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9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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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9 강
말씀/ 누가복음 8:40-56
요절/ 누가복음 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우리는 이번 봄 수양회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봄 수양회 열매로 영국과 나이지리아에 두 분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홍익대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두 증거를 보고자 합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에 걸려 고통하던 여인의 믿음과 열 두 살난 외동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께 나아와 고쳐달라는 야이로의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어떻게 축복하셨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도 운명적인 문제들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문제들로 인해 도리어 믿음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I. 혈루증 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 (40-4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온전케 하신 소식이 가버나움 전 지역에 호외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무리들은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환영하였습니다. 그처럼 심하게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돌아오시는 것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받을 내딛자 마자 달려나가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는 회당장의 체면도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사랑스런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오셔서 그 머리에 안수하여 낫게하여 주십시오.' 열 두 살 먹은 외딸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제게도 딸이 둘이 있는데 딸을 키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딸들은 재롱을 피우고 귀여운 짓을 많이 합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구김없이 자랐을 것입니다. 대개 엄마가 자녀들을 키우기 때문에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비해서 아버지는 사랑하고 용납해 줍니다. 이로 인해서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가깝습니다. 또한 열 두 살 먹은 딸은 아버지와 대화가 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교감이 됩니다. 딸은 자기가 알고 있는 유우머를 아버지와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또 당시 결혼 적령기는 열 두 살이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야이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회당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딸로 인해서 메시지 준비도 안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딸을 간호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초죽음이 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딸의 병세에 차도가 없자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만 하면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왔을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했지만 자기 집에 오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딸들이 죽어갈 때 마음만 아파하지 말고 간구하여 구원의 역사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여성의 지위가 많이 올라가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눌려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화병이 많습니다. 정신적인 병으로 인해서 고통하고 죄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원인 모를 병으로, 불치병으로 고통하는 영적인 딸들을 볼 때 요구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딸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고 주님께 나아가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와 같이 울면서 기도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있을 때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건강한 자매님들이 열국의 어미들로 자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주님은 기쁨으로 치료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꺼이 그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실 때 무리들이 에워싸 밀면서 서로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무언가 도움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 무리 속에 빨간 옷을 입은 한 여인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여자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은 빈혈을 앓고 어지럼증으로 고통을 했습니다.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섬겨야 할 일들은 많은데 온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울기를 잘 했습니다. 또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부정해지고 그와 악수를 하거나 몸에 닿으면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회당에 가서 예배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생명력을 상실해갔습니다. 섬기는 일을 하고 싶어도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학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혈루증과 같이 치료되지 않는 죄는 생명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 여인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십이 년 동안이나 체념에 빠지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더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서 있던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청춘도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육신과 정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의 말을 믿고 자신을 맡겨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의사에 대한 불신도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의사였던 저자 누가는 마가와 달리(막5:26) '의원'이라는 말 대신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의사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으로 의사들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체념하기 쉬운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한 손 마른 자를 온전케 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께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겹겹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열 두 제자들이 그 중심에 그리고 부리부리한 베드로가 팔자걸음으로 손발을 휘저으며 예수님 뒤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서서히 현기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기서 대었다는 단어는 원어로 비끌어 매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옷 가에 댄 것이지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냉냉하던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즉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의 저수지라면 여인의 믿음은 능력을 흐르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면 여인의 믿음의 관을 통해서 그 생명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모르시더라도 자신이 그의 옷가를 만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운명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믿음은 작게 표현될지 모르지만 크게 역사합니다. 