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7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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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7 강
말씀/ 누가복음 7:36-50
요절/ 누가복음 7:47
많은 죄사함 많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에 미쳐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번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는 썩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친절하며 그의 생명을 염려해 주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11:37, 13:31, 14:1). 예수님은 얼마 전에는 세리 레위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서 잔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고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옆으로 기대어 앉으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창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와 약 2m정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세리 레위의 집에서 잔치를 할 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되신 예수님을 보고 마음이 열리고 거룩한 삶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여인을 생명을 가진 인격체로 대우해 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인을 정죄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의 죄가 어떠하든 그녀를 생명을 가진 귀한 인격체로서 영접해주셨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사랑이 있고 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존재론적 사랑은 존재자체를 귀히 여기고 무조건 사랑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부모들이 갓 태어난 아기가 사랑스러워 그 존재 자체를 무조건 기뻐하며 퍼붓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때 부모들은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해도 하나도 문제삼지 않습니다. 아이가 더럽게 하고있어도 마냥 귀엽기만 하고 아이가 살림도구를 어지럽히고 깨부셔도 소망을 가지고 봅니다. 모든 창의성은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부모들은 아이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선악을 따라 상벌을 줍니다. 이때 아이들은 똥오줌을 잘 못 가린다거나 공부를 못할 때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사랑을 받고자 부모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혹시나 벌을 받지 않을까 부모의 눈치를 보게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징계를 반복해 받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존재론적 사랑을 갈망하게됩니다. 자기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기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랑을 원합니다. 본문의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은 이제까지 율법을 어긴 죄악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에서 정죄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여인은 상처를 받고 자기 자신을 이해해주고 존재자체를 귀중히 여겨주는 사랑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 주시고 그녀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이는 찔끔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북받쳐 오르는 눈물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입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도 남았습니다. 여인은 상처가 쌓여 있었습니다. 한 맺힌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깊이 영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앞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사죄와 사랑을 믿고 나왔습니다. 새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긴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수건으로 사용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왕관과 같습니다. 머리털은 여인에게 있어서 순결과 자존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유대 여인들은 남편 이외의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머리를 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머리를 풀뿐 아니라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는 남편에게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볼 때 여인은 예수님을 경배와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를 지지고 볶고 길게 하고 짧게 하고 묶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고 색칠도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하기도 하는 등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바로 그 귀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의 이 행동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 향유는 값으로 치면 1500만원쯤 될 것입니다. 그런데 1500만원 짜리 샴푸를 한 번에 써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치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사랑은 값으로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헌신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도 우리 존재 자체를 인해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탓하시기보다는 사해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인이었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로 병든 우리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실 뿐입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란 다만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나갈 때 우리의 심령에 감사의 눈물이, 지난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때의 눈물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사랑의 고백이요, 신앙고백입니다. 더러운 창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내 존재 자체가 귀하기만 합니다. 