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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0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8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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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3,430회 작성일 03-01-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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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8 강
말씀/누가복음 18:1-14
요절/누가복음 18:7
찬 363, 480,484
낙망치 않는 기도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기도하는 것은 영적인 노동입니다. 노동에는 수고가 따르지만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고 나서 이런 결과들을 얻어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응답받는 기도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과부의 끈질긴 기도와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통해서 응답받는 기도 생활을 배우고자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신비한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살면서 우주의 창조주시오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체험하고 그를 의지하며 사는 사람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부딪치는 어려움들을 응답받는 기도 생활을 통해서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

I. 과부의 끈질긴 기도 (1-8)

 1절을 보십시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우리가 기도 생활에서 극복해야 할 두 가지 어려움은 항상 기도해야 하는 것과 낙망치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첫째, 항상 기도하라.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 어떤 상황에서든지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평소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이 차이를 잘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 차이를 매우 잘 인식합니다. 사단은 항상 일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항상 기도하지 않으면 공격을 당합니다. 사단은 기도하는 사람을 제일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으면 우리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합니다. 기도를 쉬게함으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현대인들의 가장 큰 영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마음이 분주한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가 별 것 아닌 일들로 바쁘게 만들어 버립니다. 핸드폰이나 이메일 등은 우리를 괜히 바쁘게 합니다. 현대인들은 바쁘지 않으면 도리어 불안을 느낍니다. 그래서 침묵 가운데 있는 것을 3분을 견디지 못합니다. 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은 기도하기를 싫어합니다. 왠만해서는 무릎을 꿇지 않으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자기 신뢰 즉 자기 머리, 물질, 권세를 믿을 때 우리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그가 자기 확신에 차 있을 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연약함을 깊이 인식할 때 기도할 수 있습니다. 또 무사 태평한 사람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기도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사단은 기도를 쉬게하므로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셨고 우리에게 "항상 기도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권면하셨습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우리가 왜 항상 기도해야 할까요?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그 분은 아들이 항상 와서 대화를 하고 필요를 요청하면 기쁘십니다. 그런데 기도하러 오지 않으면 우리에게 아쉬운 것이 없다고 생각하시고 또 하나님을 불신하는 구나 생각하십니다. 우리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기도할 때 하나님께 대한 신실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신실하게 기도하는 종들에게 그분의 뜻을 보이시고 또 구속 역사에 귀하게 쓰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기도할 수 있을까요? 항상 마음을 하나님께 향해야 합니다. 성령을 의지해서 항상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영혼 호흡이요 하나님과의 대화요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세상 일에 파묻혀 지내다보면 하나님을 의식하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김아브라함목자님과 사라 사모님은 걸어가면서 눈을 뜨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그 분들은 서로 동행할 뿐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학사 목자님들은 기도하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사모님들은 집안 청소를 하면서 내 마음도 깨끗하게 해 주시도록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공부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문제들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훈련이 되어야 하고 숙달이 되어야 합니다. 저는 걸어가면서 생각하기를 잘하는데 걸어가면서 기도할 때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이유로든지 기도하기를 쉬게 되면 세상 욕망이 살아나고 마음이 주님에게서 멀어집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할 때 몸이 강건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항상 기도하면 영혼이 강건해지고 사단의 진을 파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는 사람의 영혼은 소생함을 입고 영혼이 섬세해집니다.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예민해지고 영적인 일들에 감각이 생깁니다. 그런데 요즈음 열심히 기도하고 영적인 투쟁을 하는 사람들이 소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성도의 의무입니다.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죄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항상 기도하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둘째, 낙망치 말고 기도하라. 