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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회 2000년 여름수양회 주제강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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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958회 작성일 03-01-17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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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여름수양회 주제강의
요한복음 4;1-30
영생의 샘 예수님
 
4:13,14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늘 말씀은 무더운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버려진 한 여인과 나누는 사랑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인생문제였던 남편문제를 도우시며 그녀의 목마름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참남편으로 영접한 후 새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우물을 마시고 목마름에 지친 인생들에게 찾아오셔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물 좀 주시겠습니까?” 이 시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선물에 대해 배우고 영생의 샘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1. 물을 좀 달라(1-15)

1절을 보십시오. “예수의 제자를 삼고 세례를 주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인기가 높아지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예수님을 견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고자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사람들의 인기가 아니라 복음을 듣지 못해 고통하여 죽어가는 영혼들의 생명이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가야 했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3일밖에 안걸리는 이 길을 마다하고 6일이나 걸리는 요단강 둘레길로 돌아서 통행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었습니다. BC722년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혼혈 정책으로 이방인과 결혼하여 피가 섞이므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으로서의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남유다 사람들은 선민으로서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남유다 사람들은 이방인과 결혼한 사마리아인들을 같은 이스라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에서 “사마리아인만도 못한 녀석”하면 가장 심한 욕이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두 민족사이에는 아무도 깰수 없는 두터운 장벽이 생겼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은 복음으로 민족간의 장벽을 허물기위해 사마리아로 통행하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복음이 들어가면 이념의 장벽, 문화의 장벽미움과 정죄의 장벽이 무너지고 한몸, 사랑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사이의 모든 갈등을 없애고 화해시키는 평화의 구주이십니다.

  6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셨을 때 너무 피곤하여 우물가에 그대로 털썩 주저않으셨습니다. 때는 40도를 오르내리는 정오였습니다. 이 뜨거운 사막을 3일에 걸쳐 70km나 걸으셨으니 얼마나 피곤하셨겠습니까? 제자들은 사다리를 탄 후 먹을 것을 사러 마을로 몰려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앉은 우물은 유명한 ‘야곱의 우물’이었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발자취가 서린 유서깊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물곁에 앉아서 사마리아에서도 다시 믿음의 사람들이 나오도록 기도하셨습니다. 

  7a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러 왔으매” 이 때 한 여인이 껌을 짝짝 씹으며 물동이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보더니 ‘흥’하고는 물을 한바가지 퍼서 벌컥 벌컥 마셨습니다. 당시 중동의 아낙네들은 서늘한 아침, 저녁에 우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아무도 오지 않는 시간에 혼자 물을 길러 왔습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사람들을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독한 여인이었습니다. 후반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녀는 다섯 번 이혼하고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욕하였고 그녀도 자신을 정죄하는 이들과 함께 있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인을 멸시하고 남자들은 여인들을 무시하였는데 여인들마저 이 여인을 따돌렸습니다. 그녀는 사람에 대한 미움과 상처로 마음이 꽉 닫혀 있었습니다. 아무도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7절후반부를 보십시오. “물을 좀 달라” 영어성경을 참조해 보면 이는 ‘물을 좀 주시겠습니까?’ 하는 부탁입니다. 예수님은 한 비천한 여인을 도와주시고자 자신을 낮추시며 그녀와 대화의 문을 여셨습니다. 예수님은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 여인을 쓸모없다 정죄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긍휼의 마음때문에 하늘영광을 버리고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아래 서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낮추어 죄인들을 섬기신 겸손의 구주이십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누구든지 이해하고 섬기십니다. 누구라도 예수님앞에 나아오면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도와주십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부탁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9절을 보십시오.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민족간의 장벽이 얼마나 컸던지 물한모금도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또 이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마음이 삐뚤어져 있었습니다. 마음에 상처가 큰 사람들을 섬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잘해주면 팅기고 무시받으면 두고두고 기억합니다. 