또 폼이 중요한데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간염으로 무기력해 지기 쉬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직장일과 학업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일하며 귀히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신장병으로 인해서 단백질과 피가 새어나갔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치료를 받느라 메시지도 쓰지 못하고 누워서 섬김만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몸으로 때우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 했던 제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이런 가운데 사모님들의 섬김을 받고 전요한목자님과 김아브라함목자님의 배려로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에 힘쓰는 가운데 꾸준히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역자의 섬김과 주님의 능력으로 신장병에서 치료되어 복음 역사를 위해 힘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연약함으로 인해서 운명적이고 슬픈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분들이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건강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 신바람이 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손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지난 밤 광풍을 이기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더니 너무 과민해 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시며 계속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색출 의지를 읽은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여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을 부정케 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훔쳤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심으로 그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여인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나음 받은 것을 드러내어 그 믿음을 바로 세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즉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녀는 고백하기 전에는 '고백하면 나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야이로와 제자들과 무리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심으로 제자들이나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드러내어 역사화함으로 이 천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 역사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감 모임을 통해서 서로 받은 바 은혜와 믿음을 나누면 서로 큰 격려를 받게 됩니다. 믿음도 풍성해지고 사랑의 관계성도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힘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소감 모임을 통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셋째, 고백 훈련은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여인은 떨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를 볼 때 고백을 하려면 자기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이런 고백은 자신의 어두움을 빛 가운데 드러냄으로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어두운 것들은 드러내면 물러가게 되고 그 자리에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밝고 신바람 나는 인생을 살려면 이런 믿음의 고백들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소감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들을 계속해서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들이 많이 고백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II.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 (49-56)
예수님께서 여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찬 물을 끼얹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 말은 평범한 말 같지만 야이로에게는 비수와 같이 그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는 혈루증에서 나음받은 여인의 고백을 듣고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고 의의 양양해 있는데 사단은 치명타를 먹인 것입니다. 그의 말은 선생을 더 괴롭게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불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는 말은 야이로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말이었습니다. 이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움이 그 마음을 덮쳐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소감 발표를 길게 시키시는가? 이 여인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가? 소감을 짧게 써야지 주저리 주저리 왜 그렇게 말이 많은가? 하면서 온갖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통곡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이제는 장례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방향 감각을 잃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령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긴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40년 동안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더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밤에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벌레나 귀신이 나올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갑에 배추색 지폐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도난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를 볼 때 돈이 없어도 두렵고 많아도 두렵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혼기를 놓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자매님들이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보면 두렵습니다. 어떤 분은 애를 낳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이에게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면 두렵습니다. 이 양이 문제 속에서 실족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를 훈련하시는 목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목자님 앞에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인간 갈등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여러 모양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근본 뿌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세력에 잡혀서 어두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야이로를 어떻게 건져내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이 야이로에게 어떤 불신을 심게 될 지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속삭이는 사단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으로 쓰러지는 야이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보약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 불신의 세력, 두려움의 세력과 싸웠습니다. 모든 병의 70%이상이 두려움과 근심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해로운 것이지만, 복된 두려움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 하면 다른 모든 두려움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은 권고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3:13, 사66:2) 말씀을 멸시하면 멸망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지금 주신 말씀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는 장례를 치루어야 할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께 나아올 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병고치는 믿음보다 더 큰 죽음을 이기는 부활 신앙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없이 두려움을 심는 상황이 밀려옵니다. 절망이 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것이요 죽음에서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슬프게 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부르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는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실체인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두려움을 제하시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잘 풀리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뒤집어 졌습니까? 믿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습니까? 우리 모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8:40-56
요절/ 누가복음 8:50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우리는 이번 봄 수양회를 통해서 복음의 능력과 은혜를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봄 수양회 열매로 영국과 나이지리아에 두 분의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지원하는 것은 우리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홍익대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기도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믿음의 두 증거를 보고자 합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에 걸려 고통하던 여인의 믿음과 열 두 살난 외동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예수님께 나아와 고쳐달라는 야이로의 믿음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믿음을 어떻게 축복하셨는가 배울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도 운명적인 문제들을 들고 주님께 나아가 해결받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문제들로 인해 도리어 믿음을 체험하기를 기도합니다.
