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눅6강(5:27-39)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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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6 강
말씀 | 누가복음 5:27-39
요절 |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추석 명절을 잘 쇠셨습니까? 명절에 큰 상을 차려 놓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도 세리 레위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동족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기쁨에 겨워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 모임 안에 큰 기쁨과 즐거움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가버나움 바닷가에는 항구와 세관이 있었습니다. 세관은 로마의 관할권에 있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세리는 유대 사람이지만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는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 가문으로서 성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는 분명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이름을 레위로 지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모세 오경을 암송하며 성전과 회당에도 나가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으로 자라면서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습니다. 그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에 유대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성전의 최고 수반인 대제사장도 로마 정부가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세무 공무원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돈 버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회계장부를 쓰는 것도 배웠습니다. 가짜 장부 만드는 법 즉 분식회계도 배웠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지만 반복하니 죄책감도 무뎌졌습니다. 그는 점점 부가 늘어갔고 동시에 동족들의 비난도 강하고 깊어졌습니다. 동족들은 그를 보면 얼굴을 돌리고 뒤에서는 침을 뱉었습니다. 이런 삶이 반복되자 그의 고뇌도 깊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만족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보다 비난을 밥 먹듯이 받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와 말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미움이 생겼습니다. 미움을 이겨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뜯어서 복수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부는 쌓여갔고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호사를 누렸지만 이런 삶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세리가 된 것은 아닌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순진한 사람도 세리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이 됩니다. 10억만 준다면 3년 간 감옥에라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졌는데 행복지수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루는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데 누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긍휼과 자애가 넘치는 눈과 마주쳤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그를 자애롭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성품과 사역을 배우고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돈을 따르던 인생에서 180도 방향 전환을 하여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따르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나를 따르면 너를 책임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레위는 이제까지 아무도 자기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 레위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죄하고 소망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인생관, 세계관을 바로잡아 주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후에 세리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 마태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Catch Me If You Can)』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실존인물인 주인공은 16-21세까지 5년 동안, 26개국 50개주에서 위조수표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1969년 프랑스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천재적 재능과 기술을 연방정부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법률공무원과 FBI 요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기술을 전수합니다. 이후 25년 동안 FBI와 정부기관에서 관련 범죄에 대해 이론과 실무를 가르쳐온 그는 금융사기 예방과 문서보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해 라이선스 수입으로 몇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주요 회계법인과 법률 회사의 자문 업무 맡고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유능한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기꾼들의 속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FBI에서 사기꾼들의 심리를 가르쳐주어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기꾼과 FBI에서 수사하는 사람이 동일 인물입니다. 같은 재주를 가졌지만 국가를 위해서 사용하면 경찰이 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면 조폭이 됩니다.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세무 공무원이 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그 재능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했을 때 공인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득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창기와 같은 죄인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사도요 성 마태로 변화되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세리 직업은 부유한 삶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요, 결단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습니다. 이 잔치에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초청을 받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레위는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함께 하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눔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모으는 삶은 허무했는데 자신의 것을 나눌 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죄인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격이 되었습니다. 레위는 그 잔치에 예수님 일행과 자기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세리로서 회당에서 출교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식사는 보통 가족과 함께 합니다. 손님에게는 간식만 대접을 합니다. 예수님은 레위와 죄인들을 가족으로 영접하고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한 가족이요, 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서로 나누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사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영육간에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의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과는 식사나 교제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과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함께 할 사람이 시간이 갈수록 적어집니다. 나중에는 자신만 남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정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으시고 치료받아서 회복되어야 할 병든 자들로 보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망가뜨립니다. 영적으로 병들게 해서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40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깊이 병들어서 무기력하고 무능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으로 지음 받았지만, 비교의식과 시기심 때문에 늘 불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형상으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갖은 욕심과 정욕 등으로 추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개척하고 도전하여 역사를 창조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도록 복을 받았지만, 불신과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고 짓눌려서 열매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세리 레위는 물질주의와 이기심으로 깊이 병들었습니다. 사람이 암이라는 죽을 병에 걸려도 치료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환자는 병만 치료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은 회개만 하면 용서를 받고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킬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정죄를 하면 방어기제가 발동하게 됩니다.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회개는 죄를 지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복합적인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합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의사는 불쌍히 여기고 어디가 아프십니까? 