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15 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274회 작성일 03-01-17 18:26

본문

2000년 누가복음 제 15 강
말씀: 누가복음 13:22-35
요절: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하면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소설 '좁은 문'이 생각납니다. 여자 주인공 알리사는 세속적인 사랑과 정신적인 사랑 사이에서 갈등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근엄한 신앙 교육과 어머니의 불륜 행실에 대한 죄의식으로 인해서 자신이 느끼는 어떤 육체적 충동도 거부합니다. 그녀가 비극적인 생을 마침으로 소설 좁은 문은 비인간적인 자기 희생에 대해 강한 비판을 제기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뇌 속에 감미로운 청춘의 정서가 감돌고 있습니다. 영적인 투쟁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영과 육의 갈등은 항상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곳에 생명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서 경건한 삶에 따르는 기쁨을 누려야 하겠습니다. 인상을 쓰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말고 믿음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 시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안일한 생각을 회개하고,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주님께서 저희 각자에게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도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I.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2-30)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실 때 어떤 사람이 물었습니다.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그가 왜 구원을 얻는 자가 적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님께서 12:32절에서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고 하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세상을 바라 볼 때 주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나온 사람은 메시야의 능력과 지혜와 사랑은 크신 데 그에 비해서 믿고 따르는 사람은 실제로 적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각 촌, 각 성으로 열심히 다니시며 열심히 가르쳐 주셨는데 실제로 믿고 따르는 자는 적으므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무리들은 밟힐 만큼 오고 은혜 받은 자가 많은데 실제로 남는 자가 소수일 때 우리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봄 학기에는 많은 자가 왔고 또 여름 수양회에도 많은 사람이 가는데 남는 자가 소수일 때 예수님의 방식이 너무  어려운 것이 아닌가 , 무언가 문턱을 낮추고 그들이 어려워 하는 것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무언가 좀 가미하거나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문제를 제기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힘써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를 힘써야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이는 종교가 많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수가 많고 전도 집회도 많고 수양회, 부흥회에 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구원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 얻는 자가 적은 이유는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좁은 문입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만으로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말씀에 대한 구체적인 순종과 강청하는 기도 생활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들어가야 합니다. 좁은 문은 초라해 보이고 비전이 없어 보이고 답답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문을 통해서 들어가려면 고독합니다. 혼자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어리석다고 비웃고 비난하고 욕을 먹기도 합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이고 겸손하게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복음 신앙의 길로 들어가야 생명이 살아납니다. 구원을 받습니다. 그 속에 참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적은 이유는 넓은 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은 넓기 때문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도 쉽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마음껏 연애도 하고 인생을 즐기면서 다른 짓 다 하면서 들어가도 됩니다. 이 문은 시원해 보이고 화려해 보입니다. 그 안에 굉장한 것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많은 것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기 때문에 외롭지 않습니다. 이 문은 상대주의, 인본주의, 육신주의, 물질주의의 문입니다. 이 문은 광내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문은 죄의 문입니다. 쾌락의 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곤고와 공허와 멸망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런 문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좁은 문을 통해서 들어가면 구원이 있습니다. 24절을 다시 한번 보십시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고시의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잠을 안자고 새벽을 깨워 공부합니다. 놀거나 연애도 하지 않고 추석이나 설날에도 공부만 합니다. 하물며 영원한 구원의 길을 가는데 대충 할 수 있겠습니까?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을 영어로 보면 "Make every effort to enter through the narrow door."라고 했습니다. 모든 노력을 다 하라는 것입니다. 형식적인 생활로는 안됩니다. 죄와 싸우는 노력, 기도와 말씀 공부에 전념함이 없이 안일하게 대강 대강 살면서 은혜로 구원얻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또 막연히 특권 의식을 가지고 들어가겠다고 해도 안됩니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 UBF가 본래는 훈련을 철저히 시키고 복음 신앙을 견지하고 사명감에 불타게 하는 좁은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신세대, X세대, N세대들을 섬기면서부터 문을 점점 넓히다 보니 훈련도 약화되고 사람 중심이 되고 사명감도 많이 약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합니다. 성장하는 교회들을 보면 새벽 기도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그들이라고 새벽 잠자기를 좋아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라고 전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사람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꺼이 희생을 치루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이는 수고에 따르는 열매를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비록 당장에 열매가 보이지 않을지라도 믿음으로 애를 쓸 때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추수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십니다.
 제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새벽 기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압니다. 전도하기가 어렵습니다. 죄와 싸우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공부를 하면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산다는 말씀을 붙잡고 투쟁했을 때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조금 맛보았습니다. 제가 전도와 제자 양성이라는 좁은 문을 통해서 부흥이라는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자기 중심성을 극복하고 하나님 중심적인 종, 하나님과 양들을 사랑하는 종이 되도록 기도합니다.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자 힘을 쓰는데 과거에 잘 했다고 자랑하면서 한때만 힘쓰면 안됩니다. 지금도 깨어서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힘써야 할 현재 힘쓰지 않고 기회가 이미 지난 후 미래에 가서 구하나 얻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치 말아야 합니다.  25절을 보십시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좁은 문은 항상 열려 있지 않고 닫힐 때가 옵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는 것도 때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도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 말고 회개하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나중에 문이 닫힌 다음에 아무리 애원을 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속삭입니다. "내일 해도 되지 않니?" 그러나 사단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에게 화가 미칩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26)." 그들은 성도의 교제 가운데에도 있었습니다. 주님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말씀도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길거리 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교회 마당만 밟아서는 안되고 말씀을 통해서 지성소까지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마태복음 7:21-27절에는 그들이 권능도 행하고 귀신도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7절을 보십시오.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그들은 어떤 점에서 행악하는 자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불신으로 인해서 주님께 신앙 고백도 하지 않고 주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것 때문에 주님은 그들을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불신은 도덕적 과오를 낳게 합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다른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주의 뜻대로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을 때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세상을 즐기며 자기 나름대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회개하고 들어가고자 하다가 기회를 잃었습니다. 죄에 잡히고 영적 소원도 잃어버리고 은혜의 때가 지나간 것입니다. 그때 후회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지자 노릇하고 권능을 행할 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고 더욱 경외심을 갖고 겸손하게 투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행악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8)." 자기는 당연히 들어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네가 누군지 모르겠는데, 너는 안돼" 할 때 그들은 뒤늦게 깨닫고 후회하고 통탄하며 이를 갈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알려 지기를 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알려 지기를 구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 율법의 요구를 지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크리스챤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것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는 인생의 자세가 달라 졌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욕을 먹어도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배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기를 알아주시기를 바라면서 애를 썼습니다. 그는 빌 3:10,11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그를 이를 위해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고자 힘썼습니다(빌2:12).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 연륜이 얼마다, 나는 UBF 정통이다, 제자 훈련을 누구 밑에서 받았다, 어느 학교 출신이다 등등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은 별 볼일 없습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순수한 열정이 있을 때 우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기쁨이 되고 또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알지 못하는 그들은 영원히 형벌 받을 것이 두려워서 슬피 울게 됩니다. 다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안타까와 하면서 슬퍼하게 됩니다. 그들이 이를 갈며 슬피 우는 것은 그들이 무시하고 하나님 나라에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던 이방 사람들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석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중에 믿었으나 겸손히 복음 신앙의 진리를 지키므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믿은 자들이 자족하고 자기 의에 빠져서 교만하게 불순종할 때 나중 되었습니다. 죤 뉴톤은 천국에 가면 세가지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꼭 있을 줄 알았는데 없는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랍니다. 두 번째는 없을 줄 알았는데 있는 사람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나 같은 노예선 선장도 천국에 있을 것으로 인해서 놀란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혜로 구원의 문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끝까지 회개하고 복음 신앙의 진리 위에 굳게 서서 힘써 말씀에 순종하여야 합니다. 항상 초신자의 마음으로 신앙을 지키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의에 빠지면 복음의 원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겸손히 회개하고 순수하게 복음을 믿고 순종해야 하겠습니다.

