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누가복음 8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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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봄 수양회 주제 2강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눅8:22-39
*요절/눅8:30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본문에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광풍사건이요, 두 번째는 광인사건입니다. 우리는 광풍사건을 통해서 힘있고 살아있는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또한 광인사건을 통해서 어떤 모습으로 망가진 인생이라도 고치시고 능히 온전케하시는 예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희가 함께 말씀을 나누는 가운데 살아있는 믿음, 역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병들어가는 시대가운데서 온전케되고, 더 나아가 영육간에 망가져가는 지성인들을 온전케하는, 치유의 권세자들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1장.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22-25)
하루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배에 오르시더니 "호수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오붓한 뱃놀이를 상상하며 소풍가는 아이들처럼 좋아했습니다. 제자들이 탄 배는 그림같이 펼쳐진 헬몬산 사이로, 석양에 빨갛게 물든 수면을 가르며, 미끄러지듯 나아갔습니다. 제자들의 입에서는 찬양이 절로 나왔습니다.
"참 아름다워라, 주님의 세계는, 저 산에 부는 바람과 빠알간 저녁 놀..." 제자들은 마치 천국에 와있는 듯 하였습니다. 한편 예수님은 제자들의 찬양소리를 자장가삼아 고물을 베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배는 디베랴 호수 한 가운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항해 도중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23절을 형제님들이 읽어주시겠습니. "행선할 때에 예수께서 잠이 드셨더니 마침 광풍이 호수로 내리치매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어 위태한지라" 갑자기 큰 광풍이 내리침으로, 고요하고 평화롭던 풍경이 이내 위태한 지경으로 돌변하였습니다. 도대체 마른하늘에 왠 광풍이란 말입니까? 갈릴리 호수는 지중해보다 해수면이 240m 낮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의 열대성 기후에 수면의 공기가 쉽게 달구어집니다. 그런가 하면 주위에는 해발 2,760m나 되는 헬몬산이 있어서 협곡을 타고 차가운 골바람이 호수로 불어내립니다. 그런데 이 차가운 골바람과 갈릴리 호수 표면의 달구어진 공기가 충돌하게 되면, 때때로 맹렬한 돌풍을 일으켜 호수를 강타하게 되는데, 그 방향과 속도를 도무지 예측할 수가 없고, 강도는 가히 메가톤급이어서 사람들은 이 돌풍을 '미친바람, 광풍'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타고 가던 배가 바로 이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광풍을 만났을 때 주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고물을 베게삼아, 풍랑을 침대삼아, 잠을 자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으로 하여금 광풍속에서도 단잠을 주무시게 한 비결이 무엇입니까? 새벽 미명부터 밤늦게까지 주와 복음역사를 섬기시는 주님의 하드워킹 라이프스타일에 그 비결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은 요동치 않는 내적 평화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떠한 상황가운데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전적으로 신뢰하심으로, 마치 엄마품에 안겨 잠이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의 평화를 누리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처럼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열심히 주와 복음역사에 충성할 때에, 어떠한 광풍에 직면해서도 지극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오믿음목자님이 아무리 숨넘어가듯 코를 곯아도 끄떡없이 단잠을 잘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제자들 중, 4명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어부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도 광풍을 자주 만났고, 또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까짓 광풍쯤이야' 하면서 의기양양하게 키를 잡았습니다. 어부출신제자들은 배를 조종하고, 다른 제자들은 배 안에 들어온 물을 열심히 퍼냈습니다. 그러나 삼킬 듯이 달려드는 대노한 파도에는 도저히 감당할 재간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바다에 관한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전문가들이었지만, 거대한 광풍앞에서는 그들의 상식도 경험도 의지도 아무것도 통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원치 않게.. 호숫물을 '꼴깍~꼴깍'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탄 배도 물이 가득하게 되어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점점 차오르는 물을 보며, 엄습해 오는 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습니다. 똑 같은 광풍 속에서 예수님은 단잠을 주무셨지만, 제자들은 바다에 빠져 죽을 것을 확신하고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로 곁에 두고서도 말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함께 계셨는데도 왜 그렇게 두려워하였을까요? 곁에계셨만 주님을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풍랑이 좀 작아보일때는 경험과 실력을 의지했습니다. 풍랑이 거세지고 광풍이 대작하자 삼킬 듯 달려드는 파도만이 보였습니다. 이처럼 문제 앞에서 자신과 형편만을 바라볼 때, 제아무리 베테랑일지라도 두려움에서 헤어나올 길이 없는 것입니다.
