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10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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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10 강
말씀/ 누가복음 9:18-27
요절/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지금 남북한 정상 회담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 그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은 성부이고 김정일은 성자이며 주체 사상은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통치 하에 북한 주민들은 천국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정일을 구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또 얼마 전까지 버스 광고판과 전봇대에는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가 나붙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떤 청년이 상사병이 걸려서 저렇게 사랑 고백을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영이란 과연 어떤 여자인가? 생각하며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선영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든 모르든 우리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여성 전용 인터넷 사이트를 하나 더 아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요17:3절은 말씀하십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는 우리에게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8-22)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시고 여러 모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배웠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로서 우상 숭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토착민들은 바알 숭배를 하고 있었고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로마 황제의 신전을 지어 숭배하게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대해서 제자들은 부담없이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19)."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이스라엘 전체에 회개의 역사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였습니다(눅 3:15).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책망하다가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를 듣고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막6:14-16). 무리들의 이 말은 소경이 코끼리 만지듯 부분적이고 피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장님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어, 전봇대 같네"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장님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는 "이것, 소방 호수아냐"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학기 초에 신입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면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최고 경영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야로 알고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메시야가 아니라 그냥 지식으로 메시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이 질문에 제자들은 좀 진지해졌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신 2년 반의 교육을 결산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종합적이고도 아주 개인적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의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베드로의 대답은 간결하였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덤벙대어 실수를 잘하였지만 중요한 순간에 종종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말도 잘하였습니다. 전에도 한번 제자들이 다 떠날 때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 하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말하여 예수님을 눈물나게 만들었습니다(요6:68). 그런데 이번에도 정확한 대답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한 말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이며 동시에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는 그 후 지금까지 2000년 동안의 우리 신자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구원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에덴 동산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죄의 대가로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위하여 창세기 3:15절에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구원의 약속을 점점 더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는 이 구원자가 올 때는 한 별이 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민 24:17).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사11장),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7장). 이 구원자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고난 당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53장). 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는 이 구원자가 의로운 해처럼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우리를 송아지같이 뛰놀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4장).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은 이 구원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메시야로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성경에서 약속한대로 구원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죄에 포로되고 마귀의 권세 아래 눌리고 고통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백성들은 이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 가운데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는 조상들이 그렇게 목 메여 기다렸던 약속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감동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그리스도십니다.
둘째,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God)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이 구원자는 구약에서 나타났던 모세, 다윗, 기드온, 삼손 같은 구원자 중의 하나인 "a Christ"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인 'The Christ'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칭 구원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었습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듯이, 자신들도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 중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나라 전통 무속 신앙을 담고 있는 정감록에는 정도령을 천지 개벽을 이룰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창가학회는 '일연'을 일본의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부처가, 유교에서는 공자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또 요즘은 대학가와 길가 전봇대에 많이 붙어있는 포스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칭하이 무상사'라고 쓰여있고, 큰 스승이라는 중국 여인이 나오고 '신을 체험하라' 미혹하고 있습니다. 또 '우주의 가을이 온다'고 주장하는 구원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에 구원이 있지 않을까 미혹되면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행4:12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세째,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의 뜻에는 "구원자" 외에도 "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왕"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저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왕께 철저한 충성과 순종을 다 바칠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이시오, 이 땅의 모든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에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달리 자신을 영접한 사람들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사9:6).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스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진정 행복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유일하신 구원자시오,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는 먼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은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옥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을 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과 율법과 자신의 무력을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구원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두 배 가득히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후에 그는 제자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을 자를 살리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을 한 손 마른 자 사건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서 입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베드로를 품고 많은 해산의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악에 대한 미련을 끊기도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위선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나라에 70년대부터 시작된 부흥 운동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나 쉽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80년대 이후 한국 교인들이 사회의 대형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충실히 다니고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돕고 있는 양들이 진정으로 중생의 체험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얻는 문제는 세상의 어떤 다른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문제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현재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신입생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기 때문에 캠퍼스 시절 시간을 드려서 말씀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기 때문에 집안의 핍박 운데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모임 다과 써빙이 맛있어서 입니까? 