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5강(5:12-26)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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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5 강
말씀 | 누가복음 5:12-26
요절 | 누가복음 5:20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을 합니다. 오늘은 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는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16).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나아왔습니다. 나병은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피부에 고름이 생기고 신체 조직이 파괴되어 많은 경우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코가 문드러집니다. 몸에서 냄새가 나고 몰골이 흉측하여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말초 신경을 파괴하여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나서 가족들과 생이별한 채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사회적인 관계를 다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나병은 율법에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레13,14장). 본래 나병환자는 병이 나은 것을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야 사람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나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데 나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께 나아오게 했을까요? 그는 예수님이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병이 불치병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주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치료를 주님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께 치료해 달라고 구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말 속에는 주님께서 고쳐주지 않으실지라도 자신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순도 높은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온 몸이 나병으로 부패한 시신과 같이 문드러졌지만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보통 나병이 나아도 흉터는 남아 있습니다. 몸의 지체 중에 떨어져 나간 것은 다시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재생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나병은 죄와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4-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떠합니까? 시궁창을 휘저으면 온갖 오물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20-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나의 모습이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나병든 사람을 어떻게 고쳐 주십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면서 상처를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 냄새가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아무도 만지기를 원하지 않는 그의 몸에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대셨을 때 그는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인격체로 존중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마음의 상처들이 따뜻한 기운과 함께 치유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으심으로 깊은 공감대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정한 사람이라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신 후 한 가지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님은 이 사건이 사람들을 자극해서 열광적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그를 따른다면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시를 받고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서두르지 않고 제자를 양성하시면서 구속 역사를 완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가서 소문을 내자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왔습니다(막 1:45). 예수님은 물러나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와 관계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집중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부딪치고 논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에 가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가 치솟을 때 여기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기 위해서 기도에 힘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고 인기가 올라갈 때 잠잠히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호사다마라고 일이 잘 될 때 겸손하게 은혜를 감당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교제에 힘쓰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자 그를 조사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용기가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감시와 위협 속에서 위축되지 않고 주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아 길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친구들은 포기하거나 다른 날에 오고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히자 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천장에 큰 구멍을 뚫어 침상째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대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조마조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친구에 대한 사랑, 친구를 살리고자 하는 열정,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습니다.
중풍병자의 상태와 그 친구들의 행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혈관이 막혀서 전신이나 반신 혹은 사지가 마비되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마비되어서 할 수 없을 때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스럽겠습니까? 그는 자기 뜻대로 일이 안 될 때 답답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기를 잘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체는 건강하지만 마음에 힘이 없어서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면서 살고 싶은데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체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의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좋은 친구들로 인해서 그가 예수님께 나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도 큰 소망을 줍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천정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고 하늘이 보일정도로 구멍이 뚫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침상 위에 한 사람이 네 줄에 달려서 대롱대롱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막힌 모습을 보고 웅성웅성했을 것입니다. 멀쩡한 남의 집 지붕을 뜯어서 병자를 달아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황당해하며 무례한 행동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기물파손 죄로 고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행동을 일으킨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역사를 감지하십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병이 나음을 받았을 때도 이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은 알아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합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원어에는 “네 죄들이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지은 많은 죄들이 한꺼번에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온 이 사람에게 중풍병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그를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신장병으로 병원에 갔을 때에 감기가 지독히 들었었지만 의사는 감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먼저 신장병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가벼운지 분별해야 합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신성 모독은 돌에 맞아 죽을 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말씀을 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일어섰습니다. 죄사함과 중풍병의 치료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가 일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때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변화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성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일생동안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내면의 병든 것들을 치료해 주시고 건강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0장 28-31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피곤하고 무기력합니까?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할 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젊은이처럼 달음박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죄의 짐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부부 싸움을 할 때 대부분 신혼 초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죄까지 다 기억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반복하고 염치가 없어서 “주님, 제가 또 이런 죄를 짓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고백할 때에 주님은 듣고 계시다가 “또 라니?”라고 반문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믿음으로 달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더라도 한 달에 열 번 죄를 짓던 사람이 한 달에 세 번 죄를 짓는다면 성장하고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변화되기 위해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 죄의 유혹에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생명을 얻고 더욱 주님을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자기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이제 자기를 초월해서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영적인 훈련과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우리 주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친구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랑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잔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온전해지도록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친구 한 사람에게 하는 작은 섬김과 사랑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5:12-26
요절 | 누가복음 5:20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우리는 지난 주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말씀을 전하시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을 배웠습니다.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고기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이 잡혔습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고백을 합니다. 오늘은 한 나병환자와 중풍병자가 나옵니다. 나병은 부정한 병입니다. 부정하다는 것은 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무기력합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십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죄사함을 주는 분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습니다. 죄를 사함 받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배우고 영접하기를 기도합니다.