결국 제자들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마지막 순간에야 주님을 생각해냈습니다. 4a절,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까지를 자매님들께서 읽어주시겠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와 깨워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죽겠나이다 한 대" 제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잠만 자고있는 주님이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상황이 너무도 급박한지라 "주여, 주여!, 주님, 살려주세요!"하면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제자들은 한계상황속에서 목숨을 걸고 주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간절히 부르짖을 때, 주님은 일어나십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크고 비밀한 일을 보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자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잠에서 께어나신 예수님께서 어떻게 제자들을 구원하셨습니까? 24b을 학생여러분만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잠을 깨사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니 이에 그쳐 잔잔하여지더라" 주님은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셨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역사하자, 바람과 물결이 슬그머니 잠잠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겼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하시니 38년을 누웠던 자가 벌떡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의 권세자가 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 우리는 광풍을 꾸짖고 다스리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고난의 파도위에서 윈드써핑을 즐길 수 있습니다.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뭐라고 하셨습니까? "어이구, 내새끼들..얼마나 놀랐을까잉~"하며 위로하셨습니까? 아니면, "얘들아, 내가 주책없이 깜빡 졸았구나.."하며 사과하셨습니까. 다같이 25a을 읽겠습니다.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하시니"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주님은 제자들
을 엄히 꾸짖고 책망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제자들의 믿음자체를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너희들의 믿음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좋던 믿음의 고백들이 광풍에 모두 떠내려갔느냐?"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아무 문제가 없고 삶이 순탄할 때에는 믿음이 아주 좋습니다. 모두들 백부장의 믿음보다 한 열배는 좋은 천부장의 믿음입니다. 힘들어지는 동역자를 보며 "저런 저런, 저렇게 믿음이 없어서야..쯧쯧쯧.."하며 혀를 찹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에게 건강문제, 직장문제, 결혼문제, 진로문제, 심정문제 등 살짝 미풍만 불어와도 수없이 보따리를 쌌다가 풀었다가 하는 자신을 발견 합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1:1테이블에서만, 말씀을 가르칠때만 믿음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실제 문제속에서 우리의 믿음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광풍에 밀려 떠내려가는 티미하고 약한 믿음이 아니라, 광풍 속에서 더욱 힘을 발휘하는, 광풍 한가운데를 정면으로 뚫고 지나가는, 살아있는 믿음, 역동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현재적으로 저희에게도 믿음을 잃고 두렵게 하는 크고 작은 광풍들이 있습니다. 학점이 1점대를 밑도는 학사경고의 광풍, 쌍권총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수십군데 입사지원서를 내지만, 한 군데서도 불러주지 않는 취업의 광풍이 있습니다. 취직도, 공부도 못하게 때마다 발목을 붙잡는 질병의 광풍이 있습니다. 매일의 끼니를 걱정하며 하늘에서 밥이 내려오기를 기도해야 하는 물질의 광풍이 있습니다. 절대진리를 불신케하고 쾌락과 허무를 좇게하는 시대풍조의 광풍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의 광풍에 직면하여 간절한 기도로 주님을 깨울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문제, 시대문제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시도록 말씀의 능력을 붙들어야 합니다. 주님은 저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라!" 말씀에 의지하여 주님의 완전한 보호와 사랑을 확신해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이, 살아서 파다닥 거리는 역동적인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2장. 네 이름이 무엇이냐(26-39)
바람과 바다, 대자연을 동원한 스릴 넘치는 선상수양회를 마치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호수건너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습니다. 바다에서 광풍이 제자들을 맞이했다면, 거라사인의 땅에서는 광인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광인이 거하던 거라사지방은 로마부대의 주둔지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군부대 주변의 문화는 매우 강포하