아니면 목자님들이 선배이상으로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까? 또 우리 목자님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기에 바쁜 직장과 가정 생활 가운데서도 전도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기에 양들에게 배척받으면서도 늘 캠퍼스에 올라가고 있습니까? 식당의 싼 밥을 먹기 위해서 입니까? 또 선교사님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해서 질병과 언어와 문화의 충격을 받으며 선교하는 것입니까? 그곳이 한국 보다 살기 좋아서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의 사랑하는 그리스도시오, 온 천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의 정욕과 교만과 이기심과 허물로 인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의 병에서 치료되고 건강하게 되어 이제는 주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 같이 죄악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감당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까지 인도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시요, 하나님께서 인정한 유일한 구원자이시요, 나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이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버림받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소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존재가 거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고난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이것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는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합니까? 이사야 53장은 이를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뿐아니라 부활 승천하사 이제는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Ⅱ.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23-27)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제자로서 치루어야 할 댓가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면 무조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생각하여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더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더 높으며,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사55:8,9).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부인해야할 죄악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음란물을 보고 싶거나, 알지 못하는 이성과 채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를 부인하고 거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해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수업도 빼먹으면서 늦게까지 안일하게 자고자하는 생각을 부인하고,"게으른 자여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말씀에 순종해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역사를 섬기면서 교만한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을 부인하고, 겸손히 낮아져 섬기길 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또 이기적이고 희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겠습니다. 우리가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영접하고자 할 때 그 당시는 남이 알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왜 자기부인하길 원하셨는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부인하길 잘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고집을 세웠다면 망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의 본을 가장 잘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되었습니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내면적인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자
기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꼭 감당해야할 외적인 희생과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자기 십자가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가 지어야할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입생들은 바쁘지만 일주일에 한 번하는 1:1 성경공부의 십자가와 소감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또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문의 십자가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학생목자이면서 학점이 무기창고가 되거나, 샤프심 학점 0.7을 맞거나, 아니면 마의 점수대인 0.0을 맞는 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목자님들은 복음전파와 제자양성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양들에게 밥 사주고 배척 받기도 하고, 말씀공부는 하지만 반발하고 속을 슬슬 긁는 양을 영접하고 제자 양성한다는 것은 힘든 십자가입니다. 이외에도 우리에게는 역사환경을 섬기는 십자가도 있고, 양들과 동역자들을 섬기기 위해 다양한 요리로 장막 써빙을 감당해야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사모님들은 자녀를 감당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때로는 헐크의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속 사람이 강해지고 영적인 성숙을 경험하게 되고 실제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지되 날마다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매일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일 주일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번 지고자 합니다. 이때 쉬고나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면 더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매고 등산할 때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쉬었다가 다시 출발 할려면 괭장히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들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줘주시기 때문에 가볍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내면이 강해집니다. 여러 개의 십자가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성숙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때 어떤 약속을 해주셨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보면 때로는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또 가정, 친구, 직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핍박이 올 때도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잃지 않고자 하고,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자 합니다. 그래서 왜 일반교회에서는 안그런데, UBF만 유별나게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강조하냐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도록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분명한 방향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지 않을 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세상 조류에 떠내려가 믿음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장차 예수님께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26)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기 부인할 것과 져야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좇으므로 주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천성에 입성하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용사들인 여러분들을 열렬하게 환영하십니다. welcome!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영원한 영광에 거할지어다.
말씀/ 누가복음 9:18-27
요절/ 누가복음 9:20
하나님의 그리스도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지금 남북한 정상 회담이 중요한 이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 그는 누구인가?' 라는 주제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은 성부이고 김정일은 성자이며 주체 사상은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김정일의 통치 하에 북한 주민들은 천국 생활을 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김정일을 구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가를 여러분은 잘 아십니다. 또 얼마 전까지 버스 광고판과 전봇대에는 "선영아, 사랑해"라는 광고가 나붙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떤 청년이 상사병이 걸려서 저렇게 사랑 고백을 하는 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영이란 과연 어떤 여자인가? 생각하며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선영이가 어떤 사람인지 알든 모르든 우리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여성 전용 인터넷 사이트를 하나 더 아는 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바로 아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요17:3절은 말씀하십니다."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는 우리에게 영생이냐 영벌이냐 하는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은 누구신가를 바로 알고 은혜 받기를 기도합니다.
