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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0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7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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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216회 작성일 03-01-17 1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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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봄학기 누가복음 제 17 강
말씀/누가복음 17:1-19
요절/누가복음 17:3                                                                                               

용서와 감사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 용서와 감사만큼 실생활에서 중요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용서는 공동체에 죄와 갈등이 있는 한 언제나 필요한 것입니다. 용서의 위력은 심판보다 강합니다. 또 감사치 않는 것은 죄의 뿌리인데 감사하는 생활은 관계성을 유지하는 데 기본입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사람들과도 좋은 관계를 맺어 삶의 풍요함을 회복하기를 기도합니다.

I. 용서 (1-10)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케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있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케 한다는 것은 짐승을 잡으려고 덫을 놓는 것입니다. 또 실족이란  말을 풀어 쓰면 발을 헛디뎌 넘어지는 것입니다. 실족케 하는 것은 죄를 짓게 하고 믿음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즉 신앙의 정도에서 떠나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양들이 실족케 됩니까? 목자가 감정적으로 양을 돕는 경우입니다.  목자가 혈기를 부려서 양이 감정을 상하면 목자에게 실망하고 믿음을 떠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해서 한다고 했는데 양과 사랑의 관계성이 약한 가운데 훈련을 시키고자 하여 상처를 주게 됩니다. 이는 기초적인 것인데도 조급한 마음을 갖다 보면 실수할 때가 많습니다. 양을 동역자로 빨리 세워서 역사를 크게 이루려는 욕심으로 인해서 양들을 실족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목자는 양을 지나치게 책망을 해서 실족케 합니다. 어떤 목자는 양에게 너무나 소홀히 대해서 서운하여 떠나기도 합니다. 양의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훈련하면 오해가 쌓여서 실족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자가 인본주의자인 경우도 양을 실족케 합니다. 목자가 죄에 대해서 문제의식이 없을 때 인간적으로 봐주어서 죄문제를 돕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그렇게 되면 복음 역사에 대해서 인간적이고 상대적인 생각을 하고 가치관이 삐뚤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주의 종들에 대한 자세가 삐뚤어지게 됩니다. 자꾸 사랑을 요구하며 상처를 부장합니다. 또 목자의 인격이 미성숙할 때 양들은 상처를 받고 고통합니다. 목자의 거짓과 정욕, 불성실, 교만으로 인해서 양들이 실족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다라는 말씀을 볼 때 제자들은 양들을 많이 실족시킨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합리화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깨어서 어린 양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작은 자 하나라도 귀히 여기셨습니다. 2절을 보면 "저가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를 실족케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 한 사람을 실족케 하는 것이 이렇게 심각한 죄입니다. 연자 맷돌은 소나 말이 끄는 맷돌로서 매우 큽니다. 이 맷돌을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빠지면 결코 떠오르지 못합니다. 이것은 당시 시리아의 사형제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십니다. 3a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스스로 조심하지 않으면 목자의 악영향으로 인해서 양들이 실족하게 됩니다. 특히 목자는 말과 표정, 행실을 조심해야 합니다. 스스로 훈련을 해서 좋은 영향력을 끼쳐야 합니다. 무엇보다 목자가 말씀과 기도 생활에 힘쓰므로 영적으로 깨어서 양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러면 형제가 죄를 범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여기서 경계한다는 말은 꾸짖는다, 책망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책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마음씨가 좋은 사람은 책망을 잘하지 못하고 삭혀 버립니다. 왜냐하면 책망함으로 인해서 관계성이 파괴될 것 같은 두려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비록 책망을 해서 미움을 받더라도 형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해야 합니다. 책망하기가 어려운 것은 사랑의 씨름을 하기가 싫어서입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한다면 책망을 해서 죄를 회개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대부분 자기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양의 문제를 보고도 돕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돌아보다 보면 자격지심에 빠져서 양의 문제를 지나치기 쉽습니다. 그런 점에서 다른 사람을 책망하기 위해서는 자기 훈련, 자기 투쟁이 필수적입니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도울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돕는다고 하는데 이해가 부족해서 잘못 돕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대화와 사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힘과 권위로 돕고자 하면 적대감이나 원한을 갖게 만들기 쉽습니다. 이렇게 되면 목자가 보는 앞에서는 순종하지만 보지 않는 곳에서는 본성대로 행하게 됩니다. 성장하고자 하는 동기 부여가 안되고 목자를 의존하게 됩니다. 반대로 우리가 죄를 범한 형제를 방치하거나 무조건 허용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실 죄를 지은 사람은 동역자들을 경계하고 딱딱하게 대하므로 말을 걸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자들은 죄지은 사람이 마음을 자꾸 완악하게 하여 거스릴 것을 예상해서 무관심하고 방치하기 쉽습니다. 그렇게 방치하는 가운데 죄를 허용하면 목자를 무력한 사람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칩니다. 그리고 죄를 지어도 괜찮구나 교만하게 생각하여 형제가 방자해지게 됩니다. 죄를 죄로 여기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불법이 성하게 되고 공동체가 타락하게 됩니다. 공동체의 질서가 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충분히 대화하는 가운데 문제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책망할 때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감정으로 대해서는 책망이 역효과를 내게 됩니다. 그가 지은 죄를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고 드러내야 합니다. 