그래서 섬세한 이해와 겸손과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현재 모습에 관계없이 그를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향한 하나님의 소망을 믿으셨기 때문에 실망하거나 요동하지 않으시고 그녀를 이해하시며 도와주셨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예수님은 여인이 두가지를 모르고 있음을 지적해주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선물은 사람의 마음을 여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여인은 지금까지 많은 남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남자들은 선물을 주며 “내마음이야~~”하였지만 모두 조건적이며 일시적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여인의 진정한 선물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 이 얼마나 기대되는 말씀입니까? 그동안 여인은,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은 상처와 자신의 죄악된 삶에 대한 정죄감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을 생각지도 못하고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은 하나님께 대한 원망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혼란스러웠었습니다. 죄를 지은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여 숨으려 하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선물을 주시고자 애타게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선물을 주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선물은 무엇입니까? 로마서 6:23은 말씀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은 죄와 죽음의 권세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절망의 상태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수고하고 땀을 흘려도 죄와 사망의 지배를 벗어 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죽음과 심판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인간에게 예수님안에 있는 영생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죄와 죽음권세 아래서 허무에 종노릇하는 절망적인 인생들에게 이보다 좋은 선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땅에서 행복하면 그만이지 영생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합니다. 그들은 이땅에서도 절대적인 삶의 의미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지만 모든 것을 빼앗아 가는 죽음에 이르러서야 결국 그것이 거짓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와 사망권세아래 평생 종노릇하다가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 위해 예수님안에 있는 영생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을 돌려드립니다.

둘째, 여인은 예수님이 누구인줄 알아야 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이 사마리아인을 멸시하는 유대의 한 청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닫고 말도 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만약 예수님을 생수를 주시는 분으로 알았다면 예수님께 간절히 구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에게 나오지도 않고 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빼앗아 가지 않나하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풍성한 열매로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7:37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게 값없이 생수를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생수를 주신다고 하자 여인의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보니 물길을 그릇도 없고 우물도 깊어서 생수를 주신다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야곱과 비교하며 누가 더 위대한지 알고자 하였습니다. 조금전에는 물도 한잔 않주면서 쏘아붙이더니 이제는 예수님을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야곱과 비교하며 무언가를 기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무더운 여름날, 자판기에서 ‘날 물로 보지마’, 이온음료 2%를 하나 뽑아 먹으면 갈증이 싹 사라집니다. 그런데 얼마 않있어 또 2%가 생각납니다. 우리의 몸은 항상 2%가 모자릅니다. 인간은 육체뿐 아니라 영혼을 가진 존재입니다. 이렇게 육체가 목마른 것처럼 우리의 영혼에도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목마름은 야곱의 우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의 사랑에 목마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만을 사랑해주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다섯 번이나 결혼하였습니다. 처음 남편은 외모가 수려하여 첫눈에 반하여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이 남자는 가정을 돌아보지 않고 매일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둘째 남편은 잘나가는 벤쳐기업에서 고액연봉을 받는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밤낮없이 일하다가 과로사로 죽었습니다. 세 번째 남편은 퇴근도 일찍하고 가정중심적이었으나 잔소리를 많이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하루종일 집에 있으면서 설겆이도 않하고 뭐해요?” 여인은 새로운 남편을 만날때마다 ‘이사람은 다를거야, 아니 달라야만 해’하며 남편의 절대적인 사랑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남편의 허물뿐 그녀가 기대한 사랑을 채워주지 못하는 것은 다 똑같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도 채워줄 수 없는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서로가 원하는 사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인생의 짐이 무거워지고, 만남은 많지만 진실한 사귐을 가질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은 자신의 버거운 삶을 이해하고 용기를 줄 수 있는 대상을 찾습니다. 그래서 이성친구를 만나 관심과 사랑을 주며 많은 시간을 함께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연약함을 감당하고 이해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요구하다가 상처받고, 육체의 정욕만 주고 받다 서로 부담만 주는 관계가 되고 맙니다. 그들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지만 모든 인간관계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시 목마를 수 밖에 없는 야곱의 우물뿐입니다.