고 정욕적이며 물질적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된 환경은 더러운 귀신들이 마음 놓고 뛰어놀 수 있는 귀신들의 운동장과 같습니다. 광인은 귀신들이 뛰노는 죄의 운동장에서 좋다고 함께 뛰놀다가 결국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 자신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귀신들린 광인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27절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 이 사람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며 집에 거하지도 아니하고 무덤 사이에 거하는 자라" 옷도 입지 않고 무덤사이에 거하는 광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병들어가는 이 시대, 청년지성인들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광인은 오래 옷을 입지 아니하였습니다. 왜 옷을 입지 않고 다녔을까요? '홍대앞 자매들의 옷차림에서 유행은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옷은 사회문화의 경향, 관습과 규범을 담고 있습니다. 광인은 아마도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되는 이 모든 것에 반발했는지 모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옷을 벗어재낀 광인과 같이 광기어린 모습들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엠티를 가면, 누가 초코파이를 제일 더럽게 먹나 게임을 합니다. 초코파이를 양말에 넣고 그 속에 침을 뱉고 여러사람이 밟아 으깬 다음 먹는다고 합니다. 또 생일빵이라고 하여, "왜 태어났니~왜 태어났니~"하며 생일당한 친구를 무지하게 패는 생일축하문화가 있습니다. 이때너무 심하게 맞아서 생일날이 제삿날이 된 사람도 있습니다. 홍대앞 청바지가게를 가면, 멀쩡한 청바지는 우리 목자님들 밖에는 안사입습니다. 반면에 헤어진 청바지, 찢어진 청바지, 총알맞아 구멍난 청바지는 없어서 못팝니다. 이 뿐입니까? 정상적인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눈뜨고 보기 어려운 연극과 전위예술, 차라리 포르노에 가까운 거짓말같은 영화들이 버젓이 공적인 무대에 올려지고 스크린에 영사됩니다. 서에 가도 '나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싸모님이 제비를 만날 때', '제비, 안전하게 키우는 법', '외도, 무작정 따라하기' 등 온통 기존의 윤리와 도덕을 파괴하는 책들로 가득합니다. 심지어 한 도시전체를 불바다로 만들만큼 하나님께서 심각한 죄악으로 규정하셨던 동성연애를, 하나의 문화로 정당화하는 모임과 이론까지 나와서 성윤리와 결혼과 가정제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을 죄라고 지적하는 사람이, 되려 문화도 모르는 무식~한 죄인으로 손가락질 받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고말았습니다. 옷을 입지 않은 채 수치심을 잃고 살아가는 광인의 모습은, 마치 오늘날 하나님이 주신 삶의 법도를 상실한채 반발과 파괴로 치닫고 있는, 소위 젊은문화의 모습, 이시대 청년지성인들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둘째로, 광인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했습니다. 무덤은 생명이 없는 곳입니다. 아무런 관계성도 나누어지지 않는 단절되고 소외된 곳입니다. 그곳은 어둠의 장소요, 죽음의 장소요, 귀신이랑 놀기 딱 좋은 장소입니다. 광인은 이러한 무덤에 거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아무리 든든한 쇠사슬과 고랑으로 묶어 놔도 광인은 이를 단숨에 끊어버리고 무덤으로 달려나갔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사이버세계는 광인의 무덤과 같습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지성인들이 사이버세계에 거하고 있습니다. 수업과 과제와 토의와 쇼핑, 회사업무와 각종 취미와 오락, 심지어 미팅과 연애까지 거의 모든 것을 인터넷과 통신을 통하여 해결합니다. 밤새도록 피가튀기는 파괴적인 게임을 하며,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강포와 살기어린 내면으로 변해갑니다. 아무의 간섭도 받지 않는 자신만의 사이버공간에서 지극히 폐쇄적이고 신경증적이고 파괴적이 되어갑니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성맺는 것이 귀찮고 또 두려워서, P.C방이나 자기방에 틀어박혀 통신, 채팅, 게임에 몰입하는 것으로 모든 관계성을 대신합니다. 얼마전에 어떤 사람은 몇날 며칠동안 밥도 안먹고 게임에 빠져 게임만 하다가 결국 탈진해서 죽었습니다. P.C방이 이 사람의 진짜 무덤이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예 음란 사이트와 일반사이트의 구분마저 모호해져 버린 인터넷 공간은 수없이 많은 지성인들을 정욕에 병들이고 있습니다. 키도 크고 잘 생긴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장차 엘리야목자님보다 크게될 거목감이었습니다. 그러던 청년이 어느날 왕따가 두려워서 친구들과 함께 P.C방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만난 스타의 세계는 참으로 깊고도 오묘했습니다. 이후 청년은 수업도 마다하고 게임에 몰입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앞사람이 남기고간 인터넷 주소를 무심코 클릭하게 되었습니다. 생전 처음보는 해괴망측한 화면에 깜짝 놀란 청년은 얼른 일어나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음란한 화면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습니다. 결국 청년은 밤마다 P.C방에서 스타와 음란의 무덤 사이를 헤메이다 아침녁에야 쾡한 눈과 쏙 들어간 볼을 하고 들어와 쓰러지듯 누워 버렸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밥먹으러 가자!"해도 일어나지는 않고 '멀뚱~멀뚱~' 천정만 바라보며, "목자님, 인생이 참 허무해요" 하였습니다. 그러다가도 밤이 되면 어김없이 무덤을 향해 달려나갔습니다. 오늘날 대학가의 P.C방들이 계속하여 호황을 누리는 것을 볼 때, 이는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임에 틀림없습니다.