묻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하고 치료해 줍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병든 자체가 불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인을 볼 때 긍휼히 여기십니다. 목자가 죄인을 불쌍히 여기면 용서하고 치료할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화에 나오듯이 태양과 바람이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내기를 하였습니다. 사람의 옷을 벗기는 방법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줄 때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사람들은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병자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자신의 병든 곳을 내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로 병들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영적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정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고, 사람들이 욕하고 멀리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실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진실하게 들고 나온 사람을 한 번도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죄인이라도 “어떻게 이런 죄를 지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나온 각종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와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고, 죄로 병든 내면을 치유해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서 사랑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시고 죄 사함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죄로 병든 영혼들이 영적 의사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 받고 치료 받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죄인이 하루 아침에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서로를 동병상련이 되어 서로를 불쌍히 여깁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 인내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에게 주된 경건의 훈련이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율법은 7월 10일 대속제일만 금식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16:29). 그런데 포로기 이후에는 예루살렘의 멸망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한 해에 나흘을 금식했습니다(슥7:3,5,8:19). 또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거나(왕상21:27; 욜1:14; 2:15-27; 사58:1-9), 슬퍼할 때(에4:3), 때때로 금식이 수반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금식을 종교적인 관습으로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점차 그들은 금식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신앙적 열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경건의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금식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혼인 집의 신랑으로 오셨습니다. 신앙 생활은 결혼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사람들은 기쁨이 넘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죄사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기쁨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금식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드셨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그 말씀이요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이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복음을 담아내는 사람들이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들과 서기관들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바로 시몬 베드로, 세리 레위를 비롯한 열두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전해주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 백성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배울 때 새 부대들이 됩니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가 될 때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고후4:16).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것이 편안합니다.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생명력을 잃고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분석한 『역사의 연구』를 썼습니다. 그는 26개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문명의 발생 – 성장 – 쇠퇴 – 해체 과정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한 문명의 흥망성쇠는 자연적 조건이나 외적인 침입에 따르는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도전에 그 구성원들이 얼마나 잘 응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문명이 성장할 때는 사명감, 순수성, 뜨거운 열정, 창조성이 있는 ‘창조적 소수’가 있지만 쇠퇴할 때는 이런 것을 상실한 ‘지배적 소수가’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우상화’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창조적 소수가 도전해서 성공하지만 성공을 한 후에는 성공에 취해서 새롭게 도전하지 않게 되어서 도태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옛 생활 방식이 좋다고 집착하게 되면 변화된 세상에서 도태하게 됩니다. 우리는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한발 한발 변화를 위해서,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누가복음 말씀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를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5:27-39
요절 | 누가복음 5:32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추석 명절을 잘 쇠셨습니까? 명절에 큰 상을 차려 놓고 함께 음식을 먹으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도 세리 레위의 집에서 큰 잔치를 벌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사람들과 상종하지 못했습니다. 민족의 반역자, 매국노 취급을 받으며 동족에게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이런 세리 레위를 예수님이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레위는 기쁨에 겨워 예수님을 위해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 그 모임 안에 큰 기쁨과 즐거움과 자유함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신 후에 바닷가로 나가셨습니다. 가버나움 바닷가에는 항구와 세관이 있었습니다. 세관은 로마의 관할권에 있습니다. 세관에서 일하는 세리는 로마 정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세리는 유대 사람이지만 로마를 위해서 세금을 거두었습니다. 예수님은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레위라는 이름과 세리는 참 어울리지 않습니다. 레위 지파는 제사장 가문으로서 성전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업으로 삼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레위의 아버지 알패오는 분명 레위 지파 사람입니다. 그는 아들이 태어났을 때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이름을 레위로 지었을 것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모세 오경을 암송하며 성전과 회당에도 나가고 하나님을 예배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청년으로 자라면서 시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생겼습니다. 그는 로마제국 치하에서 살아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장래를 생각할 때에 유대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것은 소망이 없었습니다. 성전의 최고 수반인 대제사장도 로마 정부가 임명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하고 현실을 직시하며 세무 공무원에 도전하였습니다. 그는 돈 버는 일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는 어떻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회계장부를 쓰는 것도 배웠습니다. 가짜 장부 만드는 법 즉 분식회계도 배웠습니다. 양심의 가책이 들었지만 반복하니 죄책감도 무뎌졌습니다. 그는 점점 부가 늘어갔고 동시에 동족들의 비난도 강하고 깊어졌습니다. 동족들은 그를 보면 얼굴을 돌리고 뒤에서는 침을 뱉었습니다. 이런 삶이 반복되자 그의 고뇌도 깊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한데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만족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보다 비난을 밥 먹듯이 받고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와 말로 인해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미움이 생겼습니다. 미움을 이겨보려고 했지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더 많은 돈을 뜯어서 복수를 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부는 쌓여갔고 수영장이 딸린 대저택을 짓고 호사를 누렸지만 이런 삶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느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려고 세리가 된 것은 아닌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순진한 사람도 세리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이 됩니다. 10억만 준다면 3년 간 감옥에라도 가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치관이 전도된 지 오래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풍요로와졌는데 행복지수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주님은 바라보고 계십니다.