  청년들에게는 정욕의 목마름이 심합니다. 인터넷과 비디오방, 전화방, 성인영화관, 술집등 우리사회에 음란문화는 브레이크를 떼어낸 열차와 같이 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속에서 청년들은 거룩한 소원을 상실하고 정욕의 사슬에 매여 밤거리를 끌려 다니며 목마름을 채우려고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세상 잔재미에 대한 목마름이 큽니다. 종류를 셀 수 없는 인터넷컴퓨터게임, DDR, 영화, 스포츠, 연예가소식, 그리고 청평호수에는 주말과 연휴마다 수상스키를 타러 오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고 합니다. 한 형제님은 인생의 목마름을 달래고자 친구들과 함께 하룻밤에 맥주를 76병을 마셨습니다. 그러나 목마름은 여전하였습니다. 자고 일어났더니 더욱 목이 말라 게토레이를 또 사서 마셨습니다.
  형제들은 인정에 대한 목이 마르고 자매님들에게는 아름다움을 사모하는 목마름이 큽니다. 무엇보다 바라보기 싫은 자신의 실패와 상처, 무능력, 열등감, 운명주의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자아를 만들어 보고 싶은 강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아! 타는 목마름이여! 왜 인간은 목마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예술이나 문학은 인간의 목마름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도 그 자체를 아름다운 것으로 미화시키기 때문에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안에는 인간이 목마를 수밖에 없는 정확한 이유와 해답이 있습니다. 아모스서 8:11절은 말씀합니다. “주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인간의 목마름의 윈인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어거스틴은 인간의 목마름에 대하여 이같이 말하였습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만이 채울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겐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우지 아니하면 어떤 물을 마셔도 채울 수 없는 공간이 있습니다. 여기에 이성의 사랑이나 정욕, 물질, 인정, 자기성취을 아무리 쏟아 부을 지라도 밑빠진 독에 물 을 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목마름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야곱의 우물물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 물은 이땅에 속한 물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와서 우리의 심령에 부어지는 영혼의 물입니다. 이 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의 영생의 샘물입니다.  그러면 영생의 샘물을 마시면 왜 목마르지 않습니까?
  첫째, 죄사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서 2:13에서 이같이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이 두가지 악을 행하였으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라” 인간이 목마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을 떠나 죄의 웅덩이를 파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는 영혼의 샘물을 막는 돌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신령한 사랑과 기쁨을 맛보지 못하게 합니다. 무엇보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댓가를 치룹니다. 마음이 완악해지고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사단이 심는 정죄감에 시달립니다. 죄는 사단의 세력과 함께 하기 때문에 한 번 죄의 세력과 타협하면 죄의 종이 됩니다. 죄의 종이 된 인간은 어떤 노력과 땀을 쏟을지라도 스스로 자유해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이 치루어야 할 죄의 대가를 대신 치루셨습니다. 십자가를 타고 흘러내리는 예수님의 피는 죄인이 흘려야 할 피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붙들고 예수님앞에 나가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십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내면이 밝아지고 기쁨이 생깁니다. 삶의 의미를 찾고 고난을 감당할 힘이 생깁니다. ‘인생이 다 그런것이야’ 하며 묻어두려고 했던 많은 고민과 상처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죄의 짐들을 예수님께서 벗겨주십니다. 미움의 사슬이 끊기고 원수같은 사람을 용서합니다. 열등감과 운명주의의 노예로 살던 사람이 운명을 다스리고 개척하는 복의 근원이 됩니다. 밤거리를 이리저리 끌고다니던 음란의 죄를 다스리고 성결하고 거룩한 내면을 사모하는 순결한 자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가끔 어떤 분은 ALL A+를 받기도 합니다. 죄사함을 받으면 하나님나라가 심령에 임하게 됩니다. 죄와 악령의 세력에 시달리지 않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때문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닮기때문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영생의 샘물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의 샘물을 마실 때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사람들은 술도 않먹고 담배도 피우지 않는 크리스챤을 보며 무슨 재미로 사느냐며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노래방에서 목청이 찢어지도록 노래를 부르거나 디스코장에서 몸이 꼬이도록 춤을 추고, 물살을 가르며 수상스키를 타고 마음대로 쾌락을 즐길때 기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잠시의 기쁨뒤에 찾아오는 허무와 더 큰 목마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닮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하고 아름다운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되찾고 예수님의 성품에서 자라가는 기쁨은 이 세상 야곱의 우물에서 결코 얻을 수 없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됩니다. 그러나 야곱의 우물물을 마시지 않기로 결단을 했지만 다시 야곱의 우물로 달려가서 죄의 구정물을 마시고 오는 리더도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닮는 기쁨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고자 항상 투쟁할 때 우리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주여 이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그녀는 스스로 목마름을 해결 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목마르고 삶에 지쳐 허우적 거리는 자신의 삶도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목마를 수 밖에 없다는 실존을 깨닫기 시작할 때 예수님이 주시는 영생수를 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목마른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여인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난 적당히 목마른게 좋아요!’하며 자신을 인정하지 않을 때 그녀는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인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목마른 삶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2.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16-30)

