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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000년 누가복음 제 3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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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엘리야
댓글 0건 조회 4,679회 작성일 03-01-1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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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누가복음 제 3 강
말씀/ 누가복음 5:12-26
요절/ 누가복음 5:20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깨끗케하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내용입니다. 문둥병과 죄는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 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여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행될수록 더럽게 되고  아름다운 형상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무감각증에 걸려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둘 다 죽음으로 끝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고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으로 일어나 걷게 하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깨끗하고 박력있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신 예수님 (12-16)

예수님께서 한 동네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문둥병에는 2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한가지는 결핵성 문둥병입니다. 이것은 관절에 나균이 침입하는 것입니다. 관절에 나균이 침입하면 처음에는 관절에 통증이 생기지만 점점 그 통증이 없어집니다. 몸에 작은 반점이 생기고. 뺨, 코, 입술이 삐뚤어지고 얼굴 전체가 험상궂게 변형됩니다. 몸의 각 부분에 궤양이 생기고 심한 악취가 납니다. 눈썹이 빠지고 눈이 찌그러집니다. 쉰 목소리가 나고 호흡이 거칠어집니다. 결핵성 문둥병에 걸리면 약 9년 정도 앓다가 혼수상태에 빠져 죽게 됩니다. 다른 한가지는 마비성 문둥병입니다. 이는 신경에 나균이 침투하는 것입니다. 온몸에 신경감각이 없어집니다. 손을 불 속에 넣어서 살이 타들어가도 감각이 없습니다. 눈에 파리가 붙어도 감각이 없으니 간지러운 줄을 모릅니다. 살이 썩고 손발이 떨어져 나가도 아픈 줄 모릅니다. 이 병은 20-30년 정도 앓다가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몸뚱이만 남아 결국 비참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혼합된 문둥병이 있습니다. 나균은 습하고 어둡고 더운데서 잘 자랍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 지방에 문둥병자가 많았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특히 경상도에 많아서 경상도 보리문둥이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문둥병자의 삶이 어떠했을까요? 보통 사람들은 얼굴에 여드름만 나도 심히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그는 얼굴에서 고름이 나고 밤톨만한 물집이 생기고 눈썹이 빠지고 코가 문드러져 내려 괴물같이 흉칙한 모습이 되는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어느 날 손가락이 또 하나 없어진 것을 보아야 했습니다. 발가락도 떨어지고 눈동자가 빠져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사람과 함께 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문둥병은 접촉을 통해서 전염되기 때문에 격리시켜야 합니다. 집안에서 병자가 생기면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돌보지만 문둥병이 생기면 집안에서 나가 달라고 하게 됩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버림을 받아서 고독하게 일생을 보내야 합니다. 그는 사람으로 태어났으나 사람과 함께 사람같이 살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없는 동굴에서 말 못하는 돌멩이와 벌레와 함께 살아야 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 사람 있는 곳에 가면 사람들은 문둥이 왔다며 돌을 던져 그를 내어쫓았습니다.

