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강 2000년 가을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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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가을 캠퍼스 바이블 아카데미
내가 누구를 보낼꼬?
말씀: 이사야6:1-13
요절: 이사야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소망을 선포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하시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불러 주시길 기도합니다.
첫째,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1a)
1절은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마자 장례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뎅 그렁, 그런데 그 종소리는 마치 하나님의 선민 유대의 죽음을 알리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대를 통치했습니다(B.C.787-735). 통치초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그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견고해지자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한번은 대제사장의 직분을 월권하여 성전에서 분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별된 제사장이 할 일이지 세상 정치를 하는 왕이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이렇게 축복해주셨는데 내가 분향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사랴는 80명의 제사장과 함께 왕을 따라가 이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노를 발했습니다. ' 네 이놈, 왕이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느냐 무엄하다. ' 바로 이때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발하여 죽을 때까지 문둥병자로 지냈습니다(삼하26:16-21) 그는 재위기간 국가의 경제와 국방 그리고 국제관계를 잘 유지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의 장기간의 독재는 지도층의 부패를 초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내적인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부도덕하였습니다(3:14-16). 젊은 지성인들은 절망감을 잊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셨습니다(5:11,12). 게다가 웃시야 왕의 계승자인 아하스는 불신으로 인해 두려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초강대국들은 유대를 삼키고자 입맛을 다시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백성들은 매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자기 나라와 세계의 상황을 바라보았을 때 절망하였습니다(5:30b). 우리 나라를 볼 때 계속적인 정치 싸움, 의약 분쟁, 금융 위기, 대우 사태 등등을 볼 때 마음이 어둡습니다. 취업문제로 청년들의 고뇌는 깊어 갑니다. 당시 이사야는 기본적으로 자기 가족만 돌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내 아내와 자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둘째, 보좌에 앉으신 주님(1b-7)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초강대국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유대는 자신을 방어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군은 언제라도 유대를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쪽 바벨론 제국도 유대 백성을 침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다른 나라의 침략과 파괴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사야가 자신의 절망을 잊기 위해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성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기적입니까? 그는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1b은 말씀합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 광경을 본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깨달은 이사야는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52:7)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웃시야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나 세상 강국이 자기 뜻대로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이,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현상을 분석하며 정치, 경제를 예견합니다. 그러나 누가 세상 앞날을 알아 이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오직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께서 세상을 내려보시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러나 강력한 손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만유의 주권자시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분이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스랍은 "불타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활활타고 빛을 발하면서 "천사들을 영으로 만들고 자기 사역자들을 불의 화염으로 만드신" 분을 경배합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여호와는 천사든 인간이든 불이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제대로 섬겨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 외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멸하는 불이 있는 곳에서 미온적인 자세나 무관심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보좌 앞에서 섬기려면 스랍이나 불타는 영이 되어야 합니다. 무기력하거나 맥빠진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이 타게 되면 사랑이 생기고 영이 깨어나게 됩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인 거룩한 열심으로 채워 불타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불과 바람입니다. 날개는 신속하게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곰같이 느리고 둔감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은 민첩하게 움직이고 빨리 행동하고 각성하고 아주 신속하게 주님의 사업 위로 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지치거나, 꾸물대거나, 느릿느릿하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도록 날개가 여섯 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천사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과 발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여호와의 보좌에서 발하는 밝은 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겸손히 얼굴을 가리우고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웠습니다. 스랍들은 죄가 없다하더라도 자신이 피조물이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무가치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있는 한 쌍의 날개들은 날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 네 개의 날개를 사용하고 활동적인 에너지를 위해 두 개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자신을 가리는데 네 개의 날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존경과 겸손의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경배는 활동을 능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마르다와 그녀의 봉사보다 더 낫게 취급되었듯이 거룩한 존경이 우선해야 하며 열정적인 섬김이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계명을 행하는 면에서 뛰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여섯 날개가 달린 듯이 신속하게 달려가서 모든 선한 말과 일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천사들은 찬송하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거룩함 이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표현할 수 없는 특질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분 짓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왜 우리가 속된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합니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소원입니다. 