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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4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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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633회 작성일 03-01-1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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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4 강
말씀/ 누가복음 5:27-39 
요절/ 누가복음 5:38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황량하고 거친 산 속에 살고 있는 새 한 마리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폭풍을 만났습니다. 그 새는 자기의 둥지를 떠나지 않기 위하여 있는 힘을 다해서 그 산을 향해 날아가려고 발버둥쳤습니다. 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산을 떠나면 죽을 만 같아서 안간힘을 썼으나 그것은 허사였습니다. 폭풍을 이기고 날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그 새는 폭풍이 부는 대로 자기의 몸을 맡기고 그 방향으로 날기 시작했습니다. 강한 폭풍을 따라 한참 날아갔습니다. 드디어 폭풍도 약해졌습니다. 그런데 그 새의 눈 앞에는 푸른 초장과 멋진 수풀의 아름다운 산이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살던 거친 수풀의 산과는 비교가 안 되는 훌륭한 수풀과 산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시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뉴 밀레니엄'을 맞이하여 인네텃과 정보화의 폭풍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것이 새로와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 한 구석에서는 해 아래 새것은 없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뭔가 겉의 새로움으로 채울 수 없는 속의 새로움을. 성격이 새로와지고 마음이 새로와지며 삶이 새로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속의 새로움'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세리 레위가 어떻게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 알아봅시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나가사 가버나움 세관을 지나시는데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은 것을 보셨습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의 개, 늑대라고 별명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백성들의 피를 빨아먹는 흡혈귀라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유대인이면서 백성들의 세금을 많이 거두어다가 로마에 바치고 또 자기를 위해서 더 착복을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마차가 도로를 이용한다고 해서 통행세, 마차를 세워 놓으면 주차세, 술취한 사람에게는 취득세 등등 멋대로 세금 고지서를 발부하고 내지 않으면 재산을 차압해 버렸습니다. 이로 인해 그는 백성들에게서 원성을 많이 샀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현대인의 깊은 고독과 공허감은 사랑의 상실에서 온다"고 합니다.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내가 사랑하고 있구나"하는 느낌이 없기에 깊은 허무를 느낍니다. 살면서 그토록 사랑할 대상이 없다면 삶은 공허한 것입니다. 그런데 고독한 레위가 바로 그랬습니다. 레위가 세리가 된데에는 한 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맹물로 배를 채우고 수제비로 일주일을 보내기도 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빚쟁이들에게  수없이 시달리면서 돈을 벌어야  사람 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의 청년이었지만 로마라는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했습니다. 선민으로서의 자부심과 명예보다는 실리를 추구했습니다. 그의 가치관은 현실적이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세리가 되어 좋은 저택에서 BMW 마차를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돈을 벌어서 사치를 하고 욕심껏 소비를 하면 당장은 내가 무엇이 된 것 같은데 그때 뿐입니다. 그리고 허무함이 밀려옵니다. 인간의 영혼은 소유로 채워질 수 없습니다. 세리 레위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 세관에 멍하니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레위의 마음을 읽으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레위는 이제까지 돈을 좇았습니다. 그가 세금 징수를 잘 하려면 돈의 흐름을 파악해야 했습니다. 또 사람들이 돈을 어디에 숨기는지 어떻게 검은 돈을  세탁하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돈으로 평가했습니다. 얼마 전에는 수뢰혐의로 구속된 광진세무서 8급 공무원 이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거액의 뇌물을 받은 내역이 적힌 부인의 메모장이 발견됐습니다. 이 장부에는 세무공무원인 이씨가 매일 50만원에서 3백만원까지의 뇌물을 받아 부인에게 전달해준 것으로 기록돼 있었습니다. 세간에는 세무 공무원 3년해서 평생 먹고 살 것을 마련한다고 합니다. 세리 레위는 세리계의 부패 고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불의한 재물을 탐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신도 의롭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로마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란과 곤고가 있으리니(롬2:8.9)” 레위는 불의를 행함으로 그 마음에 환란과 곤고가 가득했습니다. 그가 소문을 통해서 듣는 세례 요한의 회개의 메시지와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갈등을 더욱 깊게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레위를 예수님께서  보시고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레위의 고민과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의 삶의 방향을 돈을 좇는데서 예수님을 배우는데로 전환하라는 것입니다. 그의 인생 목표를 예수님을 배우고 닮는데 두라는 것입니다. 제자란 스승의 인격과 가치관과 사상을 배우는 자입니다. 레위는 예수님과의 교제를 힘쓰는 가운데 그를 닮을 수 있습니다.  레위는 열심히 살기는 하는데 방향을 잘못 잡았습니다. 그 결과 죄를 짓고 사람들에게 욕을 먹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사실 세리 레위를 제자로 삼게 되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욕하기 쉽습니다.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고 비난하였습니다. 또 열심당원 시몬과 같은 사람은 세리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함께 하기가 껄끄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리 레위에게 소망을 두시고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리 레위가 장차 마태복음의 저자요 말씀의 종으로 쓰임 받을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그 자체가 은혜였습니다. 