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titled Document
주일말씀 성경별메시지 심포지엄 성경 검색
문제지 성경별문제지

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11 강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섬김이
댓글 0건 조회 4,461회 작성일 03-01-17 18:24

본문

2000년 누가복음 제 11 강
말씀/ 누가복음 9:46-62
요절/ 누가복음 9:48
 가장 큰 자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누가 가장 위대한가? 이 질문은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제기되어온 질문입니다. 처음에는 무력을 가진 사람, 다음에는 금권을 가진 사람, 지금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그 시대의 가치관에 따라서  큰 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투쟁해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소유지향이 아니라 내면 세계를 말씀하시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는 어떤 자인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그 시대의 지도자로 키우기 위해서 여러 모양으로 훈련하셨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진정으로 위대한 자가 어떤  자인가 배우고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서 배우고자 합니다.

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 (46-56)

예수님께서 고난 당하시고 죽으시며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고난은 영접하지 않고 영광만 생각했습니다. 이제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대권을 잡고 등극하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히 예수님께서 왕좌에 오르시면 자신들은 장관들이 될 것이란 기대로 부풀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 촌놈들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민족에 대해서 주인의식을 갖고 지도자 훈련을 받았습니다. 목자 없는 양같은 백성들을 불쌍히 보는 시각도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제자들의 마음은 커져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가 되자 제자들은 모였다하면 누가 크냐는 주제로 변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여기서 밀리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조금 전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질문에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고백하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는 베드로, 야고보, 요한만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곳에 가지 못한 다른 아홉 제자들은 세 제자들에 대해서 경쟁심이 불붙었습니다.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어찌하든지 베드로를 제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은 삼삼오오 짝을 짓기도 하고 난상 토론을 하기도 하면서 미리 연공 서열을 정해 놓고자 하였습니다. 서로 자기 주장을 하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면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대의명분은 하나님 나라를 섬긴다는 것이지만 사실은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아지고 권세를 부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고난받을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은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에게 누가 가장 큰 자인지 멀티미디어식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첫째, 겸손한 자가 위대한 자입니다(47,48). 47,48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변론하는지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다짜고짜 호통을 치고 책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내가 곧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됐는데, 서열 다툼이나 하고 있어? 어? 다 엎드려 뻣쳐!"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위대해지고자 하는 소원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대신 한 어린아이를 통해 어떤 자가 진정 위대한 자인지 가르쳐 주고자 하셨습니다.
사실 성경적으로 볼 때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갖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하나님은 본래 인간을 창조하실 때 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도 크고 위대한 인생을 살도록 지으셨습니다. 온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큰 스케일의 위대한 인생을 살도록 지으셨습니다(창1:26).
오늘날 젊은이들의 문제는 오히려 크고 위대한 인생을 살려는 소원이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심지어 캠퍼스 지성인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뭔가 위대한 일에 도전해 보려 하기보다는 적당한 직장에 취업해 평범한 소시민이 되려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꿈도 없고 비전도 없습니다. 그저 코를 땅에 파묻고 내 한 몸 잘 될 궁리만 하는 지성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런 평범한 인생 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영향력을 받는 인생, 줏대 없이 끌려가는 팔푼이같은 인생을 살기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세상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그런 위대한 인생을 살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위대한 인생을 살기 원한다면 어린 아이들을 영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린 아이는 미숙하고 분별력이 없습니다. 자기생각이 강하고 시간과 마음을 바쳐서 섬겨야 합니다. 항상 어지럽히고 시끄럽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를 만듭니다. 어린 아이란 실제로 어린 아이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 혹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우리가  허물과 죄로 가득한 인생들을 자연 모습 그대로 대할 때 누구나 환멸의 벽에 부딪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즉 예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들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과 주님의 피로 새로 태어난 생명을 보게 될 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양들은 어떤 모습이든지 쉽게 영접하지만 리더들이나 동역자들에게는 어떤 수준을 요구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영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영접하는 것은 그를 존경하고 인정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와 사고 방식이 다른 사람을 영접하려면 마음을 낮추어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순수하셔서 큰 유익을 주지 않는 사람도 영접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 그의 순수함, 배우는 마음을 갖고 서로를 영접하고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큰 자는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땅에 엎드러져 몸을 최대한 납작하게 낮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늘 죄인된 자아를 발견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때마다 교만에 싸여 죄인된 자아를 잊어버리기 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얼마나 죽을 죄인이었는가 이런 자를 하나님께서 그 어떤 은혜로 구원해 주셨는가'를 소감을 쓸 때마다 새롭게 눈물로 고백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만을 간절히 의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자라는 그런 고백이 흘러나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진실로 큰 자로 인정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구속 역사에 귀하게 써 주십니다.