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18-22)
예수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제자들의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순간을 위해서 제자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치시고 여러 모양으로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잘 배웠는가를 판가름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곳은 가이사랴 빌립보로서 우상 숭배로 유명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의 토착민들은 바알 숭배를 하고 있었고 헬라계 사람들은 산림과 야수의 신인 판(Pan)의 신당을 지어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로마 황제의 신전을 지어 숭배하게 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질문하셨습니다.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에 대해서 제자들은 부담없이 대답했습니다.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하나가 살아났다 하나이다(19)." 세례 요한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이스라엘 전체에 회개의 역사를 이룬 사람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였습니다(눅 3:15). 세례 요한은 헤롯 안티파스의 죄를 책망하다가 목베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름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이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이가 선지자니 옛 선지자 중의 하나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헤롯은 이를 듣고 '내가 목 베인 요한 그가 살아났다'고 하였습니다(막6:14-16). 무리들의 이 말은 소경이 코끼리 만지듯 부분적이고 피상적이었습니다. 어떤 장님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고 코끼리는 "어, 전봇대 같네"라고 주장합니다. 또 어떤 장님은 코끼리 코를 만지고는 "이것, 소방 호수아냐"라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학기 초에 신입생들에게 설문 조사를 해 보면 예수님을 4대 성인 중 하나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최고 경영자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메시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메시야로 알고 올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개중에는 자신의 메시야가 아니라 그냥 지식으로 메시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답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0)" 이 질문에 제자들은 좀 진지해졌습니다. 이는 제자들에게 생각하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치신 2년 반의 교육을 결산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종합적이고도 아주 개인적이었습니다. 우리 각자는 이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의 결과에 따라서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설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의 고백이 무엇입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 베드로의 대답은 간결하였지만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덤벙대어 실수를 잘하였지만 중요한 순간에 종종 예수님을 감동시키는 말도 잘하였습니다. 전에도 한번 제자들이 다 떠날 때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 하자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라고 말하여 예수님을 눈물나게 만들었습니다(요6:68). 그런데 이번에도 정확한 대답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한 말은 베드로의 사랑고백이며 동시에 그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이는 그 후 지금까지 2000년 동안의 우리 신자들의 신앙고백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니이다"라는 말은 구체적으로 어떤 뜻입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보내신 구원자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고, 아름다운 에덴 동산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배반함으로 죄의 대가로 죽음과 영원한 심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간들을 위하여 창세기 3:15절에서 구원자를 보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후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이 구원의 약속을 점점 더 확실하게 해주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는 이 구원자가 올 때는 한 별이 뜰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민 24:17).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사11장), 처녀의 몸을 빌어 태어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7장). 이 구원자는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는 분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 인간들의 죄와 허물로 인해서 고난 당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사53장). 또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는 이 구원자가 의로운 해처럼 치료의 광선을 발하여 우리를 송아지같이 뛰놀게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말4장).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은 이 구원자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과 정혼한 처녀 마리아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메시야로서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성경에서 약속한대로 구원 역사를 섬기셨습니다. 죄에 포로되고 마귀의 권세 아래 눌리고 고통하는 자들에게 자유를 주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과 백성들은 이 약속하신 구원자를 보고, 그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고난 가운데 멀리서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예수님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베드로는 조상들이 그렇게 목 메여 기다렸던 약속하신 구원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라고 감동적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그리스도십니다.