광인이 옷을 입지 아니하고 무덤사이에 거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귀신들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청년지성인들이 파괴적이고 음란한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는 까닭 역시 귀신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시대의 문화패턴이다, 왜 개인의 문화생활까지 간섭하고 그러느냐"고 말하는 사단의 거짓말을 곶이 들어서는 않됩니다. 이는 생명을 파괴하는 사단의 역사, 더럽고 악한 영의 역사임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일찍이 신상언씨는 이를 간파하고 '사단은 마침내 대중문화를 선택했다!'라고 외쳤습니다. 저희가 귀신들린 이 시대를 바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악한 영에 사로잡혀, 강포와 음란과 정욕으로 무참히 파괴되어가는 이시대의 지성인들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저희가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과 생명에 대한 긍휼을 가지고, 악한 영과의 거룩한 싸움을 줄기차게 싸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광인을 어떻게 도우셨습니까? 30절말씀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 물으신즉 가로되 군대라 하니 이는 많은 귀신이 들렸음이라" 예수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 말씀하심으로 숨어있던 귀신의 세력을 밝히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임할 때, 간교한 속삭임으로 나의 느낌과 생각 속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주님의 말씀은 악한 세력의 정체를 드러내시는 강력한 빛이 되십니다. 또한 주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말씀하심으로 광인이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토록 도우셨습니다. 광인은 주님의 말씀앞에, 오랜 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본래모습,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시던 천국 황태자의 모습을 기억해 내었습니다. 동시에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 형편없이 망가지고 처참하게 파괴된 현재적인 모습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군대입니다"라고 고백하었습니다. "나는 군대입니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런 고백입니다. "주님, 제 마음과 생각 속에 수많은 귀신이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수많은 악한 영의 세력이 제마음의 모든 생각과 제입술의 모든 말들과 제손과 발의 모든 행위들을 더럽고 죄악되게 하고 있습니다. 저는 더러운 귀신의 세력에 붙잡혀 전적으로 타락하고 완전히 부패한 죄인입니다. 주님 제발 저를 이 귀신의 세력에서, 뿌리깊은 죄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주십시오. 본래의 거룩한 형상으로 회복하여 주십시오"라는 고백이요, 절박한 구원요청인 것입니다. 이와같은 자기발견과 고백이야말로 주님의 유과 구원역사의 시작입니다. 주님은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광인과 같은 우리의 모습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이처럼 우리는 성한 곳 하나 없이 죄악되면서도 주님앞에 나아가 고침받지 않고자하는 패역함을 더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겸손히 주님앞에 나아가기만하면 우리를 치료하여 주시겠다고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주의 말씀은 치료의 광선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거룩한 말씀의 빛 앞에 나아가 진실되게 자기고백할 때, 주님께서는 치료의 광선을 발하십니다. 우리의 상한 맘, 지친 몸, 모든 것을 고쳐주십니다. 주님의 치료의 광선이 발할 때, 우리는 모든 죄와 연약함을 떨쳐버리고 비상하는 독수리와 같이 저 하늘을 힘차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우리아를 살인교사한 다윗도, 간음죄, 살인죄를 자복하고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하였을 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기쁨을 회복하고 행복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가 오랫동안 토설치 못한 구체적인 죄문제들을 들고 나아가 고백할 수 있도록 내면에 힘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가 담대히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죄사함과 새롭게되는 은혜를 충만히 덧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2-39절을 보십시오. 주님은 자신조차도 자신을 귀하게 여길 수 없어서 밤낮 소리지르고 자해하며 무덤사이에 거하던 자를 온전케하시고자 수천마리의 돼지떼를 희생시키셨습니다. 한 생명을 온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주님의 사랑과 희생이 광인을 온전케 하실 뿐 아니라, 주님의 하신 일을 온 성내에 전파하는 데가볼리지역의 선교사로 세우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치유와 구원의 역사는 한 사람을 온전케 할뿐만 아니라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치유하시고 온전케 하시며 빛을 발하게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께서는 오늘 이시간에도 우리를 향하여 동일한 질문을 하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우리 이름이 아무리 부끄러운 것이라도, 아무리 흉측한 것이라도, 주님은 저희를 고쳐주십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시는 주님은 또한 말씀하십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시간 저희가 "네 이름이 무엇이냐"하시는 주님의 말씀 앞에,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들고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000년전 광인을 온전케하신 치유와 구원의 권능이, 지금 이시간 우리모임 가운데서도 동일한 권능으로 충만히 임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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