목자가 예수님의 심정으로 죄를 지적하고 깨우쳐 줄 때 성령의 역사로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형제가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내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내게 돌아와서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무한정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가 잘못해도 세네번은 용서할 수 있지만 무한정 용서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를 놀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신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책망해서 양이 회개했는데 목자가 용서하지 않으면 양은 계속해서 정죄감에 시달리고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또 다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관계성이 맺히지 않고 성령의 그릇이 이루어지지 않고 기도가 막힙니다. 그러나 회개하러 온 사람도 나를 믿고 나온 것이기 때문에 나도 믿음으로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회개한 사람을 용서하면 실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무한히 용서할 때 사람이 변화됩니다. 용서의 위력은 정죄보다도 큰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밥먹듯이 지으면서 회개하고 다시 돌이키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번 회개했다고 해서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와 사랑에 기초해서 우리는 용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용서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30조원 탕감받은 자와 같습니다. 그런데 오백만원 빚진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피해의식이나 상처, 미음 때문입니다. 의인의 심정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지은 사람을 사랑하고 싶지 않고 관계성을 맺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가 깊이 회개하고 죄사함의 은혜 안에 거하고 있으면 어떤 사람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자아가 죽어질 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의지해서 계속해서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하고 관계가 맺혀졌다고 해서 끝나서는 안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해서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 최선인가를 평가하고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평가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영적 투쟁을 통해서 영적 성장을 이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간구했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사도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부족해서 용서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힘으로는 용서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죄지은 사람을 책망하는 것도 믿음이 필요하지만 용서하는 것도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믿음 타령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6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는 뿌리가 옆으로 퍼져서 뿌리를 뽑기가 매우 어려운 식물입니다. 죄의 뿌리, 상처의 뿌리도 뽑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이 있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여도 심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 타령할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믿음으로 용서하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데 엄청난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분량이 문제가 아니라 질이 문제요 의지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신의 믿음이 연약하다고 핑계하지 말고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했다고 해서 자기 의에 빠질 수 없습니다. 형제를 용서했다고 해서 공로의식, 보상 심리를 갖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유익한 종이라는 의식을 갖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이를 비유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7-9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들은 하루 종일 밭이나 목장에서 일하고 돌아오면 쉬고 쉽습니다. 주인에게 수고했다, 애썼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섬김을 받고 싶습니다. 그러나 종에게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종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종이 밭에서나 목장에서 돌아오면 바로 주인의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종은 그 후에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주인과 함께 먹지 않습니다. 구석에서 혼자서 먹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고 나서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지은 사람을 용서했다고 해서 그에 대해 도덕적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루에 일곱 번 씩이라도 용서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장막 생활과 공동체 생활을 하다보면 인간 갈등을 하게 됩니다. 이런 갈등으로 인해서 미움이 생기고 벽이 생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 신뢰의 기초 위에 책망을 하면 적개심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대화를 통해서 두 사람이 그들 모두간의 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키는 해결책을 발견하게 됨으로 그들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 집니다. 그리고 대화하는 가운데 결정한 갈등 해결책을 실행하려는 동기가 증가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의사가 무시된 경우와는 반대로 자신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했을 때 그것을 더욱 쉽사리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것을 수행하려는 더 강한 동기를 갖게 됩니다. 또한 그 결과에 대해 기꺼이 책임을 집니다. 또한 협동심이 길러집니다. 갈등에 처한 양자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의 모든 자원을 동원할 때 자신들의 개인적 지식과 경험은 서로 경쟁하기 보다는 결합되어 집니다. 설득이 필요 없습니다. 힘이나 권위가 필요 없습니다. 목자는 양을 양은 목자를 좋아하게 됩니다. 문제의 본질을 밝히는데 도움이 됩니다. 양들은 더 책임감을 갖게 되고 더욱 성숙하게 됩니다. 믿음의 선배들은 후배들을 사랑하고 경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후배들은 선배를 배우고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영적인 질서를 순종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들로 성장해야겠습니다.