이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전에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윙크를 하던 눈에서는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고, 전에 자기를 뽐내기 위해 멋을 부리던 머리털은 예수님의 발을 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 전에는 자기 몸에 발라 냄새를 피우며 뭇 남자들을 타락시켰던 향유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졌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남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수록 지난 날의 죄, 자신의 죄악된 모습으로 인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로 인해 무언가 확신있는 일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끝내는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파멸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정욕과 안일, 불신과 교만 등 죄로 인해 더럽혀 질 때마다 그 피로 깨끗이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예수님은 진실로 우리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알 때 우리 역시 이 여인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재능과 학식과 젊음, 내 열정, 나의 꿈 등 모든 것이 주께 드려지기에 합당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이 여인과 같이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인이 이러는 동안 예수님은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이 모든 행동을 가만히 다 받아주셨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아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죄인인 여자가 갑자기 식사하는 자리에 나타나 눈물을 펑펑 흘리며 머리털을 풀고 발을 씻어주며 그 발에 끊임없이 입 맞추고 비싼 향유를 부어댄다면 이는 감당키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너의 진심을 잘 알았다. 받은 것으로 칠테니 이제 그만해라.'하며 여인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 속에 담긴 진심과 회개, 감사, 그리고 사랑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신 여인의 진정한 구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여자의 헌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여인이 하는대로 놔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는 그는 속에서 부글 부글 끓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5,46)." 시몬은 머쓱해졌습니다. 당시에 손님이 들어올 때 가장 싼 감람유를 뿌려서 호의를 표시했는데 그는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여자가 향유를 붓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자격이 없습니다. 시몬은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이고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죄는 가장 작은 것이라 할찌라도 깨끗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배피를 희생하여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해서 거룩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여인은 창녀이므로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말 죄 사함 받은 양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시몬은 도덕적인 죄를 별로 짓지 않는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죄의 양도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덕기준으로 봐서는 그렇게 생각되지만 죄의 기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인이나 바리새인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도리어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늘 교만하고 위선적이고 판단하기 잘하는 시몬이야말로 더 큰 죄인입니다. 시몬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러면 47절 말씀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곧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의 깊이만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시몬보다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은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깊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주님을 감격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한 형제는 소감발표 때마다 다른 형제의 드라마틱한 소감에 자기 소감이 늘 밋밋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부터 UBF에 나온 것을 후회하며 자기도 세상에서 마음껏 굴러다니다가 왔으면 죄도 깊이 깨닫고 소감도 감동적일텐데 라고 생각을 하며 늘 소감 컴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죄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 인식을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형수들 중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어야 해"하며 세상을 저주하며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거듭난 후 그의 참회록에서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깨문 것까지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깨닫고 있었기에 구원의 감격이 늘 충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며 자기에게 임한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늘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또 그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기독교사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고도 자기 의에 빠지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요 가장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a,10b)" 그러므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깊은 사람은 주님도 그만큼 깊이 사랑합니다.
죄 사함과 주님에 대한 사랑의 관계는 1차 함수입니다. 죄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죄의 은혜도 넘칩니다. 반면에 죄인으로서 자아를 깊이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사죄의 은혜도 적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풍성한 분들을 보면 양들을 섬기는 것도 아주 희생적입니다. 반면에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시몬은 자신이 빚졌다고, 죄인이라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고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섬김은 자기가 먹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빚을, 자신이 너무도 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죄인의 심정이 가득했으나 시몬은 의인의 심정으로 충만했습니다. 시몬은 신앙 생활을 오랫동안 열심히 했지만 의로운 심정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마음은 부요하고 교만해 졌습니다. 그는 열심히 십일조를 하고 금식기도를 했지만 심령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봉사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 생활은 자연히 율법적이고 딱딱하고 은혜가 없었습니다. 반면 여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늘 충만했습니다. 여인은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았습니다. 이때 여인의 내면은 구원의 은혜로 늘 충만했습니다.