둘째,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The Christ of God)이십니다 라고 고백했을 때 이 구원자는 구약에서 나타났던 모세, 다윗, 기드온, 삼손 같은 구원자 중의 하나인 "a Christ"가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인 'The Christ'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자칭 구원자라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었습니다. 그들은 산 정상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듯이, 자신들도 인간들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자 중의 하나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나라 전통 무속 신앙을 담고 있는 정감록에는 정도령을 천지 개벽을 이룰 구원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본 창가학회는 '일연'을 일본의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부처가, 유교에서는 공자가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구원자로 생각합니다. 또 요즘은 대학가와 길가 전봇대에 많이 붙어있는 포스터가 있습니다. 여기에는 '칭하이 무상사'라고 쓰여있고, 큰 스승이라는 중국 여인이 나오고 '신을 체험하라' 미혹하고 있습니다. 또 '우주의 가을이 온다'고 주장하는 구원자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것들에 구원이 있지 않을까 미혹되면 멸망의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유일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행4:12절에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세째,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다스리는 왕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의 뜻에는 "구원자" 외에도 "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왕"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고백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저의 왕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동시에 이 왕께 철저한 충성과 순종을 다 바칠 것을 다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왕이시오, 이 땅의 모든 나라의 왕이시기 때문에 만 왕의 왕이십니다. 이 예수님은 세상 왕들과 달리 자신을 영접한 사람들을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왕이십니다(사9:6).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다스림을 받는 모든 사람들은 진정 행복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은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보내신 유일하신 구원자시오, 우리의 영원한 왕이 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필요한 단계는 먼저 자신이 죄인됨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라고 생각할 정도로 죄를 철저히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자신은 죄에 대해서 속수무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옥 문턱에서 벌벌 떨면서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을 때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과 율법과 자신의 무력을 경험을 통해서 깨닫고 구원자를 갈망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게네사렛 호숫가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지만 고기 한 마리 낚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가 순종했을 때 두 배 가득히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는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려 고백했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후에 그는 제자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결단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죽을 자를 살리시고 광풍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는 것을 한 손 마른 자 사건을 통해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을 통해서 입증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이 분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의 질문에 확신을 가지고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백이 나오기까지 베드로를 품고 많은 해산의 수고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악에 대한 미련을 끊기도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위선자가 되는 지름길입니다. 우리 나라에 70년대부터 시작된 부흥 운동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너무나 쉽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80년대 이후 한국 교인들이 사회의 대형 비리에 연루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에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 충실히 다니고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돕고 있는 양들이 진정으로 중생의 체험이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가 영원한 구원을 얻는 문제는 세상의 어떤 다른 일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인간은 이 문제에 최우선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해 전 생애를 바칠 용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현재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십니까? 신입생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기 때문에 캠퍼스 시절 시간을 드려서 말씀 공부를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기 때문에 집안의 핍박 운데서도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까? 모임 다과 써빙이 맛있어서 입니까? 아니면 목자님들이 선배이상으로 사랑해 주기 때문입니까? 또 우리 목자님들은 예수님을 누구로 믿기에 바쁜 직장과 가정 생활 가운데서도 전도하고자 몸부림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기에 양들에게 배척받으면서도 늘 캠퍼스에 올라가고 있습니까? 식당의 싼 밥을 먹기 위해서 입니까? 또 선교사님들에게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기에 자신의 인생을 투자해서 질병과 언어와 문화의 충격을 받으며 선교하는 것입니까? 그곳이 한국 보다 살기 좋아서입니까?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이 나의 사랑하는 그리스도시오, 온 천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저의 정욕과 교만과 이기심과 허물로 인해서 죽으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죄의 병에서 치료되고 건강하게 되어 이제는 주님을 섬기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 같이 죄악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고 감당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끝 날까지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려 주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까지 인도하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시간 우리가 베드로와 같이 이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길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시요, 하나님께서 인정한 유일한 구원자이시요, 나의 왕이 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계하신 후 '하나님의 그리스도'로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말씀하셨습니다. 22절을 보십시오. "가라사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이는 참으로 비참한 일입니다. 종교 지도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버림받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사람의 기본적인 욕구는 다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소속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존재가 거부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일어날 고난들에 대해서 오랫동안 생각해 왔고 이것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그는 죽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이것이 그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그리스도'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만 합니까? 이사야 53장은 이를 잘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으실 뿐아니라 부활 승천하사 이제는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고난을 통해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로 승리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Ⅱ.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23-27)
예수님은 자기를 따르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따라오려는 사람들에게 제자로서 치루어야 할 댓가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자세는 무엇입니까?