만약 레위가 그냥 세리로만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역사에 기록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냥 비참한 죄인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제자에로의 부르심에 순종하였을 때 역사상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저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좇으니라." 세리 레위는 자기가 쌓아놓은 것들을 미련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이 모든 것 속에는 회계 장부와 주판 등을 포함하여 자신의 욕심과 계획, 욕먹어 가면서 모아놓은 재산, 편안한 생활과 쾌락등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들을 버리기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사실 얻기보다 버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나 버리는 자만이 행복을 얻을 권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레위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29절을 보십시오.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았는지라." 레위는 혼자서 자기만 먹던 데서 이제는 나눌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고독하던 사람이었는데 이제는 친구들이 많아졌습니다. 거기에는 이세리, 김세리, 박세리, 요술 공주 세리도 함께 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큰 잔치를 벌인 이유는 예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는 새로운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돈을 좇는 것보다 더 좋은 삶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섬기는 삶의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축복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돈을 어떻게 어디에 써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잔치를 통해서 수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세리들의 목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해서 많은 은혜와 사랑을 받았지만 동시에 핍박이라는 차원 높은 축복도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 금식하던 바리새인들이 냄새를 맡고 잔치 집에 와서 고춧가루를 뿌렸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바리새인들은 회개한 자의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사전에는 회개와 용서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율법주의로 인해서 차갑고 딱딱했습니다. 그들이 볼 때 제자들이 음식을 먹는 것은 탐식이고, 자기들이 먹으면 몸을 보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리들과 잘 어울리면 야합을 잘하는 것이고, 그들이 죄인들과 잘 어울리면 포용력이 넓은 것입니다. 바리새적인 관점에서 보면 남이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이기적인 사고방식이고, 내가 각자 음식값을 내자고 제안하는 것은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됩니다. 남이 자기 의견만을 주장하면 고집불통이기 때문이고, 내가 내 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신념이 워낙 뚜렷해서입니다. 남이 열을 내는 것은 다혈질이기 때문이고, 내가 열을 내는 것은 풍부한 감성 때문입니다. 남이 말을 느리게 하면 듣는 사람이 울화통 터지지만, 내가 말을 느리게 하면 듣는 사람까지 차분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죄인들은 함께 할 수 없는 자들이요 변화될 수 없다는 고정 관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을 의롭다고 생각할수록 그들은 더욱 고립되어 갔고 신뢰를 잃어갔습니다. 그들은 죄인들을 감당하기 보다 잘라내고자 하는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요구하는 마음은 연약한 자들을 짓이기고 더욱 병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31,32)."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가 있습니다. 여기서 건강한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모르는 자를 말하고 병든 자는 죄인임을 아는 자를 말합니다. 이 세상에 건강한 의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병든 죄인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에 차이가 있습니다. 병든 사람이 자기의 병을 인식하지 못하면 병은 더욱 깊어가고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세리 레위도 처음에는 세리들과 함께 있다보니 착복을 해도 죄가 죄인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면서 어떤 때는 갈등이 되었지만 적당히 합리화시키고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정한 세 외에는 더 늑징치 말라고 하였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죄인됨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 훌륭하신 선배 목자님의 성결한 삶을 통해서 자신의 죄인됨을 깨닫게 되고 다른 한 분의 섬기는 생활을 통해서 자신의 이기적인 모습을 보게되고 한 목자님의 도적적으로 탁월한 삶을 통해서 자신이 죄인됨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죄악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신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거룩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자기 죄가 다 드러납니다. 무엇보다 거룩하신 예수님과 율법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병든 모습, 썩은 모습을  보고 절망하게 됩니다. 성경은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병이 조금 있을 때 겸손하게 의사에게 보이고 치료를 받으면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웬만해서는 병원에 가기를 싫어하듯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기가 싫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병든 죄인들을 어떻게 치료해 주십니까? 보통 환자가 의사를 찾아가는 것인데 예수님은 병자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식사도 하시고 대화를 하시면서 치료를 하십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이메일이나 전화만으로는 안됩니다. 의사가 환자와 함께 하면서 병력에 대해서 물어보고 어떻게 아픈가도 물어보고 환부를 보면서 치료를 합니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인격적인 관계성이 맺어져야 하고 환자가 의사를 믿어야 합니다. 