그러면 왜 여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았으나 바래새인은 깨달을 수 없었을까요? 이는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이요,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고 자기 잘난 맛에 살면 결코 죄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실되게 돌아볼 때 죄인된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여인과 같이 감격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 앞에서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은 우리야 장군에게 죄를 범한 것 같지만 그는 시편 51편에서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것임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4a)"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이 주신 계명 앞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죄를 잘 깨달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십계명과 로마서1,2장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 수훈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마5:28)" 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십계명의 10번째 계명, 탐심 앞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 죄인됨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이제 그 여인에게 인격적으로 죄 용서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여인에게 구원을 공포하심으로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5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가 클수록 주님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죄 사함의 감격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 그 감격으로 뜨겁게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말씀/ 누가복음 7:36-50
요절/ 누가복음 7:47
많은 죄사함 많은 사랑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우리는 사랑할 때 가장 행복합니다. 사랑에 미쳐본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생명을 걸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한번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는 썩 좋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친절하며 그의 생명을 염려해 주던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11:37, 13:31, 14:1). 예수님은 얼마 전에는 세리 레위의 초청을 받고 그 집에서 잔치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바리새인의 초청을 받고 교제를 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대로 옆으로 기대어 앉으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때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 여인은 아마도 창기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 여자는 남자와 약 2m정도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예수님 때문에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세리 레위의 집에서 잔치를 할 때에 가서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되신 예수님을 보고 마음이 열리고 거룩한 삶에 대한 소망이 생겼습니다. 특히 예수님은 여인을 생명을 가진 인격체로 대우해 주시고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셨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여인을 정죄하며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의 상처를 이해하시고 용서해주셨습니다. 무엇보다도 여인의 죄가 어떠하든 그녀를 생명을 가진 귀한 인격체로서 영접해주셨습니다. 사랑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존재론적 사랑이 있고 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존재론적 사랑은 존재자체를 귀히 여기고 무조건 사랑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부모들이 갓 태어난 아기가 사랑스러워 그 존재 자체를 무조건 기뻐하며 퍼붓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때 부모들은 아이가 무슨 잘못을 해도 하나도 문제삼지 않습니다. 아이가 더럽게 하고있어도 마냥 귀엽기만 하고 아이가 살림도구를 어지럽히고 깨부셔도 소망을 가지고 봅니다. 모든 창의성은 무질서와 혼돈 속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성장하게 되면 부모들은 아이에 대해 무엇인가를 기대하며 선악을 따라 상벌을 줍니다. 이때 아이들은 똥오줌을 잘 못 가린다거나 공부를 못할 때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에 아이들은 사랑을 받고자 부모가 요구하고 기대하는 일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그리고 자기가 잘못했을 때는 혹시나 벌을 받지 않을까 부모의 눈치를 보게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징계를 반복해 받을 때 마음에 상처를 받습니다. 이때부터 아이들은 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존재론적 사랑을 갈망하게됩니다. 자기가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자기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주는 사랑을 원합니다. 본문의 여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인은 이제까지 율법을 어긴 죄악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사회에서 정죄받으며 살아왔습니다. 이로 인해 여인은 상처를 받고 자기 자신을 이해해주고 존재자체를 귀중히 여겨주는 사랑을 갈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여인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겨 주시고 그녀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 여자는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셨습니다. 이는 찔끔 찔끔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북받쳐 오르는 눈물입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입니다. 이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이 여자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지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도 남았습니다. 여인은 상처가 쌓여 있었습니다. 한 맺힌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깊이 영접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 앞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 여자는 예수님의 사죄와 사랑을 믿고 나왔습니다. 새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긴 머리털을 풀어서 예수님의 발수건으로 사용했습니다. 여자에게 있어서 머리털은 왕관과 같습니다. 머리털은 여인에게 있어서 순결과 자존심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유대 여인들은 남편 이외의 사람 앞에서는 절대로 머리를 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머리를 풀뿐 아니라 그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이는 남편에게도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이를 볼 때 여인은 예수님을 경배와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머리를 지지고 볶고 길게 하고 짧게 하고 묶기도 하고 펼치기도 하고 색칠도 빨간색, 초록색, 노란색으로 하기도 하는 등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 난리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바로 그 귀한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겼습니다. 그리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의 이 행동은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 향유는 값으로 치면 1500만원쯤 될 것입니다. 그런데 1500만원 짜리 샴푸를 한 번에 써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볼 때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치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여인은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께 최고의 존경을 표시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받은 바 은혜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인의 눈물과 사랑은 값으로 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머니의 헌신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보실 때도 우리 존재 자체를 인해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탓하시기보다는 사해주시기 위해 친히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온전한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대속물로 드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과거에 어떤 죄인이었든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죄로 병든 우리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실 뿐입니다. 