우리는 기도하다가 어느 때 낙망합니까? 기도의 응답이 더딜 때 낙망합니다. 자신의 부족한 능력을 보고 낙망합니다. 모든 일에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할 때 우리는 능력을 덧입을 수 있습니다. 즉 능력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때는 희망을 가지고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장애물에 부딪치거나 상황이 어려워지면 슬금 슬금 기도의 꽁무니를 빼기 시작합니다. 사단은 우리를 낙망시켜서 기도하기를 포기하도록 합니다. 한 목자님은 새내기 양이 열심히 공부하다가 농활에 갔기 때문에 낙심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낙망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목자님은 양이 공부를 잘 하다가 재수를 하겠다고 하여 낙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포기치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환경이 변하더라도 믿음으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도를 받으시고 환경을 바꾸시고 복을 주십니다. 기도는 최고 최선의 길입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은 낙망하느냐 믿음으로 하느냐의 싸움이요 낙망치 않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낙망치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는 함께 기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사람이면 넘어지지만 두 세 사람이면 넘어지지 않습니다. 서로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함께 기도할 때 우리는 견고한 진지를 구축한 것과 같습니다. 기도를 하지 않아서 육신의 종노릇을 하고 마귀의 종이 되는 것보다 더 답답하고 억울한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낙망치 말고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삭은 25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는 동역자를 위해서 한가지 기도제목으로 기도함으로 응답을 받았습니다. 한 사모님은 전세방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완고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찾아가서 자신이 매일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주인이 사모님이 이렇게 기도하시는 분인 것을 알고 하나님이 무서워서 빨리 빼주었습니다. 한 시니어 목자님은 다른 것은 몰라도 군대간 양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열심이셨습니다. 군대 간 양들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하시고 수양회 때마다 초청하고자 기도제목을 제시하시는 목자님은 위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받으시고 군대간 목자와 양 두 사람이 다 수양회에 참석하게 하시고 회복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강력한 힘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비유를 통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도록 권면하십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그에게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셔서 불의한 자를 징계하고 심판하심을 인정치 않기 때문에 그는 법대로, 공정한 재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양심의 소리도 있고 법조문도 있으나 그는 안하무인이었습니다. 그는 뇌물과 권력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고 사람 자체를 귀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긍휼이 없는 재판관이었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이 지배하는 사회는 불의한 사회요 불신 사회요 긍휼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오늘날 가장 법치가 잘 되는 나라가 미국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도 유전 무죄, 무전 유죄가 통용됩니다. 변호사들은 어찌하든지 재판에서 이겨서 승리 수당을 받고자 불의한 자도 옳다고 해 주기 때문입니다. LA에 파송된 앤드류 박 선교사는 동역자가 교통 사고를 당하였는데 배상을 받기는커녕 사고를 낸 운전사가 변호사를 동원하여 도리어 배상을 하라는 현실을 보고 미국에 살기가 싫다고 하였습니다. 안드류 선교사는 우리들에게 중보 기도를 부탁하고 밤낮 쉬지않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좋은 결과가 나오게 하셨습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관할 하에 있는 지방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는 빽도 없고 힘이 없고 약하여 가장 무시 받는 계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에게 한 가지 억울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원수가 과부의 재산을 서류을 위조해서 다 빼앗아 간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과부는 고소를 하고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죽은 것도 슬픈데 원수에게서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얼마나 한이 맺히겠습니까? 그래서 이 과부는 재판관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하고 탄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과부는 가끔씩 간 것이 아니라 자주 갔습니다. 법원에만 간 것이 아니라 그의 집에도 찾아갔습니다. 집에만 간 것이 아니라 바캉스 간 곳까지 따라갔습니다. 낮에만 간 것이 아니라 밤에도 찾아갔습니다. 날씨가 좋을 때뿐만 아니라 비가 오는 날도 소복을 하고 머리를 풀고 찾아았습니다. 막연하게 간 것이 아니라 분명한 청원 제목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의한 재판관이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콧방귀를 뀌었습니다. 과부가 뇌물도 가져오지 않고 약해 보이므로 안들어 줘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는 불의한 자이기 때문에 의를 행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습니다. 과부가 몸빼를 입고 고무신을 신고 와서 탄원하는데 그 원수는 힘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래서 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려면 수고를 많이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댓가도 안나오는데 힘 쓸 것이 없다 생각하고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4,5)" 불의한 재판관이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게 된 것은 뇌물을 가져왔기 때문도 아니요 멋있는 모습으로 왔기 때문도 아니요 재판관을 감동적으로 설득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끈질기게 찾아와서 귀찮게 했기 때문입니다. 안들어 주면 계속해서 괴롭힐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재판관은 과부 때문에 신경성 위장염, 노이로제에 걸렸을 것입니다.