I. 혈루증 여인을 구원하신 예수님 (40-48)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에서 광풍을 잠잠케 하시고 거라사 지방에서 광인을 온전케 하신 소식이 가버나움 전 지역에 호외로 퍼져나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무리들은 돌아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며 환영하였습니다. 그처럼 심하게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밤이 지나고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돌아오시는 것을 더욱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회당장 야이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땅에 받을 내딛자 마자 달려나가 그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그는 회당장의 체면도 버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간구했습니다. '주여, 사랑스런 내 딸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 집에 꼭 오셔서 그 머리에 안수하여 낫게하여 주십시오.' 열 두 살 먹은 외딸은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제게도 딸이 둘이 있는데 딸을 키우는 재미가 있습니다. 딸들은 재롱을 피우고 귀여운 짓을 많이 합니다. 야이로의 딸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하면서 구김없이 자랐을 것입니다. 대개 엄마가 자녀들을 키우기 때문에 잔소리를 많이 합니다. 그런데 비해서 아버지는 사랑하고 용납해 줍니다. 이로 인해서 딸과 아버지의 관계가 가깝습니다. 또한 열 두 살 먹은 딸은 아버지와 대화가 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교감이 됩니다. 딸은 자기가 알고 있는 유우머를 아버지와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또 당시 결혼 적령기는 열 두 살이었기 때문에 매우 아름다웠을 것입니다. 그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을 때 아버지 야이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는 회당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딸로 인해서 메시지 준비도 안되고 밤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딸을 간호하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초죽음이 되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래도 딸의 병세에 차도가 없자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만 하면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나아왔을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 뵙고 싶어했지만 자기 집에 오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영적인 딸들이 죽어갈 때 마음만 아파하지 말고 간구하여 구원의 역사를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즈음은 여성의 지위가 많이 올라가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눌려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화병이 많습니다. 정신적인 병으로 인해서 고통하고 죄로 고통하고 있습니다. 원인 모를 병으로, 불치병으로 고통하는 영적인 딸들을 볼 때 요구하기가 얼마나 쉽습니까? 그러나 우리의 딸들이 당하는 고통을 이해하고 주님께 나아가 많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와 같이 울면서 기도하는 아버지, 어머니들이 있을 때 우리 가운데 아름답고 건강한 자매님들이 열국의 어미들로 자랄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 주님은 기쁨으로 치료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예수님은 그의 믿음을 보시고 기꺼이 그 집을 향해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실 때 무리들이 에워싸 밀면서 서로 가까이에서 말씀을 듣고 무언가 도움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그 무리 속에 빨간 옷을 입은 한 여인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 여자는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고 있었습니다. 혈루증이란 만성 자궁 출혈증입니다. 이로 인해 이 여인은 빈혈을 앓고 어지럼증으로 고통을 했습니다. 일을 조금만 해도 피곤해서 하루 종일 누워 있어야 했습니다. 섬겨야 할 일들은 많은데 온 몸에 힘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은 많은데 하지 못하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울기를 잘 했습니다. 또 혈루증은 부정한 병이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접촉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녀가 앉았던 의자는 부정해지고 그와 악수를 하거나 몸에 닿으면 부정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회당에 가서 예배를 볼 수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피는 생명을 상징합니다. 혈루증을 앓는 이 여인은 생명력을 상실해갔습니다. 섬기는 일을 하고 싶어도 힘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허약했습니다. 이런 자신을 쓸모없는 존재로 여기며 자학하기도 많이 했습니다. 혈루증과 같이 치료되지 않는 죄는 생명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이 여인은 하루 이틀이 아니고 십이 년 동안이나 체념에 빠지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더 해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하며 모든 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치료받기 위해서 있던 재산도 다 허비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녀는 이제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건강도, 재산도, 청춘도 다 허비하고 남은 것은 허약해질대로 허약해진 육신과 정신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녀는 수많은 의사들의 말을 믿고 자신을 맡겨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의사에 대한 불신도 깊어갔습니다. 그래서 의사였던 저자 누가는 마가와 달리(막5:26) '의원'이라는 말 대신에 아무에게도 고침을 받지 못하였다고 함으로 의사의 명예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의 눈으로 의사들을 곱게 볼 수 없었습니다.