이런 그에게 하루는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각양 각색의 병을 고치신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그는 이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사람들의 돌 세례가 두려웠지만 믿음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엎드려 간구하였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이것은 그의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엎드려 간구하는 것을 보면 겸손하면서도 간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창조하셨는데 왜 문둥이가 되게 했느냐고 원망하기 쉬운데 그는 오직 주님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말은 예수님께 대한 회의나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는 자세입니다. 그는 주님의 주권을 믿고 겸손하게 긍휼을 구했습니다. 그는 자기의 뜻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주장하는 자세로, 반드시 고쳐 내라는 식으로 한을 품고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주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도록 간구했습니다. 이 기도야말로 주님의 심금을 울리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였습니다. 또한 그의 기도는 목숨을 건 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나오기까지 돌에 맞아 죽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살기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온 것 자체가 큰 믿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 타락했다고 생각하면 절망하고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포기합니다. 불신의 마음으로 물러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면 즉각 치료를 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어린 아이의 피부와 같이 깨끗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간구에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문둥병자의 몸에 손을 대신 것은 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불쌍히 여김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손이 문둥병자의 몸에 닿았을 때 그는 놀랐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부정한 그의 몸에 손을 대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의 따뜻한 손이 그리웠지만 아무도 그를 만져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손을 대셨다'는 말은 헬라어로 '하프아토'인데 그 어근은 '붙들어 매다'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안으시고 손으로 등을 만지셨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이 문둥병자의 몸에 닿았을 때 그의 온 몸은 사랑의 온기로 전율했습니다.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의 손길은 그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의 몸을 대셨을 때 그의 마음까지 닿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몸에 손을 대심으로 그의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마음의 상처까지 치료해 주셨습니다. 내면의 고독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는 온 몸에 문둥병이 들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동글동글하게 나온 고름에 손을 대셨을 것입니다.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는 것은 부정하게 될 뿐 아니라 전염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손을 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피고름이 나는 상처에 손을 대심으로 그의 병과 괴로움을 담당하셨습니다. 다미안 신부는 모로카이 섬에 귀양온 나병환자들의 끔찍한 꼴을 보고 크게 마음이 움직여 스스로 그 곳에 들어가 나병환자들과 일생을 함께 한 위대한 선교사입니다. 처음에는 온 정성을 다해 봉사하는데도 나병환자들이 도무지 받아 주지를 않았습니다.  당신은 감정이 사치스러운 사람이오. 우리 같은 불쌍한 사람들과 지내는 것이 당신 같은 정상인으로서는 오히려 향락이 아니겠소? 하며 그의 진실된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다미안 신부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차라리 제게 문둥병을 주십시오. 마침내 그 역시 문둥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문둥병 환자들이 그를 친하게 대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병든 사람은 사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사람을 어루만지는 순간은 곧 정신을 치료하는 순간이요, 마음을 치료하는 순간이요, 고독한 심령을 치료하시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나서 육체를 치료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권능으로 그를 치료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러자 문둥병이 곧 떠났습니다.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과 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새로 태어난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깨끗하게 된 손을 보고 놀랐습니다. 그리고 만져보았습니다. 깨끗케 된 얼굴을 만져보며 기쁨에 넘쳐서 눈물을 줄줄 흘렸습니다. 자신도 이제는 깨끗한 얼굴로 사람답게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이 기쁨을 온 세상에 알리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깨끗한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거룩한 영혼을 갖기를 원하시고 정결한 영혼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말못할 고민들을 다 아시고 깨끗케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서 영혼이 오염된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죄가 너무나 더럽고 진물이 나고 냄새가 나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 소망을 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시대인 오늘날은 죄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서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죄를 당연시 여길 뿐 아니라 남도 다 즐기며 사는데 왜? 하며 합리화하고 도리어 자랑합니다. 인터넷 접속을 통해 너무도 쉽게 음란물을 접하게 된 젊은이들은 음란물에 중독이 되어 삽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인터넷 음란사이트에 들어가 음란 만화, 동영상, 야한 글들을 비롯하여 미국에서 일본 것까지 마음대로 접할 수 있습니다. 요즘 남자 대학생의 경우 거의 대부분 음란물에 대한 경험이 있고 또 즐긴다고 합니다. PC 방에서 채팅을 통해서 원조교제를 하는데 여고생의 30%가 이를 통해서 물질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까지 이런 못된 짓을 하고 있습니다. 컴퓨터 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죄에, 특히 음란에 온 나라가 중독이 되어 있고 무감각해져 가고 있습니다. 지난번 개강맞이 수양회에서 신국원교수님의 포스트모던이즘 강의를 통해 알게 되었듯이 연극, 영화, 음악, 미술을 비롯하여 모든 영역에 걸쳐 죄에 대해 무감각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치 문둥병 말기 환자 같이, AIDS말기 환자같이 되었습니다. 