 과부의 이런 끈질김은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원수에 대해 한이 맺혔기 때문입니다. 한을 풀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을 때 비록 재판관이 불의하지만 자기의 한을 반드시 풀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한을 푸는 것이 재판관에게 가지 않으면 길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녀가 하나님의 뜻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면 포기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마음에 한이 맺혀야 끈기가 나옵니다. 선교사님들 중에는 어학으로 인해서 무시를 받고 모욕을 느끼고 그로 인해서 한이 맺히고 오기가 생겨야 공부를 잘한다고 합니다. 고시에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가난에 한이 맺혀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원한은 무엇입니까? 목자들은 사랑하는 양들을 죄와 사단의 권세에 빼앗겼을 때 마음이 아픕니다. 사단의 손아귀에서 양들을 구출해야 한다는 한이 맺힐 때 사단이 나를 공격해서 낙심하게 하고 양을 초청하지 못하게 해도 끈질기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사실 신자들을 과부와 같이 연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당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는 사단입니다. 사단은 나의 생명을 해치고 양의 생명을 해치고 하나님의 교회를 해치는 자입니다. 포도원과 같은 아름다운 교회를 망가뜨리고 짓밟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이고 못쓰게 만듭니다. 우리를 죄에 시달리게 합니다. 원수가 독화살을 쏘아서 육신적인 생각을 하게 하고 영적인 소원을 잃게 합니다. 그러면 행복과 기쁨을 상실하고 매일 푸줏간으로 끌려가는 소처럼 괴롭게 살게 됩니다. 우리가 밤낮 부르짖어야 하는데 부르짖지 않고 멍하니 헛 생각을 하고 싸울 의욕을 잃고 슬퍼만하고 있으면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우리가 밤낮 부르짖어야 하는데 부르짖지 않고 무력하게 주저 앉아 있는 것은 사단에게 한 방 먹은 것입니다. 생각만 하지 말고 단순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속히 들어주십니다. 지금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사단을 물리치면 아름다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단과 죽음의 원수를 갚아달라고 밤낮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제자 양성을 잘하는 것에 한이 맺혀있습니다. 어떤 분은 고질적인 죄문제를 해결 받는 것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아들 낳는 것에 한이 맺힌 분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이상적인 대상과 결혼하는 것에 한이 맺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한이 맺혀 있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가 이기적인 야심이나 욕심에 기초한 한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한맺힌 기도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서의 끝에는 제자 양성을 통해서 세계선교를 명하시는 주님의 지상 명령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한맺힌 마음을 품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밤낮 부르짖어 기도할 때 우리의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6-8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관과 다르십니다. 이 재판관은 불의하였지만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다. 이 재판관은 사람을 무시하였지만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재판관과 과부는 남남이었지만 하나님과 신자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신자들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은총을 받고 소망스러운 대상입니다. 재판관은 과부의 청원을 귀찮게 여겼지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이 밤낮 부르짖는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기를 지체하시는 것은 가장 좋은 때에 주고자 하심이요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연단하고자 하실 때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오실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말세의 특징은 사람들이 조급해 지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과 악영향이 커지므로 밤낮 부르짖어 기도해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인내하는 가운데 기도의 응답을 풍성히 받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I. 세리의 겸손한 기도 (9-14)

 예수님은 밤낮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하시고 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떳떳하게 서서, 나를 보라는 듯이 기도하였습니다. 아마 성전 가까이 안쪽에서 기도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잘한 것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자기 만족, 자기 자랑, 자기 의에 기초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가 누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힘으로 된 것이기에, 상대적 우월감을 갖는 것은 죄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비교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인정을 구하는 신앙은 위험합니다.

 반면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세리는 성전 멀리 입구에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애통하고 회개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십입조를 못 드리고, 토색, 간음한 것을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참회자의 기도였습니다. 그에게는 자기 의가 없었습니다. 세리는 하나님을 강하게 의식하면서 기도하였습니다. 그의 기도는 겸손하였습니다. 겸손이란 하나님께 대한 자세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은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십니다. 사람들이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하는 마음이 있는데 하나님은 이를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겸손히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그처럼 나약하며 무기력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나약하고 무기력한 것입니다. 과부의 끈질기고 불같은 기도와 세리의 겸손한 기도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실제적인 기도가 아닌 말장난인 기도가 오늘날 얼마나 많습니까?  그 중의 대부분은 기도가 아니라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것은 아무 곳에도 상달되지 않으며 아무런 역사도 일으키지 못하며 아무런 응답도 없습니다. 사실상 아무런 응답도 아무런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청하는 기도, 끈질긴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우리의 신앙 생활이 더욱 힘있게 전개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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