하루는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데 누가 자기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가 눈을 들어 보았을 때 예수님의 긍휼과 자애가 넘치는 눈과 마주쳤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예수님이 그를 자애롭게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눈은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입을 열어 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Follow me).”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의 부르심입니다. 제자는 스승의 성품과 사역을 배우고 전수하는 사람입니다. 레위는 돈을 따르던 인생에서 180도 방향 전환을 하여 예수님을 삶의 목적으로 두고 따르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는 나를 따르면 너를 책임지겠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레위는 이제까지 아무도 자기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않았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세리 레위에 대해서 사람들은 정죄하고 소망을 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인생관, 세계관을 바로잡아 주면 하나님 나라의 좋은 일꾼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와 3년 동안 함께 하시면서 그의 병든 내면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후에 세리 레위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성 마태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이 체험한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마12:20)”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캐치 미 이프 유 캔 (Catch Me If You Can)』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실존인물인 주인공은 16-21세까지 5년 동안, 26개국 50개주에서 위조수표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1969년 프랑스에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5년 동안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다가 자신의 천재적 재능과 기술을 연방정부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전제하에 석방되었습니다. 그리고 법률공무원과 FBI 요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기술을 전수합니다. 이후 25년 동안 FBI와 정부기관에서 관련 범죄에 대해 이론과 실무를 가르쳐온 그는 금융사기 예방과 문서보안 분야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자로 활동합니다. 그는 자신이 개발한 프로그램을 통해 한 해 라이선스 수입으로 몇 백만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국 내 주요 회계법인과 법률 회사의 자문 업무 맡고 있습니다. 또한 아내와 세 아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주인공은 자신이 유능한 사기꾼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기꾼들의 속성을 잘 압니다. 그래서 FBI에서 사기꾼들의 심리를 가르쳐주어서 큰 공을 세웠습니다. 이와 같이 교도소에 들어가는 사기꾼과 FBI에서 수사하는 사람이 동일 인물입니다. 같은 재주를 가졌지만 국가를 위해서 사용하면 경찰이 되고,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하면 조폭이 됩니다.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세무 공무원이 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었지만 그 재능을 자기만을 위해서 사용했을 때 공인된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소득을 얻었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가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창기와 같은 죄인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사도요 성 마태로 변화되었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며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랐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세리 직업은 부유한 삶을 보장해주었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된 보화 되신 예수님을 발견했기 때문에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준비된 사람이요, 결단의 사람이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은혜입니다. 레위는 예수님을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였습니다. 이 잔치에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초청을 받아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레위는 혼자 고독하게 지내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함께 하는 친구들이 생겼습니다. 그는 자기 집을 개방하여 함께 식사를 하였습니다. 나눔의 가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해서 모으는 삶은 허무했는데 자신의 것을 나눌 때에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죄인과 함께 하여 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격이 되었습니다. 레위는 그 잔치에 예수님 일행과 자기 친구들을 초청했습니다. 친구들은 대부분 세리로서 회당에서 출교된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예수님께 소개하였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식사는 보통 가족과 함께 합니다. 손님에게는 간식만 대접을 합니다. 예수님은 레위와 죄인들을 가족으로 영접하고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함께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한다는 것은 한 가족이요, 한 공동체를 뜻합니다. 식사를 하면서 음식을 서로 나누었고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사귐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은 영육간에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과 영혼의 생수를 공급해주셨습니다.
이런 일은 당시에는 파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인들과는 식사나 교제가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과 제자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방하였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은 분리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를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죄인들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이렇게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면 함께 할 사람이 시간이 갈수록 적어집니다. 나중에는 자신만 남게 됩니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죄인을 어떻게 보십니까? 31,32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들을 정죄 받아야 할 사람으로 보지 않으시고 치료받아서 회복되어야 할 병든 자들로 보셨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모습을 망가뜨립니다. 영적으로 병들게 해서 정상적인 기능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뇌는 40개국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소유했습니다. 그러나 죄악으로 깊이 병들어서 무기력하고 무능한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최고의 작품으로 지음 받았지만, 비교의식과 시기심 때문에 늘 불만족한 삶을 살아갑니다. 인간은 하나님처럼 거룩한 형상으로 지음 받아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로 지음 받았지만, 갖은 욕심과 정욕 등으로 추하고 부끄러운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수치스럽게 만들었습니다. 로마서 1장 21절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며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개척하고 도전하여 역사를 창조하며 많은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도록 복을 받았지만, 불신과 두려움 때문에 도전하지 못하고 짓눌려서 열매 없는 인생을 살아갑니다. 세리 레위는 물질주의와 이기심으로 깊이 병들었습니다. 사람이 암이라는 죽을 병에 걸려도 치료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환자는 병만 치료하면 건강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은 회개만 하면 용서를 받고 의인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죄인을 불러 회개시킬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이든지 정죄를 하면 방어기제가 발동하게 됩니다. 