이 예수님 앞에 우리가 해야할 일이란 다만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께 나갈 때 우리의 심령에 감사의 눈물이, 지난 죄에 대한 회개의 눈물이 흐릅니다. 이때의 눈물이야말로 우리가 주님께 드릴 수 있는 가장 값진 사랑의 고백이요, 신앙고백입니다. 더러운 창녀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접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내 존재 자체가 귀하기만 합니다. 이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의 주님이십니다. 나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님께 깊은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예수님을 만난 여인의 삶은 변화되었습니다. 전에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윙크를 하던 눈에서는 감격과 감사의 눈물이 흘렀고, 전에 자기를 뽐내기 위해 멋을 부리던 머리털은 예수님의 발을 씻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또 전에는 자기 몸에 발라 냄새를 피우며 뭇 남자들을 타락시켰던 향유는 예수님의 발에 부어졌습니다. 여인은 자신이 가진 가장 귀하고 값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진정한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될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남이 강요해서가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감사할 때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하고 경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할수록 지난 날의 죄, 자신의 죄악된 모습으로 인해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 흐르게 됩니다. 인생의 허무로 인해 무언가 확신있는 일에 자신을 드리지 못하고 끝내는 지옥에 던져져 영원히 파멸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을 구원해주신 그 은혜는 얼마나 놀랍고도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정욕과 안일, 불신과 교만 등 죄로 인해 더럽혀 질 때마다 그 피로 깨끗이 씻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예수님은 진실로 우리들의 경배와 찬양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이를 알 때 우리 역시 이 여인과 같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주님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나의 재능과 학식과 젊음, 내 열정, 나의 꿈 등 모든 것이 주께 드려지기에 합당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알게 하시고 이 여인과 같이 뜨겁게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러면 여인이 이러는 동안 예수님은 어떻게 하고 계셨습니까? 예수님은 여인의 이 모든 행동을 가만히 다 받아주셨습니다. 여인의 행동은 아주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죄인인 여자가 갑자기 식사하는 자리에 나타나 눈물을 펑펑 흘리며 머리털을 풀고 발을 씻어주며 그 발에 끊임없이 입 맞추고 비싼 향유를 부어댄다면 이는 감당키 어려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같으면 '너의 진심을 잘 알았다. 받은 것으로 칠테니 이제 그만해라.'하며 여인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의 행동 속에 담긴 진심과 회개, 감사, 그리고 사랑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다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랑을 받기에 합당하신 여인의 진정한 구주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대한 여자의 헌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 시몬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진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는 여인이 부정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만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여인이 하는대로 놔두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있는 그는 속에서 부글 부글 끓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시몬의 마음을 아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대답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45,46)." 시몬은 머쓱해졌습니다. 당시에 손님이 들어올 때 가장 싼 감람유를 뿌려서 호의를 표시했는데 그는 그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 여자가 향유를 붓고 예수님께 대한 사랑을 표시한 것에 대해서 왈가왈부 할 자격이 없습니다. 시몬은 오십 데나리온 탕감받은 사람이고 여인은 오백 데나리온 탕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달랐습니다.
47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예수님은 이 여자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것은 저의 사랑함이 많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믿음의 표현입니다. 믿음을 떠난 사랑이 용서의 근거일 수 없습니다. 사랑은 믿음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또한 죄사함은 예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과정입니다. 우리의 죄는 가장 작은 것이라 할찌라도 깨끗이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배피를 희생하여 사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죄를 고백하는 것은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을 통해서 거룩함을 사모하게 됩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여인은 창녀이므로 많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정말 죄 사함 받은 양도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대로 시몬은 도덕적인 죄를 별로 짓지 않는 바리새인이기 때문에 죄의 양도 적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덕기준으로 봐서는 그렇게 생각되지만 죄의 기준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여인이나 바리새인이나 똑같은 죄인입니다. 도리어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고 늘 교만하고 위선적이고 판단하기 잘하는 시몬이야말로 더 큰 죄인입니다. 시몬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일 뿐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그러면 47절 말씀의 참 뜻은 무엇입니까? 이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적은 사람은 적게 사랑하고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많은 사람은 많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곧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의 깊이만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여인이 시몬보다 주님을 더 뜨겁게 사랑한 것은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을 깊이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할 때 죄 사함의 은혜가 넘치게 되고 주님을 감격적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한 형제는 소감발표 때마다 다른 형제의 드라마틱한 소감에 자기 소감이 늘 밋밋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일찍부터 UBF에 나온 것을 후회하며 자기도 세상에서 마음껏 굴러다니다가 왔으면 죄도 깊이 깨닫고 소감도 감동적일텐데 라고 생각을 하며 늘 소감 컴플렉스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이는 뭘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에게 죄가 없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죄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죄 인식을 못하는 영적인 무지가 문제입니다. 사형수들 중에 자기의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극히 적다고 합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어야 해"하며 세상을 저주하며 죽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은 거듭난 후 그의 참회록에서 어릴 때 어머니의 젖을 깨문 것까지 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가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자신의 죄인됨을 깊이 깨닫고 있었기에 구원의 감격이 늘 충만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이며 자기에게 임한 주님의 구원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늘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1:15)" 또 그는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분명했기 때문에 기독교사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하고도 자기 의에 빠지기 보다 하나님의 은혜요 가장 작은 자라고 자신을 고백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9a,10b)" 그러므로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죄인으로서의 자아 인식이 깊은 사람은 주님도 그만큼 깊이 사랑합니다.