이사야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슬픈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3b은 말씀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을 보기 전 이사야는 온 땅이 절망과 타락한 남녀들로 충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와 같이 많은 현대인들이 말합니다. 세상은 미친 사람들로 충만한 것 같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온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많은 믿음의 남녀들을 있음을 보게 됩니다. 4절은 말합니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한 위대함과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이사야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십니다(5-7).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전통적인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즉시 죽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사야는 이제까지 의로운 심정으로 죄악된 시대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입술로 세상과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입술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입술로 정치 지도자를 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영광이 충만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그렇게 함부로 말을 뱉어낸 자기 입술이 얼마나 부정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그 뜻대로 주관하고 계신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하나님 역사를 얼마나 비판했는가를 알게되었습니다. ' 내가 하나님도 모르고 이렇게 함부로 입을 놀렸다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며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한 시대의 문제는 통치자나 제도의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죄악되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구삼고 온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신이 문제입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입술이 부정한 것이 문제요 나의 입술이 부정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입으로 믿음의 말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죄악된 생각을 가지고 죄악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훈련이요 징계요 거기에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 섭리가 있는 것인데 이를 믿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그 입술이 얼마나 부정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내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왜 말도 못하게 하느냐'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무심코하는 말이라도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마태 12:36,37)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말의 행적을 돌아보며 이사야 처럼 통곡을 해야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성경은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3:2).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재갈을 먹이라 했습니다. ' 말 '은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말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세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돈에 관심있는 사람은 끝임없이 돈 이야기를 합니다. 복수심으로 가득찬 분들은 말의 표현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말에는 용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을 잘 할 수 있습니까? 말을 잘 하려면 인격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말을 하려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겸손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자연히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은혜의 말을,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소망의 말을, 믿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6,7절은 말씀합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먼저 하나님은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지져서 새 입으로 만드시고 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와 입술의 허물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입술은 마음의 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죄의 짐을 벗기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허락해 주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세우시다(8-11a)
지금까지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한 입술로 인해 울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시는 것 같습니다. 8a은 말씀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보실 때 슬프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에 주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주일마다 절기마다 일년 사시사철 전국 방방 곡곡 기도원에서 ' 주여. 주여 ' 하고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세상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알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더 잘살게 해주십시오,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 이를 통해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옵소서 하는 자기를 위한 간구는 많이 하지만 세계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당장 자기의 안정과 출세를 생각하고 ' 나 괴롭습니다. ' 하는 호소는 해도 죄로 인해 지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세상 영혼들에 대한 마음의 아픔은 적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키 크고 똑똑한 선진국 미국 독일 카나다 대학생들을 제자 삼을 수 있을까, 추운 러시아에 가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자기 걱정을 해도 그곳 영혼들을 향한 애타는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사람은 적습니다. 북방 얼음산과 오대양 산호섬에 사는 사람들, 에이즈 등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며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가 가서 이 복음을 전할 것인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보낼 마땅한 사람을 찾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보시는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만민 구원역사를 위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물으시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a)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말씀하셨을 때 이사야는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쟤를 보내주십시오. 