변명하고 합리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회개는 죄를 지적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복합적인 면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합니다. 환자가 병원에 오면 의사는 불쌍히 여기고 어디가 아프십니까? 묻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진단하고 처방을 하고 치료해 줍니다. 의사는 환자에게 왜 그런 병이 생겼는지 따지지 않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병든 자체가 불쌍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죄인을 볼 때 긍휼히 여기십니다. 목자가 죄인을 불쌍히 여기면 용서하고 치료할 방법을 찾게 됩니다. 우화에 나오듯이 태양과 바람이 사람의 외투를 벗기는 내기를 하였습니다. 사람의 옷을 벗기는 방법은 바람이 아니라 따뜻한 빛을 비추어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에게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해주고 사랑해줄 때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돌이킬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 그들을 도우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사람들은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환자를 긍휼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병자가 의사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자신의 병든 곳을 내놓아야 합니다. 자신이 죄로 병들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하고 영적 의사에게 자신의 병든 모습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정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들고, 사람들이 욕하고 멀리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과 실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허물과 죄를 진실하게 들고 나온 사람을 한 번도 정죄한 적이 없습니다. 아무리 심각한 죄인이라도 “어떻게 이런 죄를 지었느냐?”고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 나온 각종 죄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죄를 다 알고 계시지만 정죄하지 아니하십니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를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십니다. 그리고 지은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흘린 자신의 피와 성령의 불로 태워주시고, 죄로 병든 내면을 치유해주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불러서 사랑하고 회개하도록 도우시고 죄 사함을 주십니다. 이때 우리는 건강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교회는 도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죄로 병든 영혼들이 영적 의사되신 예수님을 통해서 용서 받고 치료 받기 위해 모인 곳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는 병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열고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온전한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죄인이 하루 아침에 의인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과 성숙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병원에 가면 환자들이 서로를 동병상련이 되어 서로를 불쌍히 여깁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서로 인내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고 말씀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당시 세례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의 제자들에게 주된 경건의 훈련이 금식과 기도였습니다. 율법은 7월 10일 대속제일만 금식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16:29). 그런데 포로기 이후에는 예루살렘의 멸망한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서 한 해에 나흘을 금식했습니다(슥7:3,5,8:19). 또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거나(왕상21:27; 욜1:14; 2:15-27; 사58:1-9), 슬퍼할 때(에4:3), 때때로 금식이 수반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금식을 종교적인 관습으로 발전시켰는데,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였습니다. 점차 그들은 금식의 자세를 잃어버리고 신앙적 열심을 자랑하기 위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런 경건의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금식하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냐.” 예수님은 혼인 집의 신랑으로 오셨습니다. 신앙 생활은 결혼 잔치와 같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된 사람들은 기쁨이 넘칩니다. 죄사함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 4:7-8).” 죄사함을 받은 자가 누리는 기쁨은 가장 큰 복입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금식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금식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비유를 드셨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그 말씀이요 낡은 가죽부대는 바리새인의 가르침과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신 복음이 새 포도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게 되는 것이 새 포도주입니다. 이 복음에는 생명력이 있고 역동적인 힘이 있습니다. 복음을 담아내는 사람들이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제시하는 새로운 방법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그릇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리새들과 서기관들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새로운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그들을 통해서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들로’ 대표되는 사람들이 바로 시몬 베드로, 세리 레위를 비롯한 열두 사도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전해주는 복음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나라 백성으로서 살아갑니다. 우리도 자신의 부족한 점을 알고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배울 때 새 부대들이 됩니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가 될 때 겉 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롭게 됩니다(고후4:16).
그러나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변화를 싫어합니다.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것이 편안합니다.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사람들은 생명력을 잃고 도태되고 말 것입니다. 아놀드 토인비(Arnold Toynbee)는 문명의 흥망성쇠를 분석한 『역사의 연구』를 썼습니다. 그는 26개의 문명을 비교하면서 문명의 발생 – 성장 – 쇠퇴 – 해체 과정을 겪는다고 했습니다. 한 문명의 흥망성쇠는 자연적 조건이나 외적인 침입에 따르는 행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각종 도전에 그 구성원들이 얼마나 잘 응전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여부로 결정된다고 했습니다. 문명이 성장할 때는 사명감, 순수성, 뜨거운 열정, 창조성이 있는 ‘창조적 소수’가 있지만 쇠퇴할 때는 이런 것을 상실한 ‘지배적 소수가’가 나타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창조성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우상화’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창조적 소수가 도전해서 성공하지만 성공을 한 후에는 성공에 취해서 새롭게 도전하지 않게 되어서 도태하는 과정을 겪게 됩니다. 옛 생활 방식이 좋다고 집착하게 되면 변화된 세상에서 도태하게 됩니다. 우리는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한발 한발 변화를 위해서, 생명의 역사를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길이 힘들고 어렵지만 누가복음 말씀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이 꿈꾸셨던 교회를 세워나가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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