첫째,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12-16). 예수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나아왔습니다. 나병은 다양한 증상으로 나타납니다. 피부에 고름이 생기고 신체 조직이 파괴되어 많은 경우에 손가락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가고 코가 문드러집니다. 몸에서 냄새가 나고 몰골이 흉측하여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줍니다. 말초 신경을 파괴하여 감각을 잃어버립니다. 나병은 전염성이 강해서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떠나서 가족들과 생이별한 채 어두운 동굴 같은 곳에서 홀로 살았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사회적인 관계를 다 정리해야 합니다. 특히 나병은 율법에 부정한 병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레13,14장). 본래 나병환자는 병이 나은 것을 제사장에게 확인을 받아야 사람들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온 몸에 나병에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데 나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을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예수님께 나아오게 했을까요? 그는 예수님이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자신의 병이 불치병이었지만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가 예수님 앞에 엎드려 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그는 예수님의 주권을 고백합니다. 자신의 치료를 주님의 처분에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예수님께 치료해 달라고 구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주님의 긍휼만을 의지하여 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이라는 말 속에는 주님께서 고쳐주지 않으실지라도 자신을 주님께 맡기겠다는 순도 높은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온 몸이 나병으로 부패한 시신과 같이 문드러졌지만 깨끗하게 될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주님께 간구합니다. 보통 나병이 나아도 흉터는 남아 있습니다. 몸의 지체 중에 떨어져 나간 것은 다시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이 원래대로 재생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믿음이요 소망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나병은 죄와 유사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백성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4-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떠합니까? 시궁창을 휘저으면 온갖 오물이 떠오르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20-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나의 모습이 나병 환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온 몸에 나병든 사람을 어떻게 고쳐 주십니까?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나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하면서 상처를 수도 없이 받았습니다. 자신의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고 홀로 외롭게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 냄새가 그리웠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아무도 만지기를 원하지 않는 그의 몸에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대셨을 때 그는 자신이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에게 받아들여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한 인격체로 존중됨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순간 그의 마음의 상처들이 따뜻한 기운과 함께 치유가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그의 말을 그대로 받으심으로 깊은 공감대를 이루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고 건강한 인생을 살기를 진정으로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아름다운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떤 부정한 사람이라도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요 15: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그를 깨끗하게 하신 후 한 가지 경고를 하셨습니다.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가 깨끗하게 됨으로 인하여 모세가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니” 예수님은 이 사건이 사람들을 자극해서 열광적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많이 그를 따른다면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시를 받고 그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종교지도자들의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년 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서두르지 않고 제자를 양성하시면서 구속 역사를 완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가 나가서 소문을 내자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왔습니다(막 1:45). 예수님은 물러나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인기와 관계없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에 집중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부딪치고 논쟁을 벌이게 될 것입니다. 이를 준비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에 가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기가 치솟을 때 여기에 영합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따르기 위해서 기도에 힘을 쓰셨습니다. 우리는 일이 잘 풀리고 인기가 올라갈 때 잠잠히 믿음의 비밀을 간직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호사다마라고 일이 잘 될 때 겸손하게 은혜를 감당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교제에 힘쓰고 시험에 빠지지 않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17-26).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였습니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고 사람들이 그에게 모여들자 그를 조사하기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담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용기가 있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의 감시와 위협 속에서 위축되지 않고 주의 일을 하셨습니다.