쟤는 영어도 잘하고 양도 잘 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8b를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이사야는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어떻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선포하러 가도록 강권하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갈 준비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보냄을 받지 않고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하여 제멋대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준비시켜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의원아 네 자신을 고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치료함 받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치료함 받고 다른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러 보냄 받기 위해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납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캠퍼스 지성인에게로 갈꼬?", " 누가 우리를 위하여 세계 지성인들에게로 갈꼬 "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데는 어떤 자격이나 실력을 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나 학벌을 생각해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부르심에 응답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바로 지금의 나 자신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핑계, 이유를 떠나 모든 것을 다 드리며 하나님께 대답하여야 합니다. "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자신이 아직도 1:1에 제대로 헌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회개해야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도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욕구와 변명의 음성을 먼저 듣고 있다면 이것 역시 회개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은혜로 구속받은 후 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대한 헌신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의 마음을 헤아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말해야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허다한 영혼들이 죄로 고통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생각을 하며 주저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부르심 보다도 더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주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심지어 나의 존재도 주의 부르심을 결코 앞설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여 일어난 사람들에게 이사야를 보내십니다(9-11a).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마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셨습니까? 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간단히 말해 이사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사람들은 반발하는 사람들이요, 죄로 인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도 듣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반란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양들은 무엇보다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변화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0b). 그들은 영적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남은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11b-13)
하나님이 자신을 그런 사람들에게로 보낸다고 하시자 이사야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1a) 2주입니까, 한 달입니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가 일생동안 반란의 무리들에게 가야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가장 평범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반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소망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가야할 사명의 땅은 죄로 인해 성이 파괴되고 백성이 멸망하되 도시에 거민이 없어지기까지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이사야를 죄인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파괴가 임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로로 보내신다는 것은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다시 성경선생의 백성, 목자의 나라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백성은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루터기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가지들은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씨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통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비록 별로 많지 않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거룩한 씨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롬11:5). 하나님은 뿌리에서 희망을 보십니다. 나무는 베어졌지만 뿌리는 남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뿌리는 별로 쓸모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가지들이 자라나게 될 뿌리에서 소망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씨"라고 부르십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습니다(37:32).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무지한 다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교회의 생명이 거룩한 남은 자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 시대 7,000명은 남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도 ' 너희들도 가려느냐 ' 하는 질문에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형식적인 신자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할지라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소망의 싹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열심히 희망 속에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말씀: 이사야6:1-13
요절: 이사야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
이사야서는 하나님의 소망을 선포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6장에는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종으로 임명하시는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그리고 많은 이방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위하여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것처럼 우리도 불러 주시길 기도합니다.
첫째,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1a)
1절은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자마자 장례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뎅 그렁, 그런데 그 종소리는 마치 하나님의 선민 유대의 죽음을 알리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이란 긴 세월동안 유대를 통치했습니다(B.C.787-735). 통치초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겸손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와 그의 백성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세가 견고해지자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한번은 대제사장의 직분을 월권하여 성전에서 분향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별된 제사장이 할 일이지 세상 정치를 하는 왕이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못마땅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인정하시고 이렇게 축복해주셨는데 내가 분향을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이 나라의 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에 아사랴는 80명의 제사장과 함께 왕을 따라가 이를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다가 노를 발했습니다. ' 네 이놈, 왕이 하겠다는데 누가 말리느냐 무엄하다. ' 바로 이때 그는 온몸에 문둥병이 발하여 죽을 때까지 문둥병자로 지냈습니다(삼하26:16-21) 그는 재위기간 국가의 경제와 국방 그리고 국제관계를 잘 유지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유대의 평화와 번영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의 장기간의 독재는 지도층의 부패를 초래하였습니다.