둘째, 포용성이 있는 자가 큰 자입니다. 49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특별히 권위를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예수님께 대한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아홉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귀신들린 자를 데려왔으나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한은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요한은 왠지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가서 앞으로는 절대로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도록 협박하였습니다. "다시는 귀신쫓지 마! 쫓으면 죽어!" 이러한 제자들의 태도는 매우 권위적이고 독단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들과 같은 모임에 있지 아니하면 귀신을 쫓아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을 듣지 않으려면 귀신도 쫓아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 같이 생각하면 함께 하지 않는 자는 다 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 결과는 분열로 치닫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특권의식, 우월주의,  한 쪽으로 치우친 마음은 지도자로서 합당하지 않은 자세입니다. 이런 생각은 원수를 만들고 원수들에게 훼방거리를 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요한에게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틀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단체에 속하지 않았지만 일대일을 통한 제자 양성을 하고 세계 선교를 하는 단체나 교회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라고 하실 때 그들은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야 11:23절에서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해치는 자니라"는 말씀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어느 집단에 소속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행하는 일의 내용과 지향점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 중에 하나라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독단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그들 중에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바울에게 괴로움을 더하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빌1:15-18)."고 했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나 단체에 매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순수한 믿음이 있고 말씀에 대한 순종이 있는 개인이나 모임이면 다 영접하시고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가 마음이 좁아지기 시작하면 한없이 좁아집니다. 처음에는 우리 모임 외의 다른 모임을 잘 인정하지 않으려 듭니다. 그런데 점점 더 좁아져 다른 센타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다른 요회, 다른 사람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으려 들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되면 동역자를 얻지 못하고 고립되게 됩니다. 나중에는 모든 사람들의 반대와 비난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역사도 좀 인정해줄 줄 아는, 그럼으로 그들을 동역자로 얻을 수 있는 지혜롭고도 넓은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자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셨습니다. 이는 고난의 길, 죽음의 길, 희생의 길을 가고자 어려운 결단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구주로서 죽으러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아셨지만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자들을 앞서 보내어 자신을 위하여 예비하도록 사마리아인의 한 촌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을 향하여 간다는 말을 듣고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생각에 예배를 위해서 자기 조상들이 만든 그리심 산으로 가야 하는데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하니까 배척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들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제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예수님께 제안을 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 좇아 내려 저희를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그들은 자기를 배척하는 사람들을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서 불을 내려 꼬실라 버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감정적이 되었고 혈기를 부렸습니다. 그들은 교만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꾸짖으시고 다른 촌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볼 때 사마리아인은 장차 그의 양이 될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사마리아인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놓기 위해서 놀랄 정도로 개방적이셨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돕다 보면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약점을 감당해주는 가운데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조금 잘못했다고 잘라버리기보다는, 소망을 갖고 인내하며 기도하며 품어주는 넓은 내면, 사랑의 내면을 갖기를 주님은 원하셨습니다. 저희들 가운데도 뺀질대며 불순종하는 양들을 대할 때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뜨거운 맛을 한번 보여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는 분이 혹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양일지라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랑으로 끝까지 기도해 주며 섬겨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인정하고 동역을 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불신자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어서 그들이 때가 되면 예수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Ⅱ.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 (57-62)