이때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사람들이 많아 길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친구들은 포기하거나 다른 날에 오고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길이 막히자 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천장에 큰 구멍을 뚫어 침상째 예수님 앞에 달아 내렸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대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칠까봐 조마조마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눈초리와 비난에도 불구하고 친구에 대한 사랑, 친구를 살리고자 하는 열정,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상천외한 일을 벌였습니다.
중풍병자의 상태와 그 친구들의 행동은 미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중풍병자는 혈관이 막혀서 전신이나 반신 혹은 사지가 마비되어서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이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스스로 어떤 일을 하고 싶어도 몸이 마비되어서 할 수 없을 때 얼마나 답답하고 절망스럽겠습니까? 그는 자기 뜻대로 일이 안 될 때 답답하여 원망하고 불평하기를 잘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신체는 건강하지만 마음에 힘이 없어서 무기력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립적으로 인생을 개척하면서 살고 싶은데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주저앉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대부분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체념하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본문의 중풍병자는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좋은 친구들로 인해서 그가 예수님께 나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도 큰 소망을 줍니다.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을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때 천정에서 흙먼지가 떨어지고 하늘이 보일정도로 구멍이 뚫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침상 위에 한 사람이 네 줄에 달려서 대롱대롱 내려왔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기막힌 모습을 보고 웅성웅성했을 것입니다. 멀쩡한 남의 집 지붕을 뜯어서 병자를 달아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황당해하며 무례한 행동이라고 비난했을 것입니다. 주인은 기물파손 죄로 고소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20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 사람들의 행동을 일으킨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역사를 감지하십니다. 혈루병 걸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병이 나음을 받았을 때도 이 여인의 믿음을 예수님은 알아차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히브리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을 합해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믿음을 보시고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원어에는 “네 죄들이 사람을 받았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가 지은 많은 죄들이 한꺼번에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은혜가 풍성하십니다. 또 예수님은 병을 고치러 나온 이 사람에게 중풍병을 고치는 것보다 먼저 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야 그를 온전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오래 전에 신장병으로 병원에 갔을 때에 감기가 지독히 들었었지만 의사는 감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고 먼저 신장병을 치료하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일에는 순서가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 가벼운지 분별해야 합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나중에 해도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죄사함을 선포하시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21)” 신성 모독은 돌에 맞아 죽을 죄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담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보여주고자 하십니다. 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그 영광을 드러내고자 말씀을 하십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증명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예수님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는 말씀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는 일어섰습니다. 죄사함과 중풍병의 치료가 일어나자 사람들은 다 놀랐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내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순종할 때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가 일하심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죄사함을 받을 때 사람이 변화가 됩니다. 변화는 일생동안 지속되어야 합니다. 변화는 성장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으로 일생동안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하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지은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내면의 병든 것들을 치료해 주시고 건강하게 하십니다. 이사야 40장 28-31절은 말씀합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피곤하고 무기력합니까?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할 때 독수리처럼 날아오르고, 젊은이처럼 달음박질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죄 사함의 권세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가 이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받고 죄의 짐을 내려놓을 때 우리는 일어날 힘을 얻게 됩니다.
예레미야 31장 34절은 말씀합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런데 부부 싸움을 할 때 대부분 신혼 초에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현재의 죄까지 다 기억해서 공격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는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반복하고 염치가 없어서 “주님, 제가 또 이런 죄를 짓고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고백할 때에 주님은 듣고 계시다가 “또 라니?”라고 반문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믿음으로 달려가기를 원하십니다. 사실 우리는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같은 죄를 반복하더라도 한 달에 열 번 죄를 짓던 사람이 한 달에 세 번 죄를 짓는다면 성장하고 변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변화되기 위해서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고 죄의 유혹에 강해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생명을 얻고 더욱 주님을 닮아가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자기 문제에 집중하기보다 이제 자기를 초월해서 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으로 나타나고 사랑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영적인 훈련과 성숙을 향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오늘 중풍병자의 친구들처럼 우리 주위에 무기력하게 누워 있는 친구들을 주님께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많은 사랑의 수고를 요구합니다. 어린 아이를 양육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잔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한 사람이 죄사함을 받고 온전해지도록 섬겨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친구 한 사람에게 하는 작은 섬김과 사랑을 통해 영광을 나타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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