여인은 체념하기 쉬운 때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광인을 고치시고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한 손 마른 자를 온전케 하셨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예수님께 떳떳하게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럴수록 예수님께 나아가 그 옷자락이라도 만지면 나음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무리들에게 둘러싸여 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녀는 무리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중심부에 왔을 때는 사람들이 너무 겹겹이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무엇보다 열 두 제자들이 그 중심에 그리고 부리부리한 베드로가 팔자걸음으로 손발을 휘저으며 예수님 뒤를 호위하고 있었습니다. 여인은 서서히 현기증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죽을 힘을 다해서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옷 가에 손을 대었습니다. 여기서 대었다는 단어는 원어로 비끌어 매다는 뜻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옷 가에 댄 것이지만 그 마음은 예수님을 놓칠 수 없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붙잡았던 것입니다. 여인의 손이 예수님의 옷술을 만지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냉냉하던 여인의 몸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즉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이 능력의 저수지라면 여인의 믿음은 능력을 흐르게 하는 통로였습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근원이시라면 여인의 믿음의 관을 통해서 그 생명이 흘러 들어왔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서 모르시더라도 자신이 그의 옷가를 만지면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운명을 극복하게 했습니다. 믿음은 작게 표현될지 모르지만 크게 역사합니다. 또 폼이 중요한데 아니라 내용이 중요합니다.
우리 가운데 간염으로 무기력해 지기 쉬운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직장일과 학업과 복음 역사를 위해서 일하며 귀히 쓰임 받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신장병으로 인해서 단백질과 피가 새어나갔습니다. 그래서 2년 동안 치료를 받느라 메시지도 쓰지 못하고 누워서 섬김만 받아야 했습니다. 다른 것은 못해도 몸으로 때우는 것만큼은 자신 있어 했던 제가 무기력하게 누워있는 것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저는 이런 가운데 사모님들의 섬김을 받고 전요한목자님과 김아브라함목자님의 배려로 치료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 읽기와 기도 생활에 힘쓰는 가운데 꾸준히 믿음이 자라게 되었습니다. 저는 동역자의 섬김과 주님의 능력으로 신장병에서 치료되어 복음 역사를 위해 힘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연약함으로 인해서 운명적이고 슬픈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는 분들이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고 건강하고 기쁨이 넘치는 삶, 신바람이 나는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가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습니다. 그래서 "내게 손을 댄 자가 누구냐?"고 손 댄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여 무리가 옹위하여 미나이다라고 말하며 예수님께서 지난 밤 광풍을 이기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더니 너무 과민해 지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게 손을 댄 자가 있도다 이는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 앎이로다."라고 하시며 계속 찾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번 한다면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색출 의지를 읽은 여자는 스스로 숨기지 못할 줄을 알고 떨며 나아와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손 댄 연고와 곧 나은 것을 모든 사람 앞에서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여인으로 하여금 이렇게 고백하도록 하신 의도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여인의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가에 손을 대어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을 부정케 하고 예수님의 능력을 훔쳤다는 양심의 가책이 있었습니다. 만약 이대로 가버린다면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심으로 그 믿음을 온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또한 여인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믿음으로 나음 받은 것을 드러내어 그 믿음을 바로 세워주고자 하셨습니다. 즉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나은 것이 아니라 그 믿음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이 모든 사실을 고백하자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시며 축복해주셨습니다. 그녀는 고백하기 전에는 '고백하면 나 죽는다'고 생각했지만 도리어 하나님의 평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거리낌없이 사람들과 교제의 악수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귐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둘째, 야이로와 제자들과 무리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숨겨진 믿음의 역사를 드러내심으로 제자들이나 야이로에게 믿음을 심고자 하셨습니다. 감추어진 역사를 드러내어 역사화함으로 이 천년 뒤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그 역사를 통해서 믿음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소감 모임을 통해서 서로 받은 바 은혜와 믿음을 나누면 서로 큰 격려를 받게 됩니다. 믿음도 풍성해지고 사랑의 관계성도 생기게 되고 서로에게 유익이 됩니다. 또한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서 힘있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소감 모임을 통한 고백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은 자라게 됩니다.
셋째, 고백 훈련은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여인은 떨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를 볼 때 고백을 하려면 자기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백을 하는 가운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믿음과 하나님께서 이루신 역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또한 이런 고백은 자신의 어두움을 빛 가운데 드러냄으로 죄와 싸울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어두운 것들은 드러내면 물러가게 되고 그 자리에 빛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밝고 신바람 나는 인생을 살려면 이런 믿음의 고백들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소감을 나누는 작은 공동체들을 계속해서 많이 세워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믿음의 역사들이 많이 고백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믿음이 더욱 강건해지기를 기도합니다.