유대인의 내적인 삶은 어떠하였습니까? 부자는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였습니다. 많은 남자들이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습니다. 많은 여인들이 부도덕하였습니다(3:14-16). 젊은 지성인들은 절망감을 잊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술을 마셨습니다(5:11,12). 게다가 웃시야 왕의 계승자인 아하스는 불신으로 인해 두려움의 종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초강대국들은 유대를 삼키고자 입맛을 다시고 있었습니다. 유대의 백성들은 매우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사야가 자기 나라와 세계의 상황을 바라보았을 때 절망하였습니다(5:30b). 우리 나라를 볼 때 계속적인 정치 싸움, 의약 분쟁, 금융 위기, 대우 사태 등등을 볼 때 마음이 어둡습니다. 취업문제로 청년들의 고뇌는 깊어 갑니다. 당시 이사야는 기본적으로 자기 가족만 돌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괜찮은데 내 아내와 자식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둘째, 보좌에 앉으신 주님(1b-7)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는 초강대국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고 유대는 자신을 방어하기에 너무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과 시리아의 연합군은 언제라도 유대를 침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남쪽 바벨론 제국도 유대 백성을 침략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 백성들은 다른 나라의 침략과 파괴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이사야가 자신의 절망을 잊기 위해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성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기적입니까? 그는 성전에서 보좌에 앉으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1b은 말씀합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이 광경을 본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주관하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이 광경을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를 깨달은 이사야는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사52:7)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웃시야 왕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이나 세상 강국이 자기 뜻대로 주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국은 클린턴 대통령이, 우리나라는 김대중 대통령이 다스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현상을 분석하며 정치, 경제를 예견합니다. 그러나 누가 세상 앞날을 알아 이를 맞출 수 있겠습니까? 오직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께서 세상을 내려보시며 보이지 않는 손으로, 그러나 강력한 손으로 세상 구석구석을 통치하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은 만유의 주권자시오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리시는 분이십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스랍은 "불타는 자들"이라는 뜻을 가진 천사들입니다. 그들은 활활타고 빛을 발하면서 "천사들을 영으로 만들고 자기 사역자들을 불의 화염으로 만드신" 분을 경배합니다. 소멸하는 불이신 여호와는 천사든 인간이든 불이 있는 자들에 의해서만 제대로 섬겨질 수 있습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불타오르는 사람 외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소멸하는 불이 있는 곳에서 미온적인 자세나 무관심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완전히 타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타는 보좌 앞에서 섬기려면 스랍이나 불타는 영이 되어야 합니다. 무기력하거나 맥빠진 상태가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속에 불이 타게 되면 사랑이 생기고 영이 깨어나게 됩니다. 우리도 성령의 역사인 거룩한 열심으로 채워 불타는 존재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스랍들은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특징은 불과 바람입니다. 날개는 신속하게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곰같이 느리고 둔감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은 민첩하게 움직이고 빨리 행동하고 각성하고 아주 신속하게 주님의 사업 위로 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들이 지치거나, 꾸물대거나, 느릿느릿하거나 늑장을 부리지 않도록 날개가 여섯 개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까?
천사들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자신의 얼굴과 발을 드러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운 것은 여호와의 보좌에서 발하는 밝은 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겸손히 얼굴을 가리우고 경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웠습니다. 스랍들은 죄가 없다하더라도 자신이 피조물이며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무가치함을 나타내는 표시로 자신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있는 한 쌍의 날개들은 날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은 경배하기 위해 네 개의 날개를 사용하고 활동적인 에너지를 위해 두 개의 날개를 사용합니다. 자신을 가리는데 네 개의 날개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이 계신 곳에서 존경과 겸손의 자세를 취할 때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길 수 있음을 배우게 됩니다. 경배는 활동을 능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있던 마리아가 마르다와 그녀의 봉사보다 더 낫게 취급되었듯이 거룩한 존경이 우선해야 하며 열정적인 섬김이 그 뒤를 따라야 합니다. 천사들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그의 계명을 행하는 면에서 뛰어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여섯 날개가 달린 듯이 신속하게 달려가서 모든 선한 말과 일을 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천사들은 찬송하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거룩함 이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특성입니다. 이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오는 표현할 수 없는 특질입니다. 거룩함은 하나님과 피조물을 구분 짓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왜 우리가 속된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하는가 고민합니다. 이는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소원입니다. 이사야와 같이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슬픈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십니다. 3b은 말씀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나님을 보기 전 이사야는 온 땅이 절망과 타락한 남녀들로 충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와 같이 많은 현대인들이 말합니다. 세상은 미친 사람들로 충만한 것 같애.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온 땅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온 땅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많은 믿음의 남녀들을 있음을 보게 됩니다. 4절은 말합니다.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인한 위대함과 권세와 능력을 상징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은 이사야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십니다(5-7). 