제가 신장병으로 고생할 때 한 환자는 의사들을 믿지 못해서 이 의사 저 의사에게 돌아다니고 결국 병도 더욱 심화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죄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의원되신 예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과 속죄 사역을 믿게 되면 작은 죄라도 들고 나아가서 깨끗함을 받고 치료되어 의롭고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건강하게 만드사 하나님을 위하여 선한 열매를 맺는 사명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같이 병든 죄인들을 돌보는 목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의 집에서 큰 잔치를 하는 것을 보고 마음이 뒤틀렸습니다. 그들은 경건한 체 하며 예수님께 따졌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얼굴은 외식을 위한 금식이었기 때문에 어두웠습니다. 그들의 신앙 생활에는 웃음이 없고 칙칙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혼인 집에도 가고 안식일에 밀이삭도 잘라먹고 바리새인들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세리의 집에서 큰 잔치를 하면서 기쁨이 충만했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자유스러웠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의 제자들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왜 제자들이 금식할 수 없는 지 설명하셨습니다.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우리가 구마가, 송의준목자님 결혼식에 갔는데 금식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전통적인 유대인들의 픙습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결혼식에 참석해야 할 손님은 금식과 같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를 수행해야 할 때에는 금식을 하지 않아도 실례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래야 즐거워하는 결혼식 잔치가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유대인들은 시내 산에서 맺은 언약이 이스라엘 국가와 하나님 사이의 결혼으로 묘사했고 토라 즉 율법은 결혼 서약으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여 실현될 언약의 갱신은 유대주의 안에서는 참된 결혼이 이루어질 때로 생각되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적으로 임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시고 제자들은 혼인집 손님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혼인집에 오면 자연히 기쁘고 즐겁습니다. 결혼한 사람들은 신혼의 즐거움을 생각하면서 즐거워하고 미혼의 사람들은 결혼할 소망으로 즐거워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혼인집에 가면 웃음이 많아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게 되면 기쁨이 충만해지고 즐거운 잔치 집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심령이 펴지고 밝고 아름다웠습니다. 축제와 희락의 때에 어찌 금식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메시야의 희락의 때가 시작되었고 제자들과 심령이 가난한 자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들은 천국이 저희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오랫 동안 학수 고대하던 큰 결혼 잔치는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으로 경건한 자들이 애태우며 갈망해오던 구원의 때가 이미 왔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신랑을 빼앗기는  날에는 금식할 것입니다. 즉 신랑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는 금식할 것입니다. 또 그들 마음에서 예수님이 주인이 아니실 때는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 한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게 됩니다. 새 옷은 신축성이 있지만 낡은 옷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여기서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그가 전하신 복음입니다. 낡은 가죽부대는 율법주의와 옛 언약, 매너리즘에 빠져 있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굳어 있고 생명력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딱딱하고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담지 못하면 예수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고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세 가지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현재적인 실제로서 임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지켜오던 율법이나 옛 언약이 '낡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명료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여러분에게 임하였기 때문입니다(눅11:20)." 바울은 고후 5:17절에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보다 더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롬13:17).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려면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기초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마음을 다스리실 때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로 인해서 은혜의 샘이 터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혼인 잔치와 같은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람들이 묵은 포도주를 좋아하듯이 옛 것에 익숙해 있어서 그것을 좋아합니다. 즉 죄악된 옛 생활, 전통, 과거의 것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저도 타락한 본성으로 인해서 쉽게 작은 성공에 안주하기를 잘하고 고정 관념에 박혀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이 늘어져서 적당히 안일하게 일할 때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고 성령으로 육의 생각들을 죽이고 몰아낼 때 마음 판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로 새로워지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면 그 안에 있는 생명 때문에 늘 새롭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고후4:16).  이 시간 아무 것도 요구치 않으시며 우리의 현재 모습 그대로를 용납하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함으로 새로운 감동, 새로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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