 사회를 무질서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명기 23장 25절에는 이와 같은 행위가 허락되었습니다.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배고픈 사람들이 밭에 들어가서 이삭을 따서 먹고, 포도원에 가서 손으로 포도를 따 먹어도 되지만 낫을 대서는 안 됩니다. 즉 탐욕이 아니라 배고픔을 면할 정도로 따먹는 것은 허용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호해 주셨습니까? 3,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바리새인들은 다윗에 대한 구약성경 이야기를 자세히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은 잘 알고 있었지만 성경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그 뜻은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다윗은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떡 다섯 덩이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통 떡은 없고 수중에 거룩한 떡 밖에 없어서 그것을 주었습니다. 랍비 전승에 의하면 이 날은 안식일이라고 합니다. 안식일에 새로 만든 빵을 올려놓고 올려져있던 빵은 물려냈습니다. 다윗은 그 진설병을 받아서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진설병은 오직 제사장들만이 먹을 수 있었습니다(레24:5-9).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히멜렉이나 다윗에게 어떤 징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이 며칠을 굶어서 음식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는 왕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다윗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었기에 진설병을 먹었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또한 제사장들이 안식일에 봉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중입니다. “다윗 및 다윗과 함께 한 일행처럼” 제자들도 성전보다 크신 예수님과 함께 하며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주신 목적과 한계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또 이르셨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예수님은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안식일을 제정한 분이시오 또 안식일에 경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안식일이 무슨 날인지 정의하실 수 있습니다. 안식일은 주인이신 예수님을 중심으로 지켜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그 날을 주관하십니다. 히브리서 3:18에 보면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냐 곧 순종하지 아니하던 자들에게가 아니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던 이스라엘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그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지 못했습니다.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남아 있던 그 안식은 예수님 안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며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분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의 논쟁은 죄사함의 권세에서 안식일 문제로 확대가 됩니다. 즉 안식일 문제는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 다음에 등장합니다. 죄사함과 안식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참된 안식은 죄사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 진정한 안식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초청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고 그의 다스림을 받을 때 우리는 쉼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롭게 된 사람은 이웃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기보다 내가 주인이 되어서 왕노릇하고자 하기 때문에 이웃과 갈등이 생기고 다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비대면 예배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절대적으로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던 주일 성수 개념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십계명은 분명하게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폄하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안식일 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안식일에 교회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안식일은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해지기 전까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날이 주일입니다. 초기에는 기독교와 유대교가 구분이 되지 않아서 성전과 회당과 가정에서 기독교인이 모임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AD 90년 얌니아 회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회당에서 출교를 당하고 나서 한 주의 첫날인 주일에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6일 동안 하던 일을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모여 예배함으로 하나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안식일에 오른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예수님(6-11).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 때에 거기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석공이었는데 일을 하다가 오른손을 다쳐서 말라버렸고, 일을 할 수 없어서 빌어먹고 살았다고 합니다. 한 손 마른 것으로 인해서 그는 회당에 나와 하나님의 위로를 바라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자의식 때문에 늘 오른 손을 호주머니 깊숙이 넣고 다녔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의 한 손 마른 문제로 인해 당해야 했던 아픔과 고통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안식일에 회당 안에 있었지만 영혼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회당에 나아와 어떤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하려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시는가 엿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랍비들의 해석에 의하면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의료 행위라서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나 아이를 낳거나 할례를 베풀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는 예외가 되었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를 치료한다면 안식일 법을 범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장로의 유전에 매여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육체의 손은 멀쩡했지만 마음의 손이 말라비틀어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른손 마른 사람의 인생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가 겪었던 인생의 아픔 따위는 안중에 없었습니다. 오직 이 사람을 이용하고자 하는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영혼에는 하나님이 본래 주신 사랑이나 동정심은 다 말라버려 없어진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서 전혀 문제의식이 없었습니다. 애통하며 회개해야 했지만 내면이 말라 비틀어질 대로 비틀어져서 한 손 마른 자를 이용해서 예수님을 고발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잡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을 아셨기에 다른 날 이 사람을 고치던지, 아니면 갈등 상황을 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고쳐주고,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용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한 가운데 서라”고 요청하셨습니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이는 어린 아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지만 바리새인들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시인하거나 고칠 용기가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고치고자 열심이었습니다. 