5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전통적인 생각에 의하면 하나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즉시 죽었습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이사야는 이제까지 의로운 심정으로 죄악된 시대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입술로 세상과 사람들을 원망했습니다. 입술로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입술로 정치 지도자를 욕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영광이 충만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고 그렇게 함부로 말을 뱉어낸 자기 입술이 얼마나 부정한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지금 세상을 그 뜻대로 주관하고 계신데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면서 하나님 역사를 얼마나 비판했는가를 알게되었습니다. ' 내가 하나님도 모르고 이렇게 함부로 입을 놀렸다니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하며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볼 때 한 시대의 문제는 통치자나 제도의 모순에 있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죄악되다 하더라도 그것을 도구삼고 온전히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우리들의 불신이 문제입니다. 특별히 사람들의 입술이 부정한 것이 문제요 나의 입술이 부정한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입으로 믿음의 말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말을 하지 못하고 죄악된 생각을 가지고 죄악된 말을 마구 쏟아내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스라엘과 유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훈련이요 징계요 거기에는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 섭리가 있는 것인데 이를 믿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그 입술이 얼마나 부정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언론의 자유를 주장하며 '내입 가지고 내가 말하는데 왜 말도 못하게 하느냐' 따지고자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무심코하는 말이라도 그 말에 대한 책임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 마태 12:36,37) 우리가 이를 알지 못한다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신의 말의 행적을 돌아보며 이사야 처럼 통곡을 해야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
성경은 말의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약3:2). 그리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재갈을 먹이라 했습니다. ' 말 '은 인격과 사상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인격에 따라서 말의 표현도 달라집니다. 세상적인 사람들은 세상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돈에 관심있는 사람은 끝임없이 돈 이야기를 합니다. 복수심으로 가득찬 분들은 말의 표현이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로운 사람들은 은혜로운 말을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말을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사람의 말에는 용서와 사랑이 가득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의 말을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말을 잘 할 수 있습니까? 말을 잘 하려면 인격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말을 하려면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하고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겸손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게 되면 자연히 믿음의 말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위로가 필요한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은혜가 필요한 사람에게 은혜의 말을,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소망의 말을, 믿음이 필요한 사람에게 믿음을 심을 수 있습니다.
이 때에 하나님은 이사야를 위하여 무엇을 하셨습니까? 6,7절은 말씀합니다.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먼저 하나님은 이사야의 부정한 입술을 지져서 새 입으로 만드시고 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을 때 하나님은 그의 죄와 입술의 허물을 제하여 주셨습니다. 입술은 마음의 문입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인격적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죄의 짐을 벗기시며 우리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허락해 주십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세우시다(8-11a)
지금까지 이사야는 자신의 부정한 입술로 인해 울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시는 것 같습니다. 8a은 말씀합니다.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나님께서 보실 때 슬프게도 하나님의 일을 위해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있었지만 한 사람도 자신을 드리기 위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세상에 주일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가득 메우고 예배를 드리러 옵니다. 주일마다 절기마다 일년 사시사철 전국 방방 곡곡 기도원에서 ' 주여. 주여 ' 하고 외치는 사람은 많지만 세상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을 알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더 잘살게 해주십시오, 이것 해주십시오, 저것 해주십시오 이를 통해 주의 영광을 나타내시옵소서 하는 자기를 위한 간구는 많이 하지만 세계 만민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사람은 너무 적습니다. 당장 자기의 안정과 출세를 생각하고 ' 나 괴롭습니다. ' 하는 호소는 해도 죄로 인해 지옥에 던져질 수 밖에 없는 세상 영혼들에 대한 마음의 아픔은 적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키 크고 똑똑한 선진국 미국 독일 카나다 대학생들을 제자 삼을 수 있을까, 추운 러시아에 가서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하는 자기 걱정을 해도 그곳 영혼들을 향한 애타는 하나님의 심정과 그들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앞세우는 사람은 적습니다. 북방 얼음산과 오대양 산호섬에 사는 사람들, 에이즈 등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며 우상숭배에 빠져있는 아프리카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누가 가서 이 복음을 전할 것인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보낼 마땅한 사람을 찾으실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보시는 하나님의 아픔이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세상 만민 구원역사를 위해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고 물으시며 우리가 자발적으로 순종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마태복음 28:19-20a)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말씀하셨을 때 이사야는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 쟤를 보내주십시오. 쟤는 영어도 잘하고 양도 잘 칩니다. 하나님께서 누구를 추천해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8b를 보십시오.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이사야는 즉시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어떻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시 대답할 수 있었을까요? 이는 그가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과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선포하러 가도록 강권하였습니다. 