죄 사함과 주님에 대한 사랑의 관계는 1차 함수입니다. 죄를 깊이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주님의 사죄의 은혜도 넘칩니다. 반면에 죄인으로서 자아를 깊이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당연히 사죄의 은혜도 적고 주님을 향한 사랑도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죄의 은혜가 풍성한 분들을 보면 양들을 섬기는 것도 아주 희생적입니다. 반면에 자기 의가 충만한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판단의 대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은 자기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는 사람이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본문의 시몬은 자신이 빚졌다고, 죄인이라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도 없었고 주님께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의 섬김은 자기가 먹던 식탁에 숟가락 하나 더 얹어 놓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예수님으로부터 너무도 큰 빚을, 자신이 너무도 큰 죄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주님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할 수 있었고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인은 죄인의 심정이 가득했으나 시몬은 의인의 심정으로 충만했습니다. 시몬은 신앙 생활을 오랫동안 열심히 했지만 의로운 심정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자신이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마음은 부요하고 교만해 졌습니다. 그는 열심히 십일조를 하고 금식기도를 했지만 심령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봉사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의 신앙 생활은 자연히 율법적이고 딱딱하고 은혜가 없었습니다. 반면 여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죄인의 심정으로 늘 충만했습니다. 여인은 늘 상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살았습니다. 이때 여인의 내면은 구원의 은혜로 늘 충만했습니다.
그러면 왜 여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깊이 깨달았으나 바래새인은 깨달을 수 없었을까요? 이는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서 생활을 했기 때문이요, 여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람 앞에서 살고 자기 잘난 맛에 살면 결코 죄인된 자아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진실되게 돌아볼 때 죄인된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여인과 같이 감격적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죄는 사람들 앞에서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절대적으로 비추어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다윗은 우리야 장군에게 죄를 범한 것 같지만 그는 시편 51편에서 자신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범한 것임을 알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51:4a)" 우리가 늘 하나님 앞에서 또 하나님이 주신 계명 앞에서 자신의 죄를 생각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신의 죄를 잘 깨달을 수 없을 때 우리는 십계명과 로마서1,2장 그리고 예수님의 산상 수훈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추어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이미 간음한 자(마5:28)" 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십계명의 10번째 계명, 탐심 앞에서 자신을 돌아봄으로 죄인됨을 발견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주님은 이제 그 여인에게 인격적으로 죄 용서를 확신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했습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죄를 사하러 오신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여인에게 구원을 공포하심으로 마음에 구원의 확신을 주시고 평안을 주셨습니다. 50절을 다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죄 사함의 은혜가 클수록 주님도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말씀 앞에서 죄인으로서의 자아를 깊이 발견하고 죄 사함의 감격가운데 살기를 기도합니다. 또 그 감격으로 뜨겁게 양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섬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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