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22년 눅3강(4:14-44)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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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 3 강
말씀 | 누가복음 4:14-44
요절 | 누가복음 4:18,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일을 시작하시면서 취임사를 발표하십니다. 취임사 속에는 앞으로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이며,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가 하신 일의 열매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알수록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권세가 있어서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도하시며, 그를 능력으로 충만케 하시며, 권위 있게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은 희년에 관한 내용입니다. 희년(Jubilee)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년째 되는 해 7월 10일 대속죄 일입니다(레25:8-12). 대속죄 일에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레25:9). 희년이 되면 나팔을 불고 채무자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팔려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또한 돈을 받고 산 땅은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희년은 빚진 자들이 탕감을 받고, 포로 된 자들이 자유를 누리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희년 제도를 통해서 허물과 죄악으로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잃어버린 채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희년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단지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차 부유해지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서적인 결핍을 느낍니다. 사랑의 결핍을 느끼고 고독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서적인 결핍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누구나 다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정서적인 결핍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포로 된 자’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든지, 빚을 갚지 못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포로 된 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질병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고,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게임 중독, 마약중독, 잘못된 가치관이나 신념의 포로가 된 사람, 부정적인 생각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게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죄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간음을 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축제 기간 중에 간음하다가 잡혀서 돌에 맞아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 포로 된 자, 게임에 중독 된 자, 이념의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알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신의 포로 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십니다. 구약성경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신약성경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이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경 중에는 육체적인 소경도 있지만 영적인 소경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영적 세계를 밝히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라서 다른 사람의 형편을 잘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자기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때 다른 사람의 형편을 살피게 되고 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연세계가 탄식하는 것까지 보고 만유의 회복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평범한 삶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날씨, 누군가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일 속에서 성만찬의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눌린 자’는 ‘산산이 부서진 자’ 혹은 ‘깨어진 자’를 뜻합니다. 요즈음 마음이 약해서 짓눌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참다가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합니다. 과도한 삶의 무게에 눌립니다.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에 눌리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의 부담에 눌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역에 대한 부담에 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마음이 눌려 있다가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합니다. 화병이라고 하죠. 온순하던 사람이 큰 소리를 치며 시비를 걸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짓눌려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절을 많이 당해서 자신감이 없습니다. 또 다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위축이 되고 마음 문을 쉽게 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는 피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육 간에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여름 수양회에서 마음을 짓누르던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기억이 있습니다. 눌린 자들이 일어서면 무섭습니다. 우리 박기드온 선교사님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고 개척하여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도록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도움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희년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를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에 이루어지던 은혜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기간도 1년 동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순간부터 재림하시는 날까지 모든 날들이 희년이요, 은혜의 해입니다. 포로 된 자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자들이 보게 되고, 눌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오늘 이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은혜의 시대, 복음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를 누리고, 위로를 받습니까? 바로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 선포와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주셔서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인데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듣고 실천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귀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복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말을 듣고 나타나는 행동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큰 위로와 축복을 얻어가는 듯이 보였지만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 때문에 자유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를 극복하는 길은 사람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본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속담을 인용하시고 역사적인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숭배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엘리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영접하고 공궤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궁핍해서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그 음식을 먼저 자신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사렙다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흉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으되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찾아온 나아만 장군에게 방문만 열어보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도단에서 요단강은 15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고름과 상처 딱지로 흉하던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일지라도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갈릴리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참으로 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람이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찔리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하여 “나에게 대고 하는 말이야” 하고 속으로 반발하면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아무런 역사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간절하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치료와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왜 놀랐습니까?