첫째, 예수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면 무조건 무엇을 하지 말라는 것 아닌가 생각하여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더 앞세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고 더 높으며,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사55:8,9). 우리에게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부인해야할 죄악된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를 통해 음란물을 보고 싶거나, 알지 못하는 이성과 채팅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이를 부인하고 거룩하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해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수업도 빼먹으면서 늦게까지 안일하게 자고자하는 생각을 부인하고,"게으른 자여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개미에게 가서 배우라"는 말씀에 순종해야겠습니다. 또 우리는 역사를 섬기면서 교만한 마음과 알량한 자존심을 부인하고, 겸손히 낮아져 섬기길 원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겠습니다. 또 이기적이고 희생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를 부인하고,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는 말씀을 새겨야겠습니다. 우리가 자기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영접하고자 할 때 그 당시는 남이 알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내놓고 보면 왜 자기부인하길 원하셨는지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 부인하길 잘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고집을 세웠다면 망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영적인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런 자기 부인의 본을 가장 잘 보이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영접하고자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땀나는 기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기를 부인하심으로 온 인류가 구원을 받게되었습니다.
둘째,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내면적인 생각을 부인하는 것이라면, "자
기 십자가"는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꼭 감당해야할 외적인 희생과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그리스도로 영접한 사람들이 감당해야할 자기 십자가를 남겨두셨습니다. 우리가 지어야할 십자가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신입생들은 바쁘지만 일주일에 한 번하는 1:1 성경공부의 십자가와 소감의 십자가를 감당해야 합니다. 또 학생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학문의 십자가를 잘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학생목자이면서 학점이 무기창고가 되거나, 샤프심 학점 0.7을 맞거나, 아니면 마의 점수대인 0.0을 맞는 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 목자님들은 복음전파와 제자양성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양들에게 밥 사주고 배척 받기도 하고, 말씀공부는 하지만 반발하고 속을 슬슬 긁는 양을 영접하고 제자 양성한다는 것은 힘든 십자가입니다. 이외에도 우리에게는 역사환경을 섬기는 십자가도 있고, 양들과 동역자들을 섬기기 위해 다양한 요리로 장막 써빙을 감당해야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사모님들은 자녀를 감당하는 십자가도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서 때로는 헐크의 모습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때 속 사람이 강해지고 영적인 성숙을 경험하게 되고 실제적인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십자가를 지되 날마다 지고 따라가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분은 매일 십자가를 지지 않고 일 주일에 한번이나 한 달에 한번 지고자 합니다. 이때 쉬고나서 십자가를 지고자 하면 더 힘들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매고 등산할 때를 생각하면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쉬었다가 다시 출발 할려면 괭장히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 힘들 것 같지만 예수님께서 함께 줘주시기 때문에 가볍습니다. 십자가를 감당하면서 내면이 강해집니다. 여러 개의 십자가도 동시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됩니다. 나아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아가게 되고 성숙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을 때 어떤 약속을 해주셨습니까? 24,25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다보면 때로는 피곤하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또 가정, 친구, 직장에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핍박이 올 때도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자기 목숨을 잃지 않고자 하고,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자 합니다. 그래서 왜 일반교회에서는 안그런데, UBF만 유별나게 자기부인과 십자가를 강조하냐고 불평합니다. 그러나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도록 한 것은 예수님께서 주신 분명한 방향입니다. 우리가 이 길을 가지 않을 때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하고, 세상 조류에 떠내려가 믿음을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 영원한 심판에 처하게됩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주신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의 말씀을 부끄러워하면 장차 예수님께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자기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으로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 하리라"(26)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기 부인할 것과 져야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예수님을 좇으므로 주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천성에 입성하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용사들인 여러분들을 열렬하게 환영하십니다. welcome!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영원한 영광에 거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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