57-62절에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자 하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려면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첫째, 먹고 사는 문제를 주님께 맡기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57,58).  예수님이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제자가 되겠다는 의사를 비추었습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그는 마8:19절을 볼 때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매우 아름답고 이상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면 장래에 보장이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권능에 매력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능력이 많으신 분을 따르는 제자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에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제자의 영광스러운 삶에 따르는 아픔이나 가난이나 고난을 알지 못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결심은 매우 이상적이고 감상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에게 제자의 삶에 치루어야 할 대가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58)." 여우는 계속 돌아다니는 짐승이고 새는 여기 저기 날아다니기 때문에 집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안식하는 집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머리 둘 곳이 없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전혀 주무실 곳이 없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안정되게 거처할 처소가 없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날은 이곳에서, 저 날은 저곳에서 주무시고 또 내일은 어디서 주무셔야 하실 지 알 수 없는 그런 생활을 하셨습니다. 주무시는 것뿐만 아니라 식사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마디로 안정된 생활보장이 안 되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로 인해 전혀 염려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필요한 때에 모든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있어 안정된 생활의 보장 문제는 매우 심각한 현실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일단 생활이 안정이 되어야 마음놓고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렇지 않고 그날그날 근근히 먹고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심한 불안감을 느낍니다. 곧 애도 낳고 자식 교육도 시켜야 되고, 또 가족 중 누가 병이라도 나면 어떻게 하는가 불안해 견딜 수 없습니다. 당장 생활이 궁핍한 것도 힘들지만 매일매일 심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것 자체를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정된 미래를 스스로 힘으로 보장받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면 그 순간부터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의 미래를 보장하고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는 정년 퇴임할 때까지 죽도록 열심히 일해야 하고 저축도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장래 생활보장을 위해 열심히 뛴다고 생활 보장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IMF나 각종 재난이 발생하면 일생 쌓아놓은 것이 하루아침에 허물어지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그래서 각종 보험을 들지만 사고로 사랑하는 가족이 죽으면 또 본인이 죽어버리면 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일생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바둥거리다가 죽을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장래 보장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먼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생명을 살리는 일에 최고의 가치를 두고 이 일에 전심전력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한 것들을 넘치도록 채워주십니다(마6:33).

둘째, 하나님 나라의 일에 최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59,60).  예수님은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서 제자로서 성장할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제자로의 부르심은 그에 따르는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는 천사도 흠모하는 일이요 또 예수님의 전권대사로 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자의 특권이 무엇입니까? 제자가 무엇이 좋아서 그렇게 따르라고 하십니까? 제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셨기에 귀한 것입니다. 또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영원합니다. 또한 이 일을 할 때 하나님께서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 사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29b절을 보십시오.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에서나 종교에서나 사회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장례의 의무는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보다도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도 부친을 장사지내는 것을 마지막 효도라고 생각했습니다. 장사지내는 일은 인간의 마땅한 도리였습니다. 또 사제인 경우도 부모나 자녀나 형제가 죽은 경우에는 시체를 만질 수 있었습니다(레21:1-3). 그밖에 연고자 없이 죽은 사람을 묻어주는 일은 이생과 내생에 하나님의 보상이 약속된 사랑의 행위로 여겼습니다. 유대 사회의 장례 풍토가 이런 만큼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부 사람들에게는 잘못된 분노나 폭력 사용을 거부하셨지만 자기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조건들은 엄격하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오직 선포의 봉사에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사명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자신의 생명을 걸어야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것은 시급히 해야 했습니다.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여름 수양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힘써야 할 일도 복음 전파입니다.

셋째, 지나치게 가족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61,62).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좇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먼저 자기 가족을 작별케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가족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작별 인사 중 가족의 만류가 간절해 질 경우 가정에 발목이 묶일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유일한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이며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신경을 써서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좇는 자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 있어서 우선 순위에 대한 철저한 의식을 가지고 궁극적인 목적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키는 사람이 적합한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지나치게 가족 중심, 혈연 중심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족에게만 매이기보다 주 안에서 하나된 동역자들, 양무리들에게 더욱 마음을 써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 영혼들을 마음에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스케일과 내면성을 덧입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제자의 길은 결코 만만한 길이 아닙니다.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은 보기에는 비록 좁아도 결국에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생명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으로 큰 자가 어떤 자인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어떤 자세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가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희가 어린아이처럼 겸손한 마음, 또 종이 되어 섬기는 자세를 가짐으로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큰 자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1,323건 88 페이지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