고치지 않으면 죽일 태세였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셨습니다. “네 손을 내밀라.” 그가 순종할 때 마른 손이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의 손이 치료가 되었고 그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반대로 바리새인들은 악을 행하고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의 노기는 살인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마12:14).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마음을 찢는 회개의 투쟁을 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마귀의 노예가 되어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셋째, 열 두 사도를 세우신 예수님(12-16).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깊이 병들고 메마른 악한 내면을 보고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볼 때 새 가죽부대를 준비해야 함을 보셨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심으로 그의 인도하심을 구하였습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 그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본래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에, 그들을 대신하여 새 이스라엘로 열두 명의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 만민을 구원하고자 계획하셨습니다. 또한 열둘을 택하신 것은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양육하고 훈련하기에 적절한 인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많은 무리보다 소수의 사람들을 택하여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강도 높은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장차 교회를 세우고 이끌어갈 지도자 그룹입니다. 제자 양성 방법은 마가복음 3장 14,15절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고 기록했습니다.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가운데 그의 인격과 사역을 배웁니다. 제자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본 받아 전도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제자는 권능을 덧입어서 악한 영을 내쫓고 성령의 권능으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열둘을 “사도라 칭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사도’라는 단어는 한 번 사용되었는데(마10:2; 막6:30), 누가복음에서는 9번이나 사용되었습니다(6:13; 9:10,12; 11:49; 17:5; 22:14; 24:9,10,11). 누가복음에서 열두 제자들은 사도의 권위를 지닌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사도들의 권위를 나타내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제자는 부름 받은 자요, 사도는 보냄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을 위임 받아서 일을 하도록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구속 역사를 계승할 자들이요, 신약 교회의 열두 기둥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셔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고자 분명한 방향을 잡으셨고 그들을 세우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열 두 사도는 누구입니까?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이들은 청년들이요, 당시 어부나 세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지도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세베대의 아들(눅5:10)과 우레의 아들(막3:17)이라고 불리는데 이들도 갈릴리 어부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이며, 그들의 어머니 살로메는 마리아와 자매관계였습니다(요19:25; 막27:56; 막15:40). 야고보는 초대 교회의 순교자 가운데 한 사람이고(행12:1,2), 요한은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요13:23; 19:26; 20:2; 21:7,20). ‘빌립’은 벳새다 출신이며, 나다나엘을 예수님께 소개했습니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요한복음 1장 45절에 등장하는 나다나엘과 동일인물로 여겨집니다. ‘마태’는 세리 레위의 다른 이름이고,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세리 직업을 버렸고 예수님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태가 예수님의 공동체에 속한 것 자체가 예수님의 공동체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는 곳이며,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도마’는 아람어로 ‘쌍둥이’를 의미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도마는 나중에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모든 명단에서 똑같이 아홉 번째에 소개되는데 그가 누구인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셀롯이라는 시몬’은 ‘가나나인 시몬’이라고도 소개됩니다. ‘셀롯’이나 ‘가나나인’은 모두 열정적인 사람, 열심당원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독립과 자유에 대한 정치적인 열정을 품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시몬은 이스라엘 독립을 품고 정치 활동을 했던 인물이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야고보의 아들 유다’는 요한의 형제 야고보의 아들이나 예수님의 동생이 아닙니다. 다른 유다와 구별하기 위해서 ‘야고보의 아들 유다’라고 불리는데,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자입니다. 가룟은 유대에 있는 어떤 지역인데 가룟 유다는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을 사도로 세우신 것은, 첫째로 자신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돕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즉 다양성이 있었습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를만한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배우고 예수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순위로 삼았습니다. 셋째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신축성이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전통에 얽매여서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두 명의 사도들은 그 마음이 새 부대처럼 신축성이 있어서 예수님이 전해주시는 복음을 스펀지와 같이 빨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성장했습니다. 현재 그들은 제련되지 않은 광석과 같아서 잘 양육하고 훈련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종들이 될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현재는 부족하지만 장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될 소망 가운데 열두 명의 제자들을 사도로 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계승하여 그 시대 영혼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열두 명의 사도들이 죽고 난 후에는 그들을 대신할 또 다른 충성된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그 시대 영혼들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홍익대학생들과 목자님의 자녀들을 예수님의 제자로 키워가시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분들이 캠퍼스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역사에 귀히 쓰임 받는 목자요 성경선생으로 세워지길 기도합니다. 또한 저희 각자가 평생 예수님을 배우고 닮아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마음으로 영혼구원과 제자로 세우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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