 II. 감사 (11-19)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한 문둥병자 촌을 지날 때였습니다.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서 멀리 서서 소리를 높였습니다. 문둥병자들은 성대가 상해 있기 때문에 소리를 크게 질러도 듣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을 합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13)" 이는 그들의 합심기도였습니다. 그들은 문둥병 걸린 것에 절망치 않고 강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셨다는 소문을 듣고 자신들도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간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보시고 처방을 내리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본래 문둥병자가 제사장에게 갈 때는 처음에 진단을 받을 때입니다. 또한 문둥병이 다 나아서 확인을 받으러 갈 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 나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가라고 하십니다. 회복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들이 믿음으로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병을 고치러 왔다가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고 나은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이 장군이기 때문에 엘리사가 나와서 겸손하게 영접하고 안수하여 치료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교만한 장군에게 나오기 보다 종을 보내어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아만은 화가 나서 돌아가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시종의 간청을 듣고 요단강에 가서 씻고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와 같이 순종이 치료의 능력을 보게 하였습니다. 문둥병자들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음을 입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다가 문둥병이 낫게 되자 매우 기뻤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늘을 날아다닐 정도로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러어 사례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왜 나머지 아홉명의 유대인들은 오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17,18)?" 하시며 슬프고 상한 마음이 되셨습니다. 그들은 왜 감사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예수님께서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하셨으니 가야 한다고 율법적으로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나중에 찾아와서 감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하셨습니다. 이를 볼 때 감사는 바로 바로 해야 합니다. 나중에 감사를 하고자 하면 잊어버립니다. 그런 감사는 엎드려서 절 받기 식이 되기 쉽습니다. 또한 그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은 선민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이기에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감사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 의식없이 호흡하고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매연이 지독한 곳에 가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것도 큰 감사제목입니다. 제가 처음에 서울에 올라왔을 때는 매연으로 인하여 숨쉬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서울에 사는 것에 대해서 감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가서 그곳의 지독한 매연을 맛보고 나서는 서울에 사는 것도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것입니다. 또 주일이면 사모님들이나 동역자들이 식사를 대접하거나 과일을 대접합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목자님 가정들의 희생으로 먹고 마시는 것이 감사한 일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에게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맺히게 됩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우리의 내면을 풍요롭게 합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내면의 그릇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일들을 인해서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부족한 나를 쓰시는 것으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고 섬겨주시고 지원해주시는 목자님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손양원목사님은 두 아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 아홉가지 감사제목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이 나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허다한 많은 성도 중에서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맡겨 주셨는지 주께 감사합니다. 3. 삼남삼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감사 드립니다. 4. 또한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든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와석종신하는 것도 큰복이라 하거든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감사합니다. 6.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내 마음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하는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의 순교의 열매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속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신애를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을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하는 생활은 우리를 더욱 깊은 주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우리 마음에 감사가 없으면 불평이 생기고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는 생활을 할 때 기쁨이 생기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감사하는 자에게 무엇을 더 주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감사 제목을 찾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한은 돌에 새기는 사람들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를많이 받았느냐 적게 받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입니다. 감사하지 않는 것은 로마서 1:21절을 볼 때 죄의 뿌리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도 감사할 것을 찾아보면 많습니다.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성숙한 신앙 생활입니다. 우리가 감사하지 않으면 있던 은혜마저도 까먹기 쉽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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