그는 기꺼이 갈 준비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보냄을 받지 않고서는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우쭐하여 제멋대로 달려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준비시켜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의원아 네 자신을 고쳐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치료함 받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치료하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치료함 받고 다른 병든 사람들을 치료하러 보냄 받기 위해 그리고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을 인격적으로 만납시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캠퍼스 지성인에게로 갈꼬?", " 누가 우리를 위하여 세계 지성인들에게로 갈꼬 " 우리가 하나님께 나가는데는 어떤 자격이나 실력을 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를 갖춘 사람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나 학벌을 생각해 나가는 것도 아닙니다. 주의 부르심에 응답할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바로 지금의 나 자신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핑계, 이유를 떠나 모든 것을 다 드리며 하나님께 대답하여야 합니다. "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자신이 아직도 1:1에 제대로 헌신을 하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 회개해야할 일입니다. 하나님의 음성보다도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욕구와 변명의 음성을 먼저 듣고 있다면 이것 역시 회개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십자가 은혜로 구속받은 후 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의 피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주께 대한 헌신은 우리의 선택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주의 마음을 헤아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말해야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허다한 영혼들이 죄로 고통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자기 생각을 하며 주저할 겨를이 없습니다. 이 부르심 보다도 더 중요하고 긴박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주께 합당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어떤 것도, 심지어 나의 존재도 주의 부르심을 결코 앞설 수 없습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너무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자리에서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자신을 대적하여 일어난 사람들에게 이사야를 보내십니다(9-11a). 이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자마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어떤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사야를 보내셨습니까? 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간단히 말해 이사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사람들은 반발하는 사람들이요, 죄로 인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말씀도 듣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기로 굳게 결심하였습니다. 그들은 참으로 반란의 무리들이었습니다. 양들은 무엇보다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변화되면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0b). 그들은 영적 소경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진정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그들에게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넷째, 하나님은 남은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11b-13)
하나님이 자신을 그런 사람들에게로 보낸다고 하시자 이사야는 몹시 놀랐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11a) 2주입니까, 한 달입니까? 하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이사야가 일생동안 반란의 무리들에게 가야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가장 평범한 사람인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가장 반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보내셨습니다. 이는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소망을 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사야가 가야할 사명의 땅은 죄로 인해 성이 파괴되고 백성이 멸망하되 도시에 거민이 없어지기까지 될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이사야를 죄인들에게 보내십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 파괴가 임하게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살아 남은 자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포로로 보내신다는 것은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을 연단하셔서 다시 성경선생의 백성, 목자의 나라요,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 세우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훈련은 매우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훈련을 받고 나면 하나님의 백성은 의의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나님은 그루터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자라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루터기에서 자라나는 새로운 가지들은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숫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씨입니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세계에 있어서 진정한 통치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비록 별로 많지 않게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에는 자신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거룩한 씨가 셀 수 없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남은 자들의 역사입니다(롬11:5). 하나님은 뿌리에서 희망을 보십니다. 나무는 베어졌지만 뿌리는 남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뿌리는 별로 쓸모 없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새로운 가지들이 자라나게 될 뿌리에서 소망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거룩한 씨"라고 부르십니다. 이사야는 그들을 남은 자라고 불렀습니다(37:32).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무지한 다수의 역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교회의 생명이 거룩한 남은 자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엘리야 시대 7,000명은 남은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12 제자들도 ' 너희들도 가려느냐 ' 하는 질문에 남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결코 형식적인 신자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남은 자들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아무리 어두운 시대라 할지라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소망의 싹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는 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열심히 희망 속에 말씀을 전해야합니다.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 허락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대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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