속을 들여다보면 너무도 썩어서 어디서부터 수술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걷잡을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순결하고 아름다운 형상을 다 잃고 내면이 문둥병자와 같이, 짐승같이 된 오늘날 이 시대는 소돔 고모라와 같습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소돔 고모라 사람들에게 사과를 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시대에 사람들은 깨끗함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은 목마름이 있습니다. 그런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보편화되어 가는 이 음란의 죄는 인간의 힘으로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보혈로만 치료가 가능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의 더러워진 양심과 생각과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만이 주홍같이 붉은 우리의 죄와 먹빛보다 검은 우리의 죄를 양털같이 희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샘물과 같습니다. 어떤 죄도 씻어내는 힘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인류가 고안해 낸 어떤 백신보다 강력하여 온몸에 번진 문둥병같은 우리의 죄를 깨끗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피가 흐르게 할 수 있고 새 살을 돋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문둥병자의 몸에 대셨을 때 문둥병이 깨끗하게된 것같이 예수님의 보혈은 어떤 죄도 씻어 새사람 만들 수 있습니다. 죄에 중독되어 문둥병자와 같이 된 우리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소망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만이 사람의 영혼을  깨끗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그의 보혈만이 우리를 깨끗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문둥병에서 깨끗케 된 사람에게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나음을 받은 사람이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서 사회로 복귀하도록 하시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하도록 도우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경계하시면 할수록 소문은 더욱 퍼져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으려고 애쓰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온 사람들을 돕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자 양들은 기를 쓰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허다한 무리가 몰려 올 때 우리 같으면 일 속에 파묻히기 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16). 예수님은 할 일이 많을 때에 기도에 힘쓰셨습니다. 예수님은 개인기도 생활을 희생하면서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달려가 기도하심으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여시고 하나님을 향해 열린 삶을 사셨습니다.

II.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신 예수님 (17-26)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도 앉아있었습니다. 그들은 배우러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행동을 감시하고 조사하여 송사할 꼬투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실 때에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나온 열등감, 이기심, 교만과 미움, 시기심등 내적인 병뿐 아니라 위염, 축농증, 요통, 치질, 두통, 각종 종양등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습니다. 중풍병은 대개 뇌혈관이 터져서 생긴다고 합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서는 중풍병의 원인은 흔히 열이 심한 데서 생긴다고 합니다. 이것은 '대체로 5가지 감정(기뻐하는 것[喜], 성내는 것[怒], 생각하고 사색하는 것[思], 슬퍼하는 것[悲], 무서워하는 것[恐])이 몹시 지나치면 갑자기 중풍이 생기는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또 살찐 사람들이 중풍에 걸리기 쉽습니다. 양의사들에 의하면 과식을 하거나 안일한 삶을 살거나 음란한 생활 등이 중풍병의 치명적인 원인이 됩니다. 중풍병에 걸리게 되면 전신이 마비되어 움직이지를 못하고 누워지내게 됩니다. 배설 기능도 자유롭게 통제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3년 중풍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중풍병자를 섬기기가 그렇게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친구들을 잘 두었습니다. 친구들이 이 중풍병자를 돕고자 침상 채 메고 예수님께 나아가 치료를 받고자 하였는데 사람들로 인해서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복음 역사를 섬길 때에도 선배들이나 친구들, 가족들로 인해서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길을 만들었습니까? 19b절을 보십시오.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 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그들은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가로 2미터 세로 1미터의 큰 구멍을 뚫었습니다. 사람들이 위를 쳐다보니 흙이 우두둑 떨어졌습니다. 잠시 후 큰 구멍이 나고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파란 하늘과 떠가는 뭉게 구름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 침상이 끼우뚱 끼우뚱 내려오더니 예수님 앞에 정확히 착륙하였습니다.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길이 없을 때 길을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는데 그들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친구에 대해서 사무치는 목자의 심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지금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예수님께 나아가고자 했을 때 하나님이 창조적인 지혜를 주셨습니다. 또한 그들이 지붕을 뚫은 것을 보면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고자 하는 희생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인에게 손해 배상을 해 줄 생각을 하고 지붕을 뚫었습니다. 이런 정신 자세가 있으면 스피릿이 생기고 두려움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의 도전과 믿음, 희생정신은 지금도 하나님의 역사를 섬기다가 한계에 부딪치는 저희들에게 좋은 본이 됩니다. 그들은 각자의 은사를 살려서 동역하는 가운데 중풍병자 친구를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또한 그들에게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 불개미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길이 없으면 만들어 내는 영적 그린베레였습니다. 최초로 북극을 탐험한 R.E Peary는 다섯 번을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동상으로 인해 발가락이 8개나 짤린 채 병상에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 할 수밖에 없는 이 상황에서도 침상에 누워 벽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길을 찾고야 말겠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만들겠다" 결국 그는 6번만에 성공했습니다. 우리가 캠퍼스 지성인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고자 할 때 일대일 세 번을 넘기지 못하는 장애물, 두려움의 장애물등 많은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기 쉽습니다. 오늘만 날인가 하는 안일한 자세로 물러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중풍병자 친구들의 Never give up spirit을 배워야겠습니다.