  여인은 예수님과 대화하면서 마음이 열렸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에게 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궁금했고 또 얻고 싶어졌습니다.  여인이 영적소원을 가졌을 때 예수님은 그녀에게 영적인 도전을 하셨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가라사대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남편에 관한 문제는 예수님께 드러내고 싶지 않은 가정문제요 자신의 죄문제였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문제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마이너스가 될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터치하려고 하지도 않고 터치 받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영적인 눈이 멀 때 자신의 죄문제가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숨은 죄악을 회개하지 않고 영생수를 마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을 잘 이해해 주셨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으셨습니다. 여인이 부끄러운 죄문제를 들고 나오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이는 환자가 자기의 병을 고침받으려면 아픈 곳을 의사선생님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해받는 데서 나아가 하나님앞에서 인격적인 회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얻을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영적인 사랑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죄사함을 받도록 도와 주는 것입니다. 반면 인본적인 사랑은 모든 것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문제는 덮어주고 그저 잘되기만을 바랍니다. 하지만 자신의 죄문제를 해결받지 못한 사람의 생애가 하나님앞에서 복된 삶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누구든지 마음이 생수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떠나 다른 것을 경배하고 있을 때 그것을 드러내고 회개하지 않으면 시원한 생수를 받아 마실 수 없습니다. 여인이 생수를 받아 마시기 위해서는 정욕을 쫓아 남편을 다섯이나 바꾼 간음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저주받은 자매본성으로 형제사랑에 울고 웃으며 젊음을 탕진한 것을 인정하고 진실된 회개를 하여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네가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하는 말이 옳도다.” 여인은 은혜를 받기는 원했지만 죄문제를 예수님께 고백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녀는 말하지 않으면 자신의 상처와 죄문제를 숨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가 고백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녀의 삶 전체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대답을 인정해주시면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여인은 자신을 너무도 잘 아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는 여인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을 통해 사마리아여인을 비롯한 인생들의 진정한 문제가 경배문제인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녀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드리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가진 순결과 사랑과 젊음을 남자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녀는 단지 육체뿐인 남자를 예배한 것입니다. 성경은 남자는 돕는 베필이 필요한 연약하고 부족한 존재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남자는 행복을 찾는 여인의 소망을 만족시켜 줄 수 없고, 여인의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여자가 남자에게 소망을 두고 살면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실한 마음과 순결과 사랑과 생명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오직 영이신 하나님만이 행복을 찾는 우리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고 영원한 안식처가 되실 수 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나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라” 예수님은 그녀에게 선포하셨습니다.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여인은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외쳤습니다. “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이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메시야를 만난 여인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심령에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수가 흘러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주신 생수는 그녀의 심령에 차고 넘쳐서 사마리아의 모든 사람에게 흘러 들어갔습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은 목마른 인생들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 영생의 샘물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남편이신 이 예수님을 만날 때 목마름을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영생의 샘물이신 예수님을 선물로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가 세상죄의 구정물로 목마름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예수님안에 있는 신령한 은사와 기쁨으로 영혼의 빈공간을 채워 항상 마르지 않는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를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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