II.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신 예수님 (49-56)
예수님께서 여인의 고백을 들으시고 축복하시는 은혜로운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는데 여기에 찬 물을 끼얹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했습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이 말은 평범한 말 같지만 야이로에게는 비수와 같이 그 가슴에 꽂혔습니다. 그는 혈루증에서 나음받은 여인의 고백을 듣고 믿음으로 살고자 결단하고 의의 양양해 있는데 사단은 치명타를 먹인 것입니다. 그의 말은 선생을 더 괴롭게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위해서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불신의 말입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믿지 말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라는 말은 야이로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말이었습니다. 이 일만은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두려움이 그 마음을 덮쳐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원망과 불평을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렇게 소감 발표를 길게 시키시는가? 이 여인은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은가? 소감을 짧게 써야지 주저리 주저리 왜 그렇게 말이 많은가? 하면서 온갖 불평과 원망의 말을 쏟아내며 통곡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을 포기하고 이제는 장례 준비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사람이 절망에 빠지면 방향 감각을 잃고 파괴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열 두령들의 부정적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을 거역하며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이 생긴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40년 동안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다 광야에서 더 엎드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 아이들은 밤에 혼자서 화장실에 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벌레나 귀신이 나올까봐 두렵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갑에 배추색 지폐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돈이 없으면 두려워합니다. 반대로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도난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이를 볼 때 돈이 없어도 두렵고 많아도 두렵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혼기를 놓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저도 자매님들이 믿음이 자라지 않으면서 나이를 먹어가는 것을 보면 두렵습니다. 어떤 분은 애를 낳는 것이 두렵습니다. 아이에게 이상이 있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양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보면 두렵습니다. 이 양이 문제 속에서 실족하지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를 훈련하시는 목자님을 만나는 것이 두렵습니다. 목자님 앞에 자신의 허물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인간 갈등하는 것이 너무 힘들기 때문입니다. 또 핍박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우리들은 여러 모양의 두려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막연한 두려움으로 떨고 있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이렇게 두려워하는 근본 뿌리는 하나님께 대한 불신입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세력에 잡혀서 어두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야이로를 어떻게 건져내셨습니까? 50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서 온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이 야이로에게 어떤 불신을 심게 될 지도 잘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속삭이는 사단의 소리를 다 듣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신에 빠지지 않도록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네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으로 쓰러지는 야이로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딸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에게 믿음을 더욱 확실하게 해 주는 보약이었습니다. 야이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 불신의 세력, 두려움의 세력과 싸웠습니다. 모든 병의 70%이상이 두려움과 근심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두려움은 해로운 것이지만, 복된 두려움 꼭 가져야 할 두려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참으로 유익하고 복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잠1:7)이라고 했읍니다. 하나님 한 분을 두려워 하면 다른 모든 두려움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떠는 사람은 권고하시고 복을 주신다고 했습니다.(잠13:13, 사66:2) 말씀을 멸시하면 멸망합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이는 처음 믿음을 끝까지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지금 주신 말씀을 붙잡으라는 뜻입니다. 그는 장례를 치루어야 할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 희망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가 처음 예수님께 나아올 때보다 상황이 더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큰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병고치는 믿음보다 더 큰 죽음을 이기는 부활 신앙이 그에게 필요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수없이 두려움을 심는 상황이 밀려옵니다. 절망이 되는 상황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입니다(딤후 1:7). 믿음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두려움과 싸우는 것입니다. 믿음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을 보는 것이요 죽음에서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및 아이의 부모 외에는 함께 들어가기를 허락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리고 슬프게 곡하는 사람들을 다 내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자는 아이를 깨우듯이 부르셨습니다. "아이야 일어나라." 그러자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놀라는 부모에게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의 실체인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믿는 자들 속에서 두려움을 제하시고 승리의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있습니까? 잘 풀리리라 예상했던 일들이 뒤집어 졌습니까? 믿었던 사람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습니까? 우리 모두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는 말씀을 붙잡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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