그들이 지붕을 뚫을 때 말씀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머리 위로 먼지가 날리고 흙이 떨어지고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주인은 '이 놈들 누구 집을 함부로 뜯느냐'고 얼굴이 울그락 붉그락하면서 언성을 높였을 것입니다.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새치기 하지 말라고 아우성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행동은 너무 거칠어 보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회의하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보셨습니까? 20a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모보다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목자의 경륜이나 타이틀이나 그의 말을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보십니다. 그들의 믿음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의 행동을 볼 때 살아 있는 믿음, 행동하는 믿음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믿음을 가지고 자기에게 나아오는 자를 기뻐하시고 상급을 주십니다(히11:6). 그러면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아온 그에게 어떤 상급을 주셨습니까?

20b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당장에 병을 고쳐주기 보다 근본문제를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도울 때 겉에 드러나는 것보다 원인 치료를 하시는 분이십니다. 중풍병자가 누워 있으면서 무슨 죄를 지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예수님은 병 자체보다 죄로 인한 인간의 비참함에 더욱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병이 낫는다고 해도 죄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실로 놀라운 사죄의 선포입니다. 이는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선포하심으로 그를 얽어 메고 있던 모든 죄의 사슬들을 끊어주셨습니다. 그를 얽어 메고 있던 부정적인 생각, 허무한 생각, 열등감, 정욕적인 생각, 남을 원망하고 불평하던 마음, 의존심등 모든 죄악된 생각의 고리들을 끊어 주셨습니다. 이때 그의 내면에 자유와 평강이 임하고 삶의 의욕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사죄의 권세자이심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사죄의 권세와 능력이 있으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귀한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대속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근본적으로 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성을 가진 몸을 입고 죄악된 세상에 살기 때문에 여전히 죄에 시달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고 주님의 죄사함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진실된 한편의 소감을 통해 매주 마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덧입고 날마다 새롭게 새롭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회개하는 생활을 통하여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에 성령께서 강하게 일하십니다. 이때 우리는 능력있고 힘찬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다시 죄에 빠져 허우적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혼자 끙끙 될 것이 아니라 사죄의 권세자 되신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들은 죄사함을 선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언은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는 신성모독이라고 궁시렁거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사죄의 권세자시오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궁시렁거림을 아시고 대답하셨습니다.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한마디로 그가 이 땅에서 죄사함을 받은 증거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죄사함을 받자 삶에 많은 변화가 왔습니다. 항상 누워있던 사람이 즉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항상 의존적이던 사람이 자립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중풍이의 팔과 다리에 힘이 솟자 즉시 일어나 침상을 한 손에 들고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일하러 가세! 일하러 가! 하나님 주신 동산!"찬송가를 부르며 당당히 집으로 갔습니다. 입만 열었다하면 불평하던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사함이 있는 곳에는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에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말씀을 통해 문둥병자를 깨끗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배웠습니다. 또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선포하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을 배웠습니다. 죄로 인해 문둥병자같이 더럽고 무감각한  우리들에게 예수님이 사랑과 능력의 손으로 만져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 사죄의 권세자 예수님 앞에 나아가 날마다 죄사함의 은혜를 충만히 덧입고 힘찬 인생,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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