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었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말하였습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이 어떻게 역사할까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일을 합니다. 귀신이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의심하는 생각, 불신의 생각, 더러운 생각, 반발하는 생각을 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귀신은 조급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생각을 분별하여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평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받은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60%만 생각이 된다면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시몬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해질 무렵에 안식일이 끝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시몬의 집은 병원 응급실처럼 병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매우 인격적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와 같이 섬세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하루 종일 일하셔서 피곤하셨지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접해주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은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모두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는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밤 늦게까지 찾아온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퍼지도록 주무시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쉼과 하루의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보다 더 도움이 절실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자유하게 하는 복음을 다른 동네에서도 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해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가을학기에 이런 말씀 역사, 성령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말씀 | 누가복음 4:14-44
요절 | 누가복음 4:18,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 예수님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일을 시작하시면서 취임사를 발표하십니다. 취임사 속에는 앞으로 그가 하실 일이 무엇이며, 어떤 비전을 가지고 일을 하시는가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가 하신 일의 열매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알수록 더 많은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의 말씀이 권세가 있어서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을 인도하시며, 그를 능력으로 충만케 하시며, 권위 있게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셨습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셨습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읽으신 말씀은 희년에 관한 내용입니다. 희년(Jubilee)은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 다음해 즉 50년째 되는 해 7월 10일 대속죄 일입니다(레25:8-12). 대속죄 일에 희년을 선포하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레25:9). 희년이 되면 나팔을 불고 채무자들의 모든 빚을 탕감해주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팔려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주었습니다. 또한 돈을 받고 산 땅은 원주인에게 되돌려주었습니다. 이렇게 희년은 빚진 자들이 탕감을 받고, 포로 된 자들이 자유를 누리고, 눈먼 자들이 다시 보게 되고, 억눌린 자들이 해방되는 날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희년 제도를 통해서 허물과 죄악으로 하나님께 받은 기업을 잃어버린 채 비참한 인생을 살아가던 사람들이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이처럼 희년은 인생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단지 물질적으로 궁핍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하게 간구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장차 부유해지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정서적인 결핍을 느낍니다. 사랑의 결핍을 느끼고 고독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정서적인 결핍을 가진 존재입니다. 사랑에 대한 목마름은 누구나 다 느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난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정서적인 결핍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십니다. ‘포로 된 자’는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든지, 빚을 갚지 못하여 노예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포로 된 자는 이런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각종 질병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고,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힌 사람들도 있습니다. 오늘날 게임 중독, 마약중독, 잘못된 가치관이나 신념의 포로가 된 사람, 부정적인 생각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중독된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죄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그 죄는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고 추하고 더러운 인생을 살게 합니다. 더욱 심각한 것은 인간에게는 죄를 지을 수 있는 자유는 있지만 죄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번 죄의 달콤함을 맛본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간음을 하면 돌에 맞아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축제 기간 중에 간음하다가 잡혀서 돌에 맞아죽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죄에 포로 된 자, 게임에 중독 된 자, 이념의 포로된 자들을 해방시키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진리 되신 예수님을 알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미신의 포로 된 자들을 자유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십니다. 구약성경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 내용이 나오지 않지만 신약성경에는 소경이 눈을 뜨는 내용이 여러 곳에서 나옵니다. 이는 구약에 나오는 하나님의 종들과 예수님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소경 중에는 육체적인 소경도 있지만 영적인 소경도 있습니다. 육체적인 눈은 멀쩡하지만 영적인 눈이 멀어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고 땅에 코를 박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방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영적인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하셔서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영적 세계를 밝히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기중심적이라서 다른 사람의 형편을 잘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잘 보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잘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통해서 영적인 눈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면 자기를 넘어서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때 다른 사람의 형편을 살피게 되고 섬기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자연세계가 탄식하는 것까지 보고 만유의 회복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일상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평범한 삶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은총을 발견합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날씨, 누군가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하는 일 속에서 성만찬의 은혜를 체험하며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눌린 자’는 ‘산산이 부서진 자’ 혹은 ‘깨어진 자’를 뜻합니다. 요즈음 마음이 약해서 짓눌린 사람들이 많습니다. 억울한 마음을 참다가 마음의 병을 얻기도 합니다. 과도한 삶의 무게에 눌립니다. 가장으로서 삶의 무게에 눌리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의 부담에 눌리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역에 대한 부담에 눌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로 마음이 눌려 있다가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의 병이 되기도 합니다. 화병이라고 하죠. 온순하던 사람이 큰 소리를 치며 시비를 걸고 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하면 소심함과 두려움 때문에 짓눌려서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거절을 많이 당해서 자신감이 없습니다. 또 다시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위축이 되고 마음 문을 쉽게 열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사람들이 요구하는 대로 따라가는 피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영육 간에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셔서 건강한 인생을 살도록 하십니다. 