 II.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31-35)

 곧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나아와서 예수님께 위험을 알려 주었습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들이라고 보는 견해와 악의에서 헤롯의 사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협하여 헤롯의 영토에서 떠나도록 한 계략이었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떤 자세를 가지셨습니까? 32,33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 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하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두려운 상황이 오면 물러나기 쉬운데 예수님은 위험 속에서도 갈 길을 가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갈 길을 분명히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막연하게 사시지 않았습니다.  갈 길을 분명히 알고 계셨기 때문에 우왕 좌왕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자기의 갈 길을 가신 후에는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도 있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길을 가야 합니다. 되는대로 살지 말고 확신과 믿음으로 요동치 말아야 합니다. 도중에 포기하기 말고 끝까지 믿음으로 갈 길을 갈 때 때가 되면 완전해 집니다. 우리가 복음 신앙의 길, 사명의 길을 갈 때 완전해지는 은혜를 덧입게 됩니다. 예수님이 사명의 길을 지키실 때 하나님께서 부활을 주시고 승리를 주십니다. 우리가 목자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이 따른다고 해서 뒤로 물러나지 말고 더욱 분명한 자세로 제자의 길을 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고자 하니까 비굴해 집니다. 예수님은 말없이 십자가 죽음의 길을 가심으로 진정한 사명인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거창한 일을 위해 사는 것처럼 말하지 말고 겸손하게 하나님이 주신 캠퍼스 복음화와 세계 선교 사명의 길을 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를 보면서 탄식하셨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4)." 예루살렘은 종교적 자아 도취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의에 가득차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예루살렘을 품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와의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 애를 쓰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회개하고 돌아와야 함에도 불구하고 회개를 거부하며 고의적으로 대적하였습니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의 요청을 계속해서 거절하면 버린바 되어 비참하게 됩니다. 35절을 보십시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그들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지 않으므로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심판을 받습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심령이 황폐해 집니다. 그리고 버린 바 되어 결국은 심판을 받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좁은 문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기를 힘쓰고 이 세상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내게 주신 사명의 길을 가기에 힘씁시다. 캠퍼스 양무리들을 주님의 날개 아래 모으기에 힘을 씁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88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