우리 가운데 많은 분들이 여름 수양회에서 마음을 짓누르던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새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한 기억이 있습니다. 눌린 자들이 일어서면 무섭습니다. 우리 박기드온 선교사님과 같이 하나님이 주시는 열정을 가지고 도전하고 개척하여 역사를 창조해나가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예수님은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들을 해방시켜서 건강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도록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서 도움을 받으라는 뜻입니다. 궁극적으로 희년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은혜의 역사를 예언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이 시작되었다고 선포하셨습니다. 희년에 이루어지던 은혜의 역사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기간도 1년 동안만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신 그 순간부터 재림하시는 날까지 모든 날들이 희년이요, 은혜의 해입니다. 포로 된 자들이 자유를 얻고, 눈먼 자들이 보게 되고, 눌린 자들이 자유롭게 되는 역사가 “오늘 이 시간”에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은혜의 시대, 복음의 시대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유를 누리고, 위로를 받습니까? 바로 우리의 사역을 통해서, 진리의 말씀 선포와 사랑과 섬김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지혜를 주셔서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인데 바로 자유입니다. 인간의 행복은 자유에서 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우리가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듣고 실천함으로 진정한 행복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에게 귀한 생명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들이 먼저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복의 통로로 쓰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에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은혜로운 말을 듣고 나타나는 행동이 기대 이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인해 큰 위로와 축복을 얻어가는 듯이 보였지만 요셉의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목수 요셉의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예수님의 참된 모습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사람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관 때문에 자유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못한다면 이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이를 극복하는 길은 사람 이면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본받지 말고 그들이 하는 말은 듣고 순종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향 갈릴리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속담을 인용하시고 역사적인 사건을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우상숭배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지만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이방여인이었지만 엘리야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영접하고 공궤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궁핍해서 조금 남은 가루와 기름으로 음식을 만들어서 아들과 함께 먹고 죽으려고 했습니다. 이때 엘리야가 그 음식을 먼저 자신에게 달라고 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마지막 남은 음식을 아까워하지 않고 엘리야에게 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런 사렙다 과부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흉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도록 도와주었습니다.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였으되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 뿐이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을 찾아온 나아만 장군에게 방문만 열어보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말했습니다. 도단에서 요단강은 15km나 떨어져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은 자존심이 몹시 상했지만 선지자의 말에 순종하여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었습니다. 그러자 고름과 상처 딱지로 흉하던 몸이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방인일지라도 믿음과 겸손한 마음으로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이 말씀을 듣고 갈릴리 사람들은 회개하기는커녕 크게 화가 나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님을 산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였습니다. 참으로 악하기 그지 없습니다. 사람이 메시지를 듣고 마음이 찔리면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교만하여 “나에게 대고 하는 말이야” 하고 속으로 반발하면 어떻게 은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아무런 역사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 가운데 성령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간절하게 은혜를 구하는 사람에게 치료와 회복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회개하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늘 머물러 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가버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사람들이 왜 놀랐습니까? 이는 그 말씀이 권위가 있음이었습니다.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귀신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 사역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꾸짖었습니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라 서로 말하였습니다.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귀신이 어떻게 역사할까요? 우리의 생각을 통해서 일을 합니다. 귀신이 생각을 집어넣습니다. 의심하는 생각, 불신의 생각, 더러운 생각, 반발하는 생각을 넣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합니다. 귀신은 조급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일을 하게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탄의 생각을 분별하여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고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마음에 평강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받은 말씀에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60%만 생각이 된다면 믿음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면서 믿음이 자라게 됩니다.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시고 시몬 베드로의 집을 심방하셨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셨습니다. 그러자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들었습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왔습니다. 해질 무렵에 안식일이 끝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병자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시몬의 집은 병원 응급실처럼 병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님은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병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매우 인격적입니다. 예수님은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와 같이 섬세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하루 종일 일하셔서 피곤하셨지만,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을 영접해주셨습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렀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은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들레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나온 사람들은 모두 건강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날이 밝자 예수님께서는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지난 밤 늦게까지 찾아온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퍼지도록 주무시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쉼과 하루의 방향을 잡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에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보다 더 도움이 절실한,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생각하셨습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자유하게 하는 복음을 다른 동네에서도 전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해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다른 동네 사람들에게 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잃어버린 한 사람을 찾아나서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사랑의 복음을 전해서 구원하고 제자 삼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가을학기에 이런 말씀 역사, 성령의 역사, 치유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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